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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
우리의 전통연희는 주변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그 독자성과 우수성을 갖추어 왔다. 일찍이 고구려·백제·신라는 중국과 서역의 악(樂)을 받아들여, 우리의 예술생활을 풍부하게 가꾸어 나간 것으로 나타난다. 나아가 우리는 삼국·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외래 연희를 수용하여 연희문화를 풍부하게 영위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취향에 맞게 개작하여 한국화하고 나아가 새로운 연희문화를 창출해 왔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새로운 연희문화를 성립시킬 수 있었던 뿌리는 부여(夫餘)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 같은 제천의식이나, 마한(馬韓)의 농경의식 같은 상고 사회의 가무 전통으로부터 이어지는 자생적·토착적 연희문화였다. 삼국시대에 서역과 중국으로부터 외래 연희들이 유입되었을 때, 이런 연희들을 담당할 수 있는 자생적 연희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악, 신라악, 백제악은 수준 높은 연희로 발전할 수 있었다. 아무리 외래 연희가 유입되었더라도 그것을 담당할 만한 기반이 없었다면, 삼국에서 외래 연희가 전승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은 자생적 연희의 기반이 상당했기 때문에 외래 연희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키고, 다시 중국과 일본에 고구려악, 백제악, 신라악을 전달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연희문화 교류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전통연희사 연구에서는 전통연희 교류사를 반영해야만 온전한 전통연희사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불교·유교·한자 등이 동아시아 문화권 공동의 문화유산으로서, 한·중·일 각국에서 이 공동의 문화유산을 자국의 문화로 가꾸어 나갔다. 삼국시대 이후 조선 전기까지 중세 보편주의 시대에는 한·중·일 각국이 함께 동아시아의 공동 문화를 가꾸어 간 시기였는데, 연희문화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삼국시대에 동아시아 공동의 문어(文語)인 한문이 전래하고, 동아시아 공동의 종교인 불교도 고구려는 이미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 전진(前秦)으로부터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시기에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문화인 산악(散樂)·백희(百戱)도 한반도에 전래한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 제75에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에 속하게 하고, 악사와 연희자를 하사했다.(武帝滅朝鮮 以高句麗爲縣 使屬玄菟 賜鼓吹伎人)”는 기록과 고구려 고분벽화의 연희 장면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므로 연희문화의 경우도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부르는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문화가 한, 중, 일 각국에서 자국의 연희문화로 변용·발전·재창조된 측면을 살펴봐야 한다. 중국에서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부르던 연희들을 우리나라에서는 백희 ·가무백희(歌舞百戱) ·잡희(雜戱)·산대잡극(山臺雜劇)·산대희(山臺戱)·나희(儺戱)·나(儺) 등으로 불러왔다. 중국에서는 한대(漢代) 이후 백희·제희(諸戱)·잡기(雜技) 등의 용어를 주로 사용했다. 산악이란 용어는 원래 주대(周代)부터 사용되었지만, 육조(六朝) 말부터 수(隋)대에 걸쳐서 점차 백희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산악은 궁정의 악무인 아악(雅樂)과 대칭되는 의미로서 민간의 악무를 통칭하는 말이다. 산악·백희는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동으로 보유했던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문화 유산이다. 산악·백희에 주목함으로써 한국 전통연희의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밝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각종 문헌에 정착된 연희 자료들을 일관되게 꿰뚫어 해명할 수 있다. 아울러 산악·백희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 연희들을 담당했던 담당층에 대한 일관된 해명도 가능하다. 산악·백희라는 입체적인 대상을 설정함으로써, 한국 전통연희의 갈래·분포·담당층·후대 연희와의 관련성에 대한 명쾌한 논의가 가능해졌다. 산악·백희의 종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방울을 여러 개 공중에 던졌다가 받기, 칼을 여러 개 공중에 던졌다가 받기, 물구나무를 서서 여러 가지 재주 부리기, 솟대를 타고 올라가서 여러 가지 재주 부리기, 긴 나무를 양쪽 다리에 묶고 그 위에서 걷기, 줄타기, 쌍칼을 가지고 재주 부리기, 바퀴를 공중에 던져 올리며 재주 부리기, 무거운 솥을 들어 올리기, 타오르는 불을 밟고 걷기, 칼이 꽂힌 좁고 긴 원통 속으로 몸을 날려 빠져 나가기, 씨름, 현재의 태권도와 유사한 수박희(手搏戱), 말을 타면서 재주 부리기, 동물 재주 부리기 등 곡예(曲藝)와 묘기에 해당하는 연희가 있었다. 둘째,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假面戱)가 있었다. 셋째, 골계희인 우희(優戱)가 있었다. 넷째, 입 속으로 칼을 삼키기, 입에서 불을 토해내기, 칼로 혀를 끊었다가 다시 잇기, 칼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끊었다가 다시 잇기, 오이씨를 심어 곧바로 열매 맺게 하기, 나무를 심어 쑥쑥 자라게 하기, 사람이나 말을 칼로 자른 후 다시 원상태로 복원하기, 팔과 다리를 떼어내기, 스스로 자기 몸을 끈으로 묶은 후 스스로 풀기, 소와 말의 머리를 바꾸기 등 환술(幻術)이 있었다. 다섯째,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가무희(歌舞戱)가 있었다. 여섯째, 각종 악기의 연주가 있었다. 결국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가무백희·잡희·산대잡극·산대희라고 불리던 연희들은 바로 이 산악·백희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산악·백희 계통의 연희가 변화·발전하여 조선 후기에 본산대놀이 가면극·판소리·꼭두각시놀이 등을 성립시킨 것으로 나타난다. 그동안 백희·가무백희·잡희·산대잡극·산대희 등으로 불러왔던 연희들과, 조선 후기에 성립된 발전된 양식의 연극적 갈래인 본산대놀이 가면극·판소리·꼭두각시놀이 등을 모두 포괄하는 명칭으로는 ‘전통연희’라는 용어가 가장 적합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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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중국과 한국에는 서역에서 산악·백희가 전래하기 이전부터 자생적 전통의 연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산악·백희가 한(漢)·위(魏)부터 본격적으로 서역에서 유입되기 시작하여, 수·당을 통하여 계속 흘러들어 왔고, 특히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많이 전래했지만, 한나라 이전에도 이미 중국에 산악·백희와 유사한 종목의 연희들이 일부 존재했었다. 그러니까 무제(武帝)가 서역을 개척한 이후 서역에서 전래한 산악·백희가 일방적으로 중국의 산악·백희를 성립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경우도 중국처럼 자생적인 전통의 산악·백희 종목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방울받기·줄타기·솟대타기·나무다리걷기 같은 묘기와 우희 같은 골계희는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에 중국·서역으로부터 산악·백희가 전래하기 이전부터, 한반도에는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종목들이 어느 정도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전해진 신라의 ‘입호무(入壺舞)’와 ‘신라박', 고구려의 ‘괴뢰희’는 - 이것들이 우리의 자생적 연희이든 서역 연희의 영향을 받은 것이든 상관 없이 - 우리의 자생적 연희 전통이 상당했기에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과 서역으로부터 새롭고 다양하며 수준 높은 산악·백희의 종목들이 다수 유입됨으로써, 중국·서역의 뛰어난 연희자들이 공연하던 수준 높은 연희의 영향을 받아 기존에 존재하던 연희 종목들도 더욱 발전했을 것이다. | | |
전통연희의 역사 | |
전통연희의 역사는 상고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전통연희와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전통연희의 새로운 양상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상고시대는 삼국시대 이전을 말한다. 이 시대에는 상고 사회의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연행된 가무활동, 그리고 여러 유물․유적과 암각화 등을 통해서 연희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과 서역의 연희를 받아들여, 우리의 공연예술을 풍부하게 가꾸어 나갔다. 특히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부르는 외래 기원의 연희들이 서역과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다. 삼국시대의 산악, 백희는 후대 우리 전통연희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신라에서는 가배(嘉俳)와 팔관회(八關會) 등의 행사에서 연희가 공연되었다.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는 나무다리걷기(수산리 고분, 팔청리 고분), 방울받기(장천1호분), 곤봉받기(약수리 고분), 곤봉과 방울을 엇바꾸어 받기(수산리 고분, 팔청리 고분, 약수리 고분), 바퀴 돌려올리기(수산리 고분, 장천1호분), 말타기재주(약수리 고분, 팔청리 고분), 칼재주부리기(팔청리 고분, 안악 제3호분의 행렬도), 씨름(각저총, 장천1호분), 수박희(무용총, 안악 제3호분) 등 곡예에 해당하는 연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가면희(안악 제3호분) 등 연극적 놀이와 북,장구,완함,배소,긴 퉁소 등의 악기 연주가 보이며, 원숭이재주부리기(장천1호분) 같은 동물곡예 등 산악, 백희에 해당하는 연희들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 고분들의 연대는 3세기 중엽부터 5세기 중엽 사이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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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 |
도1. 팔청리 고분벽화 도2. 도1을 그려본 것도3. 산둥성 텅저우시(滕州市) 출토 화상석의 연희 장면도4. 수산리 고분벽화의 연희 장면도5. 안악 제3호분의 가면희도도6. 춤을 추는 인물 부분도도7. 동일 장면을 그려 본 것도8. 장천 1호분의 연희 장면도9. 장천 1호분의 원숭이 재주 부리기도10. 장천 1호분의 농환과 무륜도11. 각저총 벽화의 씨름을 하고 있는 매부리코의 서역인 팔청리 고분벽화의 행렬도에는 마상재, 나무다리걷기, 2인의 칼재주, 농환(弄丸, 방울받기), 건고무(建鼓舞, 북 연주) 등이 묘사되어 있다.[도1, 도2] 수산리 고분벽화에는 나무다리걷기, 농환, 무륜(바퀴를 공중 던져 올리며 재주 부리기) 등이 묘사되어 있다.[도4] 안악 제3호분의 가면희도에서는 긴퉁소, 완함, 긴 퉁소의 반주에 맞추어 서역인 형상의 가면을 쓴 사람(또는 서역인 무용수)이 춤을 추고 있다.[도5-도6] 장천 1호분 벽화에는 원숭이 재주 부리기, 농환과 무륜 등이 묘사되어 있다.[도8-도9] 동한 만기(晩期, 147189년)의 산둥성 텅저우시(滕州市) 출토 화상석에 건고무와 함께 농환, 안식오안(탁자 위에서 물구나무서기), 칼재주부리기가 새겨져 있어 한중 연희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다.[도3] >>>계속
전경욱(고려대 국문과 교수)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