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작가소개
2.작품소개
3.낭만주의 미술
4. 현대미술의 태동
* 서 론 *
●어떤 주제로 어떻게 해야할지 처음에는 너무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레포트를 하기 위해 여기저기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제리코(Gustave Courbet : 1781-1824)의 메듀즈호의 뗏목 이 눈에 띄었다.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여기 저기 둘러보았는데 그다지 어떤 느낌이 별로와 닿지 않아서 내가 많이 몰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 가게되었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했던 여러 작가들의 작품도 레포트를 하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맨 먼저 내 눈길을 끌었 던건 메듀즈호의 뗏목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었다. 작품의 뗏목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죽어있고 몇 명만 살아서 누군가에게 구원을 요청하고있는 모습이었다. 생존한 사람들의 희비가 그림으로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어쩌면 끔찍하기도 하고 생존한 사람들의 희망이 보이기도 하는 제리코의 그림은 정말 자극적인 것 같다.
● 제리코의 작품들을 보면 너무나 율동적이어서 곧 움직일 것 같은 착각이들 정도이다. 제리코는 말을 좋아했는데 그의 작품들 속에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제리코에 의해서 낭만주의가 제기되었는데 낭만주의미술은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객관보다는 주관을, 지성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하고, 또 개성을 존중하여 자아의 해석을 주장하고, 격정적․정서적으로 자유를 구하여 상상하는 대로 무한한 것에 동경한다는 전반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부드럽고 생생한 표현양식은 고전주의와는 전혀 대조적으로 극히 유동적이고 약동적이며, 극적인 움직임과 안에서 우러나오는 힘의 인상을 만들어 낸다. 형식보다는 표현이 선행되고, 딱딱한 선이나 단정한 형태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것으로서의 산뜻하고 강렬한 색채를 우선시킨다. 이리하여 오로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추한 것까지도 그려내는 것이다.
● 현대의 특징을 과거와의 단절, 전통에의 도전이라고 볼 때, 현대미술의 정신은 멀리 19세기 낭만주의 미술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에 이르면 미술은 미술가의 자기표현(self-expression)이라는 관념이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격한 고통과 정서의 표현이 많아지게 되고, 미술가의 개성도 더욱 중요시됩니다. 그리고 이제 미술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지 표현의 대상으로 삼는데 제리코의 작품들을 보면 확연히 나타납니다.
먼저 제리코에 대해서, 그리고 작품세계, 낭만주의 미술에 대해서, 현대미술과는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하여 조사하였습니다.
제리코(Gustave Courbet : 1781-1824)
1. 작가소개
◆프랑스 화가. 르왕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터 그림과 기마를 좋아했다.
◆이 화가는 짧은 생애에 그 시대를 회오리 바람처럼 치달아 빠져나가고 있다. 회화는 게랑에게서 들라크르와와 함께 배웠다.
◆ 제리코는 21세때 <엽기병의 사관>을 발표하였다. 그 후 이탈리아에 가서 배웠으며,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에 감명을 받았다.
◆귀국 후 <메듀즈호의 뗏목>을 제작 발표했으나, 평판이 좋지 않아, 그 대작을 가지고 영국을 순회했는데, 일찍부터 폐를 앓은 그는 영국의 기후로 병이 더욱 악화되었고, 33세로 요절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유화는 얼마 되지 않으나 그리스독립전쟁․노예제 반대 등 시국적인 것을 주제로 한 소묘에 뛰어났고 석판화를 참다운 예술품으로 끌어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22년 런던에서 돌아와 얼마 동안 가슴을 앓다가 33세로 파리에서 죽었다.
◆이 밖에 주요작품에 《돌격하는 샤쇠르》 《부상당한 퀴라시에》《습격하는 근위기병》《메듀즈호의 뗏목》《흉갑 기병》 등이 있으며 약간의 조각작품도 남겼다.
2. 작품소개
<습격하는 근위기병> 1812년, 캔버스 유채 ,파리, 루브르미술관
⇒작품설명:
제리코 가 21세 때 제작한 이 작품은 그가 평소 말에 관심을 두고 습작한 결과라 볼 수 있다. 필촉의 힘과 변화는 다양한 색채를 빛나게 하며 율동감을 느끼게한다. 이점은 신고전주의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회화적 요소이다. 이 작품을 통해 제리코는 21세의 나이로 일약 유명해졌다.
<메듀즈호의 뗏목> 1818-9년, 캔버스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 작품설명:
1816년 7월 2일 프랑스 정부는 세네칼의 식민지 회복을 위해 메듀즈호를 출범시켰으나 아프리카의 암초에서 난파하여 뗏목을 만들어 타고 표류하였다.
그림은 구조될 당시의 극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흑인이 수건을 흔들며 구조선에 신호를 보내며 그림 아래 쪽에는 빈사 상태의 인물들을 배치하였다. 제리코는 정확한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생존자들을 만나보고 시체 수용소에 가서 시체를 스케치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실에 입각하여 이 작품의 사실적인 세부 묘사는 주목할 만 하다.
1819년에 그려져 살롱에 출품됐다. 이 타브로는 연대기의 비극 "메듀사"에서 시사되어 그려졌다. 프랑스의 프리케이트함이 1816년에 이민을 옮기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선장의 무경험으로 난파했다. 150명의 여행객들은 거의 사망하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 서로 도와 수난용의 뗏목에 모여 광대한 바다를 표류했다.
배에 탔던 150명은 급히 만든 뗏목을 타고 표류하였다. 그러나 12일간의 표류 끝에 범선 아르고호에 의해 구조되었을 때 생존자는 15명뿐이었다. 대부분의 파도에 밀려 죽었고 남은 사람들은 극도의 기아와 정신착란 때문에 사람의 고기를 먹는 끔찍한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한다.
제리코는 뗏목 위의 사람들이 파도 사이에 나타난 구조선을 보고 미칠 듯 기뻐하는 순간을 그렸다. 그 구도는, 전경에 있는 죽은 자나 죽음 직전에서 허덕이고 있는 자들의 축 늘어진 몸뚱이로부터 시작해서, 미친 듯이 헝겊을 흔드는 흑인을 떠받치고 있는 군상에 정점이 이르도록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생존자들 앞쪽의 물결이 뗏목 그 자체의 동태(動態)와 평형을 이루고 있다. 이 그림을 위한 무수한 습작은, 그 이전의 화가들이 취급하지 않았던 인간의 극한 상황을 탐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사이에 인간적인 비애, 격분함의 에피소드이다. 제리코에 의해 이 경포의 난파선에서 구해진 사람들의 생의 실현과 그 추이를 빛과 어둠의 고요한 대비로 서술된다. 이 수법은 의심할 것없이 칼라바죠에서 배운 것이다.
제리코는 캔버스 위에 죽음의 공포에서 떠는 뗏목에서 순간을 사는 희망의 소리를 들었다.
비스듬한 구성 속에, 몸을 뒤틀고 관절은 빠져서 퇴적하여 눈이 혼돈할 정도의 극적인 표현이다. 떠받쳐진 노인의 모습은 이미 생명은 없이 그와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실의의 표정으로 실로 이 이상 박력이 넘쳐, 이 품격있는 장엄함은 그리이스 비극과 같은 것이다.
<흉갑 기병> 1814년, 캔버스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 작품설명:
빨강, 노랑, 검정의 세 가지 색을 기본 색으로 하여 비애감을 깊이 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에프손의 경마> 캔버스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 작품설명:
이 에프손의 경기는 해마다 열리는 가장 유명한 경마였다. 제리코가 그것을 놓칠리는 만무했다. 그 스피이드, 경쾌함, 요컨대 그 날렵한 생명감이 특히 제리코를 매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지적되고 있듯이, 말은 이 그림에서처럼 앞뒷발을 크게 벌리고 뛰지는 않는다.
사진기가 발명되고난 뒤 말이 달릴 때 항상 한 다리는 지면에 닿아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컨대 제리코가 그린 말들을 실질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엄연한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달리는 경마들의 경쾌하고 시원스러운 속도감이다. 제리코는 말을 좋아했던 작가다.
3.낭만주의 미술
▲19세기 전반, 특히 1820~1830년에 걸쳐 유럽 여러 나라에서 회화를 비롯하여 조각 등에도 파급되었던 예술사조.
▲낭만주의미술은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객관보다는 주관을, 지성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하고, 또 개성을 존중하여 자아의 해석을 주장하고, 격정적․정서적으로 자유를 구하여 상상하는 대로 무한한 것에 동경한다는 전반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즘, 특히 나폴레옹 제정을 정점으로 대혁명 전후에 걸친 신고전주의의 딱딱하고 까다로운 규범에 거세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나 로마적인 고전을 버리고 중세와 민족적 과거, 특히 고딕양식을 지향하게 되고, 오리엔탈리즘을 단순한 이국취미 이상으로 승화시켰으며, 자기의 상상력과 숭고한 비장감, 조국애, 인간과 자연과의 융합감 등의 감정 표현, 즉 들라크루아가 말한 ꡐ순수한 환상(幻想)ꡑ을 자유분방(自由奔放)하게 발휘하고 표출시켜나갔다.
▲이렇게 해서 그들, 특히 프랑스의 낭만파들은 이념보다는 현실에 밀착해서 시사적인 문제나 역사적인 사건, 또는 셰익스피어나 바이런 등의 문학에서 얻은 제재에 정열을 기울여 서사적․서정적인 파토스적 세계를 즐겨 그려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시대정신이며, 그 운동인 낭만주의는 미술상에서는 고전주의에 대립하는 것이지만, 고전적 양식 또는 바로크 양식과 같은 독자적인 명백한 양식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술의 각 분야에서 각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 회화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그려지는 것, 곧 주제보다는 그리는 방법, 즉 주체적 방법 또는 주관적 표현에 있다.
▲부드럽고 생생한 표현양식은 고전주의와는 전혀 대조적으로 극히 유동적이고 약동적이며, 극적인 움직임과 안에서 우러나오는 힘의 인상을 만들어 낸다. 형식보다는 표현이 선행되고, 딱딱한 선이나 단정한 형태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것으로서의 산뜻하고 강렬한 색채를 우선시킨다. 이리하여 오로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추한 것까지도 그려내는 것이다.
▲건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낭만주의 회화는 이성이나 자연이라는 이름 아래 바로크의 ꡐ꾸민 듯한 것ꡑ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 견해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사람은 그리스 미술의 ꡐ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ꡑ이라는 말을 한 미술사가 J.빙켈만이다.
그의 생각은 프랑스의 화가 비앙과 로마에 있던 독일의 화가 멩스, 스코틀랜드의 해밀턴 등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낭만주의 회화의 요소는 이미 J.미셸의 풍경화, 지로데의 인물화, 그로의 전쟁화, R.보닝턴의 풍경화 등에 선구적으로 나타나 있었으나, 1818년 《메두사호의 뗏목》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T.제리코에 의하여 제기되었고, 낭만파의 거장인 들라크루아에 의하여 승리를 거두게 된다.
▲1824년은 들라크루아가 살롱에 출품한 《키오스섬의 학살》로 명성을 얻는 해가 되었다.
이때 고전주의의 완성자 앵그르의 《루이 13세의 성모에의 맹세》도 《키오스섬의 학살》과 함께 출품되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보고 보수주의자들은 회화의 학살이라고 비난했으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열광적으로 환영함으로써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로부터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는 자타가 공인하는 라이벌이 되었고, 양극을 걷는 이 두 사람의 예술 경향은 양파로 갈라진 비평가들에 의해 부채질됨으로써 파리의 화단을 둘로 갈라놓게 하였다. 그리고 1831년에 살롱에 출품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들라크루아는 혁명의 영광을 선양했고, 위고나 보들레르와의 친교를 통해서 낭만주의 문화혁명 속에서 문학이나 연극과 긴밀히 교류하였다.
▲이 밖의 주요한 화가들로는 A.셰페르, B.웨스트, 코플리, 스텁스, 퓨슬리, W.블레이크, A.카즌스, J.컨스타블, A.터너, 드베리아, P.유에, 그리고 바르비종파(派)의 H.루소, 드비니, 밀레, 코로 등과 고야, H.도미에 등이 있다. A.J.그로와 T.제리코 등도 낭만주의적 영웅을 그 작품에서 보여주었다.
▲독일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풍경화는 낭만주의적 회화의 가장 훌륭한 성과였으며, 그 밑바탕에 있는 생각도 때로는 놀라울 만큼 닮은 것이었다. 독일 최고의 낭만파 화가는 C.D.프리드리히였다. 낭만주의시대의 조각의 발전은 회화가 발전한 자취를 그대로 좇았다.
▲조각은 회화나 건축의 경우보다는 훨씬 덜 모험적이다. 조각의 독특한 장점과 그 공간을 채우는 확고한 현실성은 낭만주의적 기질에는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낭만주의 미술에서 조각은 회화만큼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낭만주의적 이상에 가장 가까운 개성을 가진 프레오 같은 조각가도 있었다. 그 외에도 단젤스, F.뤼드 같은 사람이 있고, 동물 조각가인 A.바리도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작가와 작품은 체질적으로 조형적인 데 비하여, 독일의 낭만파들은 극히 관념적이며 문학과 방식을 같이 하여, 낭만적 심정이나 정취를 담은 풍경화에 인간과 자연과의 친화력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국민적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는 나자레파의 오베르베크, G.샤도 등을 비롯하여 리히터, 슈빈트 등과 초상화가 룬게 등을 들 수 있다. 영국에서는 블레이크, 컨스타블, 터너 등이 신비적인 자연을 표현하였고, 프랑스에서는 그로, 제리코를 거쳐서, 들라크루아에 이르러 낭만파회화를 대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자유분방한 색채, 유동적인 필치와 극적인 주제와 구도를 가지고 신고전주의와 대결해 마침내 낭만주의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4. 현대미술의 태동
현대미술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모두 다 알다시피 미술은 고대에도 있었고, 심지어 원시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시미술"이란 게 있습니다. 그런데 미술의 역사에서 언제부터를 "현대미술"이라고 부르냐면 사실 여기에 대한 이렇다할 정답은 없다. 어떤 사람은 피카소부터다, 어떤 사람은 세잔부터다, 혹은 인상주의부터다, 제각기 다른 견해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언제부터 진정으로 새로운 미술이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미술, 그리고 그 이후의 미술이 나갈 방향을 제시해준 미술을 인상주의자들, 세잔, 피카소 등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의 특징을 과거와의 단절, 전통에의 도전이라고 볼 때, 현대미술의 정신은 멀리 19세기 낭만주의 미술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1818-19]
▲낭만주의의 대표작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매우 고전적인 그림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인체를 묘사한 방법을 보면, 근육질의 몸매, 균형잡힌 인체비례 등 이상적인 인간의 신체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겐 별로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충격을 불러 일으켰었습니다. 그들에게 충격적이었던 건 이 그림이 인간의 격렬한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좁다란 뗏목위에 중첩되어 있는 인물들의 군상이 보입니다. 그들은 무언가 - 아마도 그들을 구조해줄 배를 발견하고는 손을 뻗어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몹시 지치고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화면 하단의 사람들은 거의 죽어가거나 이미 죽은 시체들인 것 같습니다. 삶을 거의 체념한 듯 팔을 괴고 있는 노인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처럼 죽음의 문턱에 선 고통의 현장을 묘사함으로써 보는 이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미술은 이전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고전주의 미술은 이상적인 인간과 이상적인 자연을 묘사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상적인 인간은 곧 이성적인(rational) 인간을 뜻합니다. 지나친 감정의 표현은 대개 자제되었죠. 고전주의에서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에 고대의 역사나 신화, 혹은 성경에서 가져온 교훈적인 이야기가 묘사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계도하고자 했습니다.
[쟈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악법도 법이다"를 외치면서 용감하게 독배를 받아 마셨던 소크라테스가 이 그림의 주제입니다. 정치적 음모의 희생자로 억울한 죽음을 맞았던 소크라테스는 대의명분을 위해 죽어간 고대의 영웅입니다.
▲이 그림은 훌륭한 역사화의 한 예가 됩니다. 인체 묘사를 봅시다. 제리코보다 훨씬 명확하고 또렷하게 해서 마치 고대의 조각상처럼 보이죠. 그래서 배경과 구분이 더 잘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제리코는 그의 선배 다비드보다 윤곽선을 불분명하게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또 전체 구도를 비교해 봅시다.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에선 왼쪽 하단으로부터 오른쪽 상단으로 향하는 대각선의 상향 운동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적인 구성에 비할 때,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수평적 구도를 취하고 있는 다비드의 그림은 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결과적으로 제리코의 그림은 다비드의 그림보다 정서적인 효과가 훨씬 커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성적인 고전주의 양식과 달리 낭만주의 양식은 상당히 감성적이라는 것입니다.
▲ 제리코의 메듀스의 뗏목을 보면 프랑스 당국에서는 이 사건을 쉬쉬하며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을 1819년 제리코가 이 그림을 그려 세상에 공개한 것입니다. 미술가가 당대에 일어났던 사건에 주목하고 사회 고발적 행위를 한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매우 현대적인 사실입니다.
▲낭만주의 이전에는 미술이란 체계적인 규칙에 따라 세계를 재현하는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 내용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런 것만이 정당하게 미술로 인정받을 수 있었죠.
▲그런데 낭만주의에 이르면 미술은 미술가의 자기표현(self-expression)이라는 관념이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격한 고통과 정서의 표현이 많아지게 되고, 미술가의 개성도 더욱 중요시됩니다. 그리고 이제 미술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지 표현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현실에선 볼 수 없는 공상의 산물도 좋고, 금기시되던 이교도의 설화도 무방합니다.
[프랜시스 고야, <자식을 삼키고 있는 사투르누스> 1700년대 말]
▲거인은 이미 사람의 머리와 왼팔을 먹어 치우고, 오른 팔을 우적 우적 씹고 있군요. 이 끔찍스러운 장면은 스페인의 낭만주의 화가 고야가 그렸습니다. 그림의 주제는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사투르투스 혹은 크로노스는 신들의 제왕 제우스의 아버지입니다. 올림퍼스의 신들의 세계가 도래하기 이전에 거인족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크로노스는 자기 아버지를 해치우고 거인족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잡아 먹었습니다. 혹시 자신도 자식에게 당할지 모르니까요. 그의 여섯번째 아들이었던 제우스는 어머니 레아가 태어나자 마자 빼돌려서 운좋게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제우스에 의해 최후를 맞고 말지요.
▲신화에 따르면, 크로노스는 자식들을 통째로 삼켰고 나중에 모두 토해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야는 이 식인의 장면을 잔혹한 캐니벌리즘으로 그려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고야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고 이 그림을 그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끔찍스러운 그림을 그렸을까요? 인간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잔혹하고 사악한 본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럴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이 그림은 원래 고야의 별장에 벽화로 그려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야는 다른 누구를 위해서, 누군가에게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렸던 겁니다.
▲요컨대 고전주의는 더이상 유일한 기준이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술가는 정해진 규칙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따라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천재니까요. 그러므로 예술가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창작할 것을 강요하는 일은 더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실들이지만, 그 당시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구미술의 전통은 낭만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이후의 미술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는 도전을 받습니다. 계속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미술의 "현대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