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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및교육

[미술사]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 및 양상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것 중의 하나는 아직도 이 개념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개념은 문학, 철학, 사회학과 더불어 예술일반에 적용될 수 있으면서도 적용분야에 따라 그 의미가 상당부분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개념의 어원과 유래를 살펴봄으로써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최소한의 접근을 시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용어는 문자 그대로 '포스트'라는 접두어와 '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결합되어 생긴 말이다. 그러니까 이 용어는 의미 면에서 본다면 단순히 '모더니즘 다음에 오는'현상을 가리킬 따름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차적인 면에서 시간적 구분을 의미할 뿐 결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어떤 유형의 가치 평가가 개입된 개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즉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시성을 가르키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프리모던'이란 용어가 단순히 '전근대' 또는 '전현대'를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스트 모던'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후근대 또는 후현대'를 가리키는 표현인 것이다.

이 용어를 보다 명시적으로 보여준 사람은 1950년대 초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이다. 토인비는 서구문명이 19세기 이루 전환기적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했다.

그 전환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그는 이것을 '돌연변이'로 인식했고,또 현대를 맞이하는 서구역사의 전통에 극적인 출발점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리고 그는 <역사연구 A Study of History> 후반에서 우리의 시

대를사회적 불안, 세계전쟁, 혁명의 시대 그리고 '포스트 모던 시대'로 명명했다.

토인비는 근대의 서구역사를 네가지로 분류한다.

초기근대(Early Modern : 르네상스), 근대(Modern : 르네상스전성기와 그 이후), 후기근대(Late Modern : 17세기와 18세기를 정점으로 한 기간과 좀더 넓혀서 보면 계몽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마지막으로 포스트 모던(Post-Mordern : 1870~80년을 기점으로 한)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위에서 살펴보았듯이이미 한 세기가 지난 서구문명에서의 포스트 모던 국면은 무정부주의(anarchy)시대로 특징지을 수 있을 지 모른다.

토인비는 포스트모던 개념을 헬레니즘 철학자들이 구축한 서구세계의 지적 인식틀 안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던 합리주의 이성론이 붕괴되고 말았다고 지적할 때 사용한바 있다. 고전적인 것을 재발견하고자 했던 르네상스의결과로서 유래된 근대 뿐만 아니라 서구문명 전체에서 누차 강조된 합리성에 대한 신뢰는후기 근대를 맞이하면서 심각한 도전을 받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1850년대 이후 그러한 도전은 한층 격화되었다.

토인비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대립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서구 과학정신은 "정념은 이성을 지니나 이성은 지식을 지니지 못한다"는 파스칼의 직관적인 관찰에 의해서 변화되고 말았다.







20세기 기독교시대에 탈 기독교적인 소구의 심리학은 인간영혼에 깔린 무의식적 심연을 탐구하기 위한 시초였으며, 자연법의 근간이 된 것은 논리(logic)의 법칙이 아니라 신화의 법칙이었음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포스트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처럼 해석되어지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발생배경(등장)


모더니즘의 회의속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이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다음 명제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에서나 읽을수 있는 보편사가 아니며 단순히 문화의 한 사조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현상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삶의 양식과 분리해서 볼수는 없다. 현대의 모든 현상을 배태한 서구이성이 허용치 않던 비판을 과감히시도하며 교조적 시대가 남긴 빈약한 세계상을 반성하는 무비판 시대의 자기 반성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역사적 반성과 자기비판에서 도출된 개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라는 사상사의 축약체에 대비하여 읽혀야 한다. 시대를 겪어내며 그 시대의 문제를 고민한 사람들의 사상사적 축약체가 문화 사회 역사 경제에 자기를 현시하는 방법으로 읽지 못하면 다만 포스트는 <현상>으로서만 포착되고 따라서 본질은 은폐되며 그리하여 뿌리없는 자기해체로 중심잃기만이 진행된다. 결국 인간은 근거도 모르는이론에 마냥 끌려가게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근본배경 연구없이 각 분야에서 드러나는 현상만을 조합하는 것은 가지만을 바라보며 나무의 병을 진단하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철학/영화, 같은글}}.

그렇다면 이 포스트모더니즘은 도대체 무엇인가?

"현대에서 우리가 갖는 느낌은, 이제 우리 자신이 새로우며, 새로운 시대가시작되고 있으며,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떤 것도 다시 똑같을 수 없고, 어떤 것도 다시 똑같기를 원치 않으며, 우리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기를 원하며, 과거의 모든 대상, 가치, 정신구조, 일을 행하는 방식들을 제거해 버리길 원하다. 어쨌든 과거의 모든 것이 변형되기를 원하다는 신념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현대적이어야하며 동시에 현대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방식이다."

포스트모던에서는 과거 그 자체가 과거에 대한 인식, 또는 역사성, 그리고 집단적 기억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비동시성과 이의 발생이 동일한 시간대 위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으로 시작과 종말의 붕괴, 기원의 부정, 인간의 탈중심화, 새로운 것에의 활력, 이성의 탈신격화, 통일성의 거부, 주체의 공허성, 언어의 한계성, 메타담론들의 해체 등을 지적할 수 있다. 






탈근대로 번역하든 후기현대로 번역하든 그런 것은 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방가르드나 다다이즘과 같은 단순한 문화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구가 현대로 진입하게된 사상사적 계기들을 모더니즘이라 부르고 그에 대한 비판으로 도출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다만 자본주의라는 현실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의 고리들일뿐 현대성의 대안이 아니다. 하버마스처럼 아직 이성을 포기할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어떻게 바라보든 분명한 것은 지구상의 곳곳에서 각각의 영역에서 하나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의 재검토, 합리주의의 거부, 주체의 해체를 바탕으로 한 시대의 이념을 사회의 각 영역에서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는 또한 이러한 세계관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조망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은 형용사의 역할을 수행하며 다양한 명사에 붙게된다. 포스트모더니즘 영화가 그렇고 미술이나 건축 패션 광고 정치학 사회학 등 포스트모더니즘을 세계관으로 혹은 방법론으로 채택한 연구자들 이 존재하는 모든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드러난다. 그들의 시도가 성공적이었느냐 아니냐는 차후의 문제이다.이성이, 이성을 가진 주체가 세계를 진보로 이끌리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타자의 문제를 논하고 거대이론의 해체를 다루며 생산과 소비와 욕망을 담론화시키는 그 모든 영역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관계를 논의하는데서 이론가들의 입장은 크게 두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의 하나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가깝게는 모더니즘, 넓게는 낭만주의의 계승이나 논리적 발전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펴는 이론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후기현상이나 그것보다 한결더 극단적으로 발전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흔히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되어 온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미국의 네오리얼리즘 이론가 제럴드 그래프는 이러한 관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파악해 온 가장 대표적인 이론가 중 한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이제까지 서구 세계를 풍미해 온 문화적 전통과 예술적 인습은 몇몇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그렇게 쉽게 붕괴되지 않고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가깝게는

모더니즘, 멀게는 낭만주의의 전통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이 견지하는 입장과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이 두 운동의 기본 전제들을 논리적으로 발전시킨 극한 점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일종의 '돌파구'로 파악하는 일부 이론가들의 태도를 가리켜 그가 '신화'라고 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한편 다른 일군의 이론가들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과 의식적 단절이나 비판적 반작용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이론가들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낭만주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더니즘과도 변별적으로 구별되며, 그 나름대로의 독특하고 고유한 존재이유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뒤이어 나타난 급진적으로 새로운 예술전통이나 이론 또는 사조에 해당된다. 이런 입장을 내세우는 이론가들의 경우 포스트 모더니즘은 '탈모더니즘'이니'반모더니즘'적인 속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차이


우리가 여전히 모던의 상황에 있다고 믿는 한 우리는 휴머니즘이나 계몽주의의 자식들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비이성적인 것의 힘을 규명하고, 또 고립시키는 것은 언제나 지식의 전유물이 되어왔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반지성적 풍토를 가져오기도 했다. 나는 이것을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우리는 해리 레빈에게 있어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단순히 역사적이거나 문화적인 것을 명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모던과 포스트 모던을 어떤 목적들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 때의 목적이란 가치 판단과 편견을 뜻한다. 이처럼 레빈이 사용한 용어의 문맥에서 보면 포스트모던은 명백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반대의견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이와 같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나 의식적 단절로 파악하려는 일군의 이론가들 중 레슬리 피들러(Leslie Fiedler)는 '모더니즘의 죽음을 곧 포스트 모더니즘의 출생'이라는 도식으로 모더니즘의 종말을 주장한다.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모더니즘의 죽음과 고통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출생의 산고를 겪으며 살아왔고-1955년 이후 그 사실은 한결 더 첨예하게 의식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겪으며 살고 있다. (감수성과 형식에 있어 가장앞지르고 있으며, 앞으로 이보다 더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제아래)자신들을 스스로 '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자처하던 유형의 문학,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이르기 까지 찬란한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유형의 문학은 이제 사망하였다. 즉 그것은 이제 현실이 아니라 역사에 속해 있다.


우리나라 포스트모더니즘


우리나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1980년대 후반 젊은 예술가 집단과 문학이론가들에 의해 소개된 이후 대단히 활발한 논쟁의 장이 되어 왔다. 그 논쟁의 한쪽 입장은 포스트모더니즘을 7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처했던 모더니즘과 민중 문학의 첨예한 대결과 갈 등을 융화시킬 수 있는 대체 세력으로 수용하고 그것이 시민 사회의 다양성과 자율성, 그리고 참여 등을 통해 모종의 변혁 에너지를 제공해주는 대안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이고, 다른 한편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을 미국의 독점적인 세계 지배 전략이 해체되는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탈정치, 탈이데올로기를 내세운 포스트모더니즘이 진보적, 보수적, 반동적 제 사상이 혼재된 채, 제 2, 제 3 세계의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들을 무력화시키는 새로운 문화 침투 전략이라고 경계하는 입장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과에 대한 이와 같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특히 문학연구의 분야에 있어서, 신비평과 모더니즘 사조의 해게모니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이어서 정전에 대한 재고와 재편성 및 주변부 문학 텍스트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타자」 혹은 「타자의 포용」이 중요한 문학용어로 사용되게 되었고, 서구 중심, 백인 중심에서 벗어나 소수인종의 문학과 문화, 여성문학, 그리고 자국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는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서구 문화의 유입과 수용이라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우리 시각에서 외국의 문학과 문화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비판적 수용 및 주체적 이해의 노력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서구의 포스트니즘과 우리나라의 비교


피자헛과포스트모더니즘


  1999년 4월. 서울의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분루를 삼키며 농성장을 떠나는 서울 지하철 노동자들의 뒷모습은 3년 5개월 전에 전면 파업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고 환하게 웃던 프랑스의 지하철과 철도 노동자들의 밝은 모습과 서글픈 대조를 이루었다.

나는 여기서 두 나라 노동자들의 파업 양상을 비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번 서울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에 관해 한 가지 사실을 짚으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즉, 이번 서울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은 '지하철 노동자들이 서울 시민의 발을 볼모로 했던 게 아니라, 거꾸로 지하철 노동자들이 서울 시민의 볼모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지하철 노동자들이 서울 시민의 발을 볼모로 파업을 벌이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이 주장에는 제법 그럴듯한 '시민의 발'이라는 표현과 또 '볼모'라는 자못 자극적인 말까지 들어 있어서 대중 선동의 효과를 십분 발휘하였다. 일반 시민들은 이 주장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따라서 이 주장은 여론을 '파업 반대' 쪽으로 몰아가는 데에 큰 몫을 톡톡히 했다. 그러면 독자는 나와 함께 이 주장을 '해체'해 보기로 하자.

이 주장, 즉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민의 발을 볼모로 하고 있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파업으로 불편을 겪게된 시민들의 비난의 아우성 소리가 파업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대신에 시와 정부 당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볼모라는 말이 성립된다. 시민들은 당연히 단체협약마저 일방적으로 파기한 서울시를 비난해야 마땅했고 또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일자리를 창출하는 대신에 정리해고라는 신자유주의의 정책을 기조로 하고있는 정부 쪽에 비판의 화살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실제는 그와 정반대로 나타났다. 불평, 불만에 찬 시민들의 눈초리는 오직 파업 노동자들에게 되돌아가 꽂혔고 오직 그들에게만 비난을 쏟아 부었다.

그게 무슨 볼모인가? 인질자에게 직접 으르렁대고 폭력까지 가하는 볼모(피인질자)를 본 적 있는 사람 손들어 보시라. 그런 볼모는 이미 볼모가 아닌 것이다. 또한 인질자도 이미 인질자가 아닌 것이다.




제조업 분야처럼 노사 사이에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 부문의 파업과 이번 파업을 비교해보면 실제로 볼모가 되었던 측은 시민들이 아니라 파업 노동자들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중간에 시민이 없었더라면 파업 노동자들은 도리어 더 자유로웠을 테니까 말이다.

시민의 발을 볼모로 했던 예는 파리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 때 그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은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스스로 파업 노동자들과 같은 노동자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사회정의의 실현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고 믿었고 따라서 파업 노동자들과 연대하였다. 서울 지하철 노동자의 파업이 부분 파업이었던 것과 달리 완전 파업이었고-지하철, 시내버스, 기차가 단 한 대도 움직이지 않았다- 또 3주씩이나 계속되어 불편함의 정도도 몹시 심했지만 프랑스의 텔레비전 화면에서 "불편하지요. 하지만 나는 파업 노동자들을 100% 지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미소짓는 중년 여성을 볼 수 있었다. 파업 노동자들이 가두 시위를 벌일 때에는 연도의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다. 즉,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스스로 볼모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파업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대신에 노동자들의 복지 연금을 삭감하려했던 정부를 비난했다. 60%를 넘는 시민들이 파업을 지지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정부는 끝내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 문제되었던 사안이 복지 연금 삭감이었던 반면에 서울 지하철 노동자들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정리해고 등의 사안이었음에도 3주간이나 전면 파업을 벌였던 프랑스의 노동자들과 달리 부분파업을 벌였을 뿐이다. 그랬는데 프랑스의 파업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성공했음에 반해 서울의 지하철 노동자들은 정부, 언론으로부터 매도당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민들로부터 등돌림을 당했고 결국 파업은 실패했다. 이와 같은 두 나라의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의 시민들은 서로 연대하는 시민정신이라는 성숙된 근대 이념을 갖고 있음에 반해 한국의 시민들은 아직 그렇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한국의 포스트주의


이 글의 제목인 '피자헛과 포스트모더니즘'과 어쩌면 아주 동떨어진 한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노동자 파업 얘기를 서두에 꺼낸 것을 보고 좀 어리둥절했을 수도 있겠다. 나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연대할 줄 아는 '근대적 시민정신'을 하나의 예로 제시하면서 한국에서 지금도 끈질기게 불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유행 바람에 대하여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긴 포스트주의자들에겐 위의 파업의 예가 별로 적확한 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근대적 시민정신'이나 '합리성의 확보'마저 '권력의 억압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해체'의 대상일 뿐이겠기 때문이다.

미리 고백하건대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내용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한국 땅에서 오랫동안 불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은 나를 주눅들게도 했다.

그런데,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는 내 나름대로 헤아려보니 10년 전쯤에는 알뛰세 바람이 한 동안 한국 땅을 휩쓸었다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체되었는데, 그러다가 4년 전쯤인가에는 아주 잠깐 동안 라깡 붐이 회오리바람처럼 일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이 한국 문화계를 강타하더니 IMF의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



라깡 붐 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척 멍청했다. 프랑스하곤 아무 관련 없이 한국 땅에서 라깡 붐이 일었을 때 어리석은 나는 그 속내를 모르고 혼자 끙끙댔다. 그 붐의 성쇄가 미국에서 잠깐 반짝했다가 사라진 '심리분석'과 운명을 같이 했다는 것을 이제는 좀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뒤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체할 것이 아직 아무 것도 없어서인지 꽤 장수(?)를 하고 있다. 그 동안에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리얼리즘', '포스트모더니즘과 마르크시즘' 등, '포스트'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들어간 글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고 책들도 꽤 많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영문학자까지 나서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 구조주의'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으니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지금 한국에서 지식 깨나 있다는 사람 중에 문화 깨나 말하고 담론 깨나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니 '탈주'니 '전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나는 어느 영문학자의 '포스트……과 포스트……'라는 책제목을 대하고 꽤 당혹했는데 지금 와선 나름대로 짐작되는 구석이 없지 않다. 즉, 국내에서 가장 선구적으로 '포스트'를 수입한 사람들이 바로 일부 영문학, 영미철학 전공자들이었고 그 뒤를 일부 예술비평가(건축, 비디오아트, 영화, 연극 등)들이 뒤따랐던 것 같다. 그러다가 90년대 동구권의 몰락, 한국 학생운동의 위기와 때를 같이해서 일부 '진보'이론가들까지 합세하여 대량으로 포스트를 수입하면서 대열풍이 불게 되었고 서점가에 포스트 관련 책들이 판을 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이 불어대니 이를 막기 위한 맞바람도 불어주어야 했다. 계간지 [창작과 비평]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문학과 사회]에는 금년 봄호에도 포스트모더니즘에 관련된 글이 실려 있다. 심지어 [역사비평] 최근호(99년 봄호)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학의 종말인가?" 라는 실로 놀라운 제목의(역사학의 종말!) 논문도 실려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헤아릴 수 있게 해준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한국 땅에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에 신자유주의뿐만 아니라 포스트주의도 한 몫 거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로서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실로 기이한 사실은 포스트 바람들의 진원지가 프랑스 땅이라는데 정작 프랑스에서는 그 바람을 도무지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뛰쎄와 라깡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접어두고라도,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푸코와 들뢰즈와 데리다를 말하고 있는데 푸코와 들뢰즈와 데리다의 나라인 프랑스 땅에서 나는 '뽀스뜨 모데르니슴(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아무리 철학적 담론하곤 거리가 멀다 손쳐도 분위기까지 모르고 지나칠 정도는 아니다. 더욱이 프랑스라는 땅은 토론을 좋아하고 논쟁을 좋아하기로는 한국 땅에 비할 바가 아닌 곳이다. 한국에서 포스트 담론이 그 정도라면 진원지인 프랑스 땅에서는 포스트의 대지진이 일어났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내 귀에는 '뽀스뜨 모데른느(포스트 모던)'나 '뽀스뜨 모데르니슴' 이라는 말조차 아주 생소한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포스트모더니즘이 적용된 문화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예술분야에서 행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예전에 처음 나왔던 TTl 광고도 따지고 보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광고라고 할 수 있다.





시각 디자인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시각 디자인에도 포스트 모더니즘의 바람이 불고 있다.} 아직은 그 기본 이론이나 방법론에 대해 각계에서 논란이 끝이지 않는 상 태로 관념적 순수 예술뿐 아니라 실용 예술인 시각 디자인에도 적요, 적차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분야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지난해 문학계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에 관한 출판물이 쏟아지면서 탈 모더니즘이나 모더니즘의 발전이 냐로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시각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 다. 20세기의 세기말적 현상으로 보여지는 포스트 모더니즘, 정확한 재현, 축 소, 확대를 많이 필요로 하는 시각 디자인의 특성상 종래에서 자와 컴퍼스 를 이용하는 기하학적 기법이 애용되었으나 각종 기재의 발달로 복사나 축 소, 확대가 쉬워지면서 디자인 분야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 경향의 자유로 운 표현이 가능해진 것으로 있는데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마스코트인 [코비]도 포스트 모더니즘 디자인으로 흔히 올림픽의 휘장과 마스코트가 향 후 수년간 세계 디자인계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코비 역시 그 역할을 충실히 담보해 낼 것으로 보인다. 책 디자인 분야에서 딱딱한 활자체 대신 손으로 서툴게 쓴 제목이 유행하 고, 잡지를 비롯 각 회사의 로고로도 활용, 기업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관리 하는 C.I.P. 팬시업계 등도 포스트 모더니즘 디자인을 상품에 다양하게 채 택, 많은 상품을 출하하고 있는 상태라서 우리의 디자인 각 분야에서 포스 트 모더니즘 경향이 두드러진 것으로 보여진다. 93년 대전 만국 박람회의 마스코트인 우주 아기 요정 또한 우리 나라 포 스트 모더니즘 디자인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TV 광고에서의 포스트 모더니즘


우리 나라 TV영상, 특히 광고 부분에 포스트 모더니즘 영상이 대대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나라 TV에서의 포스트 모더니즘 영상 은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기에는 아직 미약하지만 광고와 코미디, 드라마 군데군데 에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발점이 포착된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현대 서구 사회의 문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틀로, 아직 그 개념이 명확치 않아 국내에서 숱한 논쟁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상태 에서 문학, 미술, 음악, 건축 등에 이어 TV 영상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규명한그 첫 번째 작업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포스트 모더니즘 영상이 가장 자주 나타나는 분야는 광고 분야라는 지적이 디자인 계에 새로운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 예로 TV광고 중 [카파 시계]광고, [빅맨], [트라이]처럼 남성 화장품 선전 의 여성 출연, [리복], [나이키 에어]등 운 동화 광고에서 포스트 모더즘의 흐름이 나타 나고 있다. 18세기의 "슈트롬 운트 드랑"의 시대나 19세기 중엽의 리얼리즘,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 전후에서 2차대전 종식 시기에 유럽을 휩쓴 모더니즘과 비견되는 지배적인 시대사조인 포스트 모더니즘은 현재 유럽과 미국은 물론 일본과 우리 나라 유행되고 있 으면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 즘은 그 규정이나 개념이 모호한 것으로 인 해 의혹과 불신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이 포스트 모더니즘 양상을 두고 '지적 유행'이나 '특이한 사람들이 즐기는 기괴하고 유치한 게임의 일종'등으로 일축하고 있다.




지금까지 시각 디자인에서 TV에 포스트 모더니즘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현 한국적 추세를 보건대 시각 디자인의 꽃이라고 불려지는 광고 시장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열풍은 식지 않는데 이에 대한 주체적 연구와 책임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와 포스트 모더니즘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먼저 인식되는 시각전달은 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감각을 종합예술인 영화로 묘사한 만큼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인식과 비판, 실험이 자주 거행되는 분야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최근 영화의 예를 들어 비평, 판단해 보자. 요즈음 극장에서 상영되는 수많은 영화들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논의로 부터 추출된 징후들이나 특성들 또한 쉽게 발견되는데 일제 시대의 민족적 심리를 상기하면서 한 영웅적 인물을 그린 [장군의 아들], 영화가 유일한 대중매체로 받아들여진 시대와 사회의 재현과 매체에 대한 반성을 담은 [시네마 천국], 여성의 지배적인 표현에 대한 전복 가능성을 보여준 [니키다], 전지전능한 테크놀러지와 인간의 융합을 섬뜩하고도 인간적으로 그린 [플라 이], 미래의 가공할 테크놀러지 속에서 꿈과 현실의 혼동을 보여준 [토탈리콜], 헐리우드의 다양한 장르를 혼합한 [사랑과 영혼] 등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징후를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심지어는 얼마전 백만 이상의 우리 나라 어린이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인 [영구와 땡칠이]도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작 품이다. 이밖에도 포스트 모더니즘 영화라고 이컬어질수 있는 작품들은 수 없이 많다.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오직 영화라는 매체를 실험하는 영화, 영화 속의 한 장면이 다른 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모방한 영화들까지 도 포스트 모더니즘 영화라고 불린다. 이렇게 영화에서의 포스트 모더니즘이 너무나도 풍부하고 또 다양한 것은 다른 영역에서 적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한 영화가 가장 대중적인 매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고 급 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 모든 고급한 예술도 대중적 상품으로 전략하게 되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특징이라면 영화는 그 징후가 가장 잘 드러나는 매체일 수 있다. 텔레비전과 광고에서 흘러나오는 영상들이 우리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영상이 우리의 사고를 끊임없이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영상 매체간의 상호 텍스트성이 두드러지 게 나타나고 또 그것을 주도해 가는 것이 영화이다. 게다가 영화는 최신의 테크놀러지를 통해 포스트 모더니즘의 다양한 특성을 가장 대중적으로 응축하여 표현할 수 있다.


비디오 아트와 포스트 모더니즘


백남준씨의 비디오는 아트는 70, 80년대 전세계적으로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비디오 작품들이었다. 형태를 깨뜨리고, 색을 파괴하고, 인간 내면의 한 단면과 복잡성을 그린 백남준씨의 비디오 아트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적절히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의 생애를 통한 작 품을 알아보고 비디오 아트의 장르를 알아볼까 한다. 비디오 아트는 공식적으로 1963년 3월 독일 부퍼탈에서 있었던 백남준씨의 [전자 TV]에서 그 기원이 발견된다.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를 시작하기 이전 그는 일본 동경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1956년에 졸업한 다음, 음 악을 공부하기 위하여 독일에 유학 중이었다.



그는 뭔헨에 머물면서 녹음된 물소리와 어린아이가 옹알대는 소리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음악의 일부를 사 용하여 한편의 음악적 콜라주를 작곡하였다. 그 작품을 계기로 비디오 아트 의 예술적 동지인 칼하인즈 스톡하우젠, 기외르기리게티, 마우리치오 카겔 등과 연관을 맺으면서 다다이즘 경향의 어셈블라주와 콜라주 그리고 미국의 작곡가 존케이지와 인연을 맺으면서 비디오 아트는 첫 디딤돌을 두드리게 되었다. 1963년 부퍼탈에서 최초의 비디오 아트가 이루어졌는데 이 전시회 를 통해 1960년 광학적이고 의미론적 행위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해 준 (생 生 전송)의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13대의 텔레비젼 배부 회로를 각기 다르 게 바꿔 놓아 13대의 TV가 각기 다른 형태의 다양성을 보여주도록 했는가 하면, 각 TV 세트에 서로 다른 리듬을 주기 위하여 발전기, 녹음기, 라디오로부터 나오는 전자파를 다양한 지점으로 보내는 시도를 아울러 실시하였 다. 즉, 형태를 깨뜨리고 흩어지는 방법을 사용하여 종교적 색채 및 인간의 내면 등을 다루었다. 소리, 형태, 행위로 볼 수 있는 그의 예술 세계는 1982년 보수적인 휘트니 미술관이 백남준씨의 작품을 비디오아트 최초의 영 구 소장품으로 지정함으로써 그는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전세계에 공인 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 포스트 모더니즘의 수용 문제

80년대 중반 이후 미술계에 나타난 다양한 변화의 국면을 포스트 모더니 즘이라는 예술 형식으로 보고 있는데 6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서서히 제기되어 왔던 논쟁들이 다시 재현되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국적 수용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서의 포스트 모더니즘 논의는 198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고 이것은 1980년대 초부터 주로 새 로운 변화를 갈망하던 젊은 세대들에 의해 전개되어 온 반모더니즘<운동>에 서 발생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현단계 미술의 진로에 새로운 방향타가 되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논 의의 복합성과 불투명성 그리고 그것의 한국 미술의 수용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절충적이고 통합적인 태도로 인해 지난 시대의 경직된 이분법을 극복하는 변증법으로써 새롭게 용인되고 있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 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단순히 미술이나 미학의 차원을 넘어서 서구의 역사와 문화, 철학, 사회학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논의되고 있는 인식론적 문 제를 수반하고 있다. 포스트 모던한 것은 탈출구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보드리 아트일수도 있다.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긍정적, 건설적 측면과 부정적, 파괴적 측면을 우리의 주체적 시각에서 반성적으로 바라보는 자세 가 요구된다. 따라서 예술과 대중의 교리와 고립에서 벗어나 다원화를 모 색하고 보다 많은 대중이 접할 수 있도록 우리의 미술에 맞는 우리 시각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현단계 한국 미술과 관련한 포스트 모더니즘 논의의 수 용과 그 비판도 그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여 보다 폭넓은 차원에서 반성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작은 이야기들의 다양성이 공존적 조화를 이루는 미술. 미술계에서의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올바른 수용은 물론 활발한 활동이 기대된다. 또한 미술이 명확한 비판 의식으로 사회의 표준화, 기계화, 복제 화 하는 비인간적 속성을 폭로하고 지배 이데롤로기와 문화적 순수성의 파 괴를 과감하게 표현할 때 우리의 예술적 인식과 창조적 실천을 위한 공간은 확트이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형상적으로는 존재하나 그것이 다루어야 할 근원에 대한 정리가 선행되었어야 했고 따라서 문제는 이제까지 간과되어 온 <모더니즘>, 특히 한국의 모더니즘의 역사적, 비평적 정리가 시급하다는 논의로 압축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에 최근 층이 두터워 진 비평, 근. 현대 미술사를 전공한 전문 학자들의 적극적인 기여가 기대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디자인 회사들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디자인의 대부인 에토르 소트사스 Jr.이 자신의 이 론을 세상에 보급하고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기 위한 실험실이자 판매 가게를 설립한다는 취지 아래 세워진 디자인 그룹이다. 전축에서 흘러나오 는 봅 딜런의 노래 가사에서 "멤피스(Memphis)"라는 표제를 따서 이 회사를 멤피스로 지칭하였다. 멤피스는 부르스, 테네시, 로큰롤, 미국, 이집트의 도시, Ptah신(神)의 신성한 거리 등의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어 그들의 취향 을 잘 반영해 주었다. 맴피스는 미래 지향적이었고 국경이 없는 현대성을 환기시켰으며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도그마도 거부되었다. 맴피스는 소트사 스 외에 30세 미만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자유분방하고 과격한 이 들 디자인은 새로운 기능과 자유를 창조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기능이 있는 디자인이 아니라 가능을 디자인하려고' 애를 쓴 소트사스는 "디자인은 다소 잘 배치한 크롬 입힌 테두리나 다소 새로운 진기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디자인이란 무엇보다 의식적인 행위이며, 해명 의, 팽창의, 복잡하게 얽힌 탄도(彈道)를 가만히 푸는, 도구를 둘러싼 모든 종류의 작용, 반작용의 행위이므로 이를 앎으로써만이 디자인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최근 발표한 소트사스를 위사한 멤피스 가구 소품들은 국제적 주목을 받 고 있고, 특히 새로운 디자인 철학에 굶주린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다. 흔히 포스트 모더니즘들이 고전적, 토착적 건축 문화를 리바이벌 하는 경향임에 비해 멤피스는 그러한 역사주의적 자세를 완전히 떨쳐 버렸기 때문에 젊은 신진들이 더욱 환영하여 마지않는 것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적용된 문화를 결론적으로말하면


문화사적 맥락에서 볼 때, 새로 배태되는 사조란 언제나 기성 가치를 근 본부터 부정하고 그 가치의 불합리를 극복하려는 전위 사상이 중심이 되어 왔다. 이들은 고립된 입장에서 새로운 대안을 심각하게 주장하여 기성사회 에 충격과 자극을 주고자 시도하였다. 문제 의식을 가진 소수 사람들이 점차 이들의 주의 주장을 수긍하면서부터 새로운 사조는 그 뿌리를 내리는 것 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바로 이렇게 태어나고 발전한 것이다. 새로운 문 화의 한 분야로 포스트 모더니즘은 정착될 것이다. 인간의 자극중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시각, 모든 예술의 형태는 초창기에 시각적 발전을 해 왔다. 결국 모더니즘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사조를 탄 생하게 하였는데 이런 시각 전달 디자인에서 받아 들어지는 포스트 모더니 즘의 영역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달 매체인 TV, 신문, 잡지 등 매체 전반에서 모던을 거부한 새로운 감각이 나날이 급증하고 있는데 포 스트 모더니즘 추세는 우리 나라 역시 분명 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의 전이가 눈에 띄게 보이고 있다.



간단한 예로 TV 시청의 생활화, 광역화, 컴퓨터의 등장 및 보급의 확대, 이에 따른 정보와 통신 대변혁(집에 앉아 시장을 볼 수도 있고 심지어 안방의 TV앞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걸프 전쟁의 실제 상황을 동시에 생생히 볼 수 있다.), 대중의 문화 참여 폭의 확대 및 인식의 변화, 얼마전 유명 대중 가수가 지금까지 대중 예술인에게 대관이 허용되지 않았던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인 리사이틀을 가졌던 사건에서도 이같은 변화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즉, 디자인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은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앞으로 얼마간은 상당한 문제를 일으키며 발전할 것이다.

이에 앞서 우선 우리의 정신 자세를 바로 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을 받아들이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실험적 예술 형태에 애정을 갖고 관대하게 보아주는 예 술적 풍토를 가꾸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한 예술 형태의 전통이 쌓이면 우 리의 예술 세계는 더욱 넓고 깊은 영역으로 뻗어갈 것이다. 그때 그러한 전 통을, 그러한 독창적 영역을 어떻게 부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제 우 리 모두는 우리의 천재들이 왜 이 땅에서 그 천재성을 꽃피우지 못하고 외 국에서 꽃피울 수밖에 없었는가를 자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가와 작품소개 및 작품분석


데이비드살르(양면적그림)1986작 ,배리 플라나건(코끼리)1986 ,길버트와조지(나) ,미모 팔라다노(외로운 태양)1986. 작품을 말해보면!!!!!


현재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요즘 문화에 관한 용어중 가장 흔하게 듣고 있는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용어는 비단 문화의 한 현상을 지칭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아주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부분의 문예사조와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확한 발생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용어의 개념을 정의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처럼 이것의 기원과 발생 연도에 대해 정확함을 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문학에서는 스페인의 비평가 페데리코 데 오니스가 이 말을 처음 썼으며, 피들러도 그의 시 선집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도 이런 용어를 썼으나,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정의에 따라 사용한 것이므로 그 뜻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공통적인 점은 기존의 체계와 뚜렷이 구분되는 반작용 현상을 지칭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사용법은 일부 철학자나 비평가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나타날 뿐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비평가들이 이 용ᄋ어를 문화와 그 현상들을 나타내는 데 도입함으로써 그 개념이 전반적으로 확산 되어 갔다. 그 이유로는 이차대전의 상흔에서 점점 벗어나는 시기가 바로 1960년대였고, 풍요한 물질문명, 마침 활발하게 논의되던 인권문제들,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다시 재현되는 이차대전의 참상, 그것을 통해 야기된 반전사상들, 달표면에의 착륙 등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으며,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혁신적인 현상들이 나타남에 따라 기존의 가치체계나 도덕이 효력을 상실하게 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한 시기가 바로 이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달하기 시작한 다양한 예술적 일상적 사상적 경향을 지칭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통일성을 거부하고, 인간의 탈 중심화, 언어의 한계성 등을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이라고 주장한 이합 합산의 이론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이론가 장 프랑스와 리오타르도 시배별로 분류하는 법은 포스트 모더니즘과는 상관없는 모더니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하며, 포스트 머더전 성격을 갖고 있는 포로이트, 라블레니체, 말라르메, 랭보 등도 다 이범주에 들어가는 작가로 지칭하고 있다. 여기서도 절대성이 아닌 상대성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제까지 포괄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개념에 대해 정말 기본적인 점이라고 할수 있는것을 얘기해 보았다. 이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든 영역에 걸쳐 이야기 되는 것이긴 해도 나타난 시기와 표현되는 양상이 결코 동일할 수는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건축이나 미술 같은시삭, 공간적 예술과 문학과 철학 같은 시간예술을 어떤 구체적인 면에서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다원성과 상대성을 강조하는 정신만이 공통적으로 논의될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포스트 모더니즘 이론가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건축에 관해서는 이 모든 이론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논의될 것이 많으나, 또한 같은 이유로 너무 개괄적인 것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