장은선갤러리 초대
이임호展
2008년 4월 2일(수) ~ 4월 12일(토)
장은선갤러리 [약도보기]
서울 종로구 경운동 66-11번지 T.02-730-3533
관람시간 : 오전10:00~오후6시(월~토)/오전11:00~오후5시(일)
이임호의 정물화
정통 아카데미학파의 진수가 담긴 정물화
신항섭(미술평론가)
사실주의 회화양식은 조형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실상을 첨삭하지 않고 그대로 재현하는데 있다. 더불어 화가 자신이 존재하는 현실, 즉 자연물상을 포함하여 인간 삶의 양태를 객관적으로 진실하게 묘사하는데 있다. 이 두 가지는 사실주의 양식의 핵심을 이룬다. 우선 조형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물의 형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치밀한 관찰뿐만 아니라 인체해부학에 근거한 입체적인 조형감각을 숙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기술적인 훈련에 따른 정확한 비례감각을 터득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진정한 사실주의 회화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임호는 이 세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작가이다. 인체를 포함하여 물상의 형태 및 그 구조적인 이해 및 학습 그리고 조형감각은 물론이요, 구성에 이르기까지 정통 사실주의 조형개념에 관한 확고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다가 복수의 소재 및 인체를 하나의 화면에 놓았을 때 요구되는 균제, 비례, 조화, 통일 따위의 조형적인 요소를 통합하는 구성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를 숙지하고 있다. 이는 순전히 레핀아카데미 수학을 통해 익힌 역량이자 미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그의 경우 정통 아카데미학파의 충실한 추종자이자 적자인 셈이다. 인상파와 사실주의의 절충양식이 지배하는 20세기 초 일본유학을 통해 서양미술을 익힌 한국화단에 진정한 사실주의 미학이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제까지 우리가 보고 배워온 사실주의 회화양식은 단순히 정확한 눈과 손의 기술에 의탁하는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인물화 및 정물화는 진정한 사실주의 회화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은 물론이요, 정물 그리고 풍경에 이르기까지 정통 사실주의 미학을 그만큼 성공적으로 성취한 작가는 한국화단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한국화단에 진정한 사실주의 미학의 기초를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미 고전이 돼버린 사실주의 미학에 대한 현실적인 관심은 진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근대적인 미학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도 여전히 회화의 근간임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사실주의 미학이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표현양식임을 말해준다. 그의 작품은 뿌리가 약한 사실주의 미학의 본질 및 정통적인 가치체계를 세우는데 필요한 모범답안이 될 수 있다.
이번 전시회는 소품 몇 점의 풍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최근에 제작된 정물화로 꾸며진다. 따라서 정통 사실주의 미학에 근거한 정물화의 진정한 조형적인 특징 및 그 미적 가치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다. 작품으로서의 예술적인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소재의 형태 묘사와 관련해 보면 어디 한 군데도 어설프게 처리한 곳이 없다. 여기에는 치밀한 관찰에 의한 형태해석과 정확한 비례, 그리고 과장 없는 명암 및 원근법이 뒷받침되고 있다. 이는 모두 실상과 허상(그림)을 분간하기 어려운 공간감, 즉 입체감을 만들기 위한 기술이다.
그의 정물화는 단순히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어떤 속임수도 없다. 오직 사실주의 미학에 대한 진지한 탐구 및 개별적인 해석이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소재의 선택 배치 구성에 이르기까지 사실주의 미학이 요구하는 수준을 충족시키는데 집중된다. 무엇보다도 소재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형태에 대한 정확하고 명확한 묘사를 원칙으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형태묘사에만 치우치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소재가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고심한다.
그의 작품에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입체적인 표현이다. 서로 다른 크고 작은 형태의 소재들을 한 곳에 모아 놓았을 때 형성되는 복잡한 공간적인 관계 및 깊이를 효과적으로 통합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빛과 음영 그리고 심도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서 심미적인 감상을 요구하는 부분인데, 그의 경우 타고난 미적 감수성 및 기술, 그리고 조형감각으로 심미적인 깊이에 도달하고 있다. 빛과 음영은 소재의 형태에 따라 그리고 주변 소재와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는 이러한 요구를 거뜬히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정물의 성패여부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소재들이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질적인 소재들이 모여 조화로운 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순전히 화가 개인의 미적 감각의 소산이다. 소재의 배치에 따라 다양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까닭에 전체적으로 잘 어울리는 관계를 찾아낸다는 것은 일종의 연금술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정물화의 소재 배치 및 배열 그리고 구성에 따른 다양한 조화의 묘수를 찾아내는 그만의 미적 감각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소재가 놓이는 위치는 물론이려니와 각기 다른 형태 및 색채의 대비에 따라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 또는 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알 수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는 이번 정물화전을 통해 물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더불어 그 조형적인 비결을 보여주려는지 모른다. 그 만큼 사실주의 조형적인 특징에 투철하고 철저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정물화는 사실주의 미학에 대해 교조주의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주어진 소재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라는 윤리성에 적극 호응할지라도, 소재의 선택 및 배치, 구도 그리고 색채 배합과 구성이라는 일련의 작업과정에서 자신만의 미적 감각을 반영하는데 적극적이다. 형태해석에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림의 중심적인 소재를 제외한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는 소재의 형태묘사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다시 말해 그림의 중심(화면 중심과는 다른)을 차지하는 소재의 형태묘사는 투철한 반면, 그 주변에 놓인 소재의 경우는 개략적으로 묘사하는데 그친다.
이번 개인전 작품에서는 병, 과일, 꽃, 접시, 액자 따위의 중심적인 소재는 명확하고 선명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탁자를 덮는 보자기나 천 따위의 보조적인 소재는 그 전체적인 이미지만을 드러낼 뿐 세부묘사를 생략한다. 그런데도 생략적인 세부묘사로 인해 그림의 전체적인 사실성이 약화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중심적인 이미지들의 존재성 및 사실성이 더욱 돋보이는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형태의 명확성이란 반드시 극렬한 세부묘사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주변에 놓인 다른 소재, 즉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소재의 형태를 약화시킴으로써 중심적인 소재의 존재성을 강조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묘사기법은 아카데미학파에서도 용인되는 부분이다. 반드시 그림의 전체를 빈틈없이 사실적인 묘사로 채워야 한다는 의무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적인 미학에서 부분적인 생략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화가의 의도에 따라 부분적인 생략, 즉 세부묘사를 생략하면서도 사실성을 잃지 않는다면 문제 삼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 부분으로부터 사실주의의 강고한 조형적인 이념에서 살짝 벗어나 자유로운 호흡, 즉 개별적인 감각을 반영하려고 한다.
색채만 해도 그렇다. 현실적인 색채감각에 충실하면서도 반드시 현실색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태도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은 풍요로운 색채의 조화를 중시하는 경향이다. 다소 과장된 색채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경직된 사실주의 조형개념의 영향을 감쇄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정물화는 색채의 아름다움, 특히 유화의 색상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일깨워준다. 그의 정물화서 색채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색채 이미지에 따른 효과적인 소재의 배치는 시각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유채화의 아름다운 발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보색대비도 마다하지 않는 강렬함이 있는가 하면, 아주 부드럽고 온화한 색상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고정관념에 의해 길들여진 습관적인 색채감각이 아니라, 소재들 간의 연관성을 부단히 의식하면서 어떻게 하면 죽어 있는 사물들에게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여 마치 살아 있는 물건처럼 보이도록 할 것인가를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조합해낸 색채이미지는 소재의 질감을 더욱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다. 실제의 색채이미지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기능하는 생생하고도 풍요로운 색채이미지로 통합하는 것이다.
어쩌면 사실주의 회화의 조형적인 생명력이란 생동감과 질감 표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높은 기술적인 완성도를 뒷받침하는 감각적이고도 세련된 필치가 보조한다. 단순히 사실적인 묘사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생체리듬이 실린 경쾌하고도 주저 없는 터치를 솔직히 드러내고자 한다. 세련된 감각에 의해 살아나는 리듬감이 실린 터치야말로 그의 작품에 빛나는 생명력을 부여하는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정물화는 구성은 다소 복잡하지만 정물화의 모범적인 사례로서는 그 어떤 결격사유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번 정물화를 통해 바로 아카데미 양식이 지향하는 ‘정물화는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강변하려는지 모른다. 실제로 작품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기술적인 완성도와 빈틈없는 소재 배치 및 구도 그리고 구성은 전형화된 정물화의 표현양식임을 말해 준다. 동일한 몇 가지의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양태의 구성 및 구도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자신의 의도를 선명히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