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 엣지(Hard-Edge)
1950년대 말에 일어난 미국의 기하학적 추상화의 새로운 경향. '쿨 아트', '신추상(New Abstrction)' 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미국 화단에서 지배적이던 추상표현주의에 반기를 든 일련의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쓰여온 명칭이다. 이 말을 처음 쓴 것은 1959년 미국의 평론 가 쥴스 랭스너이지만 영국의 평론가 로렌스 알로웨이에 의해 일반화 되었다. 이 회화의 특 징은, 명칭이 시사하듯이 단단한 가장자라에 의해 화면이 구분되며, 시원하고 단순한 색깔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또 종래의 기하학적 추상회화에서는 각각 독립된 의미를 지니는 형태 몇 개를 조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방식, 즉 화면 전체를 몇 개의 부분으로 분할하 는 그런 표현 방식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하드엣지의 경우에는 형태가 화면 전체여서 분 할이 불가능하다. 바넷 뉴먼, 애드 라인하트, 마크 로드코의 그림들은 이미 1950년대에 하드 엣지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으며, 또 보색과 병치된 색깔의 상호 작용에 관신을 기울였던 조 셉 앨버스의 그림과 저서들도 역시 하드엣지 회화의 탄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아 크릴 물감의 개발은 이 경향에 새로운 기술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범위'와 '경계'가 명 확하게 정의되어 있는 이 '가장자리(edge)'에 대한 최초의 강조는 1960년대에 미술을 산업 적으로 조립하는 것을 가능케했던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케네 드 놀런드, 엘즈워드 켈리, 프랭크 스텔라 등이 있다.
한국현대미술
한국현대미술의 시작은 서양화가 도입되고, 전통회화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1910년대부터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미술과 미술가의 개념이 변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미술교육이 시작되었고, 협회활동이 일어났지요.정규미술학교는 없었 지만 1908년 한성미술품제작소가 설립되었는데, 도안과 디자인을 하여 제작하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미술공부를 했지요. 한편,1911년 윤영기가 서울에 경성서화미술원을 설립했다고 하는데 , 이것은 곧 서화미술회강습소로 바뀌었어요. 서예와 미술을 3년과정으로 가르쳤고, 교수진은 근대 미술가인 조석진, 안중식이었죠. 이곳을 통해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등의 작가가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1918년에 서화협회가 결성이 되어 1921년부터 36년까지 전시회(협전)가 계속 열렸지요 이 협회는 전통미술과 서양화 모두를 활성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화가 이상범, 김은호, 변관식, 노수현, 이용우, 이한복/ 나혜석 새로운 변화의 움직임(1910) 서양화의 유입과 더불어 전통화단도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문학의 사실주의 영향을 받아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실경산수를 많이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상범,변관식,노수현,이용우등이 1923년 '동연사'그룹을 결성했는데, 일상생활이나 시골풍경을 주로 그렸습니다. 또 동물화, 화조도같은 정물에 대한 관심도 부상했다고 합니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이 시작했는데, 동양화/서양화/사군자와 서예로 구분되었어요. 그래서 이때부터 동양화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선전은 젊은 미술가들의 등용문이 되었는데, 총독부의 재정적 후원을 받고 있어 이전의 협전이 위축되는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화가 동양화단 : 장우성 /김기창 / 서양화단 : 김인승, 이마동 /오지호, 이인성 /구본웅, 문학수 /김환기, 유영국 전위그룹의 형성(1930/40) 1930년대 전통화단은 세 그룹에 의해 주도되었어요. 앞세대의 김은호와 제자들을 중심으로 주로 채색화를 그리는 화단, 이상범과 제자들의 사실주의 수묵산수화,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통산수가 그것입니다. 또 김은호의 제자들은 '후소회'를 만들어 1936~1943년까지 6회의 전시회를 열었고, 이상범의 제자 배렴, 이건영등도 제자들의 전시회를 1941~1943년까지 여러번 열었습니다. 한편,1920년대부터 1940년대의 서양화단의 양상은 아카데믹한 사실주의 양식으로 주로 인물화를 그리던 화가들(김인승,이마동) 모더니즘 계열의 인상주의,야수주의 양식으로 풍경화를 그리던 화가들(오지호,이인성) 표현주의,추상미술을 중심으로 하는(구본웅) 전위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김환기,유영국) 첫째 그룹은 주로 서있거나 앉아 있는 인물상,누드가 주요 소재였어요. 두번째는 인상주의적 풍경화의 경향인데, 이를 잘 표현한 화가는 오지호였다고 합니다.. 또 향토적 분위기가 주로 나타나는데, 황토색, 짙은 갈색이 주로 등장했습니다. 세번재 그룹에서 정치적 전위로 KAPF가 나타났고, 회화 양식에서는 유럽의 실험적 모더니즘을 수용했습니다. 김환기,유영국등 의해 추상이 처음으로 시도되었지요. 이 시기 일본의 유학생들은 주로 '자유미술가 협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화가 동양화단 : 장우성 /김기창 / 서양화단 : 김인승, 이마동 /오지호, 이인성 /구본웅, 문학수 /김환기, 유영국 전위그룹의 형성(1930/40) 1930년대 전통화단은 세 그룹에 의해 주도되었어요. 앞세대의 김은호와 제자들을 중심으로 주로 채색화를 그리는 화단, 이상범과 제자들의 사실주의 수묵산수화,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통산수가 그것입니다. 또 김은호의 제자들은 '후소회'를 만들어 1936~1943년까지 6회의 전시회를 열었고, 이상범의 제자 배렴, 이건영등도 제자들의 전시회를 1941~1943년까지 여러번 열었습니다. 화가 동양화단 : 장우성 /김기창 /박래현 / 이응로 /서세옥 /천경자 서양화단 :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박서보 /김창렬 / 남관 /이승조 새로운 추상에의 시도(1950/60) 동양화단에서 이상범과 변관식은 계속해서 산수화의 대가로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부동양화가들은 전통수묵화의 영역에서 벗어나 추상회화를 시도했습니다. 박래현, 이응노가 그들인데,박래현은 구체 적인 이미지가 지워지고 선과 색의 자유화를 강조함으로 동양화단에 있어 추상의 한 방향을 제시했지요. 거의 추상의 선국라고 할까? 이응로는 60년 이후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문자 추상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60년대에 들어서 서세옥,장운상,민경갑,정탁영등 젊은 화가들은 '묵림회'를 만들었는데, 이를통해 전통수묵의 정신성을 현대회화에 도입하려고 했어요. 대상을 단순화하고,더 나아가 형태를 떠나 먹이 종이 위에 번지는 자발성등의 추구등 추상작업을 시도했습니다. 전쟁 이후 1957년 30년대의 전위그룹에 이어 두번째 전위그룹이 생겼났어요. 박서보,김창렬,장성순,하인두, 김서봉, 정창섭등이 그들인데, 그들은 '현대미미술가협회'그룹을 만들어 집단적으로 활동을 했지요. 이들의 작품은 유럽의 앵포르멜이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미술과 유사한 표현정신을 반영하고 있어 '앵포르멜'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 다. 서정추상이라고도 하는데, 서구가 물질성을 강조한 것에 비해 한국의 앵포르멜은 정신성을 강조하였어요. 60년대 후반부터는 앵포르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탈앵포르멜 운동이 일어나는데, 기하추상의 시도, 옵아트,오브제 미술등이 시도되었습니다. <오리진>,그룹의 작가들은 차가운 추상의 작업을 모색했고,
의 작가들은 설치, 퍼포먼스등의 실험작업을 해 나갔습니다. 서승원.이승조등이 기하추상의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런 경향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한 작가들도 많이 있지요. 화가 박서보, 하종현, 권영우, 이우환 모토크롬 회화의 전성기 (1970) 70년대 중반서부터 한국현대미술은 정착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한국적인 모더니즘 미술이 구현이 되었습니다. 앵포르멜부터 축적된 평면회화와 현대미술만을 취급하는 전시장이 생겨나면서 현대미술은 더 활발하게 전개가 되었지요. 회화의 본질을 추구하여 평면 자체에서 모든 재현을 거부하고, 조형성을 추구했어요. 이것이 더 심화되서 나중에는 그리는 행위마저 포기하고 가장 단순화시켜 버리는 미니멀 아트로 흐르기도 하지요. 그러나 미니멀 아트와 개념미술은 서구의 물질성과 표현적 금욕성에 더 관련이 있고, 한국의 모노크롬은 이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표현적 금욕성에 더 관련이 있고, 한국의 모노크롬은 이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평면의 자율성,순수성을 추구한 것과 더불어 한국인의 세계관이 표현되었다고 평가하지요. 즉 한국의 모노크롬은 정신성을 추구했습니다. 75년 동경화랑에서 개최된 모토크롬 작가들 전시의 서문을 보면 회화에 쓰인 백색은 물질 이상으로 하나의 정신이며 <백>이라고 하는 한 우주세계라고 했지요. 그리고 한국인의 자연관,물질관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평론가 이일은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삶을 배제한 순수추상의 평면만을 고집한 것에서 지나친 형식주의와 에예술지상주의로 치우치고 갈수록 획일화되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화가 임옥상 ,신학철 오윤 구상의 회복과 국제화 (1980) 1980년대는 사회비판적 미술운동인 민중미술이 우리나라 미술사상 최초로 집단화되어 일어났어요. 이것은 이전 시대의 권위적이고 제도적이며 현실 반영이 없는 모노크롬미술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지요. 형식만의 미술은 공허한 것이라 비판하고, 미술은 내용성이 있어야 하며 사회현실을 반영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선구적 그룹으로 '현실과 발언'이 있고, 임옥상, 오윤 등의 작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화단에서는 이 민중미술을 예술성이 결여된 정치적 선전으로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91년 호암미술관에서 <임옥상전>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15년 1980-1994>의 전시회가 열리는 등 1990년대 인정을 받아 민중미술은 역사속에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1980년대 동양화단에서는 수묵화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전통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수묵만으로 표현매체를 제한하고, 먹의 미묘한 농담의 다양성을 파고듦으로 수묵을 통한 고유한 정신세계를 탐구하고자 했지요.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회는 국제적이고, 다차원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는데 화단도 이러한 변화에 따라 국제적이 되어 해외 전시회를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다원화되는 세계(1990) 1990년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여러 분야에서 논의가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post 는 '후기'라는 뜻을 가지면서 동시에 벗어난다는 '탈'의 뜻을 가지고 있어요. 시기적으로 후기 산업사회에서 생겨난 새로운 사조로 후기 모더니즘이지만, 모더니즘을 벗어나는 성격이 더 강하지요. 모더니즘이 서구 중심이고, 남성과 지배권, 보편적인 양식에의 추구등 중심지향적인데 반해 포스트 모더니즘은 중심이외에 대한 관심이 강하고 여성, 피지배자, 제 3세계등 주변 지향적입니다. 또 모더니즘이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상대성을 주장하고, 다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 양상이 미술에서도 나타났는데, 보편적인 추상양식에서 벗어나 자국의 전통을 소재로 하는 여러가지 양상의 미술이 보여지고, 다양한 매체의 사용과 장르의 해체가 보여지며, 인용과 차용이 많이 쓰여졌습니다. 특히 과학기술을 응용해서 작품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회화가 거의 사라지고 비디오 아트, 설치, 영상매체의 활용, 컴퓨터의 사용등 멀티미디어적인 작품이 현재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페미니즘 미술이 강하게 등장했지요. 한국 미술도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이 우리나라 상황에 따라 등장하였습니다 앞으로의 현대미술은 매체적으로는 컴퓨터와 그밖의 멀티미디어가 지배적일 것이라는 전망을 합니다. 그리고 가치관이 다양해지지만 더 혼랍스럽고, 급기야는 붕괴하며 인간성 상 실이 심해지는 사회속에서 미술도 그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할 것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도 이제는 그 열기가 식고, 지금은 어떤 운동이나 주류 경향은 무시되며 여러 양식이 동시에 공존하며 서로 인정해 줄 것을 바라는 시대이지요. 그래서 앞으로 어떤 형태의 미술이 나올지 아무도 장담을 못합니다.
해칭(hatching)
판화나 소묘에서 세밀한 평행선 또는 교차선을 써서, 대상의 요철이나 음영을 표현하는 묘 법이다. 빛의 미묘한 반사 등까지의 복잡한 것에서부터 지도·제도 따위의 간단한 것까지 여러 종류의 해칭이 있다.
해프닝(Happening)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 주로 행해졌던 비연극적, 탈영역적인 연극 형식. 우발적인 사전 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예술의 각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표현운동의 하나. 해프닝은 주제, 소재, 액션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형식으로 전개하여, 이른바 예술과 일상 생활과의 경계 를 없애려는 것이 하나의 특색이다. 특히 미술에서는 화가의 제작 행위 그 자체를 하나의 표현으로 본다는 주장에서 발전한 것으로 액션 페인팅의 행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 물체와 만남으로써 바로 눈 앞에 이벤트를 발생시켜, 그것을 직접 체험한다는 일 종의 '실연'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해프닝의 선구로는 미래파와 다다의 즉흥연기 등을 거론 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폴록(J. Pollock)과 존 케이지(John Cage) 등 뉴욕에서 활약한 일련의 호가들과 관련이 있다. 초기에 이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던 작가 중의 한 사람인 클 래스 올덴버그는 회화와 조각의 결합을 꾀하교, 대중의 행동을 작품에 끌어들였는데, 그는 해프닝을 현실 전체를 원동력으로 해서 다시 변경된 현실을 창조하는 욕망의 표현수단으로 보았다. 해프닝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앨런 캐프로인데, 그는 이런 매개체를 최초로 실연에 옮긴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활동중인 사람과 사물을 콜라주 하는 방법을 고안 해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올덴버그, 휘트면, 그룸즈, 짐 다인 등은 비슷한 경향의 작업을 하 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을 위한 그들의 이벤트는 일반적으로 내용이 없는 각본과 즉흥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작가들은 해프닝에서 무용수나 단편영화, 연설 그리고 조잡하게 제작된 구조물을 이용했다. 우연성은, 해프닝의 현장에 자유롭게 참여한 관중의 예기치 않은 행동을 수용한다. 우연성의 수용은 전위 음악가 케이지의 이론에 영향받은 것으로 그는 오래 전부 터 작품에 우연한 사건을 도입하여 예술과 생활의 경계를 허물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많은 비평가들은 블랙 마운틴 대학에서 공연한 1952년의 실연을 들어, 케이지를 해프닝의 최초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고 있다. 위의 공연에는 전위 무용수인 머스 커닝햄, 화가인 로버 트 라우센버그, 피아니스트인 데이비드 튜더 등 많은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1960년에 가까워 지면서 여러 작가들은 이 새로운 예술의 특성을 정의하려고 시도했다. 캐프로는 자신의 작 품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상점 정면이나 다락방과 같 은 상황에서 도시와 농촌의 풍경으로 옮겨가면서 대중을 초청, 거의 의식적이고 계산된 사 건의 연속 속에 결합시키고자 했다. 휘트먼은 각기 다른 장치로 연속물을 마련하고 주어진 배경 속에서 행동을 계속하여, 연극에 보다 더 접근해갔다. 다인은 위협적이고 무시무시한 효과가 강조된, 해프닝으로서의 사이코 드라마를 시험했다. 조각가인 올덴버그는 움직이는 대상에 대한 활성화된 반응에 관심을 집중했다. 해프닝은 복합적인 매체에 관심있는 작가들에게 계속적으로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 은 춤, 작곡된 음악, 전위적인 연극 형식의 일면을 포용해왔다. 해프닝은 이미지의 단절이나 전통적인 일차원적 구성에서 그 진전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연극과 구별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어떤 예술 형태보다도 연극적인 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행동 미술(Behaviour! Art)
최근의 새로운 미술 동향의 하나. 보디 아트라고도 한다. 비헤이비어는 태도, 동작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인간의 외관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따. 개념 미술에서 발전한 것으로, 모든 과학이 정신 구조와 육체 구조라는 도식화된 인간관계를 방법론적으로 문제삼고 있는 데 대해서, 행동미술은 특수한 예를 들어 육체의 운동 및 변화의 제 조건 또는 각 순간마다 변화하는 육체의 현상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행동미술은 과정미술과 마찬가지로 관념을 생산하는 개념미술의 필연적인 진전으로 볼 수 있다. 개념미술에서 행동미술로의 전개는 길 벗과 조지에 의해서 였다. 이들은 변화의 과정을 시각화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육체를 유일 한 소재로 이용했다. 미국에서 행동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비토 아콘치, 데니스 오펜하임 등이 있으며, 독일에서는 클리우스 링케와 볼프 칼렌 등이 같은 경향의 작업을 하고 있다
허백련 - 許百鍊 (1891~1977)
동양화가. 호 의재.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1910년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 3년을 마치고그림 공부에 전념하여, 1920년 목포에서 첫개인 전을 열면서 화가가 되었고, 1935∼1937년 조선 미술 전람회에 계속 1등으로 입상하면서 이 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1953년 광주 농업 고등 기술 학교 교장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그 뒤 국전 2회 때부터 13회 때까지 심사 위원을 지냈고, 1958년 예술원 종신 회원이 되었 다. 시·글씨·그림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남종화(南宗畵)의 대가로 손꼽힌다. 주요 작품으로는 〈계산청하〉 〈설경〉 〈모추〉 〈하경산수〉등이 있다.
현대미술
20세기 미술은 지금도 진행 중인 여러 경향들에 의한 동시대적 움직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미술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어느 미술보다 우리의 관심과 호기 심을 끌고 있지만, 아직 시간과 역사의 흐름에 의한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난 해함 또한 크다. 20세기에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과학과 산업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사회 변화가 그 어느 시 대보다도 급격했다. 이러한 변모는 미술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데, 20세기 미술은 그 사조와 경향들을 일일이 나열하기에도 벅찬, 다양성의 한 세기 였다고도 할 수 있다. 여러 다른 성격의 사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현대 미술에서 보이는 보편적이 자 특이한 양상이기도 한데, 이는 20세기 사회가 가지는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현대 사회는 시간과 움직임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으며, 세계는 그만큼 다양하고도 복잡하게 변모하고 있다. 현대인은 생활 전반에서 빠른 속도감에 쫓기는 듯한 불안감과 한 번에 수용하기에는 벅찬 다양함 속에서 혼란함을 느끼고 있다. 이로서 현대인은 주변 상황에 끊임없이 반응해야하며, 20세기라는 특수한 상황을 겪어 내고 있다. 바로 이런 현상이 미술에도 어김없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20세기 미술가들은 하나의 유파를 계기로 함께 작업한다. 그들은 공동으로 작업실을 쓰며, 토론하고, 그림을 그린다. 또한 어느 한 미술가가 새로운 운동을 형성하기 위해 뜻을 같이 하는 작가들을 모아 선언문을 내기도 한다. 이런 운동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상호 영향을 주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미술가가 한때 는 이 운동에 속하다가 또 다른 때에는 다른 유파에 가입해 그전과는 다른 성격의 작업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현대미술과 작가들은 단 한가지의 방식으로 설명되어지기 어렵게 되었고, 그만큼 여 러 종류의 예술 사조가 공존하게 된다. 또한 회화, 조각, 건축으로 나뉘어 설명되던 미술 분야가 이제는 다양한 매체와 기법이 수용 되면서, 설치나 행위 등의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세기말에 와 있는 지금, 20세기 미술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 평가는 조심스럽게 시도되고 있다. '미술은 사회의 거울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까지의 미술사를 통해서 증명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우리는 동시대의 미술을 조심스럽게 살펴봄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판단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이전 미술 20세기가 시작되고 나서 현대미술의 첫 번째 장을 연 사조로 야수파, 입 체파, 독일 표현 주의를 꼽을 수 있다. 이 세 가지 사조는 1900년을 기점으로 태동된 미술 운동이다. 마티스를 중심으로 하는 야수파는 색채의 해방이라는 슬로건에 맞게 힘찬 붓터치와 색채의 자율성을 추구하여, 강렬한 원색의 과감한 사용을 통해 외부 세계에 대한 감성을 표현 했다. 이것은 추상으로 나가는 본격적인 시도로서,색채의 추상성을 선도했다. 이에 비해 입체파는 피카소, 브라크를 중심으로 선의 추상성을 시도한다. 세잔에게서 영향받은 이들은 원근법의 파괴와 동시 시점을 통해 대상 묘사에 있어 해체적 성향을 보인다. 이러한 추상으로 향한 미술의 움직임은 이미 그 전 세대들을 통해 시작되었다. 즉 19세기말부터 시작된 모더니즘의 사상은 현대 미술의 근간 사상으로 자리잡아, 미술 순 수주의에 입각한 추상이 새로운 회화 양식으로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 되어 준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는 주관적 주제 선택과 내용 중시로 위의 두 사조와 차별성을 갖는다. 비이성주의, 원시주의를 표방한 다리파와 청기사파의 그림에서 우리는 회화의 자율성을 느 낄 수 있다. 이 세 사조에 이어 나오는 여러 추상회화파는 가히 20세기를 추상의 세기라고 불리게 할 정 도로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다가오는 과학 선진 사회에 대한 긍정적 예언과 찬양을 입체파에서 흡 수한 기법으로 대상을 추상화함으로서 그들이 표현해 내고자 한 역동성, 움직임, 동시성을 나타내고 있다. 추상을 향한 또 다른 움직임은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독일 바우하우스 등과 몬드리안 , 말레 비치 , 칸딘스키 등의 추상 선구자들에 의해서 계속 이어진다. 이 중 러시아 아방가르드, 바우하우스, 데 스틸 그룹들이 펼친 기하 추상운동은 과학과 예 술, 실생활의 효율적 접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기하추상의 형태를 생활 디자인에 응용하거나, 혹은 그 미술 자체로서 시민 생활 곳곳에 뿌리내리려고 하였다. 이러한 과학에 대한 유토피아적 예찬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서 모두 깨어지고 만 다. 역사상 유래 없는 파괴와 학살의 장이 된 1차대전을 겪은 유럽인들은 기존의 문명과 진보주 의적 전통, 과학 발전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 것이다. 전후의 암울한 사회의식 속에서 반미학의 예술을 주창하는 다다이즘이 태동하게 된다. 이들은 기존 사상과 질서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외치면서 이후 20세기 미술의 이념이 되는 레디 메이드 개념, 무의식에 의한 우연의 법칙, 반 예술의 미학 등을 확립한다. 그러나 이들은 거부를 위한 거부, 파괴를 위한 파괴로서 그 다음을 이을 새로운 대안을 제 시하지 못한 채 운동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이어 탄생된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한계를 인정하고 의식과 무의식, 우연과 필연의 상반된 가치들을 모두 수용해 내고자 했다.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이란 정신분석학에 깊은 공감을 느낀 이들은 인간의 잠재된 혹은 억눌린 본능과 무의식을 의식세계 속에서 구현해 냄으로서 인간 내면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를 시도한다. 1945년 이후 미술 초현실주의의 내면 표출의 욕구는 제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앵포르멜(서 정 추상)운동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의해 다시 한 번 나타난다. 1차대전이 끝난지 채 30년이 되지 않아 발발한 2차 대전은 최신의 무기와 패권주의의 이데 올로기로 무장한 채, 1차대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파괴와 학살로 전세계를 황폐화 시킨 다. 결국 6년간의 전쟁을 끝낸 서구인들은 극도의 허무주의에 빠지면서 폐허가 된 외부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내면세계로 눈을 돌린다. 이에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추상기법을 통해 전쟁중에 겪었던 무서운 기억과 울분을 토해내 고, 전후의 힘겨운 현실을 극복해고자 한다. 미국은 폴록을 중심으로 한 추상표현주의로 서구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추상표현주의와 함께 색면추상(후기 색채추상)이 등장하게 되는데, 추상표현이 강렬한 붓터 치와 색채로 대변 될 수 있다면 색면추상은 이와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즉 넓은 캔바스에 서정적, 명상적인 색면을 펼쳐보임으로서 비교적 안정감있는 느낌을 관객 에게 전달한다. 1950년대까지 서구 사회를 풍미하던 추상회화는 개성만능주의의 뜻모를 공 허한 작업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이에 1960년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운동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전쟁의 우울한 기억에서 벗어나면서 다양화되는 미술계는 시각적 효과를 노린 옵아트, 움직 임을 중시하는 키네틱 아트, 새로운 구상 회화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팝아트와 극사실주의 , 모더니즘의 최극단이라고 일컬어지는 미니멀리즘, 예술가의 예술적 개념 자체를 작품화한 개념 미술 등의 현란한 운동이 자유롭고 활기차게 진행되는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지미술과 행위예술 등이 활발해 지면서 회화와 조각의 영역을 뛰 어 넘는 작업들이 행해지고 있다. 또한 80년대에 와서는 미술 조류가 추상에서 구상으로 다시 한 번 자리바꿈 하는 양상을 볼 수가 있다. 신 표현주의, 자유구상, 트랜스 아방가르드 등의 구상회화가 포스트 모 더니즘적 실례로 설 명되고 있으며, 과학 기계를 이용한 비디오 아트, 컴퓨터 그래픽 아트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 다. 20세기 미술에는 이외에도 수많은 운동들이 펼쳐졌으며, 지금도 계속 새로운 미술 운동이 생겨나고 있다.
형식주의(Formalism)
예술의 다른 특성들보다 예술 작품의 형식에 보다 우선권을 부여하는 예술 이론, 또는 실제 1970년대에 특정한 예술권에서 남용한 용어. 분석적으로 볼 때 대상으로부터 특정한 속성, 성질 또는 관계를 추상화하거나 뽑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 작용은 대상 의 다른 속성들을 무시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므로 비평적 분석은 필연적으로 예술작품의 총체성을 분열시킨다. 예를 들어 한 미술 비평가는 예술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상호보완적이 라기보다는 독립적인 것처럼 논의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형식'은 대상을 색채나 텍스처에 관계없이 묘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형식의 개념과 연관돈 철학적 문제들은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시각 예술에서 형식주의는 일반적으로 20세기의 현대 미술, 그리고 벨(Clive Bell), 프라이(Roger Fry), 그 린버그(Clment reenberg)와 같은 이론가들에 대한 특별한 논점을 의미한다. 벨은 '시각예술' 이라는 표제 아래 여러 시대와 문화에서 나온 무척 다양한 대상들의 공통분모를 찾아냈다. 그는 특징 중 하나가 미적 감정을 일으키는 선과 색채의 결합으로 이를 '의미있는 형식 (significant form)'이라고 불렀다. 리글과 미술사가는 '예술가들이 형식에 대한 의지'를 가 진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순수 형식에 가장 가까운 예술은 음악이므로 이론가들은 모든 예 술이 음악의 조건을 갈망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런 경향의 종착점은 내용이없는 순수 형식의 추상미술 즉, 형식추상(Formal Abstrction)이라는 개념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심지어 추상예술조차도 내용을 가진다. 예술가들은 그 후에도 물질 자체의 색채와 질감과 선을 취함으로써 예술작품을 구성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그들 예술 작품이 외부의 현실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즉 예술을 독자적이라고 주장하는 예술과, 부분과 전체의 관계라는 면에서 형식을 분리시키는 예술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영국 예술이 미국 예술에 지배당했을 때 형식주의는 미국의 미학과 비평에 의하여 영국의 예술로 스며들었다. 또 버긴이 지적했듯이 또다른 형식주의의 전통, 즉 사회주의적 형식주의 가 유래한 러시아 형식주의가 있다. 1960년대까지 많은 예술가와 비평가들은 형식적 추상이 고갈되고 어휘상으로도 지루해졌다 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현실의 문제들을 반영하지 못하고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하지 않음으로써 형식적 추상주의자는 엘리트이며 사회적으로 무책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어떤 예술도 역사와 사회를 벅어나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예술은 건전하지 못 한 철학적 전제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적 회화(Metaphysical Painting)
이탈리아 근대 회화의 한 경향. 1915년부터 1918년에 이르기까지 지오르지오 드 키리코, 카 를로 카라, 모란디 등의 작품에 적용되었볾. 키리코의 형인 시인 알베르토 사비노는 그것에 는 "조형적 한계 내에서의 정신적 요구에 대한 총체적 표상이라는 아이러니가 있다"고 말한 다. 1938년 키리코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술 작품이 진실로 불멸의 존재가 되 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인간 한계 내에서 벗어나야 하며, 논리나 상식은 이에 저해된다. 따라 서 이는 꿈과 어린아이의 정신 상태에 가깝다 … 선사 이래 인간이 물려받은 가장 강력한 감각은 예감으로 늘 우리와 더불어있다. 마치 우주의 무의미의 영원한 증거인 것처럼 …." 형이상학적 회화는 물론 키리코의 개인적인 셩격이 강하게 작용했지만, 미래파에서 전향했 으며, 모란디도 움베르토 보치오니의 영향을 입었다. 카리는 키리코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기묘한 심리학적 암시보다는 선과 색의 시각적 특성 및 회화상의 문제에 주목했다. 모란디 역시 심리 묘사보다는 조형적·회화적 효과를 위해 수수께끼같은 '형이상학적' 이미지를 사 용했고 선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형이상학적 회화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이미 쇠퇴했으나 그 영향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18년에서 21년까지 기관지인 <발로리 플라스티치>를 발행했다. 키리코의 회화는 그가 1924∼9년간 파리에서 합세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전조를 보이고 있다.
홀바인 (Hans Holbein der Jungere,1497~1543)
독일의 화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와 목판화가인 브루크마이어에게 그림을 배우고 바젤·북이탈리아·런던등지 에서 이름을 떨쳤으며, 1532년 에라스무스의 추천으로 영국 헨리 8세의 궁정 화가가되었다. 그는 뒤러와 함께 독일 르네상스의대표적인 화가로 불리었으며, 중세의 양식에서 벗어나 독 창적인 예술 세계를 펼쳤으며,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으며, 성격 묘사를 아주 잘 하였고, 섬 세한 마무리와 풍부한 빛깔로 의상의 재질감까지 교묘하게 나타냈다. 주요 작품으로는 〈모레테 상〉 〈그리스도의 시신〉 〈마이어 시장의 성모〉 〈구약성서〉 〈죽음의 무도〉 등이 있다.
환상예술(irrealistic art)
상상적, 환상적 세계를 표현한 예술. 사실주의 예술에 대랍되는 개념으로 사용할 경우가 많 다. 또한 구성·추상미술과 대비되는 경우도 많다. 경험적·합리적인 자연관 및 그 표현 기 법에 대립하는 제재, 기법, 예술관에 의해 성립된 예술을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제재면에서 는 신화적 괴물류, 종교적 환상, 몽상적 세계를 표현하고, 기법적으로는 비사실주의적 형태, 색채 등을 주로 사용한다. 서양 중세의 묵시록적 환상의 표현, 코넬리스 보슈, 윌리암 브레 이크, 르동 등과 중국 명말청초의 우 삔, 꽁 시앤 등이 대표적이다.
황금분할(golden section)
선분 AB를 점 P로 내분할 때 AB·BP = AP²을 만족하는 두 선분 AP:AB의 비례 관계 를 가리킨다. (√5 -1:2). 보통 황금분할 또는 황금비라 불리는데, 그것은 이 관계에 있는 비례가 시각적으로 좋은 느낌을 주기 샔문이다. 황금분할은 이미 르네상스기에 '신의 비례' 로 존중받았다. 근대 미술사에서는 1912년에 결성된 입체파의 한 분파를 말하며 이 황금비 로 대표되는 기하학적 원리를 존중하여 '섹숑 도르'파 라고 자칭하였다. 그 최초의 전람회는 1912년 파리의 라보에시 화랑에서 열렸고, 그리스, 레제, 글레즈, 메쟁제, 라 프레네, 로트, 들로네, 마르쿠시, 자크 비용, 마르셀 뒤샹 등이 참가하였다. 다시 말해서, 피카소와 브라크 를 제외한 당시 입체파에서 기하학적 추상주의에 교량 구실을 한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회화(painting)
어떤 지지재나 장소 위에 각종 안료를 써서 형상을 표현한 예술. 자기표현, 장식적 목적을 위해서 행해진다. 표현되는 장소, 지지재에 따라서 동굴화,암벽화, 벽화, 제단화, 타블로화 등 으로 분류된다. 표현 재료와 기법에 따라서는 프레스코, 템페라, 유화, 모자이크, 스테인드 글라스, 수채, 소묘, 판화, 콜라주, 수피화 등으로 분류된다. 주제의 선택에 따라서는 구상, 추상 또 역사화, 신화화, 종교화, 풍속화, 정물화, 그리고 추상화의 경우에도 서정적 추상과 표현주의적 추상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기법, 양식, 장시 대상, 장르는 각 시대의 요청에 따 라서 변화하며,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최대의 상형표현 예술인 회화의 역사를 구성하 고 있다
회화의 보존 및 복원(conservation and restoration of paintings)
회화의 보존은 정교한 기술과 재료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미적 감수성과 미술사 지식을 아울로 요구한다. 물질적 변화의 어떤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고 백년 정도 지속된 회화는 거의 없었다. 그러한 징후들이 작품을 부패시키고, 결과적으로는 작품을 손질하게도 만든다. 복원이 새로운 문제는 아니다. 부패의 원인은 물리적인 손상과는 달리 항상 그림과 기저재 (support)의 재료에 내재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원인 중의 많은 것들이 적당한 조치, 또는 대기의 습도 등을 비롯한 환경상태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예방할 수 있다. 따라서 보존의 가장 중요한 일부분은 화경 요인에 대한 정기적인 검사와 노후화의 진단이 가능한 적절한 장소에서 그림을 전시하고 안전하게 소장하는 일들이 포함된다. 그림의 기법, 재료, 상태에 관해 최대한의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미경으로 실험실에서 검사해 볼 수도 있고, X선 이나 다른 방사선을 이용해서 검사할 수도 있다. 보존 과정에서는 그림의 다양한 기술적 특 징이나 병리학적 특징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림의 물질적 구조는 기 저재(벽, 패널, 캔버스, 종이, 동판, 상아 등), 밑칠 도료(게소, 백묵, 적갈색 저토, 색소 등), 안료층, 표면 도장재, 와니스, 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각 중은 각각의 기능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층에서 생기는 다양한 형태의 부패를 상쇄시키는 것이 보완의 목적이다. 대부분의 경우 부패의 원인은 처음의 재료에 내재해 있으므로 재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실제로 임상적인 관심을 가장 흔하게 요구하는 것이 기저재와 표면이다. 이상적인 기저재는 그 기 계적인 기능 외에도 물질적으로나 화학적으로 견고하고 화학작용을 일으키지 않아야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재료들 가운데서 이점에서 완전한 것은 없다. 벽화나 프 레스코는 벽의 습기 때문에 부패한다. 패널화에서는 비교적 습기가 있는 대기의 변화가 목 재의 수분 내용물을 변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목재의 크기를 변하게 한다. 안료와 도장재는 가변성이 높은 목재에서는 쉽게 부서져 떨어지기 쉬운데,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송상된다. 캔버스와 그 위에 입힌 와니스도 습기를 흡수하여 동일한 결과가 일어난다. 그 외 에도 균류가 침해하는 경우라든가, 캔버스가 약해서 찢어지고 부패하는 현상도 생길 수 있 다. 수채화, 소묘, 그리고 판화도 노후화가 일어나는데, 기저재에서 흔히 기인하는 것이다. 와니스로 표면을 입힌 최종층은 와니스가 마치 필름처럼 깨끗하고 색채가 눈에 띄지 않게 연속적으로 입혀져야 하기때문에 복원작업과정에서 가장 섬세하고 어려운 부분이다. 와니스 와 안료는 콜로이드이기 때문에 그 물질적 호학적 성질에 대한 전문가적인 지식이 있어야 작업 중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후기 모더니즘(Post - Modernism)
후기 모더니즘은 지난 20세기에 걸쳐 서구의 문화와 예술, 삶과 사고를 지배해온 모더니즘 에 대한 반동으로서 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기 모더니즘은 하나의 통일된 사조나 운동은 아니지만, 그 중심적 동기는 모더니즘을 통해 수립된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엄격한 구분, 예술의 각 장르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다. 많은 사상가들이 모더니즘은 종말을 선고했는데, 다니엘 벨, 이합 핫산, 브라이언 오도허티, 헤롤드 로젠버그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다니엘 벨은 "오늘날 모더니즘은 쇠잔했다. 거기에 는 긴장도 없고, 창조적인 충동의 기운도 빠져버렸다. 모더니즘의 반한적 충동은 제도화되었 고 그 실험적인 형식은 광고와 고급문화의 기호와 구문으로 흡수되어버렸다."고 썼다. 그리 고 로젠버그는 "모든 예술은 과거의 예술이며, 한 시대의 양식이다"라고 선언했다. 결국 모 더니즘의 확립된 양식들이 붕괴되고 의심받게 되자, 양식에 대한 확실성이 무너지고, 과다한 병적 징후에 시달리게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그러한 언어상실, 언어의 혼란을 일컬어 '정 신분열증' 이라고 칭했다. '후기 모던'이라는 말을 처음 쓴 것은 건축 비평가들이었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 유행하던 엄격한 사각형 형태의 국제적 양식에 대한 반발로 나온 건축물에 대해 쓴 말이었다. 따라서 건축에 있어서는 직선과 사각형의 고착된 형태를 탈피하여 삼각형과 원의 형태가 도입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후기 모던'적 경향이 분화되지 않은 과거의 예술을 소생시 키려 한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다른 시대, 다른 문화로부터 양식과 이미지를 차용하는 예술 은 모두 '후기 모던'의 자격을 얻는다. 한편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엄격한 구분을 파기하고 장르의 장벽을 넘나들기 위해, 여러 가지 대중문화의 현상들(신문기사, 광고,만화, 통속물)과 갖가지 신화적 요소들을 작품에 차용하며, 그러한 예가 미술에 있어서는 앤디 워홀에서부터 조나단 브로프스키, 루치아노 카스텔리, 산드로 킹, 프란체스코 클레멘테, 엔조 쿠키, 살로메 등이다. 그리고 음악에서는 클래식과 팝을 혼합한 필립 글래스나 테리 릴리 같은 작곡가들 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용과 혼합의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평론가들도 있는데, 예로 프레드릭 제 임슨은 그러한 차용행위가 당대의 언어로 당대의 현실을 표현할 능력이 고갈되었음을 입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후기 모더니즘은 여러 가지 양식의 차용과 혼합을 통해 일견 새 로운 면모를 보이지만,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창작 주체가 상실되어서 외부의 세 계와 사물을 묘사할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했기 샔문이라고 비판한다. 예로 독일 신표현주 의의 기수 라이너 페팅과 살로메는 독일 표현주의의 양식과 내용을 선호하며, 표현주의 시 대로 되돌아간다. 프란체스코 클레멘테와 줄리안 슈나벨은 1930,40년대에 프랑스나 이탈리아 에서 유행한 신낭만주의적이고 의사 초현실적인 측면을 골라낸다. 그들은 콜라주 기법을 통 한 재료의 자유로운 합병을 시도하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회화, 값싼 종교성물들, 어떤 것이 든 작품에 끌어들인다. 후기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또다른 주된 특징은 모더니즘적 문화와 사고방식이 세워놓은 엄 격한 지배의 틀을 거부하는데 있다. 즉 후기 산업사회는 자본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모 든 삶의 영역에 부과하며, 그러한 이념을 떠받치는 것은 엄격한 합리주의이다. 따라서 각각 의 문화의 영역을 고도의 전분화를 지향하고, 다른 영역과는 소통이 안되는 전문적인 언어 로만 자체소통하게 된다. 따라서 전문분야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이해도 비판도 불가능한데, 후기 모더니즘은 그러한 소통불가능한 상태를 타파하고 삶과 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 해, 예술에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끌어들여 비판적으로 다룬다. 과거의 신화와, 성적인 콤플 렉스를 다루는 이유도 그런 것이다. 특히 바바라 크루거와 한스 하케에게서 보이는 산업자 본주의 사회의 소비적 생활방식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정치적인 색채를 띤다. 또한 레온 골 럽은 제3세계의 고문화 쿠데타를 작품으로 다뤄, 첨예한 정치적 쟁점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지배이데올로기에 반발하는 가장 대표족인 형태는 페미니즘 예술이다. 그것은 기존 사회에 통용되고 있는 남성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여성으로서의 아이 덴티티를 확인하려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사진과 글을 적절히 결합하여 비판적 환기력을 높 이고 있는 바바라 크루거, 스스로 갖가지 형태의 여성으로 분장하여 자기 사진의 모델이 되 고 있는 신디 셔먼, 비디오, 영화, 패션사진으로 작업하는 다라번바움이 그런 경우이다. 이런 후기 모더니즘의 거러한 정치 지향적인 성격은 모더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 채, 몇가지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추가한 것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오히려 모더니즘이 가지 는 금욕주의와 장르 간의 배타성은 그대로 놔둔채 언어의 혼란만 가중시켰다는 의견들이 후 기 모더니즘의 열기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입장이다. 모더니즘의 지속적인 존립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한 요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현대화에 따르는 예견치 못한, 달갑지 않은 부작용, 현대 건축과 도시 계획의 참담한 실패, 미니멀, 개념 예술가들이 모더니즘 이론의 몇가지 단초를 자신들의 논 리적 귀결로 이끌어간 데서 비롯된 부조리, 실제적인 영향력이 거의 없는 예술적 '혁명'의 광적인 전복행위, 모더니즘 자체 내에서의 자기 파괴적 성향, 1960년대의 문화 혁명이 야기 한 태도 변화, 그리고 마르크시즘의 영향과 모더니즘에 기초하지 않는 문화와 예술을 가지 고 있는 공산주의 국가의 증가 등이다. 모더니즘에 점점 더 환멸을 느끼게 되는 또다른 징 표는 몇몇 미국의 미술관들이 현대미술 프로그램을 축소하거나, 심지어는 소장품들을 탈현 대화하려는 결정에서 찾을 수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전개는 분명히 반동적 세력 뿐 아니 라 진보적인 세력에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아직은, 확정된 일관성있는 사상의 체계는 아니며(핫산은 포스트 모더니 즘의 무정부주의로 흘러갔다고 주장한다.),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욕망에 의해 촉발된 회의 주의적인 비판적인 의식이다. (오도허티는 '성난 침묵'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본적인 정서 내용이라고 믿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필연적으로 모더니즘의 페허를 헤치고 나가 며, 모더니즘의 부정이라는 가시적인 대안을 세우려고 노력한다. 결국 포스트 모더니스트들 은 모더니즘의 많은 개념들을 전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을 다른 목적에 맞도록 이용할 것이다.
후기 인상주의(Post - Impressionism)
영국의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Roser Fry)가 1910∼11년 겨울에 런던의 그래프론 화랑에서 기획·개최한 전시회인 '마네와 후기인상주의전'이란 표제에서 유래한 명칭. 그러나 특정한 예술 운동, 단일한 경향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모네, 피사로, 시슬리 등의 인 상주의와 단순한 점묘주의로서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된, 보다 견고한 화면 구 성을 구하려 했던 경향과 표현 내용을 중시하려 했던 경향을 말한다. 여기에는 만년의 르느 와르, A. 루소 등의 화가도 포함되나,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세잔느, 반 고호, 고갱 세명 만 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3인 모두 초기에는 인상주의에 참가하여, 인상주의의 기법으로 그 렸었으나 세잔느는, 인상주의의 작품이 물체의 형태가 불꽃 속에 용해되어 공간 표현이 애 매해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물체의 실제감과 고전적 작품의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해서 입체파에의 길을 열었고, 반 고호는 정열적인 감정의 표현을 강하게하여 표현주의의 선구자 가 되었다. 고갱도 상징주의적 색채를 짙게 띤 인간의 생과 사, 영적인 것 등의 표현을 통하 여 인상주의를 탈피, 그 순색의 넓은 새견에 의한 기법을 개벌하여 야수파에의 길을 개척했 다. 인상주의에서 일단 발전하여 그 개성적인 표현 방법을 확립하고, 다음의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이들 화가들을 일관한다는 점에 이 '후기 인상주의'란 말이 의의가 있다. 그 러나 포함되는 화가의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과 내용이 애매한 점 등도 부정할 수 없 는 사실이다. 신인상주의와 같은 시대에 인상주의의 맥락에서 좀더 새로운 예술 세계를 지향한 또 하나의 경향으로 후기 인상주의가 있다. 세잔느, 고갱, 고호는 후기 인상주의의 3대 화가라고 부른 다. 고갱과 세잔느가 인상주의 그룹전에 여러번 출품하면서 그들 화업의 출발을 인상주의에서 했기 때문에 이들을 인상주의의 후계자로서, 그러나 새로운 인상주의자로서 취급하는 것이 다. 인상주의가 순간적인 외관의 모습을 포착하려는 표현을 하였다면 이들은 보다 견고한 것과 본질적인 것을 추구했다는 점이 다르며, 이로써 인상주의의 극복이라는 면에서 의의를 가진 다. 이들은 인상주의의 업적, 즉 순수한 빛과 색을 새롭게 발견하고 각자의 개성 있는 화풍을 인정하는 전통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상대적으로 인상주의가 잃었던 견고함, 질서, 그리고 인간 내면의 심오한 깊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 세 화가의 접근 방식과 목적은 서로 달랐으나, 세 사람의 업적이 모두 20세기 미술-야 수파, 표현주의, 입체파-이 발생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폴 세잔느(1839-1906)는 후기 인상주의자들 가운데 형태와 구성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을 구 축한 화가이다. 즉 인상주의의 회화를 이루고 있는 순간적 인상에 영원성을 지닌 견고함을 첨가 시키므로서 인상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그는 자연의 본 질적 구조를 구현하는데 있어, 대상의 외형에서 잡아 낼 수 있는 객관적 시각의 결과와 대 상에 대한 작가 자신의 주관적 이해를 동시에 표현함으로서, 20세기 추상미술이 가지고 있 는 객관과 주관의 동시성을 선구적으로 보여주었다. 세잔느는 1872년경 퐁트와즈와 오베르에서 피사로와 함께 자연을 대상으로 한 풍경, 정물화 를 그리기 시작한다. 인상주의를 표방했던 그는 화구를 들고 야외로 나가 풍부한 햇빛 아래 서 빛나고 있는 시골풍경을 밝은 원색과 생생한 터치로 그려냈다. 1873년에 완성 한 [목을 맨 사람의 집]이 바로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먼지 하나 없는 맑은 날씨 속에 인적없 이 조용한 마을 한귀퉁이의 풍경은 제작 초기의 인상주의자답게 선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전성기 인상파 시기의 그림들에서 보이는 공기 속에서 부유 하는 듯한 대상물의 흐릿함 대신 기교없이 튼튼히 지어진 건물에서 기인하는 사물의 견고성 과 화면을 빈틈없이 구성하는 치밀함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세잔느의 화풍은 이후 그의 화 업 속에서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1894년에 완성한 [사과바구니가 있는 정물]은 그가 고향 엑스에 있는 자신의 화실에서 그린 것이다. 세잔느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이와 비슷한 정물화를 많이 제작했는데, 모두 비슷한 형식으로 그려졌다. 이 그림들에서 우리는, 그가 움직이지 않는 정물을 이용해 그가 추구했던 회화관을 표현하 고자 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잔느는 주지하다시피, 순간적인 빛에 의한 일견의 화 간을 포착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도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가 푸생과 같은 예 술을 이룩하고자 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림이란 형체나 구도를 완벽하게 하는 불변의 질서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예술관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이 그림이다. 화면 속에 위치한 술병과 사과, 바구니들은 흡사 우연히 그렇게 놓여진 것처럼 보이나, 사실 자세히 관찰해보면 대상물체를 바라보고 있는 시점이 각 부분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있다. 예를 들어 식탁보가 걸쳐져 있는 테이블의 좌우모서리를 보자. 왼쪽의 모서리가 오른쪽의 모서리보다 낮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화는 그림 양쪽을 구성하는 소재의 구도나 식탁보 형태에 상응하면서 눈 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보인다. 또한 바구니속과 테이블위에 널려 있는 사과들은 각기 보고 그린 시점이 틀리다. 이러한 표 현법은 일견 기법의 서투름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세잔이 추구하고자 했던 회화 의 자율성의 문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세잔은 과거의 아카데믹한 재현기법을 재사용하지 않은 채, 대상물의 실제감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회화 각 부분의 상호관계 혹은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 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화면의 각부분을 인위적으로 조절함으로서 평면으로서의 화면 내의 조형적 질서를 이루어 내었다 1887년에 그린 [푸른 꽃병]에서 확인되는 색채의 투박함은 세잔느가 표현하고자 했던 화면 의 견고함을 유지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색채는 화면 속의 자율적인 기능을 발 휘하는데 이용되었다. 그의 색채는 대상물체가 지속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듯한 부동성을 나 타내는데, 푸른 꽃병과 테이블의 가라앉은 듯한 색조는 화면 위에 달라붙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세잔의 고향인 엑스의 생트 빅트와르산은 그가 평생을 두고 그려나간 중요한 모티브 중 하 나이다. 1905년의 [생트 빅트와르산]은 빅트와르산 풍경화의 마지막 단계에 그려진 것이다. 녹색과 청색의 굵고 짧은 터치로 이루어진 평면적인 화면이 강렬하면서 무게있게 펼쳐져 있다. 실 제적인 윤곽선은 뚜렷하지 않지만, 세잔느가 가지고 있었던 이 거대한 바위산에 대한 느낌 이 영원한 질서속에서 구현되고 있다. 세잔느가 인상주의를 미술관에 있는 옛 대가들의 작품들과 같이 지속적이며 견고한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우리는, 원근법과 단축법을 배제한 채로, 인상파의 분절된 터치 와 비교적 단순한 원색을 이용해 자연과 화면 내의 질서를 이룩한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폴 고갱(1848-1903)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 중 고호와 함께 인간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기울 인 화가였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늦은 나이에 거의 독학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서 영국의 소설가 섬머셋 모옴이 그의 삶을 소재로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엮어 낼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영위한 작가이다. 고갱은 인간의 내면 중 종교적인 것, 장식적인 것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기법면에서는 인상주의의 극복이라는 의미에서 원색의 면에 검은 테두리를 쌓아 구획주의를 추구했다. 또한 대담한 변형과 왜곡, 강렬한 원색의 사용 등으로 장식적 효과를 냈으며, 이 로서 화면의 평면화를 시도한다. 그는 남태평양의 한 섬인 타히티로 옮겨가면서 기독교와 원시적 토속 신앙의 결합이라는 특이한 예술 세계를 구축한다. 증권거래인의 직업을 그만두고 아마추어 취미 작가에서 본격적인 직업 화가의 길로 들어선 고갱은 1886년부터 90년에 걸친 5년간을 프랑스 지역인 브르타뉴에서 보내게 된다. 거기서 그는 신앙심이 두텁고 순박한 농민들의 단조롭고도 건실한 삶에 매료되어 그들을 주 제로 많은 그림을 그리게 된다. [황색의 그리스도]는 1889년에 그린 것으로서 영혼의 세계에 살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현 실 세계에서 신앙의 삶을 영위하는 여인들을 한 자리에 배치함으로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종합을 이루고 있다. 사실 고갱은 1880년대 후반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종합'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의미는 기법과 내용 양쪽 면에서 적용되는데, 기법면에는 인상주의의 세 세한 붓터치에 의한 '분석적'기법에 대응해 마치 스테인드 글래스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의 형태를 단면의 색채들의 집합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내용적 측면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한 화면에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황색의 그리스도]는 이 런 '종합주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갱은 브로타뉴 지방의 퐁 타벵이란 마을에서 사트르라는 젊은 농민 부부의 신세를 지게 된다. 그는 그들의 호의에 감사하는 의미로 미인으로 평판이 높았던 부인 안젤 사트르의 초상을 그렸다. 그러나 [아름다운 안젤]이란 제목의 이 작품은 당사자인 그 부인에게나 남편에게나 조금도 아름답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고갱이 가지고 온 그림을 보고 부인은 "끔찍한 그림!"이라고 소리쳤고, 남편은 크게 화를 내 어 고갱은 할 수 없이 그림을 되가져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갱의 눈에는 소박하고 인 정 많은 퐁 타벵의 시골 여인을 그의 솔직한 눈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녀는 전통 복장을 하 고 두 손을 얌전히 모은 채 정면을 향하고 있다. 그녀의 초상을 구획하는 원 밖에는 이국적인 조각과 벽지 같아 보이는 배경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구획주의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감성을 위해 화면을 임의적으로 구성하는 기법에서 현대미술의 선구적인 경우를 확인할 수 있다 1890년 고갱은 5년간의 브르타뉴 시기를 마치고 더욱 문명과 동떨어진 곳을 찾아 프랑스를 떠나게 된다. 그는 유럽사회의 세속적인 문명과 사회를 벗어나 어딘가 있을 때묻지 않은 순 수의 세계, 즉 원시의 세계를 꿈꾸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가 만족감을 가지고 정착하게 된 곳이 바로 남태평양의 타히티라는 섬이었다. 그는 1893년에서 95년사이에 한 차례 귀국했을 뿐 생애의 나머지를 열대 섬에서 보냈다. 그 결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의 예술 세계도 브르타뉴 시기와는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그것 은 바로 자연과 원주민의 토속신앙, 그리고 그들의 순수한 삶에 대한 그의 감흥이었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는 화면 왼쪽 아래 구석에 쓰여진 [IA ORANA MARIA]라는 말이 그 대로 1891년에 그린 이 그림의 제목이 되었다. 이 말은 타히티 섬의 마오리족의 말로 '아름다운 마리아'라는 수태 고지를 알리는 천사의 부름 소리라고 한다. 실제로 화면에는 안쪽에 있는 꽃나무 그늘에 천사의 모습이 보인다. 이 마리아와 예수의 머리 위에 후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종교화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종교화는 이제껏 서양미술 속에서 보아왔던 것과는 틀리다. 무엇보다도 무대가 화려한 열대 식물에 싸인 남태평양의 한 가운데 섬이며, 등장인물이 모 두 타히티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점은 고갱의 관심이 기독교적 테마와 원시세계의 풍의 밝고 건강한 색채에 동시에 있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적 사회에서 살던 고갱에게 원색적이고 자유분방한 타히티의 풍물은 신선한 충격이었 고, 그 결과 우리는 이 그림에서 유럽의 정신이 원색의 원시림에 뒤섞이는 것을 볼 수가 있 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일반적으로 고갱의 작품 중에서도 걸작 으로 인정되고 있는 이 그림은 1897년에 고갱이 두 번째 타히티에 체류 할 때 그린 것이다. 고갱은 이 작품으로 최후의 철학적 유언, 즉 자살을 기도하기 전의 자신의 예술 세계의 총 결산으로 삼을 작정으로 제작했다. 이 무렵 고갱은 건강이 점점 더 나빠지고 파리에서 자신 의 그림들이 푸대접을 받음으로써 결국 무일푼의 실의에 빠지게 된다. 비관 상태에 있던 고갱은 비장한 각오로 신들린 것처럼 이 작품을 서둘러 완성하게 된다. 오른쪽에 그려진 것은 여인들, 아이들, 개 및 봄의 상징이며 인생의 시작을 나타내고 있다. 중앙은 남자가 나무의 열매를 따려고 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다. 왼쪽에는 인간이 사 물을 안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비극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기술적으로 보아 이 작품은 고갱의 예술성이 절정에 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개성적 이며 톡특한 양식과 색채, 상징성이 완전히 조화되어 그가 가지고 있었던 영혼의 철학을 투 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빈센트 반 고호(1853-1890)는 강렬한 붓터치, 화려한 원색으로 그의 개인적인 감성을 표현 해 낸 표현주의자이다. 인상주의와 바르비종파의 밀레에게 영향을 받은 고호는 프랑스 남부 지방 아를르에서 밝고 원색적인 채색으로 전원 풍경을 그렸다. 그의 색은 인상주의에서 시 작해서 그 나름대로 발전한 것이지만 강렬한 붓터치는 그만의 생명력을 지니면서 고호의 독 자적인 예술 세계를 가능케 해주었다. 고호는 인상주의의 부르조아적이고 물질적인 표면주의에 머무를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그 가 예술을 인간 생애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를르에 있는 반 고호의 방]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고호가 1888년 아를르에 와서 고갱 과 함께 생활하며 제작 활동을 하던 해에 그린 작품이다. 고갱과의 공동생활은 얼마 못 가 고호의 정신병의 발작, 귀를 자르는 사건 등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지만, 그런 미래를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고호는 기대에 부푼 나날을 보내며 이 그림을 그린다. 화면 전체를 구성하는 엉성한 원근과 단축법의 효과가 어딘지 그림을 어색하게 하지만 밝은 원색의 생기 있는 붓질이 그만의 특유한 예술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고갱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새로 실내장식을 하기 위해 침실을 데생했다고 쓰고 있다. "실 내의 데생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평탄한 면을 만들면서 두텁게 칠한 붓을 크게 움직여 갈 뿐 나는 이들 여러가지 색으로 여기에 절대적인 평화를 표현하고 싶다." 반 고호는 1888년에 아를르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룰랭이란 우편배달부를 알게 되었다. 그는 그 후에 고호의 몇 안되는 가까운 친구가 되어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고호의 편지 속 에서도 자주 등장하게 된다. 8월초 편지에서 고호는 "나는 지금 어떤 모델을 그리고 있다. 그 사람은 집배원으로서 큰 얼굴에 턱수염을 기르고 있고 소크라테스를 많이 닮았다. 당기와 같은 열렬한 공화주의자이며, 보통 남자들과는 다른 흥미로움을 가진 사나이다."라고 그를 소개하고 있다. 1888년에 그린 [배달부 룰랭]은 그를 그린 작품이다. 고호는 인상파의 색채 기법과 일본화의 영향을 받아, 주로 아를르와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있던 2년 동안에 고도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후기 인상주의의 한 계열을 완성하게 된다. 프로방스의 햇빛을 받고 빛나는, 고호의 이 시기의 그림은 흡사 용트림하는 듯한 강렬한 운 동감을 지니고 있다. 1889년에 완성한 [별들이 반짝이는 밤]은 생 레미 정신병원의 병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밭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를 이해해 준 레이 의사가 있는 병원에서 그는 비교적 자유로운 투 병생활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많은 걸작들을 완성하게 된다. 이 그림은 생 레미 마을을 약간 높은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왼쪽 전경에 높이 솟아 있는 삼나무와 풍경 중앙에 있는 교회의 첨탑과의 대조가 화면 전체에 넓은 공간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 건너편에 멀리 보이는 언덕 위로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 달과 별들 은 거대하고 용솟음치는 빛을 발하면서 화면 전체의 비현실적인 환상을 제공하고 있다. 정 신병원에 갇혀 자신의 병을 원망하며 고호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굼실대는 밤바람과 각각의 빛을 어두운 하늘에 흩뿌리고 있는 별들의 모습에서 고호는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대고 있는 열정을 투과시키고 있다. 종말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던 당시의 고호가 생명을 향해 몸부림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정신병에 고통받는 화가가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이런 식으로 화폭에 쏟아 놓은 것이라고 평가해 왔지만, 어느 천문학자의 연구에 의해 화면 위에 그려진 달과 별들의 위치가 그 당시의 실제 천체의 구성과 비교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제대 로 자리잡고 있음이 밝혀졌다.
휴머니스트 아트(humanist art)
미국에서의 후머니스트 아트 주창자인 배리 슈와르츠는 (Barry Schwartz)기술과 인간 사이 에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는 모든 예술을, 인간 존재와 환경의 점 증하는 기계화에 동조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비휴머니즘적 예술과 휴머니즘적 예술로 구 분한다. 그는 휴머니스트 아트를 형이상학적인 것, 실존적인 것, 부조리한 것, 정치적인 것의 네 가지로 구별한다. 형이상학적 휴머니스트는 상징적인 효력을 가지는 작품을 창작한다. 그 는 관람자를 자품에 대한 해석으로 끌어들인다.(레너드 바스킨, 필립 에버굿, 조지 시걸). 실 존적 휴머니스트는 반응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관람자와 마주서는 이미지를 창출한다(듀안 핸 슨, 프란시스 베이컨, 존 브래트비). '부조리주의자들은 혐오- 호기심의 메커니즘을 채용한 다.(로버트 크럼, 짐 너트, 글래디스 니릇륚). 정치적인 후머니스트는 관람자가 가지는 억압 과 투쟁의 감정과 접촉하고자 한다(벤 샨, 듀안핸슨, 에드워드 키엔홀츠, 메이 스티븐스). 모든 구상예술이 휴머니스트 아트는 아니지만, 휴머니스트 아트는 추상에 반대되는 의미에 서 구상적이다. 슈와르츠는 사회에 대한 절망이나 환멸을 표현하는 예술 작품에 대한 체험 이 관람자의 사회적 의식을 개선할 것이라는 자신의 가정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낙관주의 는 거짓'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그는 예술의 변혁적 잠재력에 대한 뚜렷한 낙관적 믿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기술이 실제의 힘으로 간주되는 소련에서는, 예술에 있어서 휴머니즘의 사도는 블라디슬라 브 지멘코이다. 그는 예술의 휴머니즘적 본질 -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묘사하는 것- 을, 동 굴 벽화에서 시작되는 휴머니스트 아트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사회 주의 리얼리즘의 공식적인 소비에트 미학 원칙과 동일시한다. 지멘코가 예찬하는 작가들은 데이네카, 플라스토프, 이오간손, 이바노프, 질린스키 등이며, 그는 서구 아방가르드의 모든 선언들을 반 휴머니즘적이라고 비난하며, 미국의 휴머니스트 아트나 중국의 농민화도 무시 한다.
흉상(胸像)bust(영)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상반신을 다룬 조상(彫像). 흉상의 역사는 초상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후세계를 믿었던 이집트인들은 여러 선 명한 색을 사용해 죽은 사람의 흉상을 만들었지만 예술작품을 유기체로 본 고대 그리스인들 에게는 인체를 절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신체의 일부를 나타내는 흉 상은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그러다 헬레니즘시대에 와서 흉상이 다시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흉상은 눈먼 '호머'의 초상에서와 같이 이상화한 형태와 기원전 1세기 알렉산드 리아 예술에서와 같이 사실적인 형태가 공존한다. 로마시대에 흉상은 최성기를 맞아 공화정 초기부터 정교하고 다양한 창의적인 흉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초상미술을 금기시한 중세에 는 흉상이 거의 자취를 감추어 유골함에 값비싼 금속으로 성자들의 모습을 조각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르네상스 *,특히 15세기 피렌체의 예술가들은 매우 사실적인 것부터 형식에 치 우친 이상화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전의 흉상을 부활시켰다.16세기에는 로마 제정 후 기의 정교한 흉상을 모방했으며, 바로크 시대에는 새롭고 화려한 형태가 발전했다. 그후로는 형태상의 변화는 거의 없으나 신고전주의 시대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흉상을 제작했으나, 인물의 성격묘사에 치중해 전통적 형태에서 멀어졌다. 현대에는 학구적인 조각가들에 의해 흉상은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흑인미술(黑人美術) Negro Art (영)
아프리카의 흑인에 의한 원시 미술. 그 제작 지역은 아프리카 북부의 이슬람 문화권을 제외한 서부 및 중앙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하여 세네갈에서 차드에 이르는 지구, 콩고 지 구, 수단 지구로 크게 나누어진다. 나무, 상아, 청동, 철, 금, 은 등을 써서 만든 조각과 공예 가 주요한 것으로, 중심은 종교적, 주술적인 가면이나 인체 조각에 있다. 기학적 형태, 생명 감이 넘치는 변형 등이 19세기에 주목을 받은 이래 유럽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 다르다. 베닌에서는 16~17세기, 콩고에서는 17세기경 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제작 시기가 불명확한 것이 많다. 근대 미술은 이 흑인미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야수파는 원시적 데포르마숑을 배웠고, 표현주의는 신비적 요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피카소를 비롯 입체파에 끼친 흑인 미술의 영향이다. 특히 1906~09년의 피카소의 작품들을 '흑인미술시대 Periode negro' 로 구별하고 있을 정도이다. 피카소는 주로 흑인미술에 나타나는 볼륨의 해석에 의 한 기하학적 면의 구성, 논리적인 사고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논리 체계에 의한 물체의 파 악, 입체적인 단순화와 부분의 강조 등에서 힌트를 얻어 그것을 실제의 제작에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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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용어[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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