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의 절규, 뭉크, 그리고 표현주의
캔버스에 유화 83.5 ×66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1983
의과대학 의예과
52032586
고영환
1. 뭉크의 절규
그림 속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다리 위에 두 명의 남자가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다. 전경에는 날카롭고도 강렬한 모습으로 관찰자에게 다가온 세 번째 형상이 서 있다. 성별을 알 수 없는 그는 정면을 향하고 있고, 경직돼 있으며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모든 것을 꿰뚫는 외침을 위해 입을 벌리고 있다. 이 인물은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배경을 이루는 피오르드식 풍경은 하나의 '정신의 지대'로서 그 형상의 내면적 삶을 반영한다. 하늘은 핏빛으로 빨갛게 채색되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들, 그리고 교회의 탑과 같이 잔잔한 요소들은 뒤쪽에 배치되어 있다.
<절규>의 채색은 자연주의에 입각한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철저하게 '색채의 신빙성'을 고수하였다. 피처럼 붉은 빛의 저녁 하늘이 비치는 검푸른 물은 가을 기운이 나는 빛과 날씨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모든 것이 전경에 있는 인물의 얼굴 표정과 자세처럼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그러지고 고조되어 있다.
배경의 줄무늬 채색은 종종 음파를 가시화 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힘과 에너지가 물성화한 하늘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비교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죽은 자의 두개골에서 나오는 그 절규가 소리를 지녔는지, 외부로 향하는 극도의 내면적인 두려움이 그 절규의 소리를 멈추게 했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생겨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체 내부를 연구하고 시체를 해부했던 것처럼, 나는 영혼을 해부하려고 한다. 당시 시체 해부가 죄악시되었기 때문에, 그는 암호화하여 기술하여야만 했다. 오늘안 내가 해부하고자 하는 것은 해부를 거의 비도덕적이고 경박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신적인 현상들이다."
뭉크는 판화를 회화 못지않게 중시하였으며 회화만큼 판화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유화에서의 테마를 판화로 옮기기도 하였으며, 제목을 바꾸기도 하고, 석판이나 목판으로 변화시켜 표현하였다. 뭉크는 판화의 기법적인 면에 여러 가지 혁신을 가져다 주었는데, 동일한 작품 속에 몇 가지 기법의 판종을 병용하기도 하고, 합성 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혁신을 실행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판화에 대한 기술을 크게 연마하였는데, 이 작품도 이 때 제작되어진 석판화로서 부드러운 모필(毛筆)에 의한 풍요로운 곡선은 장식적인 윤곽을 지니는 한편, 동세에 의한 조형적 화면 구성은 긴장된 가운데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여 주고 있다. 유화에서와 같이 동일한 구도를 채택하였는데 석판화에서는 더 한층 힘있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출 처 : 네이버 오픈사전 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31252
2. 뭉크 Munch, Edvard
뭉크 [ Munch, Edvard , 1863.12.12~1944.1.23 ]
뢰텐 출생. 아버지는 의사였으나 심한 이상성격자였으며, 일찍이 어머니와 누이를 결핵으로 여의고, 그 자신도 병약하였다. 그와 같은 환경과 육체가 그의 정신과 작풍에 영향을 끼쳤다. 오슬로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1881∼1884), 급진적인 그룹의 영향을 받았는데, 초기작품 《병든 아이》에서 볼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응시는, 그 후의 작품에서 일관하고 있다.
1889년 한여름을 바닷가의 마을에서 보내고, 신비스러운 밤의 불안을 잡아 《별이 있는 밤》 《백야(白夜)》 등을 그렸다. 1890년 파리로 가서 레옹 보나의 아틀리에에 들어갔으나 파리에서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일본의 목판화(木版畵)와 피사로와 로트레크의 작품이었으며, 고갱과 고흐의 매력이었다. 1892년 가을, 베를린미술협회전에 출품하였는데, 그것들은 초기의 애수 어린 서정적 성격을 더욱 내면화하고, 생(生)과 사(死),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하고 있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여기서 뭉크의 독자적인 세계가 확립된 것이다. 게다가 베를린에서의 스트린드베리와의 만남은 그 깊이를 더하게 하였다. 그 후 파리에서는 말라르메 등과 사귀고 입센을 알게 되었으며, 명작 《생명의 프리즈》 연작(聯作)을 완성하고, 1894년부터 판화를 시작하였다. 1908∼1909년에는 신경병으로 코펜하겐에서 요양하였으며, 그 후부터 색채가 밝아지고, 문학적 ·심리적인 정감이 두드러졌다.
1937년 나치스는 독일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을 퇴폐예술이라 하여 몰수해버렸다. 만년에는 은둔생활을 하였다. 한편 판화가로서도 근대의 대작가이며 표현파의 선구자이자,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이재(異才)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밖의 《봄》 《질투》 《절규》 《다리 위》 《저녁시간》 《죽음의 방 The Death Chamber》 등의 작품이 있다.
<질투>
<봄>
<사춘기>
3. 표현주의 [ 表現主義 , Expressionismus ]
특색은 작가 개인의 내부생명, 즉 자아(自我) ·혼(魂)의 주관적 표현을 추구하는 ‘감정표출의 예술’에 있다. 이 운동은 우선 회화에서 시작되어 다른 조형예술을 거쳐 문학 ·연극 ·영화 ·음악에까지 미쳤다.
미술에서의 표현주의라는 명칭은 베를린의 《슈투름(폭풍)》지(誌)의 주간 헤르바르트 바르덴이 보급한 것이며, 이 경우에는 1910~1920년에 벌어진 모든 반인상주의(反印象主義)를 표방하는 운동의 총칭이 된다. 그러나 이 개념은, 광의로는 시대를 초월한 유럽 미술의 저류(底流)의 하나이다. 즉, 지중해 세계에 대립되는 북방 게르만의 풍토를 반영하고 조형적인 ‘형식’과 그 자율성에 대해 혼의 힘과 그 분출을 특징으로 하며, 고전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대립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프랑스 회화의 범국제적인 보편성과 비교하여 표현주의를 특징짓는 강한 정신체험, 가시적(可視的) 세계를 초월한 환상, 때로는 냉혹 ·잔인할 만큼의 분석과 풍자는 위기적인 시대상황에 찢긴 개인의 미와 윤리에 수렴되는 비중이 훨씬 크다. 이런 의미에서 표현주의의 선구는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들, 특히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祭壇畵)》에 거슬러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반인상주의의 입장에 섰던 뭉크, 호들러, 앵소르, 고흐, 고갱의 1885년부터 1900년에 걸친 화업(畵業)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상징주의와 아르 누보 양식의 박진성과 평행하는 이들 화가들의 주관적 표현은 드라마틱하고 또한 집념에 가까운 테마를 소수의 강렬한 색채와 대비시키고 왜형(歪形)된 포름(형식), 단순 ·긴밀한 구도, 선의 그래픽한 예리함과 역동성(力動性)으로 파악하였다. 이상의 조형적 특색은 그대로 독일의 표현파 작가에게도 공통된다. 독일 표현주의 회화에는 세 그룹이 있다. 첫째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브뤼케(橋)’ 그룹으로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 로틀루프 외에 놀데, 페히슈타인도 참가하고 연차전(年次展)과 집회가 조직되었다. 이 그룹은 독일 현대회화의 출발점을 이루었고 프랑스의 포비슴과 북유럽의 뭉크에 고취되었다. 그 중심인물은 원시미술에서 생명력을 파내고, 격앙된 색채와 예리한 관찰로써 대도시의 가두풍경을 그린 키르히너이다. 둘째는 1910년 베를린에서 바르덴이 창간한 예술잡지 《슈투름》 및 같은 이름의 화랑(畵廊)에 의하여 만들어진 ‘슈투름그룹’으로, 오스트리아의 화가 코코슈카의 자아와 외계의 상극을 새긴 심리적 초상화로 대표된다. 바르덴은 자기 나라의 젊은 전위화가(前衛畵家)를 화랑에 결집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미래파, 초기의 프랑스 큐비스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잡지에는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논문 및 들로네(클레의 번역에 의하여), 레제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전위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약 15개국 90명의 작가와 366점의 작품을 모아 일찍이 보지 못한 최대의 국제전을 열었다. 셋째로는 칸딘스키, 마르크를 중심으로 1911년 뮌헨의 신예술가동맹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결성한 청기사(靑騎士) 그룹이다. 구성원으로는 이 밖에도 클레, 야우렌스키, 마르케, 쿠핀, 뮌터 등이 있고, 전람회는 뒤에 드레스덴의 ‘다리’, 베를린의 ‘분리파협회’, 프랑스 작가(루소, 피카소, 브라크 등), 러시아 작가(말레비치)를 추가하여 확대시켰다. 이론가인 칸딘스키는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을 발표하여 유물론과 리얼리즘에 지배당하고 있는 미술에 반기를 들었으며, 화가의 내적필연(內的必然)에서 우러나는 정신성 ·환상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작과 더불어 마르크, 클레 등의 형태의 분석 ·종합의 시도는 ‘청기사’ 운동이 지향하는 현대 추상회화의 중요한 주류의 하나로서 주목된다. 이 밖에 베크만, 그로스 그리고 여류화가 모다존 베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표현주의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재차 그룹을 결성하지도 못한 채 나치스 체제의 발흥과 동시에 ‘퇴폐예술’로 낙인찍혀 개별적으로 어려운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혹은 스스로 붓을 꺾고 예술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벨기에에서 일어난 플랑드르 표현파가 있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코브라’ 그룹(알레신스키, 아펠)의 추상적 표현주의, 초기의 루오, 그로메르 등의 화가도 표현주의의 진영에 넣을 수 있다. 조각에서는 확대된 인체(人體)의 모습을 추구한 렘브루크, 농민의 중후한 종교성을 탐색한 바를라흐가 있다. 표현주의 건축은 최근의 연구에서 관심을 끌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환상적 형태와 색채에 특색을 보인 치히와 타우트를 들 수 있다. 문학 ·연극에서는 베데킨트, 트라클, 카이저, 조르게, 괴링, 베르펠, 하인리히 만 등이 있고, 음악에서는 쇤베르크, 힌데미트 등을 대표적 작가로 꼽는데, 이 두 사람은 한결같이 영감에 의하여 파악된 감정의 표출과, 자아감정(自我感情)을 고양시키는 것을 기조로 하여, 참신하고 대담한 수법에 의한 예술적 변형에 특색을 나타내었다.
또한 표현주의는 대도시의 실내장식 ·포스터 ·진열장 전시에 이르기까지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특히 영화사의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슈투름’의 세 화가(헤르만 바름, 발터 뢰리히, 발터 라이만)가 협력한 로베르트 비네 감독의 《칼리가리 박사》(1919)는 그 금자탑(金字塔)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