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 예술(Destructive Art)
폭력과 파괴라는 20세기의 특징적인 형상은 현대 예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60 년대 전반기엔 각국 출신의 여러 미술가들이 제2차 세계대잔 이래 인류가 행한 파괴를 유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파괴와 폭력을 창조의 방법으로 사용하여 새로운 형식을 발전시켰다. 이렇게하여 파괴 예술은 자족적인 하나의 미학으로 부상했다. 이 예술은 대게 공개적으로 진행했고 그래서 청중은 계속되는 파괴행위로 변형된 대상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변화 과정은 결과로 생기는 파편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로 간주되었다. 장 팅겔리는 스스로 폭파 되는 기계를 전시했고 토슈는 타자기를 때려 부수었으며 래담은 스콥(Skoob) 탑 (북(books) 의 철자를 거꾸로 한)을 만들어 폭파시켰다. 슈라이브는 낙화술을 이용해 불로 이미지를 그 렸다. 메츠거는 나이론 시트를 파괴시키는데 산을 이용했다. 바이락은 피와 동물의 시체를 사용한 거리의 이벤트로 주목을 받았다. 사실 대부분의 행위와 해프닝은 공격과 파괴적 행 위를 상당히 포함하고 있다. 1966년 런던에서 '예술에 있어서 파괴에 관한 심포지엄(Destruction in Arts Symposium)' 이 메츠거와 샤키의 준비로 개최되었다. 10개국에서 2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참석했고 심포 지엄 기간에 제시된 파괴예술의 실례들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언론과 대중 그리고 비평가 들의 열광과 방해를 함계 받았다. 주최측은 예술에서 파괴기법이 세계적인 운동일 뿐 아니 라 사회 현실과 밀접히 관련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인간의 공격성이 예술을 통해 순화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 폭력이 예술 형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8년 두 번째 심포지엄이 미국에서 개최되었다.
파노라마(panorama)
그리스 어의 'panhoran : 모두가 보인다는 뜻'에서 비롯된 말로 회전화 또는 전경화라고도 한다. 배경을 둥글게하여 원경을 그리고, 전경에는 인물이나 기타 다른 입체적 모형을 놓고 조명하여 도시, 전투, 역사적 장면 등의 전모를 제시, 현실감을 자아내게 한다. 바로크의 무 대 장치에서 출발하여 18세기 말 파리, 런던에서 실현되었고, 19세기 후반에 크게 유행되었 으나 속임수적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흥미가 떨어지자,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쇠퇴하게 되었 다.
파스킨(Pascin)-(1885~1930)
회색조의 부드러운 색으로 인물과 정물을 많이 그렸다. 주요 작품 : 녹색 모자를 쓴 누드 등
파스텔화(pastel painting)
파스텔로 그린 그림. 파스텔은 빛이 있는 가루 원료를 반죽하여 굳힌 것으로, 옛날에는 석고 또는 백점토를 원료로 써 왔으나 지금은 물에 거른 탈산석회로 만든다. 이무런 매체나 도구 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스텔화를 그리는 방법은 다른 그림과 구분된다. 예를 들어 유화는 그려진 색채가 그려지기 전의 건조한 색채와 차이를 보이지만 파스텔화에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파스텔 화가는 사용하는 색채에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파스텔화는 착색이 안정적이지 못한 단점이 있으며, 가벼운 접촉 이나 변화에 의해서도 손상되기 쉽다. 정착제를 써서 이런 단점을 극복할 수도 있지만, 파스 텔 화의 틀질인 표며늬 질감을 훼손시키고 색깔의 광채를 감소시킬 우려가 있다. 유리를 씌 우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최선의 보호책이다. 일반적인 바탕 재료는 무색지가 쓰인다. 파스텔의 색조는 프레스코나 과슈에 가깝지만, 광채를 발하는 분말 표면은 파스텔 특유의 속성이다. 파스텔화는 15세기 말부터 분필 그림의 활용에서 유래하였다. 모든 색깔을 사용하는 파스텔 화는 풍경화가인 동시에 동판화가였던 티일러와 마담 베르네렝 등이 18세기 전반에 발명했 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18세기 말의 시몽 랑타라는 파스테를 풍경화에 최초로 사용했 던 미술가의 한 사람이었다. 19세기 전반에 파스텔화는 퇴조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인상주의 와 더불어 부활하여 대중화되었고, 오늘날에는 파스텔화의 다양한 기법이 개발되고 있다. 그 어진 한 획마다 나타나는 효과와 밋밋한 색깔의 부위를 감싸는 윤곽 그리고 색깔들이 뒤섞 이지 않고 나란히 병치되는 개방적인 기법의 가치는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판화(engraving, print)
나무, 금속, 돌 등의 면에 형상을 그려 판을 만든 다음, 거기에 잉크나 물감 등을 칠해 종이 나 천 따위에 인쇄하는 것. 모토나프 혹은 우니카라 불려지던, 한 점밖에 남길 수 없었던 초 기(주로 15세기)의 예를 예외로 한다면, 판화란 우선 복제의 예술이고 또한 기술이다. 판화 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중 트럼프에서 나왔다고 하는 설이 일반적이 다. 실제로 뒤러 이전의 판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무명작가의 한 사람이 트럼프 의 도안을 디자인 하고 그것을 동판화로 인쇄함으로써 '트럼프의 화가'라고 불려졌던 것도 초기 판화의 민중성을 말해주고 있다. 판화는 또 조각에 있어서 소형 브론즈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예술작품의 복제 수단으로서도 널리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런 종류의 판화는 단지 감상용이 아니고 화가의 화본으로서도 널리 이용되었다. 판화의 역사를 고찰해 보면, 초기 판화는 정치적·종교적 선전의 수단으로서도 중요한 역할 을 다하고 있다. 물론 활자도 유효한 수단이었으나 당시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의 민중에 호 소하는 데는 도상이 문자보다도 한층 유효한 수단이었다. 이런 류의 판화 중에는 예술적으 로 뛰어난 것도 있으나, 대개 문화사적 내지 사회사적인 기록또는 자료로서 가치있는 것이 많다. 이와같이 특히 사진의 발명 및 보급 이전의 파노하에는 예술가 자신의 자유로운 발상 에서 제작된 것도 다수 있으나 순예술적, 미적 목적 이외의, 이의적, 종속적인 복제 수단으 로서 다뤄진 것도 적지 않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판화 일반을, 회화 등에 비해 일종 의 예술 보급판, 염가판으로 보는 다소 소극적인 평가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근대 내지 현 대에 있어서 이른바 '오리지널 판화'의 개념은 '오리지널리티'를 중시하는 근대의 일반적인 동향에 호응함과 동시에, 기존의 판화가 때로 감수해 왔던 부차적, 타율적인 성격에 대한 도 전이기도 하고 또 복제의 역할이 사진에 의해 대체된 상황에서는 필연적인 탈출로일 수 있 다. 판화의 제작 과정에는 일반적으로 도안을 디자인하는 일, 그것을 판으로 새기는 일, 그리고 인쇄하는 일의 3단계가 있고, 그것에 대응하여 예술가도 회화사, 조각사, 인쇄사로 나누어지 는 수가 있는데, 오늘날의 판화가 '오리지널'한 것으로 취급되기 위해서는 제1단계와 제2단 계가 동일한 예술가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소위 화가 겸 판화가라는 'Peintregraveur'의 개 념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오리지널 판화는 위의 제1단계, 제2단계는 물론 제3단계, 즉 작가 가 인쇄에 입회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수가 많다. 오늘날의 판화에서 서명이 하나의 가치 기 준으로서 중시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도 이렇게 예술가 자신이 판화 제작의 전 과정에 참 가한다면, 만들어지는 판화의 수도 한정된다. 이런 종류의 소위 한정판의 경우는 판화의 어 딘가에 그 수를 분수로 기록하는 수가 많다. 이를테면 18/50이라면 인쇄한 장수가 50점이고 그 중에서 18번셉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범위내의 것이라면 '오리지널'이 몇점이라 도 존재하는 브론즈 조각의 경우처럼 모두 '오리지널'로 본다. 또 이러한 한정판의 경우에는 '오리지널'이라는 점에서 질적으로 커다란 차이는 없다. 판화 중에서도 동판화는 전문적인 판화 출판사나 출판업자가 간행하는 것이 근대 이래의 추 세이다. 근대의 유명한 판화 출판사로는 에칭 전문의 로지에 라크리에르, 드가, 툴루즈 로트 랙. 뭉크 등이 애용하던 석판 인쇄의 오귀스트 크로, 채색 석판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한 페레(이상은 프랑스), 미국에는 석판화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나다니엘 캐리어, 또 제2차 세계대전 후 로스엔젤레스에서 창설된 태머린드 공방 등을 들 수 있다. 19세기 중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판화의 동향은 회화에 있어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하 고 혁신적이었다. 특히 사진의 발명과 그 보급은 판화의 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즉, 사진 이전의 판화의 커다란 역할은 원래 한 점밖에 없는 유명한 예술작품이나 기념비를 복제해서 유포하는데 있었다. 이를테면 미켈란젤로나 루벤스의 양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 던 것도 판화의 공적이었다. 사진의 발명은 복제 수단으로서의 판화에 종언을 고한 것이었 다. 화가 폴 들라로시는 사진술의 탄생을 맞아'오늘로서 회화는 죽었다'고 탄식했는데, 이러 한 상황은 판화나 회화는 기계적인 사실성의 추구라하는 점에서는 사진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화가는 판화가에게 가르쳐주어, 새로운 국면의 타개를 시사했다. 이것을 게계로 판화는 복제의 수단에서 오리지널한 것으로 전환했다. 휘슬러, 고갱, 툴르즈 로트렉, 보나르, 뭉크 등 세기말에 활약한 화가들의 목판화나 석판화는 삽화적, 설명적인 성격이 강했던 종래의 판화의 틀을 대담히 타파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칸딘스키, 놀데, 키르히너 등 독일 의 표현주의 작가들은 특히 목판화에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구하였고, 초기의 피카소, 브라크, 비용 등은 입체파 적인 시점을 그대로 판화의 세계에 도입했다. 현대 판화의 오리지널리티가 가장 단적으로 나타난 것은 서적의 삽화로서 제작된 판화로, 특히 화상 앙브르와즈 볼라르가 피카소, 루오, 샤갈 등에 의뢰하여 출판한 유명한 문학작품 의 삽화가 그 좋은 예이다. 이 경우 텍스트는 예술가에게 있어서의 단지 출발점에 지나지 않고, 그 이후는 오로지 예술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맡겨지기 때문에, 완성된 작품은 결코 텍스트에 정확히 대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특히 삽화 판화의 황금대였던 프랑스 18 세기의 그것과 비교하면 명확한 것으로 텍스트와 삽화와의 정확한 대응은 현대 작품에서도 거의 고려되고 있지 않고 있다. 또 양식면뿐만이 아니고, 이를테면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1930년대에 미국에 전판된 것으로 생각되는 실크 스크린의 유행이나, 다색 에칭, 기타 많은 시도에 의해 미국이나 유럽의 각국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준 헤이터를 중심으로 한 '아틀 리에 17'의 활동, 또 많은 예술가가 시도한 동일한 작품에 있어서의 신구 여러 가지 기법의 병용 등도 종래의 우수한 '복제적'인 판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새로운 오리지널리 티 판화이다.
팝 아트
'팝'이라는 용어는 광법위한 영역에 걸친 다양한 예술활동들을 망라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 이었다. 이들 예술형태들이 가진 공통점은 매스 미디어의 형상과 때로는 기법까지도 이용한다는 점 이었다. 새로운 경향을 지칭하기 위하여 다른 용어들도 많이 제시되었다. '신통속주의(New Vulgariamism)'와 같은 명칭은 이에 대한 미국 비평가들의 혐오감을 표 현하는 것이었고 '신사실주의(New Realism)'나 '신다다주의(Neo-Dadaism)'와 같은 용어들은 이것의 미술사 와의 관련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팝'이라는 명칭으로 낙착이 되었던 것은 이 용어가 대중매체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대중매체들은 다른 어느 것을 위해서도 협동한 적이 없었으나. 팝 아트를 찬양하기 위해서 는 결속 되었다. 그것은 이 미술셩향이 다소 충격적이면서도 재미있기 때문이었으며.또한 대중매체 자에가 이같은 예술운동에 대한 집합적인 서구로 보여졌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특히 대중음악의 가수나 그룹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영역솨 관련을 맺게 되었느느데 대중음 악가들이 이례적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성공하였던 것은 1960년대의 괄목할만한 현상 이었다. 영국에서 제작된 최초의 팝 회화 중 몇몇은 이같은 속성에 들어맞았다. 그 그림들에서는 영화배우와 대중적 스타들. 그리고 여타의 대중적 영웅들이 찬미되었으며 .화가들이 (대부분이 20세 초반이었던)젊은 대중층과 그들의 열정에 노골적으로 보조를 맡추 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었다. 팝 아트(Pop Art) 196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구상 회화의 한 경향. '팝(pop)' 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포퓰러(popular)' 의 약자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즉 통속적인 이미지, 다시 말해서 일상 생활에 범람하는 기성의 이미지에서 제재 를 취했던 이 경향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팝 아트가 급속히 일반화된 것은 1962년 뉴욕의 제니스 화랑에서 열렸던 '뉴 리얼리스트 전'이후의 일이나, 영국에서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그 전조가 된 예술활동이 있어왔다. 즉 1950년대 초부터 리처드 해밀튼, 에두 아르도 파올로치 등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서 대중 사회의 문화, 예술, 매스 미디어와 같은 무멭들을 토론하고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팝 아트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 말을 처음 으로 사용한 사람은 영국의 비평가 로렌쳾, 알로웨이였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이 명칭은 이 미 1950년대 초에 런던의 소그룹 예술가들 사이에서 쓰여왔다는 것이다. 영국의 팝 아트는 발생 초기부터 사회 비판의 의도를 뚜렷이 갖고 있었다. 이 운동은 구태의연한 사회 질서에 대한 비판으로서 사회와 예술을 접목시키고자 했던 젊은 작가들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따라 서 알로웨이가 영국에 있어서의 '대중문화'라고 한 것은 미국과는 다른, 문화적 계급을 의식 한 것이었다. 이 샔문에 영국의 팝 아트에서 나타나고 있는 아이러니컬한 성격이나 표현의 직접성 등에서는 전통에 대한 다다이즘적인 반응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팝 아트는 1950년대 초기의 미국 화단을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의 애매하고 환영적인 형태와 주관적인 미학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팝 아트는 특히 미국의 전위적인 작곡가 존 케이지의, 지극히 평범한 것조차도 미적·예술적인 가치가 있다는 사상 에 고무된 바 크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미국 미술이 유럽으로부터 수용한 입체파 와 초현실주의의 원리는 복잡하면서도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것이었는데, 1960년대의 문화 가 안정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추진력은 추상주의와 사실주의라는 양극으로 분리된다.미국 의 팝 아트는 그 한 극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미국의 상징되는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 한 낙관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다. 원래 사실주의란 좋든 나쁘든 간에 문화 현상을 그대로 전사하는 것으로, 그 사회 속에서 자연히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국 팝 아트의 선배 작가 로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를 들 수 있다. 특히 라우센버그는 일상생활에서 흔 히 발견되는 물체, 이를테면 코카콜라병, 자동차의 타이어, 침대 등을 이용하여 이른바 컴바 인 페인팅을 창안해 냄으로써 팝 아트가 성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미국의 팝 아트 는 흔히 발견되는 일상의 이미지나 물체를 미술 작품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 다. 일상적으로 흘러 넘치는 영상 또는 물체를 이용한다는 것 자체는 반 미학적이고, 다다적 인 사고방식이다. 다다이즘과 기본적으로 다른 것은 팝 아트가 세련된 고도의 기술에 의해 '일상'을 미술의영역으로 또는 사회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 있다. 또 화면에 나타 난 이미지는 구상적이지만 회화적 사고 그 자체는 추상성이 높다. 팝 아트의 작가들은 일상 의 이미지를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기호나 기호체계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스타인, 클래스 올덴버그 등은 사회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 - 이를테면 마릴린 몬로의 얼굴,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 세븐 업의 트레이드 마크, 그리고 디크 트레이 시의 연속 만화 따위 -을 작품 속에 도입함으로써 기호 체계와 그들 자신의 테마를 겹쳐서 표현하고 있다. 미국의 팝 아트는 뉴욕 뿐만 아니라 서부에서도 독자적인 전개를 보여, 뉴욕 팝과 캘리포니아 팝의 2대 조류를 이룬다. 에드워드 키엔 홀츠, 멜 라모스, 에드워드 러셔 등으로 대표되는 캘리포니아 팝 아트는 뉴욕 팝보다 생경한 표현이 적고 상업적인 테크닉의 재현에 강조를 두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패러디(parody)
패러디에 관하여 1. 패러디의 역사성 패러디는 그것의 대상이 되는 원본이 있다. 그래서 패러디 된 작품은 그것의 원본을 끊임 없이 상기시켜주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회귀의 복고적인 성격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패러디 는 원본에 대하여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새로운 시각을 지니기 때문에 즉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새롭다는 단어인데 이 의미는 원본을 뛰어 넘어 무언가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패러디는 이처럼 원본으로의 회귀성과 원본을 뛰어넘으려는 자체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패러독스라고 하는데 패러독스란 자기자신을 욕되게 하 는 것 즉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패러디를 패러독스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원본에 대한 회귀성의 강도가 진보의 강도보다 훨씬 약하기 때문에 모순의 개념보다는 진보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패러디라는 말은 원래 '참조'라는 뜻인데, 참조라는 말은 그 자체로 진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뜻에서 보자면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듯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의 연속선상에 있으 며, 나름대로의 아방가르드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아방가르드의 가장 큰 핵심은 역사를 진 보로 보고 있으며, 패러디 또한 역사를 진보로 보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모더니스트들 이 주장하는 아방가르드는 지나온 역사들을 '참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모더니즘의 패러독스이다) 아방가르 드는 시간을 방향을 가진 하나의 직선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가장 큰 모순은 시간이 한 방향으로 직선적으로 진행하는 거라면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점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즉 역사란 어떠한 목적점을 향하여 진행되는 것일까? 즉 인류의 최종적인 진화의 목표는 무엇일까? 라는 근본적인 철학적 물음을 상실 하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모더니즘시대의 사람들은 역사성 속에서 최종 목적점을 찾으 려는 철학적인 노력을 포기한 채 빨리만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나침반도 없이 사막 한가 운데서 질주하다가 방향도 없이 해매게 된 꼴이다. 목적점이 없는 일직선의 시간적인 사고는 결국 과연 역사란 진보인가? 라는 회의적인 사고 를 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역사의 목적점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에 목적점이 있다는 사고는 근본적으로 영혼주의적이며, 이것을 목적론적인 사 고라고 한다. 반대로 역사에 어떤 목적점이 없다는 사고는 인간은 기계조직에 불과하다는 기계론적인 사고이다. 뉴우톤과 데카르트,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이 기계론적 사 고의 사람들의 생각에 의하여 인간의 삶에서 삶의 목적을 빼앗아 버린다. 1960년대를 기점으로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직선적인 시간관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다.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문명타파적인 히피운동은 인도의 철학이나, 동양의 불교 ,, 도교, 유교 등에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동양적인 원적인 시간관에 커다란 영향을 받 게된다. 동양에서는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등으로 60년마다 다시 갑자년으로 돌아오는 근본적으로 원적인 시간관을 가지고있었다. 불교의 원이나, 도교적인 세계관 역시 원적인 시 간관을 잘 말해주고, 주역의 상하권으로 나눈점이나 마지막' 화수미제'괘에서 보듯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뜻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원적인 시간관을 보여준다. 자동차의 바퀴는 원운동을 하고있는데, 자동차는 직선운동을 한다. 만약 어항에서 헤험치는 물고기를 두 대의 무비 카메라로 각각 정면과 측면에서 촬영을 하고 각각의 모니터에 방영 한다면 마치 두 마리의 각기 다른 물고기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최근 사람들은 시간을 좀더 먼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시간이란원적인 성격과 직선적 인 성격을 모두 갖춘 나선형을 그리고있다 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패러디란 근본적으로 이러한 나선형의 시간관에 근거한 것이다. 즉 끊임없이 과거의 참조 를 하고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앞으로 진행하는 시간이다. 여기에 시간의 방향성이 가진 목적 점에 대하여 신중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가 가진 가장 큰 특 징은 속도의 문제에 있었지만, 포스트모던의 중점은 '무엇'이라는 목적성에 있는 것이다. 2. 패러디의 호환성 인류의 삶은 한마디로 말하면 패러디의 역사이다. 어제의 삶을 패러디하지 않고서 어떻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어제까지 내가 알고 배운 컴퓨터에 대한 지식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나는 오늘컴퓨터의 자판하나도 두드리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삶은 처음부터 패러 디 자체인 것이다. 미술이란 처음시작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자연을 모방했음이 틀림없다. 즉 자연이라는 원본 이 있으며 이 원본을 참조하여 그린 것이다. 따라서 그림이란 처음부터 자연을 참조한 패 러디인 것이다. 모더니즘의 작가들은 끊임없이 '참조'라는 단어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보여왔 다. 왜냐하면 그들의 창조라는 단어는 '참조'라는 의미와는 반대적인 느낌이 강했고 또한, 참조는 끊임없이 뒤를 돌아다보게 하는 속성 때문에 앞으로 빨리 속도감있게 달려야하는 그 들로서는 참조라는 '패러디'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분명해졌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끊임없이 '참조'되어 생명력을 지니고 발달되어 온 것이다. 지 구상의 모든 문화들은 서로 다른 문화들을 '참조'한다. 문화라는 것은 그것자체가 패러디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공통적인 원본을 가지고 있다. 패러디의 속성상 현재의 문 화들은 끊임없이 원본에 대한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만약 마네의 올랭피아가 티치아노의 그림을 패러디한 사실이 알려만 졌더라도 사람들은 마 네의 생각을 전혀 의심할 필요도 없이 공감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의 삶이 서로 간의 의사소통에서 거의 문제가 없는 것은 바로 패러디의 기능 때문이기도 하다. 문화나 문명의 발달은 패러디가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집, 가구, 자동 차, 그 밖의 모든 것들은 구석기 이전의 역사들로부터 끊임없이 패러디 되어온 것들이다. 이러한 오랜 시간동안의 패러디 때문에 문화는 상호 호환성을 가지게 된다. 현대 미술의릐 가장 큰 문제는 대중과의 대화가 단절되어있다는 것이다. 작가와 작가 작가와 평론가들 사 이에도 진정한 정보의 전달이 막혀있다. 이것은 그 동안의 미술이 적극적인 패러디를 통하 여 발전되어오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3. 패러디의 과정성 패러디는 분명 원본을 참조한다. 모방하지는 않는다. 모방이란 가치의 문제가 없는 것을 말 한다. 패러디는 근본적으로 가치에 대한 탐구이다. 따라서 시대가 바뀌면 시대정신에 의하여 가치가 바뀌게 된다. 패러디 된 작품은 다른시대 또는 다른사람에 의하여 다시원본으로의 역할을 하고 패러디 된다. 따라서 패러디 된 작품은 과거와 미래사이의 역사성 가운데에 존 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패러디의 현재란 과거와 미래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발생하여 미래로 성장해나가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패러디는 그 과정성의 특징 으로 인하여 하나의 완결점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분명 패러디는 그 가치에 대한 연구에 의하여 시간의 목적점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필수로 하고 있지만 , 하나의 작품이 그 결 론을 말하고있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패러디는 끊임없이 연속적이고 시간적으로 개방 되어있으며, 동시에 공간적으로 개방되어있다. 하나의 작품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세계속에서 상호 택스트적으로 연결 되어있으며, 끊임없이 참조하고 참조되어진다. 그래서 작품은 한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라 시 대상황의 전 인류가 공동으로 창작하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서명이란 그 작품을 누군가의 창작에 대한 결과라는 의미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까지 작품에 대한 서명 그 자체의 패러디인 것이다. 4. 패러디의 긍정성 흔히들 동양의 노자나 불교는 현실이나 존재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대긍정에 이르는 방법 을 사용하고있다고 알고있으나, 이는 전혀 잘못된 이해이다. 불교는 티벳쪽으로 전파된 밀교 라는 형태 등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며, 기존의 불교가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대긍 정에 이르는 길이라면 밀교는 긍정과 긍정을 통한 대긍정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탄드라 불교등에서는 육체적인 섹스 등이 가장 중요한 수행방법이었다. 부처는 긍정과 부정의 두가 지 수행법을 동시에 설파하였던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 첫장에서 이름이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라고 말하였는데, 또한 이름이 있 는 것과 이름이 없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을 현이라고 한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데아와 현상계가 동일한 것이며, 존재에 대한 긍정 또한 존재에 대한 부정과 마찬가 지로 진리에 대한 접근법이라고 말한다.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 정신이란 부정성을 근거로 한다. 앞선 역사에 대한 부정성이야 말 로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더니스트들은 개인을 타인으로부터 또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영혼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보아왔으며, 이러한 개인의 독자성을 표현하는 것 이야말로 미술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러한 개인이야말로 역사 속에서 패러디의 산물인 것 이다. 따라서 화가들은 자신을 실존하게 해주는 바로 자신의 역사성을 부정함으로해서 결국 자신의 실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역사부정의 정신이야말 로 그들이 가장 표현하려고 했던 개인의 주체성을 화면 속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사실 모더니즘의 역사는 개인의 정체성을 찾고 드러내려는 시도였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개 성과 인간성은 사라져 버리고 그가 만든 껍데기의 상표들인 형식만이 존재하게 된다. 아방 가르드 속에 개인의 정체성 뿐 아니라 어떠한 인간의 그림자조차도 부정되고 사라지게하는 커다란 패러독스를 만든다. 패러디의 가장 큰 특징은 참조대상에 대한 긍정성이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긍정이야말로 자기자신에 대한 긍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긍정성, 역사에 대한 긍정성은 개 인의 자아에 대한 생각을 독립적이고 패쇄되고 명확히 구별된 개체로서의 개인에서, 개방적 이고 타인과 상호교환적이고, 모든 존재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긍정은 자기자신에 대한 긍정이며, 모든 부정성 자체를 포함하는 긍정 이다. 따라서 패러디가 원본에 대한 부정의 정신이 아니라 긍정의 정신으로 찬미를 하고있 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러디는 원본을 참조하여 발전시켜나가는 점에 있어서는 아방가르드의 부정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부정성마져도 긍정하는 대긍정의 자세야 말로 패러디의 자세이다
퍼포먼스(perormance)
실제의 관중 앞에서 예정된 코스를 '실행' 한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하는 다양한 행위 양식 을 포괄하는 용어. 퍼포먼스는 국제적이면서, 각각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기 샔문에 다른 이 름으로 불리며 지역적인 문화 특성 때문에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 액션 페인팅, 신체미술, 공동체 미술, 해프닝, 과정미술, 거리미술과도 교류될 수 있는 미술 형태이다. 민속 미술이나 샤머니즘, 어린이들의 놀이, 종족 관습과도 유사성이 있다. 미술에 있어서는 회화나 조각 등 의 작품에 의하지 않고 미술가의 육체적 행동이나 행위에 의해서 어떤 조형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금세기 들어 자주 전위예술의 최전선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후 존 케이지를 음악 감독으로하여 결성된 머그 커닝햄 무용단의 영향과 액션 페인팅 이래 미술에서 공연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되면서 음악, 문학, 조형예술, 연극 등 여 러 장르를 포함하는 일종의 총합예술을 지향하는 표현 수단으로서 가장 넓게 사용된 개념이 다.
펑크 아트(Funk Art)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났던 미국 회화의 한 경향. 펑크는 속어로 보잘 것 없는 가치가 없는 사람, 젊은 불량배, 애송이, 동성연애자, 농담, 허튼 소리 등의 의미가 있다. 1967년 봄, 윌리 엄 사이츠가 캘리포니아 대학 부속 미술관에서 '펑크 아트'라는 명칭의 전시회를 연 이래 부각되었다. 여기에 출품된 작품들은 주로 입체작품으로, 구부러지고 이상한 형태의 것들이 었는데, 대부분이 여러 가지 색으로 채색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펑크 아트는 이미 1950년대부터 일부 작가들 간에 논의가 되어 왔다. 즉 그들은 뜨겁고 물결치는 듯한 재즈곡 을 지칭하는 펑키(funky)라는 용어를 빌어다가,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한 경멸의 의미로 외 설적인 명칭을 붙였던 것인데, 펑크 아트는 본질적으로는 앗상블라주의 예술이었던 펑키 아 트에서 자연적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1960년대의 대부분의 미술 동향이 '차가운' 경향을 띠 었던 것에 반해, 펑크 아트는 재료에 있어서는 반기능적이며 뜨겁고, 미학에서는 반 지성적, 반형식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 관심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있었지만 그러나 그 인간상은 뒤집혀진 인간이며, 통속적이며 내장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케네드 프라이스, 부르스 코너, 로버트 허드슨 등이 있다.
페루지노 (Perugino,1450~1523?)
이탈리아의 화가. 치타 델레 피에베에서 태어났다. 1481년 교황 시크스토스 4세에게 초대되어 보티첼리·길란다이오 등과 함께 바티칸 궁전 시 스티나 예배당 벽화 장식에 참여하였다. 그 뒤 15세기 말의 약 10년간이전성기로서, 감미롭고 감상적인 분위기에 단순화한 인상의 표현, 좌우 대칭적 구도, 청징한 분위기가 넘치는 풍경 묘사 등이 그의 독특한 화풍이며, 그 것들은 제자인 라파엘로에게 뚜렷이 계승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그리스도의 책형〉 〈성 베르나르도의 환상〉 〈그리스도 강가〉 〈아폴 론과 마르슈아스〉 〈피에타〉 등이 있다.
페미니스트 아트(Feminist Art)
여성 미술. 1960년대 후반부터 여성 예술가들이 종래의 예술을 남성의 시각에서 본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여성의 감성과 시각으로 새롭게 바라보고 실천한 예술을 말한다. 여성 참정권론자들은 여성의 해방을 당연 목표로 했으나 이후 여성운동은 사회·문화적 부분까지 포함하는 등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페미니스트 비평가와 역사가들은 대부분의 여성들로부터 예술가가 될 기회를 박탈하는 차별적인 문화제도를 지적하게 되었다. 수백년 간 유럽의 대부분의 여성은 예술가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설사 그런 생각을 가졌어도 필요한 교육을 받고 남성과 동등한 조건하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여 판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 다. 그래서 여성이 시각 문화에 기여한 증거를 이젤 그림보다도 덜 전통적인 영역, 즉 북미 의 누비이불이나 나바호 담요, 사진 등에서 주의해 살펴봐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있었다. 문 화사적으로 여성이 얼마나 기여했는가는 여성의 예술을 하나의 전통으로 확립해야 될 필요 성 때문에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에게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페미니스트 아트는 제도의 성적 인 편견을 공격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여성들은 이를 수용하여 현 제도를 비 판하고 보다 나은 환경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 제작을 한다. 게다가 역사적인 선구자들은 특 별히 여성의 기능이 부활해야 함을 주장했고 페미니스트 예술가들도 여성적인 특성이나 가 정 생활과 같은 경험을 작품의 기반으로 삼도록 고무시켰다. 20세기 초에 더욱 많은 여성 예술가, 예를 들면, 타우버, 아르프, 오키프, 헤프워드 등이 나 타났고, 그 뒤를 이어 젊은 세대인 크릿, 마리솔, 프랑켄탈로, 하티칸, 릴리 등이 1950년대에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누구도 작품에서 의식적인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 다만 여성적인 속성이 훌륭한 예술을 생산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한도내에서 성적으로 중성 이라고 간주될 정도의 권리만을 획득했다고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여성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상황이 아주 달라진다. 여성 예술가들의 운동은 여성 해 방 운동과 뉴욕에서 일어난 예술가들의 저항운동이라는 두 개의 급진적인 모임이 결합되면 서 가속화됐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덧붙이고 현존하는 예술구조의 불공정성을 드러냄으로써 페미니스트 아트의 기반을 다졌다. 1971년에는 캘리포 니아 미술 대학 등에서 페미니스트 아트 강좌가 생기고, 1972년에 여성작가 회의가 개최되 었볾. 그 이후로 여러 그룹들이 협조와 공동 작업, 전시회 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79 년에는 페미니스트 아트 인스티튜트가 여성의 손으로 결성되었다. 또 같은 해 페미니스트 아트의 기수로 불리는 쥬디 시카고가 이 주장을 상징하는 <더 디너 파티>를 발표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예술은 순전히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이 아니라 평등주의자와
포름(form)
형, 형식, 형태 등 때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미술 용어로서의 포름은 색깔에 대한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용데 대한 '포름'이라는 말과는 일단 구별되어야만 한다. 그 러나 실제로는 이들 두가지의 뜻이 뒤섞여 쓰이고 있어 애매한 느낌이 있다. 미술에서의 포 름이란 색깔과 함꼐 대상의 시각적 경험을 형성하는 감성적 요소의 기본 개념이므로 이것이 없으면 대상의 시각 체험은 불가능하게 된다. 포름이란 일반적으로 말하면 대상에 있어서 공간의 자기 한정이라 할 수 있는데, 반드시 윤곽이 있는 시공간의 추상적인 한계를 가리키 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공간 체험의 전체적인 충실상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공간 체험의 구성에 미치는 주요한 감성의 양상에 따라, 때로는 보다 많이 시각적으로, 혹은 촉각 적으로 이러한 감각적인 측면 이외에 관념적인 측면도 첨가되므로 내용이니 형식이니 하는 말의 한계가 애매해 진다. 또 인상주의 이후의 근대 회화에 있어서의 포름이란 관념은 색과 완전히 떨어져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반대로 색의 관념에는 포름이란 관념이 반드시 결합되 어 있다. 색면에 의한 공간 구성이 가능한 것은 그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포스터(poster)
전달할 내용이 일정한 크기의 지면이나 천 등에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표현하는 선전광고 매체. 포스터란 명칭은 기둥을 뜻하는 '포스트'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 기둥에 붙여 표시 했던 사실에서 이런 호칭이 나왔다. 15세기 중기의 인쇄 기술의 보급과 함꼐 일반화되었으 나, 19세기부터 급속히 발달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860년대에 대형 인 쇄기가 발명되자 포스터의 크기는 급속히 확대되어 소위 포스터 시대가 시작된다. 이 개막 시대에 특히 포스터의 디자이너로서 활약한 사람은 프랑스의 쥘 세레였다. 그는 독특한 기 법으로 포스터를 그려, 그의 스타일은 그 후 포스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포스터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쥘 세레와 함계 많은 화가들이 포스터에 손을 댄 것이다. 그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은 툴루즈 로트렉으로, 그는 거의 30여점의 포스터를 남 겼다. 툴루즈 로트렉과 함꼐 활약했던 테오필 알렉상드르 스탱랑, 알퐁스 뮈샤 등도 초기 포 스터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포스터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즉 '문자가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이란 성격에서 포스터 전체의 통일적인 시각적 효과를 자 각한다는 성격이 부각되었다. 또 각국에서는 포스터의 제작량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그 내용 도 새로운 회화의 동향이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다양해졌다. 또 포스터에 사진이 이용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혁명 후 소련에서 일어난 구성주의에 의해 개발된 포토 콜라주, 포토 몽타 주와 같은 기법은 포스터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또한 형태의 단순화, 색채가 갖는 효과의 탐구라는 점에서 바우하우스에서 만든 포스터는 실험적인 것이 많았으나, 여기 에서 개척된 새로운 시각 언어는 포스터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포스터는 이러한 여러 가지 수법이 도입되어 매우 다양해졌는데, 특히 프랑스의 카 상드르는 격조높은 포스터를 많이 그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정치 포스터가 중심이 되 었으나, 전후에 포스터는 다시 전전 이상의 활기를 보였다. 그러나 전후의 세계 포스터계의 움직임을 개괄한다는 것은 극히 곤란한 일이나, 여기에서 몇 가지 특색있는 현상만을 열거 한다면 우선'비쥬얼 스캔들'로 클로우즈업 된 프랑스의 레이몽 사비냑의 유머에 넘치는 포 스터를 볼 수 있다. 사비냑은 포스터가 웃음을 유발한다는 것을 실증시킨 점에서 특히 큰 공적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위트와 유머는 전후 포스터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요소로서, 이런 경향은 넓은 의미에서 초현실주의의 기발한 이미지에서 촉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벤 샨에 의한 선묘에 기초를 둔 독특힌 포스터가 제작되 었으나, 전후는 시장 조사를 근거로 한 광고의 합목적성이 강조되어 포스터도 분업을 토대 로 한 아트 디렉터 시스팀을 획립했다. 여기에서는 개인으로서의 포스터에 마지막 손질을 하는 아트 디렉터로서의 디자이너 역할이 중시되는 것이다. 그 결과 포스터는 광고의 한 분 야로서 상대화되어 보다 효용이 높은 광고 매체, 이를테면 텔리비전의 상업광고 등에 관심 이 높아지게 되었다. 한편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포스터의 사회적 의미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포스터가 광고·선전의 매체로서 게시된 다음,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회화와 같이 수집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런 현상에는 양면에 있어서, 포스터가 회화에 접근함과 동시에 회화도 또한 표현 방법이 다양해져서 드디어는 1950∼60년대의 팝 아트에서 보여지듯 광고 매체를 주제로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도 무시될 수는 없다. 즉 회화도 포스터나 간판에 접 근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포스터와 회화가 전적으로 동일화됐다고는 할 수 없고, 전시 또는 게시된 시각적 형식으로서 공통성이 있는 부분이 크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 려할 때, 포스터는 도시 그 자체를 미술관으로 하는 또하나의 회화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포스터의 기능은 어디까지나 광고·선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여 ' 도시에 있어서의 또하나의 회화'란 점도 오늘날의 포스터의 기능으로서 주목할 부분인 것이 다.
포스트 모던 디자인(post modern design)
팝 디자인이라고도 한다. 1945년 이후 많은 젊은 건축가들과 설계자들은 현대 디자인의 대 가들이 수립해 놓은 가치에 대항해 왔다. 그들에게는 현대 건축 및 설계가 전통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또한 현대 디자인의 기능 이론-목적성의 적합성, 재료의 충실 성, 기능적 효율성-은 정서적·심리적·비합리적인 인간 욕구, 즉 대중 문화의 존재, 저속한 공예품의 지속적인 매력, 그리고 소비재들에 대한 수요에 의해 명백히 드러나는 욕구를 수 렴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부적합한 것이 입증되었다고 믿는다. 최근 몇 년 동안 표현주의적이고 환상적인 전통을 부정하고 합리적인 건축 형태에 너무 큰 비중을 부여해 온 불균형을 수정하기 위해 현대 건축의 발달사가 다시 쓰였다. 1960년대에 팝 아트와 '팝 디자인'의 출현-런던 카나비가에 의해 예시된-은 현대 전통에 대 한 하나의 반발이었으며 포스트 모던 디자인의 시대를 열었다.
포스트 미니멀리즘(Post - Minimalism)
미니멀리즘을 계승했으나 그 미학에는 반대했던 1960년대 후반 미국 미술의 새로운 동향 -- 개념론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경험을 지향하는 방법에서부터 순수하게 지적인 행동 예술로 나아가는 -- 을 총망라하기 위해 미국의 미술 평론가 핀커스 위텐(Robert Pincus-Witten)이 만들어낸 용어. '안티 미니멀리즘'은 미니멀 아트와 같은 시기에 등장했 으나, 그 미학은 상반되며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사마라스, 헤세 등의 주물 숭배적 조각들이 보여주는 미술 양식을 말한다.
포토 몽타주(photo-montage)
사진을 오려 그 부분을 재조립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는 합성 이미지를 만드는 기법. 사실 포토 몽타주의 영역은 조각난 사진들을 이용하는 데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사진에 글씨, 색깔, 그림을 덧붙이는 것도 포함된다. 포토 몽타주는 영화에서 필름을 편집할 때 사용하는 몽타주 수법에 대해서 보통 사진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정적인 필름'이라 불려왔다. 포토 몽 타주의 여러 예는 19세기의 스크랩 북·영화·엽서에서 발견되나 순수 예술가들- 베를린의 다다이스트들인 그로츠, 하트필드, 회흐, 바아더, 하우스만- 이 진지하게 이 방법을 채택한 것은 1916∼17년부터이다. 포토 몽타주의 가능성을 개발해 온 주요 예술가들에는 엘 리시츠 키, 모홀리 나기, 로드첸코, 바이어, 클루치스, 막스 에른스트, 만 레이, 마르셀 뒤샹, 슈비터 스, 해밀튼, 존슨 등이 있다. 이들의 이름을 보면 서로 다른 다양한 예술 사조 - 다다, 초현 실주의, 구조주의, 팝 아트 -에서 이 기법을 빌어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포토 몽타주 는 하트필드의 손에 의해 정치적인 선전 도구로서의 히믈 충분히 발휘했다. 1970년대에 포 토 몽타주는 유럽과 미국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다시 유행했으나 이 경우의 몽타주는 사진을 분할한 것이라기보다 연속된 사진과 원문을 병치하고 배열한 것이다.
포토그램(photogram)
사진기를 사용하지 않고 감광지 위에 직접 물체를 놓고, 빛을 비쳐 음영을 만드는 방법 및 그 작품. 일반 사진기보다는 직접성이 강하고 창조성이 풍부하다. 모홀리 나기는 포토 몽타 주를 시도하면서 포토그램의 매력을 재발견하고,1922년 네덜란드의 잡지<데 스텔>에 처음 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한편 이와는 관계없이 만 레이가 같은 방법에 의한 작품을 같은 해 에 발표하였다. 후자는 이를 특히 '레이요그램'(뒤에 레이오그래프로 개칭)이라고 이름붙였 다. 모홀리 나기의 작품이 추상화풍이라면, 레이의 작품은 환상화풍이다. 어느 것이든, 빛의 미묘한 해조를 자유로이 조작하며, 물체를 직접 파악할 수 있는 특성을 살린다.
포트리에(Jean Fautrier)-(1898~1964)
앵포르멜 양식으로 196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에서 대상을 받았다. '인질'시리즈로 유명하 며, 비참한 이미지를 통하여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그려냈다. 아버지의 사망후 어머니가 그를 런던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약관 14세에 로얄 아카데미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1917년에 1차 대전에 동원되었으나 독가스를 마시고 퇴역, 전후에는 파 리에 정착한다. 1921년 그의 작품은 사회적 사실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이러한 반 입체주의 경향을 어두 운 색조의 격한 감수성을 보이는 자연주의적 누드와 인물화를 통해 지속된다. 그후 그의 작 품은 암시적, 구상적으로 급속히 변화해 가서 검은 색을 마티에르의 효과가 나오도록 두껍 게 칠하고 그 위에 데생을 날카롭게 파낸듯한 정물화, 환각의 상태와 같은 풍경화를 발표한 다. 1929-30년에는 유화와 결별하고 종이를 배접하고 그위에 다양한 재료로 두꺼운 안료를 입 히는 ' 마티에르'효과 탐구작업을 벌이며 현실을 좀더 충동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모색한다. 1943-1945년 인질시리즈에서 포트리에는 그의 영감의 원천이 마티에르의 역점을 두는 자기 고유의 화풍과 기법을 확립하게 된다. 그후 불투명하면서도 투명한 물감이 만들어내는 마티에르 효과에서부터 이미지가 드러나고 있다. 보라색, 분홍색, 연한 초록색등 그가 주로 사용하는 색조 작품이 보이는 폭력적인 강 력함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폰타나 (Lucio Fontana,1899~1968)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 아르헨티나의 산타페에서 태어났다.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학교에서 조각을 배우고, 제2차 세계 대전전에 ‘추상·창조’ 그룹에 참가하였다. 전후에는 밀라노에서 ‘공간파’를 결성하여공간주의 운동을 일으키고(1947년, 제1선언), ‘공간을 가로질러 빛나는 형태’를 새로운미학의 형성이라 하여, 운동·색채·시간·공간, 곧 네온의 빛·텔레비전·건축 등에서볼 수 있는 4차원적 존재를 현대의 예술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캔버스에 날카로운 칼자국을 넣은 커팅 작품을 통하여 회화와 조각의 새로운 형태 로서의 공간 개념의창조를 보여 유명해졌다. 만년에는 그림자에관심을 가져, 도려낸 실루엣의 그림과 같은것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 다.
폴록 Jackson Pollock (1912-1956/미국)
미국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화가. 1912년 와이오밍주 코디에서 태어났다. 1930년 뉴욕으로 나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 하였으며, 피카소의 '게르니카'나 미로 에게서 자극을 받아 심하게 왜곡된 인물이나 동물의 이미지를 그렸다. 그러나 1948년경부터는 마루에 커다란 캔버스를 펴놓고 몸체로 그림 속에 들어가 그리는 물 감 뿌리기와 흘리기 기법의 액션 페인팅을 시도하여 유럽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미국 미술 의 새로운 장을 펼쳤다. 대표작으로는 '비밀의 수호자들', '블루 폴즈', '기운'등이 있다.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에나멜을 캔버스에 흘려 우연적인 효과를 얻는 작업을 하였다. 드리핑을 통한 액션 페인팅 의 화가로 미국적 추상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1912년 와이오밍주 코디에서 태어났다. 1930년 뉴욕으로 나가 아트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 하였으며, 피카소의 '게르니카'나 미로에게서 자극을 받아 심하게 왜곡된 인물이나 동물의 이미지를그렸다. 그러나 1948년경부터는 마루에 커다란 캔버스를펴놓고 몸체로 그림 속에 들어가 그리는 물 감뿌리기와 흘리기 기법의액션 페인팅을 시도하여유럽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미국 미술의 새로운 장을 펼쳤다.대표작으로는 '비밀의수호자들', '블루 폴즈', '기운'등이 있다. 미국 추 상미술의 대표자 중의 한사람으로 가장뛰어난 액션 페인터였다. 1930년대에 아메리카 인디언의 전통미술이 내포하고 있는 영혼성을 발견하여 큰 감명을 받 았다. 1936년에 처음으로 반 추상적 그림을 그린다. 2차 세계대전중 뉴욕에 망명중인 초현실주의 자들과 만나 인간정신의 자동기술법에 매료되 었다. 신화와 상징,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안의 회화기법에서 영감을 얻고 또한 자신의 알콜 중독을 퇴치하기 위해 시작한 구스타프 융식의 정신분석법에서도 영향을 받아 폴록은 점점 더 폭력적인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1938-41년사이 그의 붓놀림이 더욱 강해지고 폭발적이 되어감에 따라 그의 그림에서 형체 가 사라지게 된다. 마치 그의 고뇌를 감추기라도 하는듯, 그림의 중심에 나타나던 토템과도 같이 위협적이던 인물들을 해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상형문자와 같은 것으로 뒤집어 쒸어버 린다. 절제된 자동기술적 회화언어를 찾아내기 위해 구멍을 뚫은 깡통은 채색의 도구로 사용하기 도 한다. 순간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회화기법을 추수하던 그는 1946-47년경에 드리핑 기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갖고 있던 형식적 표현적 욕구에 부응하는 이 기법을 회화의 자동기술 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화폭을 바닥에 깔고 그위에 격렬한 액션이 가는대로 물감을 흩뿌림으로써 데생과 채색이 하 나로 융합된 세계로 이루고 그 다음에 화폭을 잘라내고 틀에 끼움으로써 순수한 회화면이 화면전체를 뒤덮은 이른바 '올 오버'기법도 창출해낸다. 1951-52년에는 색채의 사용을 포기하고 신비한 형체가 재등장한다. 흑백 구상화'블랙 페인 팅'을 발표했다가 다시 드리핑 작품을 하기도 한다. 주요 작품 : No. 32., 집중 등
퐁피두 센터
파리의 중심지인 보부르에 자리잡고 있는 예술·문화활동의 다양한 기능이 종합된 초 현대 식 건물. 1977년 개관. 렌조 피아노와 로서스의 공동 설계로 설립된 이 건물은 제련소나 정 유공장과 같이 직선적인 강철제의 구조와 청색과 적색의 울긋불긋한 설비로 건축계에 큰 충 격을 주었다. 정식 명칭은 국립 조르주 퐁피두 예술 문화 센터. 1971년 시공해 77년 완공될 때까지 문화의 중앙집권화와 정보의 자본주의적 집중의 기준점 등의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문화행정의 한 고리로서 미술뿐 아니라 문화정보의 수집과 분류, 재생산의 장으로 활 용되고 있으며 파리의 중요한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표현주의(Expression!ism)
독일을 중심으로 나타난 강렬하고 불안한 느낌의 양식으로, 야수파와 함께 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다. 신비주의, 사회 불안이 게르만족 특유의 민족적 정서와 어울려 나타났으며, 뜨거운 추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표현주의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 미술에서 자연의 재현은 부차적이 며, 주관의 표현이야말로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선에 의한 형태를 강 조하고 색채는 단순화, 평면화 시켰다. 마음의 상태가 그림주제가 되며 아주 강하게 묘사되 어 사물에 정상적인 모양이 뒤틀리게 되는 20세기 미술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극단적 인 마음의 상태가 너무 작가개인의 취향에 치우쳐 있어서 다른 사람으로서는 그만큼의 의미 와 관심을 갖게 하기가 어렵다. 부조화와 분열만을 꿈꾸고 있다. 우리내부세계에 있는 가장 모순적이고 가장 폭력적인 것 을 발굴하고자 했다. 반자연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더이상 자연을 모방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개인이 갖고 있는 조물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표현주의 회화는 인상파와 같은 미묘한 색조와는 달리 소수의 강한 색채를 채용하기 때문에 단순한 색채 대비의 효과를 지향하는 것이 많았다. 착색의 단순화와 아울러 구도도 긴밀한 형식 속에 단순화 되어 있다. 표현주의란 용어가 특수예술 유파나 양식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사용된 기원은 불명확하며, 그러한 명칭의 예술운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표현주의 미술의 원리는 크게 '비이성', '반전통', '반서구' 적인 것을 의미한다. 표현주의는 '비이성'을 추구함으로서 '반서구' 적인 태도와 '반전통' 적인 이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 한 표현주의는 그림의 내용 즉, '문학성' 을 형태의 완성보다 중요시하는 내용주의 미학위에 그 기초를 두고 감정과 이념을 자유롭게 표현하려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 결과 조형적인 완성도는 이차적인 문제가 되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나 작가의 내면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더욱 중요시한다. 20세기뿐만 아니라 역사상으로 정신적인 불안시대에는 항상 표현주의적인 예술양식이 나타 났으며, 따라서 표현주의는 인류 미술역사에서 항구적인 한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 표현주의는 반 고호와 고갱을 그 선구자로 볼 수 있다. 이 중에 특히 반 고호는 이들에게 직접적인 기법의 특성을 형성하게 하는데, 비록 반 고호 가 스스로를 인상주의자로 칭하고 인상주의자의 밝은 색채를 이어받아 화폭에 선명한 원색 의 선들을 펼쳐놓기도 했지만, 그의 감성적, 상징적 특성은 색채를 단지 빛을 표현하는 것에 만 한정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심리를 묘사하는 적극적인 매체로 이용하였다. 고호에게 있서 생명감있는 선이야 말로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매체가 되었다. 색채의 임의성과 상징성은 고갱의 경우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고갱은 상징주의 계열의 화가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의 그림을 단순화, 평면화시키면서 비사실적인 색채로 그의 정신세계를 표현하 였다. 그는 또한 비유럽적인 원시세계를 대상으로 삼음으로서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같은 미 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한다. 고호와 고갱에 이어 노르웨이 태생의 뭉크도 표현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화가이다. 그는 불안, 공포, 증오, 애정과 같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선명한 감정을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선으로 표현해 표현주의자들의 새로운 조형언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표현주의의 경향은 독일뿐 아니라 각국에서 끊임없이 나타났으며, 20세기 전반 독일에서는 `다리파` 와 `청기사 그룹`의 두 경향으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독일의 표현주의는 그 당시 아카데믹한 미술로서 간주된 인상주의와 보릅스베데 그룹의 낭 만적 풍경화 그리고 유겐스틸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자유롭게 전달 함으로써 자신들이 사물의 본질과 관계하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개인적 미술을 추구했 다. 때때로 그것은 사회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표현주의자들은 예술가를 사회를 형성하는 일원으로 보고, 전체 사회속에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고 행동한다는 기본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독일 사회가 안고 있었던 여러가지 도시적 병폐를 미술을 통해 고발하고 비판 하고자 하였다. 또한 회화를 통해 사회를 개선하여 새로운 유토피아를 구현해 나아가고자 하였다. 그들은 후기 인상주의,야수파 및 초기 입체파에서 기술적 방식을 습득하였다. 또한 중세 독 일 목판화의 거칠고 들쭉날쭉한 평태에서도 영향을 받고 있으며, 원시미술에서의 낭만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표현주의자는 인상주의를 사물의 외양에 관심을 두는'피상적이고 기계적인 표면적인 미술' 이라고 비난하면서 표현주의자는 사물의 내면의 깊이를 창조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 이 가능한 것은 그가 그 깊이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세기초부터 30년대까지 지속되어 현대의 표현주의는 전후 추상표현주의 또는 앵포르멜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독일 표현주의의 기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선적인 것, 얼룩진 것, 그리고 사실적 인 것등이다. 이 중 선적인 그림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이는 특히 키르히너등의 다리파 그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놀데의 종교적인 주제, 페히슈타인과 키르 히너 등의 유토피아적인 주제, 신즉물주의의 딕스나 그로츠의 사회비판적인 주제, 벡크만과 마르크의 상징적인 주제, 코코슈카의 비관적인 인간심리 주제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청기사 그룹- 1911-1914년을 중심으로 활동한 청기사 그룹은 화면의 조형적인 효과를 무시하고 않고 형 태와 내용을 조화시키면서 화려한 원색의 장을 펼치고 있다.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 그 룹은 다리파 같이 독일 낭만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나, 집단적인 공동작업이나 과격한 사회 비판적인 태도를 내세우지 않고, 여러 나라들의 미술가들이 함께 움직인 모임으로서 특히 프랑스 미술에 대해 좀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그룹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당시 독일에 거주하고 있었던 러시아인 바실리 칸딘스키 (1866-1944) 였다. 칸딘스키가 추구한 것은 회화 그 자체이며 여기서 정신적인 세계를 즉흥 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 정신적인 세계는 '절대' 혹은 '추상' 이라는 성격의 회화를 형 성하게 된다. 다리파 그룹- 1905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창립된 다리파는 키르히너, 헤켈, 놀데, 뮐러등이 핵심 멤버이다. 이들은 주로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학생으로서, 전통적인 미술교육을 거부하고 순수한 상 태로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하였다. 이들은 또한 중세 길드 조직과 비슷하게 공동 작업을 중 요시 했는데, 각자의 개성을 중요시하기 보다는 한 그룹으로서 집단으로 작업하는 것을 선 호하였다. 특히 키르히너는 표현주의와 다리파의 예술관에 대한 많은 글들을 남기며, 그룹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05년에 목판화에 새긴 선언문을 통해 이들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짓는 다리 역할을 함으로 서, 빈민계층에 대한 동정, 부르조아 중심의 낡은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 사회정치적 현명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다리파 화가들의 공통적인 양식적 특성은 야수주의와 비슷한 강렬한 윈색사용과 고의적인 형태 변형을 들 수 있지만, 야수주의와 구별되는 점은 11-13세기 중세 고딕 조각과 스테인 드 글라스 등에서 전통을 이어받은 듯한 왜곡되면서도 호소력 있는 표현기법이다. 또한 원 시미술의 영향과 프랑스 미술, 즉 신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짓고자 신속한 창조력과 그림을 삼켜버릴듯이 서두르는 감각으로 작업을 하였다. 자신들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주제로 사용하였으며 그들이 원하는 효과를 얻기위해 그 주제를 왜곡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표현주의 예술사와 비평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 예술의 기본 목적을 자연의 재현으로 보는 것 을 거부하며 르네상스 이래 유럽 예술의 전통적 규범을 떨쳐버리려 했던 20세기 예술운동의 하나. 표현주의자들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이며 회화의 선, 형태, 색채 등은 그것의 표현 가능성만을 위해 이용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구성(구 도)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 개념은 감정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해 무시되 었으며, 왜곡은 주제나 내용을 강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표현주의가 명확한 강령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1905년경부터지만 그 싹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이다. 표현주의 운동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나 다른나라에서도 거의 동시에 전개되었다. 특히 독일의 경 우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해체되기 전까지 다른 어떤 나라보다 표현주의가 발전했다. 표현주의는 야수파, 초기의 입체파, 인상주의,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연의 모방을 거부한 다 른 여러 화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 비평가들이 1911년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 다. 그러나 이 용어를 그뤼네발트나 엘 그레코 같은 화가들에게 적용함으로써 용어 사용에 약간의 혼란을 가져왔고, 더 넓은 의미로는 낭만주의나 바로크와 유사한 미학·비평 용어로 통용되기도 했다. 19세기말 이전엔 형식의 아름다움이나 구성의 조화가 감성적인 메시지의 명료한 전달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 규범(관습)의 완전한 파괴는 없었다. 그러므 로 일반적인 의미에서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는 '표현주의'와 20세기 예술의 한 경향으로 서의 '표현주의'는 당연히 구별되어야한다. 20세기 미술에서의 표헌주의는 반 고호와 고갱을 선구로 하고 있다. 비록 반 고호가 스스로 인상주의 전통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고 인상주의자의 밝은 색채를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그 의 감성적·상징적 특성은 색채를 단지 빛을 표현하는 것에만 한정하지 않고 더 적극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데 있다. 그는 자연을 의식적으로 '인간의 심각한 정 열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과장했다. 이것이 색채를 감성적·상징적 맥락으로 처음 사용하게 된 경우이며 선 또한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선의 방향이 미술가가 대상에 대 해 느낀 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고갱은 더욱 의식적으로 인상주의 를 깨뜨렸다. 고갱은 엄밀한 의미에서 표현주의자는 아니지만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표현주 의의 중요한 요소가 된 상징주의의 규범을 명확하게 받아들인 최초의 화가였다. 에밀 베르 나르의 영향을 받은 고갱은 모든 형태를 단순화·평면화시켰고 사실주의와 유사성이 전혀 없는 색채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천사와 싸우고 있는 야곱>은 배경의 붉은 색 때문에 더 욱 선명해 보인다. 새로운 양식에 대한 대응으로 고갱은 내용의 단순성을 추구했다. 초기엔 브리타니 농민 사회에서, 후기엔 남태평양의 섬에서 그 단순성을 찾았다. 유럽 도시문명에 염증을 느낀 고갱은 이후 표현주의자들이 열중하게 된 원시 미술이나 민속 미술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미 반 고호와 고갱을 알고 있던 노르웨이 태생의 뭉크는 불안·공포·애정·증오와 같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선으로 표현해, 그 가능성을 탐구한 표 현주의의 직접적인 선구자 중의 하나이다. 자신의 강박관념을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한 그는 그래픽 기법의 단순한 직접성을 원용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특히 독일 미술에 많은 영향 을 끼쳤는데 그 영향은 비를라하의 조각에까지 이르는 등 방대했다. 즉 바를라하는 뭉크의 기법을 종교적·사회적 주제를 표현하는데 적용했다. 한편 그로테스크하고 끔찍한 가면을 이용해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된 비열함을 그린 벨기에 태생의 앙소르와 독일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친 스위스 태생의 호들러도 표현주의 초기의 중요한 작가이다. 표현주의 그룹은 1905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야수파는 반 고호와 고 갱의 이론을 그들의 회화에 결합시켰는데 1908년 이 유파의 리더격인 마티스는 그들의 목적 을 다음과 같인 말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추구하는 것은 표현이다. 색채의 가장 중요한 목 적은 표현을 도와주는 것랬. 가을 풍경을 그리기 위해 나는 어떤 색채가 그 계절에 적합한 가를 기억해내려고 애 쓸 것이다. 나는 계절이 주는 감각에 의해서만 영감을 얻는다. "마티 스는 이러한 생각을 인물화에도 적용했볾. 마찬가지로 드랭은 풍경화에, 루오는 강렬한 힘과 단순성에 의한 새로운 종교 회화에 이것을 적용했다. 1905년 드레스덴에서 다리파가 결성되었고 1906년 이들의 첫 전시회가 열렸다. 야수파 회화 가 가장 격렬한 그림에서도 구성의 조화를 무시하지 않았고 색채도 장식성과 서정성을 잃지 않았던 반면, 독일에서는 이런 억제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즉 형태와 색채를 통한 왜곡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과 창작으로 향한 욕망의 심리적·상징적 표출이었다. 1913년 키르히 너는 "우리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순수한 창조적 충동을 유발하는 모든 색채를 수용한 다."고 썼다. 그러므로 독일 미술은 고전적 기풍에 젖어있는 프랑스 미술의 입장에서 보면 낯설고 거친 그리고 미완성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다리파에 가담했던 놀데는 앙 소르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코코슈카가 그린 혼란스러운 선과 과장된 색채의 풍경화와 초상화도 표현주의 작품의 전형이 되었다. 이러한 점은 베크만의 작품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스미스를 제외하면 표현주의의 모든 특징이 영국의 취향과 어울리지 않았다. 루이스와 소용돌이파의 실험은 비록 그들을 표현주의라 분류하더라도 짧은 기간 동안 이루 어진 것이어서 규모가 무척 작았다. 프랑스 야수파는 마티스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한동안 지지부진하게 전개되다가 1907년 이후 형식적인 입체파가 유행하면서 퇴색해버렸다. 이탈리 아의 표현주의 운동은 미래주의에서 나타났는데 시인 마리네티는 1909년에 발표된 <미래주 의 선언문>에서 과거의 모든 예술에 대해 공격했고 동시대의 진정한 양식에 대해 얘기했다. 미래주의의 작풍은 입체파와 유사한 점이 많았고 보치오니와 카라는 소용돌이치는 추상적 형태가 담긴 상징주의를 통해 기계시대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다. 1911년 마르크와 러시아 출신 칸딘스키 등은 청기사 그룹을 조직해 같은 해 뮌헨에서 중요 한 전시를 개최했다. 마르크는 동물을 통해 세계를 다소 감상적으로 표현했고 곧 순수 추상 으로 전환했다. 1911년 칸딘스키는 지각심리학 연구에 기초해 <예술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 여>를 썼다. 그는 이 글에서 대상에서 분리된 감정의 회화적 등가성을 밝히고자 했다. 또한 그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절대 순수를 표현하고자 함으로써 절대주의에 보다 가까이 다 가서게 되었다. 한동안 청기사 그룹에 몸담았던 클레는 유아적인 표현을 시도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표현주의는 독일을 풍미하게 되었다. 청기사 그룹의 미술가들은 더욱 이 론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을 제작했고 후배 세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칸딘스 키나 클레같은 화가들이 여러 해 동안 바우하우스에서 그들을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표현주의는 꿈 속의 장면을 그린 샤갈이나 격렬한 감정을 표현한 수틴에 의해 명맥이 유지 되었다. 영국에서는 매튜 스미스가 정물이나 인물 습작을 통해 야수파적인 그림을 계속 그 렸다. 신즉물주의로 알려진 독일의 새로운 리얼리즘(마술적 리얼리즘)을 전닜란 그로츠와 딕 스는 초기 표현주의에서 고안된, 왜곡과 과장이 심한 작품을 그렸다. 표현주의의 여러 특징 은 현대 미술에서도 많이 추구되고 있다. 타시즘과 추상 표현주의는 표현주의의 직속 후예 라 할수 있으며 많은 그룹들이 야수파와 다리파의 방법을 현재까지 뒤따르고 있다
푸생 (Nicolas Poussin,1594~1665)
프랑스의 화가. 노르망디의 레장드리에서 태어났다. 1621년 뤽상부르 궁을 장식하는 일에 필립 드 샹파뉴와 함께 고용되었다. 1628년 성베드로 대성당의 제단화를 그릴 무렵부터 명성이 높아져, 1639년 마침내 프랑스의 루이 13세에게 수석 화가로서 초대되었다. 신화와 고대사, 성서 등에서 제재를 골라 그것을 상상적인 풍경 속에 균형과 비례가 정확한 인물화로 그렸는데, 그 장대하고 세련되며 정연한 화면 구성과 독창적인 정취는그 뒤 프랑 스 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7세기 프랑스 최대의 화가이며, 프랑스 근대 회화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주요 작품으로는 〈예루살렘의 파괴〉 〈아폴로와 다프네〉 〈바커스제〉 〈플로라의 승 리〉 등이있다.
풍경화(Landscape Painting)
풍경을 주제로 한 회화. '풍경'이라는 말은 원래 네덜란드 어에 어원을 둔 화가들의 용어. 회화에서 자연 경관을 나타내는 것을 기술하기 위해 16세기 후반에 처음 사용되었다. 이집 트·비잔틴·로미네스크 시대의 유럽의 종교적인 예술에서도 주요 주제의 배경으로 풍경적 요소가 매우 양식화된 형태로 도입되었음을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회화에서는 흔히 강 을 비롯한 자연적인 지형을 신의 모습으로 상징화하거나 물고기·새 등으로 간접적으로 표 현했었다. 풍경이 그림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 것은 화가와 그들의 후원자들이 풍경을 보 는 법을 배우게 된 후에 가능해졌다. 아주 최근까지 사람들은 자연을 하나의 통합된 연관물 로 보지 않고 별개의 물체의 집합으로 본 것 같다. 자연을 '경치'로 보는 능력은 화가들에 의해 획득되었고, 원근법을 사용해 구체화한 그림을 통해서 일반 대중에게 전파되었다. 자연 을 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화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원근법을 통해 비로소 풍 경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풍경화는 환상과 장식이라는 이중적 속박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나 지 못해 목가적인 요소가 강했다. 그러나 어쨌든 자연 경치 그 자체를 즐기고 활용하기 시 작한 미술이 처음으로 등장한 때는 로마 시대이다. 자연의 힘에 대해 거의 신비적인 숭배를 했던 중국 등 극동 지방에서는 일찍부터 풍경화 즉 산수화가 발달하였으며, 훗날 유럽의 풍 경화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츄럽에서 풍경화가 독립된 장르로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이다.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미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구현, 전파했다. 그는 미술가란 단순한 삽화가가 아니라 시인처럼 세계의 창조자라고 보았다. 그의 영향을 받아 목가적인 삽화가 유행했으며, 플랑드르 지방의 그림에는 이야기적인 요소가 줄어들고 섬세하게 세부 묘사를 한 풍경을 그림의 배경으로 하는 것이 눈에 띈다. 최초의 '순수한' 풍 경화는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중간에 이놹치한 다뉴브 지방에서 그려졌다. 그림은 이야기 를 전달해야한다는 인습을 깨뜨린 사람은 알트도르퍼(Altdorfer)로서 유화·에칭·수채화 등 에서 풍경 그 자체를 수용가능한 주제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 개혁은 풍경화의 발 달에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때의 풍경화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자연주의 적'인 작품은 극히 드물며, 상당히 엄격한 공식에 맞춰 배열한 환상적인 주제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탈리아에서의 풍경화는 이상적이고 영웅주의적인 경향으로 나아간 반면, 네덜란 드에서는 소박하고 사실주의적인 풍경화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여러 유형의 풍경화가 자유롭게 창작되고 있었다. 클라우드, 거틴, 터너 등이 독창적인 화필을 구사하고 있던 덩시, 마침내 콘스타블은 루이스탈과 후베마에게서 시 각적 진실을 표현할 언어의 원천을 찾았다. 콘스타블의 신선한 시각과 화풍은 프랑스 낭만 파 - 특히 바르비종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시적인 풍경화도 그 추종자들을 잃지 않아 독일의 프리드리히와 영국의 터너 등이 그 뒤를 이었다. 19세기 후반, 터너의 영향을 받은 모네는 비회화적·문학적 요소를 눈에 보이는 인상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화가의 주제 서 열에서 풍경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후 세잔느, 반 고호 등 후기 인상파들도 풍경을 자주 그렸다. 그러나 현대 미술은 사실성에서 후퇴하여, 루소를 추종하는 일요 화가들만이 아직도 풍경을 성실히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몽상적 풍경화 (dream landscape)의 매력과 공포를 발견했으며, 한편 세잔느에게서 입체파 화가들로 이어 지는 여러 추상·반추상 계열의 화가들은 풍경을 정물의 일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풍속화
일정한 사회적 계층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전형적인 한 모습을 그린 회화. 풍속 화는 사람들의 계층에 따라 농민적·서민적·귀족적인 것 등으로 나눌 수도 있지만, 내용 여하에 따라서는 종교화나 역사화등과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이들 주 제를 풍속화풍으로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풍속화는 고대에서도 확인되는데, 품페이의 벽화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중세에서는 일상 생활이 예술 표현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므로 본래의 뜻에서의 풍속화는 나오지 않는다. 유럽 미술에 풍속화풍의 묘사가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로서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네덜란드 화가들 사이에서 풍속화풍 의 묘사가 점차 많아진다. 또한 독일의 뒤러도 종교적인 내용을 종종 풍속화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풍속화가 그 취재범위를 넓히고, 이것을 전문으로 하는 화가가 나온 것은 17세기 특 히 네덜란드에서였다. 플랑드르의 화가 요르단스, 브라우워는 풍속화가로서 유명하며, 또 당 시의 화가로 렘브란트, 루벤스, 벨라스케스 등도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18세기에서는 프랑 스의 샤르댕과, 시민 생활에서 취재하여 교훈적·풍자적인 풍속화를 그린 호가드 등을 제외 하고는, 상류 사회를 다룬 풍속화가 프랑스에서 유행했는데 랑크레, 부셰, 프라고나르 등이 그 대표자이다. 당시의 이색적인 풍속화가로서는 스페인의 고야를 들 수 있다. 또한 19세기 에 와서 사실주의적 사조는 많은 풍속화를 낳았다. 프랑스에서는 즐겨 이국 풍속을 그린 들 라크루아, 온갖 사회층을 날카롭게 풍자한 도미에, 농민화가인 밀레, 노동자의 생활을 다룬 쿠르베가 있고, 독일에서도 소시민 생활을 그린 A.L 리히터 이외에 멘첼, 라이플 등이 각기 풍속화를 그렸다. 문학적 내용을 배제하고, 순수한 회화적 요소에만 호소하려는 인상주의 운 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마네, 드가, 리버만 등이 풍속화를 그리기만 했지만, 풍속화는 차차 쇠퇴하게 되었다. 단 19세기 말기에는 로트렉과 같은 예외도 있다.
프라 안젤리코 (Fra Angelico,1400?~1455)
이탈리아의 화가.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 ‘베아토 프라 안젤리코(축복받은 천사 수도사)’로 불렸다. 20세 때 피에솔레의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초창기의 그림은로렌초 모나코의 고딕풍에서 출발하여, 성서의 삽화와 템페라의 판 그림에 빛나는 듯한색채로 꼼꼼한 세부 묘사를 한 것이다. 산마르코 수도원의 벽화에서는 프레스코 화법을채택하여 그 특성을 충분히 살리면서 조형적 인 인물상을 보여 주었고, 로마 고대 건축의장대함을 보여 주는 스케일이 큰 벽화도 그렸다. 주요 작품으로는 〈리나이누올리의 성모〉 〈수태 고지〉 〈최후의 심판〉 등이있다.
프라이머리 스트럭쳐(primary structure)
기본 구조, 원구성 등으로 번역된다. 원형, 장방형과 같이 단순하면서도 기본적인 모양에 의 해 구성하는 것. 1966년 4월 뉴욕에서 개최된 동명의 전람회가 이 명칭의 기원이다. '미국과 영국의 젊은 조각가들'이라는 부제가 붙여졌던 이 전람회는 1960년대 중기에 보여진 조각의 새로운 특징을 부각시킨 것으로 기획자는 키너스턴 맥샤인이다. 조각(sclupture)이란 말 대 신에 구성(structure)이란 말을 쓰고 있듯이, 깎고 다듬는다는 의미의 종래의 조각 개념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공간 구성을 목표로 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그 형태가 극히 단순하다는 점 에서 간결한 표현을 추구하는 미니멀 아트와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프라이머리 스트럭처 의 특징을 요약해 보면, 첫째 형태가 구, 원주, 원추, 각주, 입방체 등의 기본적인 것으로 된 점. 둘셉로는 대부분이 선명한 원색으로 채색되어 있는점. 그러나 이러한 색채는 대개 기계 적인 방법(이를테면 분무기 같은것)으로 채색된 것이어서 우리가 회화에서 느끼는 색채의 감각과는 달리 정서가 배제되어 있다. 셋째는 재래의 조각에서 사용된 돌, 석고, 시멘트, 철 등의 자연적 또는 반자연적인 소재 대신에 플라스틱 알루미늄, 스테인레스, 유리, 합판 등의 현대적인 공업용 소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 넷째는 수공적인 작업을 지양하고 설계도에 따라 공장 등에 주문 생산하고 있는 점 등이다. 따라서 조각가들은 왕왕 자신의 역할을 디자이너의 그것에 한정시켜 창작의 비개성적인 면과 복제의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 다. 그러므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구조물의 경우는 제작 비용을 지불할 파트롱이 없으 면, 실현을 보지 못하는 건축물과 같이 지상의 작품으로만 남아 있는 수도 있다. 또한 스케 일이 커서 관객들이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어 종래의 조각처럼 관객에 의해 둘러싸여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환경적인 면이 강한 점도 특징의 하나이다. 이 경향은 1950년대 영국에서 일어난 것으로 안토니 카로와 필립 킹에 의해 시도되었다. 헨리 무어의 제자들인 이들은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추상 조각의 거장은 무어를 능가하겠다는 의욕에서 조각을 인간의 수공 적 작업에서 해방시키고자 이런 명쾌하고 거대한 공간을 만들었던 것이다.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1416?~1492)
이탈리아의 화가. 토스카나파에 속한다. 산세폴크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품은 모두독자적이고 훌륭한 것들로, 원근법의 자유로운 구사, 맑은 색채, 명석한 빛 의 처리, 위엄이 있고 당당해 보이는 인물의 표현 등으로그 시기에 보기 드문 획기적인 양 식을 보여준다. 대표작은 바치 가(家)의 위촉을 받아그린 아레초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 안의 제단 벽화 〈십자가 전설〉이다. 1466년 이전에 그린 이 벽화는 높고 큰 벽면을 3단으로나누어 가로를 길게 하고 〈황금 전 설〉을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12장면으로 나누어 그렸는데, 15세기 이탈리아의 최고 걸작으 로꼽힌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미제리코르디아의 성모〉 〈성탄〉 〈성모〉 등이 있다.
프레스코
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는 뜻. 덜 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 그림물감이 표면으로 배어들어 벽이 마르면 그림은 완전히 벽의 일부 가 되어 물에 용해되지 않으며, 따라서 수명도 벽의 수명만큼 지속된다. 프리스코는 석고가 마르기 전에 재빨리 그림을 그려야하는 어려움이 있으며, 그리므이 수정도 거의 불가능해 정확하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또 사용할 수 있는 안료의 색깔도 제한되어 있으며(15· 16세기의 화가들은 프레스코에는 천연의 안료만이 적합한 것으로 믿었다), 벽이 마를수록 색깔도 옅어지며, 색의농담을 이용한 효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과 제약이 오히려 광범한 주제의 디자인과 과감한 방식의 도입을 권장하는 격이 도어, 이탈리아 르네 상스 회화의 순수함과 힘, 불멸성을 크게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레스코 화법에서 석고는 안료를 접착시켜주는 매체로 작용하며, 흰색만이 사용된다. 이와같은 전통적인 방법 의 프레스코를 이탈리아에서는 프레스코 부오노 또는 부온 프레스코라 하며, 같은 안료를 사용하여 마른 회벽에 그리는 것을 프레스코 세코 또는 단순히 세코라고 불렀다. 프레스코 는 기념 건조물의 벽화를 그리기에 가장 적합하다. 다만 습기가 차면 석고가 부서지므로 그 림도 함께 떨어져나가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건조한 지역에서는 가장 영구적이다. 그 결과 건조한 지방 - 특히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북유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프레스코 회화는 크레타와 그리스의 벽화, 폼페이의 그레코 로만 벽화 가 있다. 중세 초에는 벽화를 그릴 때, 여러 방법이 혼합 사용된 듯하며, 프레스코로만된 벽 화는 없는 듯 하다. 그러나 로마 수도원 건물 벽화를 보면 12∼13세기에는 프레스코가 모자 이크 둾예의 일부로도 사영된 것이 발견된다. 훌륭한 프레스코는 대부분 이탈리아의 대가들 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 일인자가 지오토이고 그밖에 마사치오, 프란체스카, 라파엘로, 미켈 란젤로, 코렛지오등이 있다. 프레스코의 융성기는 14∼15세기이며, 16세기 이후로는 점차 유 화로 대체되었다. 19세기에 독일 기독교들과 영국의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이 전통적인 이탈 리아 프레스코의 부활을 시도했으나 기법의 복귀가 어렵자 들라크루아, 퓌비 드 샤반 등 많 은 화가들은 그 대신에 표구(Marouflage)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프레스코는 20세기에 들 어와 멕시코의 리베라나 오로츠코에 의해 재발견되는 등 그 전통은 계승되고 있다. 한편 아 시아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벽화를 그릴 때 마른 석고 위에 아교로 그리는 방법을 사용해 왔으나, 인도 지방의 벽화 기법을 조사해 본 결과 11∼12세기의 프레스코 기법이 전해진 것 으로 보인다.
프로그램드 아트(programmed art)
이탈리아의 미술가이자 디자이너인 무나리가 1945년 이후에 제작한 자신의 작품을 서술한 말로 '만드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예술이다. 무나리가 예술 대 상으로 삼은 것은 전자모터를 사용하여 작은 화면에 색깔과 형태의 배합, 변형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프로그렘이란 컴퓨터 용어로, 변형 속도와 전 과정이 한 번 바뀌는데 소요되는 시간의 길이를 프로그램하는 것이다. 일종의 키네틱 아트인 듯하나 무나리는 이러한 가정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네틱 작품에 프로그램드 아트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한다. 1960년대의 옵아트, 시스테믹 회화, 시리얼 아트에도 이 말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예술은 문자 그대로 프로그램된 것을 뜻하므로 컴퓨터 예술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고 하겠다.
프로타주 Frottage(불란서어)
나무판이나 잎, 천 따위의 면이 올록볼록 한 것 위에 종이를 대고,연필등으로 문지르면 피 사물(被寫物)의 무늬가 베껴진다.그때의 효과를 조형상에 응용한 수법. 원뜻은 '마찰' 이라 는 의미의 프랑스어 frotter에서 나왔다. 작자의 의식이 작용하지 않은 차원에서 우연이 나 타나는, 그 예기하지 않았던 효과를 노린다는 의미에서는,데칼코마니나 타시슴 혹은 오토마 티슴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우연한 효과를 노리는 것뿐만 아니고, 몇 가지 피사물을 의식적으로 짜맞추는 경우도 있고, 혹은 거기에 나타난 무늬에서 힌트를 얻어 붓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 수법은 우연이나 무의식을 존중하는 초현실주의에 의해 다루어졌다.특히 독일 태생 에른 스트는 콜라주와 함께 수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1926년의 <박물지(博物誌)>는 이 수법을 구사한 화첩(畵帖)으로서 유명하다. 그는 어느날, 마루 바닥의 얼룩을 보고 있다가 거기에서 온갖 환각(幻覺)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고, 이 수법을 발견했다고 한다. <박물지> 에서는 문질러 나타낸 나뭇잎이나 헝겊 따위 가 인간의 머리,괴물, 바다의 풍경 등으로 변모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미술(Proletarian Art)
프로 미술이라 약칭되는 수가 많다.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자각의 고양을 반영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 계급의 생활과 투쟁 양상, 그리고 지배자의 압제, 허위, 부패를 그리는 미술. 도미에, 뫼니에를 선구자로하여, 19세기 말부터 1920년대, 국제적인 노동 운동이 전개 되면서 성행되었다. 독일의 콜비츠, 그로츠, 프랑스의 스탱랑, 미국의 그로퍼, 멕시코의 리베 라, 오로츠코, 시케이로스 등이 유명하다. 그 표현에는 개개의 작가에 따라 관념적인 저항성, 희생과 비참에 대한 인도주의적 감상, 염세주의적 또는 허무적인 현실 폭로의 태도, 우의적 혹은 도식적인 단순한 묘사가 많으며, 갖가지 뉘앙스, 개인차가 있다. 점차로 방법론적인 자 각이 전개되어,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의 주장이 일어났고, 1930년대 중반부터 이 운동의 주 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속으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프리미티브(primitive)
프리미티브라는 용어는 예술에 관한 저술에서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① 19세기 말에는 진화론자들의 관점에서 문명의 중심지로부터 직접적인 영향권밖에 있는 민족에게 프리미티브라는 말이 사용됐다. 그래서 아프리카 흑인, 에스키모, 태평양 섬의 주 민들과 그들의 미술품이 '프리미티브 아트'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 후 이러한 문화들이 반드 시 문화의 형성기나 퇴화기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유럽 문명과는 분명히 다른 사회조 직과 기술의 체계 안에서 완성된 독특한 문화라고 인식되었다. 따라서 프리미티브 아트 또 한 예술적 완성에 도달하기 위한 초보적 단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미학적·기술적 열등성을 지녔다고 말할 수 없다. ② 유럽의 미술사가와 미술품 감정가들 사이에서 프리미 티브라는 용어는 유럽의 여러 제국 중에서 그림이나 조각의 역사적 발달 과정에서 초기 단 계에 속하는 것, 그리고 이 초기의 미술가들이 자연주의적이고 환영주의적인 재현의 분야에 서 성숙기의 미술가에 의해 성취된 것을 얻으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사 용되었다. (물론 이것은 오류임이 밝혀졌다.) 19세기 중기부터 이 용어는 르네상스 이전의 서구 미술을 지칭하는 말로 쓰여졌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가 과학적 원근법과 해부학의 시 대 이전이기 때문이다. 프리미티브란 용어는 미술사가, 감정가, 큐레이터 등에 의해 자주 사 용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가치를 매기는 것도 아니며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한 초보적인 것 을 이르는 말도 아니다. ③ 미술사가들이 전문적 교육을 받지 않고 그 시대의 전통적 또는 전위적 방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독특한 소박성을 보여주고 있는 미술가들에게 붙인 명칭이 다. 대표적인 예로 루소를 들 수 있으며 최근에는 모세가 있다. 용어가 가진 의미 자체만 볼 때 프리미티브란 정통적 기술이 모자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연스러운 매력을 전해줄 수 있다는 가정이 따라붙는다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 1905년과 1920년 사이에 야수파와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러시아의 표현주의 경향의 호가들을 가리킨다. 이들 화가들은 러시아의 민속 미술로부터 강력한 자극을 받아, 주로 러 시아의 하층 계급의 생활 장면을 많이 그렸다. 그들은 또한 기술적으로는 고도로 단순한 형 식과 강렬한 색채를 즐겨 사용했다. 모스크바의 푸른 장미파 회원들, 라리오노프, 곤차로바, 부를류크 등은 전형적인 프리미티비즘의 작가들이다. 말레비치 또한 초기 단계에서는 역시 프리미티비즘의 화가였다.
플럭서스 ( FLUXUS )
"플럭서스(FLUXUS)"는 흐름, 끊임없는 변화, 움직임을 뜻하는 라틴어로 1960년 부터 1970 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 전위예술운동이다. 이 용어는 1961년 뉴욕의 갤러리 A/G에서 행한 일련의 강연회를 알리는 초청장 문구에서 조지 매키우너스가 처음 사용했으며 여러나 라의 언어에서 ‘흐름’이나 ‘변화’란 의미를 내포하는 플럭서스 미술은 양식이라기 보다 는 마음의 상태에 가깝다. 독일에서 시작되어 뉴욕과 북구의 수도인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 으며 일본과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도 비슷한 활동이 독자적으로 펼쳐졌다. 이 운동은 대중문화에 의존하지 않고 아방가르드 미술가와 음악가와 시인들이 창조해 나갈 새로운 문 화를 추구했으며 게릴라 극장과 거리 공연, 전자음악 연주회 같은 초기의 플럭서스 이벤트 는 1960년대와 연결지어 생각되는 성적 충동과 무정부주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플럭서스 미술가에게는 사회적 목적이 미적 목적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의 주된 목 적은 부르조아적인 판에 박힌 미술과 생활을 혼란시키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예술형식과 스타일을 벗어난 예술가들의 생각 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계획되었던 잡 지의 제목으로서 매키어너스가 선택했다. 그 잡지는 발행되지 못했지만 플럭서스란 명칭은 1962년 매키어너스가 비스바덴에서 조직한 최초의 콘서트 시리즈인 <새로운 음악>에서 처 음 사용되어졌다. 플럭서스는 미래파나 다다이즘, 또는 초현실주의와 같이 하나의 양식이 아 니라 하나의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공동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조직적 화가 집단이라 기 보다는 예술 시장과는 거리가 먼 예술가 개개인과 아웃 사이더들이 모인 지극히 자유로 운 집단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해 낸 행위와 창조성의 형식들은 오늘날 당연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생긴 것이다. 1964년 부터 플럭서스는 베를린에 확산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서유럽에서 있었던 초기의 플 럭서스 페스티발들이 끝난 다음 이었다. 당시 서베를린의 문화적 상황은 겉으로는 개방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상상력의 빈곤에 빠져 '20년대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 지 못하고 고전주의적 취향의 문화를 지향하며 학문적인 지방예술을 답습하고 있어서, 플럭 서스의 출현은 실로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플럭서스 예술가의 대부분은 뉴욕(New York) 소 호(Soho)지구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1963년에 조지 매키어너스(Geo rge Maciunas) 가 플럭서스의 본부를 창설했고, 딕 히킨즈(Dick Higgins)는 유명한 썸씽 엘스 프레스 (Something Else Press)를 창설하여 1964년부터 1974년까지 중요한 플럭서스의 책들을 발 간하였다. 유럽의 주요한 플럭서스 중심지에서는 플럭서스 페스티발 후에 콘서트나 전시회가 따르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베를린의 경우에는 그 순서가 역으로 진행되었다. 즉, 플럭서스 예술가 들에 의한 단독 저녁 집회들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큰 규모의 페스티발로 발전되었고 마지 막에는 매키어너스(Maciunas) 자신이 조직한 1976년의 <플럭스 합시코드 콘서트>로 절정 을 이루었다. 1964년 이래 플럭서스란 이름으로 불려진 현상은 세계 여러 곳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이렇 게 각기 다른 대륙과 도시에 사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사이의 몇몇 여행가들에 의한 전파나, 이제껏 만난 적이 없었던 예술가들 사이에 편지에 의 한 교신으로 가능했으므로, 우편은 개념을 전세계적으로 교환하기 위한 매체가 된 것이다. 레이 존슨 같은 플럭서스 미술가들은 ‘우편 미술’을 시도했는 데 이는 우편 제도를 전달 방법으로 이용하는 미술로 엽서형태의 콜라주와 그 밖의 소규모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플럭서스에서 탄생시킨 또 다른 미술은 때로는 우편 미술과 협력하여 행해지는 ‘고무도장 미술’이다. 즉, '메일 아트(Mail Art)'와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미술은 뉴욕에서 맥로우와 영이 매키어너스를 위해 편집한 '앤솔로지(An Anthology)'와, 쾰른에서 보스텔이 만든 '데꼴라쥬(De-coll/age)'잡지 등을 통해 처음 소개 되었다. 플럭서스 미술가들의 전형적인 제작 방식은 다양한 재료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이었으며 많은 미술 형태가 동시에 그리고 불협화음 처럼 전개되는 플럭서스 이벤트는 동시대에 등장 한 액션이나 후에 나온 해프닝과 비슷한 경우도 있지만 보다 유머러스하고 개방적인 경향을 특징으로 한다. 플럭서스 이벤트는 산책하거나 나무를 태우는 단순한 동작에서부터 미니 텔 레비젼으로 만들어진 브래지어외에는 거의 걸친 것이 없는 샬로트 무어맨이 첼로를 연주하 는 장면을 보여주는 무어맨과 백남준의 공동작품과 같이 대중의 관심을 끈 이벤트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하다. 플럭서스는 공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플럭서스의 첫 출현 이후 25년이 지난 1987년 현재에 이르러서도 미술가들은 플럭서 스를 이해하는데 혼란을 겪고 있는데, 그것은 플럭서스가 일정한 범주로 제한되거나 목록화 할 수 없기 때문임. 플럭서스를 이끌어 나가던 많은 작가들은 플럭 서스에는 어떤 하나의 목적이나 방법이 없으며 공통점이 있다면 이제까지의 예술과 몇몇 낡은 기존의 범주들이 더 이상 쓸모없어 졌다는 깨달음일 것임. 이러한 공통점을 가진 개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발 표하기 위해 서로 협력했던 것을 플럭서스라 할 수 있다. 플럭서스의 초기 이벤트들은 비교적 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로 극적, 허구적 요 소가 삭제되어가면서 구체적이 고 실제적인 시공간을 강조하는 매우 단순한 개인적 행위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예술과 현실사이의 간격을 없애고자 했 으며, 연극, 음악, 미술, 문학, 무용 등으로 뚜렷이 구분된 예술 매체간의 인습적 경계를 무 너뜨리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이한 매체를 결합시킨 '인터미디어', 즉 음악과 시각예 술, 무대예술과 시를 융합한 통합 양식개념을 발전 시킨 것이다. 즉, 플럭서스 이벤트에는 대개 음향효과와 전위음악이 인체의 동작과 다양한 '비예술적' 재료들과 함께 결합되어, 음 악과 무대예술과 같은 시간예술의 특성이 도입됨으로써 예술작품은 더이상 물적 대상이 아 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동적인 과정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은 기존 미술에 있어서의 정적인 작품 개념을 뒤엎은 것이다. 예술작품을 과정으로서 규정하는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 전반에 공통된 것이기도 하지만 플 럭서스의 경우에는 특히 시간성이 강조되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 변화하고, 소멸하는 불확정성의 미학 또는 소멸의 미학이 그 특색이라 하겠다. 이러한 플럭서스의 소멸의 미학 이 예술 오브제의 생산과는 무관한 듯 보이는 것은 사실이며, 작품의 아이디어나, 공연과정 을 기록한 영상, 문서 등의 물적자료는 작품의 증거물은 될지언정 과거 예술작품과 같은 감 상의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없음도 사실이다. 플럭서스 미술작품은 기상천외하며 부조리한 것 같지만 고정관념을 타파하려는 그 밑에 깔린 태도는 후대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 으며 개념미술과 퍼포먼스 아트의 등장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피사로 (Camille Pissarro,1830~1903)
프랑스의 화가. 서인도 제도에서 태어났다. 1855년 파리로 가서 화가가 되었으며, 만국박람회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을 보고 크게감명 을 받았다. 몇 차례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번번이 낙선하고,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런던으 로 피난하여 그 곳에서모네와 함께 터너 등의 영국 풍경화를 연구하였다. 전쟁 후에는 파리 북서쪽 교외에 살면서 다시 소박한 전원 풍경을 그렸는데, 그의 작품은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바탕으로수수하면서도 견실함을 보여 준다. 만년에는시력이 약화되었으나 최후까지 제작 활동을계속하여 인상주의 운동과 운명을 함께 하려는 성실성을 보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붉은 지붕〉 〈사과를 줍는 여인들〉 〈몽마르트르의 거리〉 등이 있다.
피카소 Pablo Ruiz Picasso (1881-1973/에스파냐)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났으며, 1897년 마드리드의 상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곧 퇴학했다. 1900년에 파리에 나가 작품 활동을 했는데, 처음에는 로트레크의 영향을 받았다. 1902-1905년까지를 '청색 시대'라 하여 차갑고 어두운 분위기의 빈민을 주제로 주로 그렸으 며, 1904-1906년 사이를 '붉은 색 시대'라 하여 서정적인 서커스나 유랑 연예인을 주제로 그렸다. 1907년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20세기 회화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분석적, 종 합적인 단계를 거치며 '고전주의 시대', '꿈의 분석 시대', '고전의 변용 시대', 만년의 '에로 티시즘'등의 다양함을 보여 주고 있다. 1881년10월25일 1889년 (8세) 1895년 (14세) 1897년 (16세) 1900년 (19세) 1901년 (20세) 1904년 (23세) 1905년 (24세) 1907년 (26세) 1910년 (29세) 1912년 (31세) 1914년 (33세) 1915년 (32세) 1918년 (33세) 1919년 (38세) 1920년 (39세) 1923년 (42세) 1924년 (43세) 1925년 (44세) 1926년 (45세) 1927년 (46세) 1928년 (47세) 1929년 (48세) 1930년 (49세) 1931년 (50세) 1932년 (51세) 1933년 (52세) 1934년 (53세) 1936년 (55세) 1937년 (56세) 1938년 (57세) 1939년 (58세) 1940년 (59세) 1941년 (60세) 1942년 (61세) 1943년 (62세) 1944년 (63세) 1945년 (64세) 1946년 (65세) 1947년 (66세) 1948년 (67세) 1949년 (68세) 1950년 (69세) 1951년 (70세) 1952년 (71세) 1953년 (72세) 1954년 (73세) 1956년 (75세) 1957년 (76세) 1958년 (77세) 1959년 (78세) 1960년 (79세) 1961년 (80세) 1962년 (81세) 1963년 (82세) 1964년 (83세) 1965년 (84세) 1966년 (85세) 1967년 (86세) 1968년 (87세) 1969년 (88세) 1970년 (89세) 1971년 (90세) 1972년 (91세) 1973년 (92세)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출생. 첫 작품 [투우사]를 그림. 바르셀로나의 라 론하 미술학교에 입학.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 마드리드의 미술전에서 '과학과 은총' 수상. 친구 카를로스 카사혜마스와 함께 파리로 감. 잡지 '호벤투트'에 첫 소묘집 발표. 마드리드에서 잡지 '아르테 호벤'의 펴집과 삽화 담당. 볼라르의 화랑에서 첫 개인전. 이때 부터 'Picasso'라 싸인함. 파리의 라비냥가 아뜨리에 [라보아르]에서 제작.아폴리네르를 만남.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서 고졸에서 생활. 브락크, 드랭을 만남. 화상 칸와일러를 만남. 세잔의 회고전에 감명. 흑인 조각의 여향. [아 비뇽의 아가씨들]을 제작. 큐비즘의 전성기. '블라우에 라이터 전'에 참가. 조각제작 시작. 브락크, 드랭과 아비뇽에 머뭄. 파리에 머뭄. 올가와 결혼. 라 보에티가 23번지 아파트에 옮김. 러시아 발레단과 러던에 감. 미로를 만남. 파리, 로마에서 개인전. 앙드레 브르통을 만남. 발레 [멜퀴르]의 무대장치. 제1회 '슐리얼리스 전'에 출품. 파리 로장베르 화랑에서 개인전. 뉴욕, 베르린, 파리에서 개인전. 시카고, 뉴욕, 파리에서 개인전. 조각가 곤잘레즈와 추상조각 시도. [피카소 부인]이 피츠버그의 카네기 화랑에서 1등상 수상. 발자크의 [알려지지 않은 걸작], 오비디우스의 '메타모르포즈'를 위한 삽화 제작. 6월, 런던 에서 '"피카소 30년 전"을 개최. 샤토 드 보와즈르에 아뜨리에를 세움. 슐리얼리스트 잡지 '미노토르마쉬'의 표지그림. 스페인에 머뭄. 투우 시리즈 제작. 프라도 미술관장에 임명. 도라 마르를 만남. '프랑코의 꿈과 거짓'을 출판. [게르니카] 제작. 보스턴, 런던, 뉴욕에서 작품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 예술 40년전] 개최. 독일군 침공 이후 파리로 돌아옴. '꼬리 밟힌 욕망'을 집필. 뷔퐁의 '박물지'를 위한 엣칭 삽화31점을 제작. 뉴욕에서 개인전. 살롱 도톤에 피카소 작품(79점)을 특별 전시. 석판화 제작. 프랑소아즈 질로를 만남. 발로리스에서 도기 제작. 라미에 부처와 함께 발로리스에서 도기 제작. '죽은 자의 노래'에 석판화 6점을 실음. 파리서 도기 개인전. 런던에서 석판화전. 메리메의 '칼멘'을 위한 엣칭 42점을 제작. 레네의 영화 [케르니카]를 완성.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출품. 바르샤바 제2회 평화옹호 국제회의를 위한 포스터 제작. 파리에서 조각전. 살롱 드 메에 [한국의 학살]을 전시. 발로리스의 교회당에 벽화 [전쟁과 평화]를 제작. 프랑소아즈 질로와 이별. 실베트의 초상화 시리즈 제작. 칸느의 라 칼리포르니 별장에 옮김. 클루소의 영화 [피카소, 천재의 비밀]이 완성. 런던에서 "피카소 판화 50년전" 개최. 쟈클린 로크와 동거. 파리의 유네스코회관에 벽화 [떨어지는 천사]를 제작. 리놀륨 판화 시작. [라스 메니나스와 생활] 시리즈 발표. 마네의 [풀밭에서의 식사] 개작 시리즈. 쟈클린 로크와 결혼. 59년 이후의 보르나르그 시리즈를 발표. 다비드 [사비느의 약탈] 개작 시리즈. [화가와 모델] 시리즈 제작. 바르셀로나의 건축가 회관에 벽화 제작. 캐나다, 동경에서 "파카소 전" 개최. 시카고의 시빅 센터를 위한 모뉴먼트 원형을 완성. 시카고의 시빅 센터에 모뉴먼트 건립. [347점의 엣칭] 순회전. 칸느의 마두라 화랑에서 [도기전]개최. 바르셀로나의 미술관에 약9백점의 유화, 뎃상, 판화를 기증. 12월 18일 [피카소 미술관] 개 관. 파리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파카소 90세 기념 대회고전] 개최. 동경에서 [근작전] 개최. 남부 프랑스의 무쟁에서 사망.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1973) 피카소는 양식의 변화를 많이 거쳤다. 만년에는 조각, 도자기에도 손을 대 끊임없는 제작의 태도를 보였으며, 전반기에는 애조가 띤 분위기가 작품을 청색으로 표현한 청색 시대를 거 쳐, 분홍색 위주의 장미빛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 미술(니그로.미개 미술)를 접 하면서 본격적인 입체파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종합 시대에 남긴 많은 콜라주 작품과 드로잉,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작품 을 그리기도 하였다.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나 1897년 마드리드의 상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곧 퇴학했다. 1900년에 파리에 나가 작품활동을 했는데, 처음에는 로트레크의 영향을 받았다. 전통화로 출발했던 사람으로서. 정상적인 소묘훈련을 맡았으며 또 그가 전통적인 소묘를 완 전히 버렸을 때까지도 주제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던 손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1902-1905년까지를 '청색시대' 라 하여 거침과 가난을 표현하는 색채사용하여 차갑고 어두 운 분위기의 빈민을 주제로 주로 그렸으며, 1904-1906년 사이를'붉은 색 시대' 라 하여 서 정적인 서커스나 유랑 연예인을 주제로 그렸다. 어릿광대 부부같은 주제들이 여전히 우울한 느낌은 자아내긴 하지만 형태들은 더욱 둥그스름하고 조각같은 모습을 띠게 되었다. 1907년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20세기 회화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분석적, 종 합적인 단계를 거치며 '고전주의 시대', '꿈의 분석 시대', '고전의 변용 시대', 만년의 ' 에 로티시즘' 등의 다양함을 보여 주고 있다 1910년에 그린 [칸바일러 초상]은 분석적 입체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걸작 초상화의 모델은 당시 피카소와 가까웠던 화상이다. 그는 일찌감치 입체파의 예술 성을 간파하고 피카소와 브라크를 위시하는 많은 입체파 화가들을 후원하고 그들의 작품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수집한 그림들을 일반에게 공개 전시함으로서 입체파가 당시 를 대표하는 하나의 전위적 예술로서 자리매김 하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1910년 여름 한때를 피카소는 스페인의 작은 도시인 카케스에서 보내면서 정물 또는 나부를 소재로 하되, 극도로 복잡한 구성을 시도한다. 그 당시 그의 입체주의는 화면 내용을 거의 해독 불가능한 추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 작 품에서 포즈를 취한 반신상의 칸바일러의 얼굴 오른쪽에는 아프리카의 가면이, 그리고 왼편 뒤로는 건반과 그 위에 놓인 물체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인물 앞의 한쪽에도 정물 소재가 올려진 테이블이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전통적인 명암법을 무시하고, 빛의 방향을 어느 한쪽에 고정시키지 않은 평면적 변용의 구성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서양화에서 처럼 선명하게 판별되지는 않는다. 그 러나 또한 각 면에는 미묘한 명암이 섬세하게 부여되어 그의 얼굴 윤곽과 몸체가 조심스럽 게 나타나고 있다. 피카소가 1937년에 그린 [게르니카]는 그의 무수한 작품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걸작이 다. 이는 1930년대에 그려진 피카소의 통렬한 파시스트 압제에 대한 고발이며 반전을 상징 하는 작품이다. 1936년 피카소의 조국 스페인에서는 총통 프랑코가 중심이 되어 공화국 체 제를 전복하려는 쿠데타가 일어난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가 프랑코를 지지하는 가운데 1937년에는 프랑코 정권에 반 대하여 민주운동을 벌이던 피레네 산맥 근처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나치의 폭격기가 초토 화시켜 버린다. 그 엄청난 학살의 소식을 전해들은 피카소는 당장 일련의 데생을 시작한다. 죽음과 공포 속 에서 울부짖는 인간과 쓰려진 말과 소들이 상징적으로 강조된 형태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것들이 대작 [게르니카]를 구성하는 부분들이 된다. 그전에 피카소는 마침 파리에서 개회될 예정이던 만국박람회의 스페인館을 위한 벽화를 스페인 정부로부터 위임받았었다. 파카소는 이를 위해 이 작품을 한 달만에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것은 독재 세력과 잔인한 살육에 대 한 정치적 저항과 분노를 표명한 피카소의 최초의 대작이면서 동시에 입체주의 평면화라는 그의 또 다른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1969년에 피카소는, "스페인에 국민의 자유와 민주 체제가 회복되면 이 작품을 스페인으로 보내라' 라고 유언함으로서, 1981년 무렵, 1939년 이후 보관해 온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스 페인의 마드리트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림속의 인물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본 여체의 여러 측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되는데 첫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했다라기보다는 거기에 있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것을 묘사하였다. 왜곡시킨 형태들은 거의 환전히 평면화되어 있으며 또 그것은 앞뒤로 공간이라고는 거의 없 기 때문에 앞으로 돌출되어 있는 듯이 보이며 우리와 그 인물들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마련 해주지 않고 있다. 형태들을 분해하고 얼굴의 몇몇 부분을 난폭하게 재배치하여 야성적인 효과를 달성했는데 아마도 그는 이런 방법이 충격을 줄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주요 작품 : 아비뇽의 처녀들, 게로니카, 거울 앞의 소녀 등 피카소 (Pablo Ruiz y Picasso,1881~1973) 프랑스의 화가. 에스파냐의 말라가에서 태어나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미술 공부를시작하였다. 이 무렵 당시 바르셀로나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 운동에서많은 자극을 받 고, 특히 르누아르·로트레크등의 화법에 매료되어 이를 습득하는 데 힘썼다. 1897년 마드리드의 왕립 미술 학교에들어가 바르셀로나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1900년 이후로는 파리를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였 다. 1909년에는 분석적 입체파,1912년부터는 종합적 입체파 시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거장이 되어 있었는데, 종합적 입체파 수법을 1923년 경까지 계속하고, 1934년에는 에스파냐를 여행하며 〈투우도〉 등을 그렸으며,1936년의 에스 파냐 내란 때는 인민 전선을지지하였고, 이듬해 프랑코 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 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 및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 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그려낸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픽토그래프(Pictograph)
일종의 그림문자로서 올림픽이나 만국박람회등 세계 각국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사용해서 어떤 의미를 나타내고 ,국제적인 언어의 차이를 초월해서 직감으로 이해할 수 있 도록 한 그래픽 심벌을 말한다. 중요한 비주얼 사인의 요소로서 포자완계의 케어마크 등 일시적인 캠페인 기간이 아니라 항 구적인 사용이나 사무용 기기에 사용하는 그림문자의 연구도 진행 되고 있다
핑거 페인팅(finger painting)
회화 표현의 한 기법. 안료에 풀, 가루비누, 스타치 등을 섞은 핑거 컬러(수성 그림물감)을 써서 손가락으로 그린다. 주로 그림물감의 미끄러짐에 좋은, 타일이라든가 유리, 나무판자 따위가 쓰인다. 반드시 손가락만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손 전체나 주걱, 솔, 바늘 따 위도 쓴다. 스피드감이 강조되며, 반응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보통은 그린 뒤 닦아내는 방 법을 핑거 페인팅이라 부르는데, 종이나 캔버스에 전용하면 작품으로서 보존할 수 있다. 저 학년의 아동 교육에서 채용되는 경우가 많다. 전후에는 표현 행위 자체를 중시하는 화가들 특히 추상표현주의적 경향의 작가들이 많이 사용하였다. 화가의 충격적인 몸짓이나 행동이 직접 반영되어, 질감의 변화도 팵길 수 있으므로, 지금도 이 기법이나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그리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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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용어[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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