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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시/국내작가

'화첩기행' 새 장르 개척한 화가 김병종"여행은 외로움을 껴안아주는 母性"

'화첩기행' 새 장르 개척한 화가 김병종
"여행은 외로움을 껴안아주는 母性"
  • 여행지에서 돌아와 그곳의 풍광과 사람에게서 받은 인상을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온 화가 김병종(55·서울대 미대 교수)씨가 ‘여행- on the road’(열화당·전3권)를 펴냈다. 10여년 동안 아시아, 유럽, 라틴아메리카 등 14개국을 돌아본 뒤 작업한 167점의 그림을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판형과 레이아웃으로 시원스럽게 담아냈다. 작품집 출간과 함께 지난달 전시회도 두 곳의 화랑에서 동시에 열었다.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서 이색적인 문화와 사람을 접하는 여행은 늘 설레는 일이다. 이 설렘과 흥분은 특히 예술가들에게는 작품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에너지로 작동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에너지의 크기는 감수성의 감도와 성실성에 비례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김병종에게 여행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렸을 적 잠시만 걸어도 끝이 보이는 작은 시골 읍에 살면서 항상 먼 곳을 향한 그리움이 내 안에 있었습니다. 지리부도에 나오는 외국 지명을 노랫말처럼 흥얼거리며 살았지요. 그동안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떠나고 싶은 욕망이 충족된 건 아녜요. 돌아와서 가방을 풀고 며칠 있으면 또다시 암중모색, 떠날 곳에 대해 생각해요. 그림은 여행의 2차적인 부산물일 뿐입니다.”

    김병종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문기(文氣)’를 타고났다는 평을 들을 만큼 글 또한 유려한 화가로 유명하다. 일찍이 서울대 미대 재학시절에는 대학 문학상을 휩쓸었고, 신춘문예도 미술평론과 희곡 분야에 두 번이나 당선됐다. 문학청년이었고 철학을 공부했으며 그림을 전공으로 삼았으니 이른바 ‘문사철’에 두루 능한 드문 예인인 셈이다. 그가 라틴아메리카를 기행하고 난 뒤 글과 그림을 엮어 펴낸 책 ‘라틴 화첩기행’은 스테디셀러로 각광 받고 있다.

    “사람마다 관심 영역이 다르겠지만 나는 여행지의 첫 느낌을 사람과 사물의 색깔로 기억해요. 이젠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이 입었던 옷의 색깔, 심지어 얼굴에 어리는 빛이 기억의 잔상으로 남아요. 그래서 망막의 포충망에 걸려들 만한 색채의 황홀함이나 미학, 이런 게 느껴지지 않은 곳은 이젠 가고 싶지 않아요. 남미는 카리브해의 물색, 다크블루와 옥색이 뒤섞여 쉼 없이 미묘하게 변하는 그 색깔이 황홀했습니다. 안데스 산맥에 쌓인 하얀 눈을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서 갈 때는 흰색에 대해 새롭게 배웠습니다. 그동안 흰색에서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포용성과 자기를 비워두는 듯한 여백을 느꼈는데, 안데스의 파노라마 치는 하얀 장관을 접하면서는 흰색도 저토록 공격적이고 모든 색깔을 제압할 만큼 강렬한 것이었는가, 놀랐습니다.”

    그는 남미에 가서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화려한 색채를 거리낌없이 쓰고 즐기는 문화에 충격을 받았다. 멕시코시티에서 도로는 차들로 정체돼 있고 택시 안은 에어컨도 작동되지 않아 덥고 짜증나는데 노점에서 시원한 음료수가 아닌, 빨주노초파남보가 줄줄 흘러내릴 것 같은 색색의 알사탕을 파는 모습을 보았다. 도시의 간판이나 자동차 색깔은 모두 원색에 가까웠다.

    “이 색채가 도대체 이들에게 어떤 삶의 의미를 주는지 곱씹어봤어요. 가난하고 어려운 살림살이에서 담장은 왜 저토록 빨갛고, 대문은 분홍색이며, 지붕은 또 왜 저토록 환한 노란색인지…. 화가도 주저할 만한 원색을 단호하게 쓰는 그들의 문화를 접하면서, 아, 색채가 가난한 사람들에겐 어떤 해원의 수단이 될 수 있구나, 이런 걸 내밀하게 느꼈습니다. 고도 자본주의 사회로 갈수록 주거문화나 의상의 색깔은 원색을 자제하고 중간색 톤으로 흐릅니다. 야만적인 원색을 꺼려하면서 무채색 계통으로 흘러가요. 물론 카리브해의 물빛과 쏟아지는 햇빛 같은 것들이 그곳 사람들을 낙천적으로 유도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색채라는 것이 사람에게 위로와 기쁨과 보상을 줄 수 있다는 걸 남미에 가서 확인했습니다.”

    여행을 하고 난 뒤 글과 그림을 같이 생산해내는 그의 ‘화첩기행’ 작업은 이제 하나의 장르로 굳어져가고 있다. 현실 너머의 몽롱하고 탐미적인 그리움을 표현해내는 그림, ‘옆구리에서 하루 종일 조잘대는 원숭이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문학이 합쳐져 그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그는 이제 모로코, 알제리 등이 있는 북아프리카로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다. 그는 두 종류의 문화가 교배된 곳에서 파생되는 제3의 색채에 매력을 느낀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문화가 겹쳐진 곳에서 나오는 한과 예술의 빛깔을 탐색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on the road’ 서문에 이렇게 썼다.

    “여행이 끝나는 어느 날 홀연히 내 삶도 끝나, 나는 지상을 떠날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지도 같은 것도 없이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떠나게 될 것이다. …떠나는 연습을 잘해 두면 지상을 떠나는 마지막 여행마저 수월할 수 있지 않을까.”

    글 조용호, 사진 송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