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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및교육

[미술사]장 프랑소아즈 밀레에 대해서

-장 프랑소아즈 밀레에 대해서-



의과대학 의예과

52032598 노기원




Jean Fransois Millet (1814.10.4~1875.1.20) 장 프랑소아즈 밀레


프랑스 화가로서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출생이다. 가난했으나 신앙심이 깊고 애정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띄어난 재능을 보여,  1833~36년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37년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진출하여 P.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40년 살롱전에 출품한 초상화가 입선되었으나, 장학금 지급의 중단으로 생활이 어려워져 로코코풍의 나체화 등을 그려야 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48년 살롱에 출품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루브르미술관 소장)은 그 후 농민생활을 그리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은 F.부셰․J.H.프라고나르풍(風)의 규방화(閨房畵)와 목가적인 주제를 많이 다루었고, 부드러운 필촉(筆觸)과 명암의 콘트라스트가 특징이었다. 그의 풍경 역시 코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화풍은 주제가 농민화로 바뀐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49년 콜레라의 만연을 피해 가족과 함께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주하면서부터는 농사를 지으면서 거의 모든 그림의 제재가 농민의 일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시절에 T.루소, C.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詩的)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派)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화가로서의 영광을 누렸으며, 68년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밀레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도 아마 없을 것이다.

여기서 대중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통속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것은 예술가에게는 더 없는 모독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는 널리 알려져 있는 대신, 예술적으로는 삼류 소설과 같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기도 하다. 프랑스국민들은 도미에의 회화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그것이 약화되고 감상화된 밀레의 작품에는 호감을 가지고 감응할 수 있었다.

그러면 과연 밀레는 싸구려 예술의 한 대명사일까. 이 점이 밀레에 따라 다니는 오해의 한 요인이랄 수 있다.

  만종과 이삭줍기같은 작품이 그런 일분의 작품에 속하는데, 이 작품들은 밀레의 예술을 대표해 주면서도 한편 밀레를 부단히 통속적인 예술가로 만들게 하는 요인의 그것이기도 하다. 중, 고등학교의 교과서에서부터 산간 벽촌의 음식점이나 이발속에 이르기까지 그 복제품이 퍼져 있는 편이고 보면, 가히 이 작품들이 지니는 대중화라는 것은 그 예를 찾을 수 없게 하고 있다. 그러니까 밀레는 이 작품들로 인해 유명해진 반면, 자신의 많은 부분을 잃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도 밀레의 예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작품들을 에워싸고 있는 통속적 의미를 떨구어 버리는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같이 보인다.

이 작품들이 유명해진 것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그만큼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라든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 가령 르노와르의 누드화들 같은 작품들도 일반들이 쉽게 좋아하는 보편성을 갖고 있는 그림임에도, 그것을 쉽게 통속적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유독 밀레의 경우가 예외적이라고 하는 것은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회화적 가치 이외에, 지나친 종교적 의미나 사회적 의미가 부연된 나머지,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보편성에 기인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이들 작품 속에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만을 강조했을 때 작품이 지니는 예술성은 그만큼 윤색될 수 있고, 따라서 통속적인 것으로 떨어질 위험을 지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밀레는 풍경적 요소를 인간에 종속시켜, 노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그리고, 만년에는 단순화한 형체의 구성을 시도했는데, 진지한 종교적 심상이 표현되어 있는 그의 작품은 도덕적인 가치에서도 칭송을 받았다.

  1865년 경부터는 밀레의 작품은 점차 밝아져  인물의 테마보다도 풍경이 더 중요시되어 만년의 가작 《봄》에는 인상파의 빛의 효과와 대기가 예고되었다. 1867년 만국박람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이삭줍기(1857)》 《만종(1859)》 등이 있다. 1875년 사망했다.



<대표작품>


  <씨 뿌리는 사람>

밀레는 1849년 파리 근교 퐁테느블로 숲속에 자리한 바르비존이란 작은 마을로 찾아든다. 이 마을엔 밀레말고도 자연을 동경해서 찾아든 화가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미술사에서는 바르비존파(派)라고 부르고 있다. 바르비존을 무대로 한 자연파 화가들의 명칭이었다. 밀레의 농민 화가로서의 활동도 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본격화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많은 대표적인 농민화 들이 여기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건초를 묶는 사람들>과 같이 1850~51년 살롱에 출품한 것으로, 씨를 뿌리는 남자의 역동감 넘치는 포즈는 약간 비뚜름한 지평선의 불안한 배경과 어울려 극적인 상황을 예시해 주고 있다. 대지와 인간의 관계가 흥미롭게 드러나고 있다.




<루크르트와 부인의 초상>


주지하다시피 밀레는 노르망디의 한 한촌(寒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만년(晩年)에 명성을 얻을 때 까지 누구보다도 많은 고생을 하였다. 특히 청년 시절은 빈한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부인인 포리느오노가 죽 은 것도 병약(病弱)한 때문이었다.그래서 인지 초기의 초상화들에서 알 수 없는 우수가 화면을 덮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이 초상은 아내 포리느의 언니, 아니면 동생을 그린 것인데, 초기 밀레의 초상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촉촉한 눈을 보이고 있다. 단정한 자세와 화면에 들어 차는 구도의 밀도는 초기 밀레의 초상화가로서의 뛰어난 일면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채석장>


농민화와는 다소 다른 소재의 그림이지만,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티브의 애착은 밀레의 작품 밑바닥을 관류하고 있다. 후기의 농민화에서 보는 정태적(靜態的) 묘사와 달리, 여기서는 동적(動的)이면서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해 보이고 있다. 돌 틈바구니에 꽂은 지렛대에 매달려 있는 두 인물의,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동작은 화면에 사선(斜線)으로 달리는 시각적 이동으로 인해 단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 시기 밀레는 특히 미켈란젤로가 묘사한 인물의 데생에 관심을 기울 였는데, 그것은 인간의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고통에 대한 공감일 것이다. 밀레의 작품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활기와 박진감을 주고 있다.



<만종(晩鐘)>


<이삭 줍기>와 함께 밀레의 대표작 가운데하나. 밭에서 일을 끝내고 저녁 종이 울리는 가운데 부부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 장면은, 단순히 노동에서 오는 기쁨뿐만 아니라 삶의 진실과 기쁨을 전해주고 있어 쉽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먼 지평선에 황혼이 물들어 가고, 이 빛을 받은 부부의 경건한 자세는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종교화의 새로운 양식이라고 칭송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작품은 처음 1천프랑에 국외로 팔려 나갔으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다시 프랑스로 팔려 왔을 때는 그 8백 배가되는 80만 프랑으로 올랐다는데도 이 그림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1906년에 루브르에 기증되었다.



봄>

밀레는 사계의 시리즈를 몇 장 그린 바 있다. 이 작품도 사계 중 봄의 풍경이다. 알사스의 실업가 프레드릭 알트망으로부터 주문받아 그린 것이다. 농가의 사계는 더욱 자연의 풍부한 변화를 보여 주는데 만년에 갈수록 자연이 갖는 하나의 서사시로서 엮고 있다. 아마도 화가로서나 인생으로서의 완숙과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닌가 본다. 수평의 구도적 맥락을 보여 주면서 신비한 기운이 한층 짙게 깔려 있다. 과수들이 선 사이로 난 길 저쪽엔 목책이 수평으로 가로 지르고, 그 뒤쪽으론 수목이 울창하다. 이제 막 비가 개이는 듯 한쪽 하늘엔 무지개가 반원을 그리며 하늘에 걸려 있다.


 

이 작품은 여름철의 노동과 노동에 의한 피로를 표현하고 있다. 세 여인의 일련의 정지된 듯한 동작을 모노톤 배경과 더불어 시간을 초월한듯 마치 성서의 한장면인것 같은 인상을 준다.

조화롭고 안정된 구도와 갈색톤의 자연적인 색채속에서 부드러운 빨강, 파랑, 노랑의 대비는 고전적인 성화를 연상시킨다.


해가 넘어간다.

또 한해의 가을 햇살도 엷은 미소를 남기고 황혼의 낙조 속으로 묻히고 있다. 해 넘어 가는 가을 들녘에 옹기종기 쌍아 올린 추수 볏단이 아련한 향수와 더불어 달려온 한해 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다.

밀레의 '만종'(晩鐘)과 '이삭줍는 여인들'(The Gleaners)의 그림이 한마디 메시지로 아직도 식지 않는 여름 열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다. 밀레의 그림은 당시 나폴레옹의 천하 통일이 끝나고 저 유명한 불란서 혁명의 혼란의 격랑이 지난 나폴레옹 3세 끝없는 영토 확장에 세계를 침략하고 있던 때다. 밀레는 돌아가는 세상판에 휘몰리지 않는 인간 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황혼의 저녁 들판에 종탑에서 들려오는 기도의 시간에 맞추어 부부가 겸손히 두손을 모으고 조 물주의 은혜를 감사하는 그림이다. 혼란의 와중에 평화로운 질서를 오히려 잃지 않는 모습이다. '이삭줍는 세 여인들'은 앞치마를 두르고 땅에 떨어진 곡식을, 추수를 끝내고 눈이 덮이기 전 그래도 남아 있을 이삭을 줍는다. 풍요 속에 검약을 절제하는 모습이다.

광할한 미국대륙에 어쩌면 내 동댕이치듯 아니면 쫓겨온 듯,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땅 에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한국인이 너무 열심히 살고 있어 우리는 때로는 '동양의 유대인'이라는 이상한 별명도 얻고 산다. 이민의 성취의 꿈을 '아메리칸 드림'으로 이룬 사람도 있고, 아직도 팔을 걷어 부치고 발 붇힐 곳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만종의 기도와 이삭줍는 계절에 우리는 한번쯤 우리들 자신으로 돌아와 나 자신의 모습과 정상적인 일상의 건강을 다시 점검해 보는 시간이면 좋겠다.

꿈의 성취 이전에 먼저 우 리들 하나 하나, 자신의 소중함을 확인해 보는 계절이면 좋겠다. 단풍이 드는 것도 자기 보존을 위한 수분 조절에서 오는 것이고 겨울 잔디는 뿌리를 강하게 하기 위해 더 이상 잎을 내지 않는다. 나무마다 다시 필 잎과 꽃망울에 스스로 각질로 싸매고 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 자신을 한번 돌아보아야 할 때다.

자신을 아끼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용납하는 여유를 찾을 시간이 아쉽다.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나, 천하를 얻고도 자신을 잃든지 빼앗겨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이기주의 세태에 자신만을 위하라고 부추기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모습을 참으로 보는 사람, 자신의 소중함을 참으로 아는 사람, 자신을 참으로 아낄 줄 아는 사람은 이기적일 수가 없다. 너무 성취만 보고 달려가지 말고 만종(晩鐘)의 기도로 우리들 삶의 이삭을 줍자.

톨스토이의 우화 중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영주가 자신의 노예에게 상을 주기 위해 두 사람을 불러 말했다. "내일 아침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자신이 밟고 가는 땅은 모두 그대들에게 줄 것이다." 그래서 두 노예는 다음 날 해 뜨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땅을 밟고 뛰기 시작했다. 한 노예는 한나절을 뛰니 숨이 차서 자신의 평생 해 먹어도 남을 정도의 땅만 밟고 멈췄다. 그러나 다른 노예 한 사람은 한치라도 더 밟고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몇 번이나 기절하고 죽을 힘을 다해 해가 땅에 떨어 질 때까지 뛰었다. 그리고 달렸다. 그의 체력의 한계를 이미 벗어난 탈진 한 상태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해가 지고 영주가 나타나 그들이 밟은 땅을 약속대로 주려고 했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 몫을 밟은 노예에게 그가 밟은 땅을 주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뛰고 또 달 린 노예에게 그 광활하게 밟은 땅을 주려고 했다. 욕심껏 달린 쓰러진 그 노예를 깨웠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죽어 있었다. 그 영주는 혀를 차며, "허허 자신이 묻힐 다섯치 땅이면 될 것을 너무 무리를 했구먼..."

너무 자신을 잊고 제정신을 잊고 제 궤도를 벗어나 무작정 달리고만 있는 우리들의 삶은 아닐 것인가?

며칠 전 우리 가까운 뉴져지 섬머빌에 사는 72세의 엘러너 보이여 할머니는 우연히 사둔 복권이 당첨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피붙이 하나 없이 아직도 68년형 고물차를 몰고 다니는 가난한 생활이었다. 그의 복권 당첨 액은 1천1백80만 달러 였다. 그 할머니는 금액 전액을 성당, 마을 소방서, 인명구조대 등 자원 봉사 단체에 몽땅 기부해 버렸다. 10여년전 노모의 병간호를 위해 조 기 은퇴한 후 어머니와 동네 노인들, 병약자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했다. 평소 이런 헌신과 희생 적인 생활이 몸에 베어 있는 삶이었다. 당첨 소식을 듣는 지난 10일, 고장난 차를 수리점에 맡기고 다른 사람 차를 얻어 타고 기금위탁을 위해 성당으로 달려갔다. 새차 한 대라도 마련하라 는 주위의 권고도 마다하고, "내 인생은 달라 진 것이 하나도 없다." 는 말 한마디이었다.

이 시대의 천사 같은 할머니다.

평소의 삶이 그랬듯이 "내 인생이 거액의 횡재 돈 때문에 달라질 것이 없다."는 그런 삶이 우리들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복권 당첨의 행운의 날과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달라질 것이 없는 삶의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건실하게 이어 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