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Henri: 1869~1954)
마티스는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등 19세기에 일어난 갖가지 미술 운동에서 영양소를 섭취하여 자기 예술을 살찌우고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립니다. 그의 양식은 이러한 과정을 무시하고는 생각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그의 예술은 분명히 파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나, 후기 작품들은 이러한 양식을 철저히 뛰어넘고 있기도 합니다. 미술사에 있어서 그가 가진 명목상의 지위는 야수파의 리더입니다. 이는 피카소나 브라크가 입체파의 선도자로 간주되는 것과 비슷한 예입니다. 야수파는 연약하고도 단명한 운동이었고, 화파를 형성한 후에도 공식화된 강령을 갖춘 적이 없었죠. 야수파의 모든 화가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마티스만이 치열하면서도 단순화된 색채 조화와 세련된 소묘력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성취해 나가는 위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자 이제, 20세기의 가장 창의적인 거장의 한 사람, 오늘날에도 젊은 화가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20세기 초의 몇 안 되는 화가중 한사람, 색채의 지배자 마티스의 작품세계로 들어갑니다.
간혹, 스무 살이 넘도록 자신의 천부적 재능을 깨닫지 못했던 위대한 예술가들이 있습니다.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유년시절과 청년기를 통해 그는 어떤 형태의 예술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티스는 1869년12월31일 밤 9시 북부 프랑스 르카토 캉브레지의 외가에서 곡물상을 하는 부친과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냅니다. 1887년 법과 자격시험에 합격, 잠시 생캉탱의 법률사무실 서기로 일했으나나 건강상의 이유로 이를 그만둡니다. 보앵에서 보낸회복기는 전혀 예술에 관심이 없던 마티스를 화가의 세계로 이끄는 계기가 됩니다. 옆 병상의 남자가 가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마침내 병상에 그림도구를 가지고 와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거지요. 그때부터 마티스는 어머니가 건네준 물감으로 물방앗간과 마을 어귀의 경치를 담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한 마티스는 귀스타브 모로의 주의를 끌게 되어 1895년부터 모로의 화실에서 작업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하면서 마티스는 색채화가로서 그의 천부적 재질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마티스는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였고 본능적인 충동이나 영감의 원천을 흐리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사물을 구상화시키는 능력이 있었죠. 그의 스승이었던 귀스타브 모로는 '너는 회화를 단순화 시킬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부단히 자기의 창작과정을 밝혀 나갔으며 자기 예술의 원천, 방법,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 감성이 아닌 지성을 동원합니다. "예술가는 최선의 자아를 오직 그림 속에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비극일 따름이다. 작가가 분석하고 개발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포비즘은 어디까지나 표현수단의 순수한 것을 재발견하는, 용기의 고취이며 추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표현'이란 '화가의 주체성에 의하여 화면에 나타나는 구성'을 뜻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긴밀한 질서를 지목하는 것입니다.
모로가 죽은 후, 그는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다니며, 드랭과 알게 됩니다. 이 무렵은 그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기이나 예술적으로는 다양한 인맥을 형성하는 시기입니다. 드랭을 통하여 블라맹크를 알게 되고, 1900년 이후에는 세잔풍을 도입하여 극도로 구성적인 포름과 어두운 색조로 전향하였으나, 1904년부터는 시냐크·크로스와 함께 생트로페에 체제하게 됨으로써 신인상파 풍을 짙게 받아들입니다. 이 새로운 교우관계가 이듬해에 시작된 야수파(포비슴) 운동의 강렬한 색채의 폭발로 나타나게 되었지요. 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로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습니다. 98∼99년에는 후기인상파에서 유래하는 한층 강렬한 색채의 실험에 착수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마티스 부인의 초상화입니다. 현란한 색채가 가장 인상적이죠?^^ 바탕에는 빨강, 노랑, 초록, 파랑, 핑크, 적어도 5개 이상의 색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티스 부인의 얼굴에도 온갖 색깔이 다 쓰였습니다. 마티스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이 그림을 <가을전>이라는 전시회에 출품했습니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도 마티스의 것과 비슷하게 강렬하고 비자연적인 색채가 특징이었죠. 그들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이 보기엔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거칠어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야수파(Fauvism)"라는 별명을 얻었던 것입니다.
<모자를 쓴 여인>을 그리고 나서 불과 몇달 후에 그린 마티스 부인의 초상화입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비평가는 물론이고 부인까지도 불쾌함을 느꼈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이 마티스에게 ‘부인을 왜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나?'라고 묻자 그는 ‘나는 작품을 통해 아름다운 부인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을 그렸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즉 심리적인 주관으로 색을 표현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모자를 쓴 여인'이 야수파란 이름에 걸맞는 충동적이고 통제되지 않은 색채와 구성을 보여준다면, 이 그림은 상당히 잘 정돈된 느낌을 줍니다. 구성을 안정감있고 견고하게 해주며 형태를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현란한 색채입니다. 이 그림에서 마티스는 전통적인 명암법이나 원근법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색채대비를 통해 훌륭하게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그림은 그가 야수파의 즉흥성을 탈피하고 견고한 구성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기점의 작품입니다.
야수파 시기의 마티스를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입니다. 색채와 형태에 의한 새로운 표현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서 있는 여인, 웅크리고 있는 여인, 꽃다발을 들고 움직이는 여인, 고전적인 나체화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형태의 회화입니다. 여기선 젊은 여인들의 나체상 자체가 발하는 아름다움이나 눈부심을 외면고, 그 형상의 명확한 윤곽선과 율동감으로 장식적인 리듬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의 평면적인 색조도 이 화면의 명쾌한 단순화와 장식적 조화에 잘 합치돼 있고요. 마티스가 의도한 호사란 세련과 단순화로 제어된 삶의 풍요로움, 다시 말해서 고요와 열락, 질서와 아름다움을 노래한 보들레르의 시, 그것이었습다. 그에게 있어 표현과 장식적 구성은 별개가 아니었죠. 그는 프랑스 회화의 전통적 정신인 '명확함과 질서 존중'의 지지자였습니다. 바로 그 점이 바로 그를 야수파 그룹에서 탈출케 하고, 자기 실현의 길을 개척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빨강의 조화는 야수파 스타일에 작별을 고하는 작품입니다. 마티스는 이제 더이상 야수파가 아닌 것이죠. 이 그림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림안의 모든 요소들은 잘 조화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불필요하게 그려진 것이 없이 통제된 우아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매우 평면적으로 보입니다. 벽지와 식탁보가 동일한 패턴으로 연결되어서 거의 구분이 되지 않죠. 마치 벽지의 무늬가 식탁보를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가 있는 풍경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창밖의 풍경인지, 풍경이 그려진 그림인지 애매합니다. 하지만 마티스에겐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빨간색에 대응하는 녹색의 풍경이 거기에 있어야했을 뿐이니까요. 결국 마티스가 이런 그림을 그린 이유는 단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한 것입니다. 마티스가 이그림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순수한 시각적 세계였던 것입니다.
마티스의 작품에서 색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색채에 관해 “내가 녹색을 칠할 때 그것은 하늘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입니다. 마티스에게 있어서 색채는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감정의 표현이었고, 이는 20세기 초의 미술운동인 야수파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색채는 더욱 강렬해짐녀서 905년 살롱 데 엥데팡당전을 기화로 본의 아니게 야수파의 우두머리가 되는데요, 그의 작품은 가능한 한 가장 솔직한 방법으로 그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아름다운 파랑, 노랑, 빨강 등 인간 감각의 저변을 뒤흔들 수 있는"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이 작품, '삶의 환희'는 단순화한 형태, 대담한 색의 사용, 종교성을 배제한 신화의 원용 등으로 다시 한번 물의를 일으킵니다. 마티스가 완성한 그림 가운데 통찰력과 영향력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기도 하죠. 그 원래의 구상은 1095년 여름, 콜리우르에서 자연을 연구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공간 구성으로는 대각선보다 전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간 비율은 훨씬 대담하고도 자유롭게 다루어졌고,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서 평면적인 색면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티스의 예술은 양식과 주제의 조화를 이룩했고, 그에 따라 장식적인 양식의 대작을 만들 수 있는 미술가로서의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했습니다. 거기에는 벌써 건축적 조형에의 열망이 비치고 있는데 그때까지 시도했던 작품 가운데서 가장 큰 화폭(세로 1.7m, 가로 2.3m)의 구도는 균형과 명쾌한 기법의 본보기였습니다. 그리고 농밀한 색채는 억제되어 전통적이고 목가적이라는 거룩한 주제에 대한 예술가의 정서적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지성에 의해 누그러진 정서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구도는 단순하면서도 윤택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그의 스승 귀스타브 모로의 고뇌에 차고 불확실한 환상들을 바로잡아 주는 듯 합니다. 삶의 기쁨을 계기로 작품의 크기만으로도 인물의 장식적인 자태를 표현할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무용수들과 음악가들, 그리고 '풀밭에 누워 이야기를 하거나 꿈에 잠긴 사람들'이란 주제들은 모두 1906년의 그의 걸작 <삶의 기쁨>에서 나왔습니다. 이 목가적인 작품은 야수파로서 그의 절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단계를 넘어서는 방향타이기도 했습니다. 그 전해의 봄에 제작한 신인상주의 작품 <호사, 평온, 그리고 열락>과 더불어 이 그림은 한층 더 기념비적인 일련의 인물화 습작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