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술전시/미술치료

[미술치료]미술로 초등학생들 치료하기

[미술치료]
미술로 초등학생들 치료하기



안진의 한국화가

유괴살해사건이 있었던 안양 명학초등학교에서는 25일부터 아이들의 심리 치료가 진행되었다. 상처 받은 아이들에 대한 치유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심리 치료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사건을 다룬 방송 언론매체의 취재 방식이다. 아이들의 상처를 더 깊이 만들지는 않았는지, 더 많은 아이들의 심리상태를 혼란스럽게 흔들어 놓진 않았는지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취재기자는 울지 않는 아이에게 친구가 죽었는데 왜 울지 않느냐고 묻는다. 울면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그래서 아이들은 기자들이 우는 아이를 좋아한다 하고, 울지 않는 아이는 나쁜 아이인 거 같다고 말한다.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아직 어린 초등학생들이다. 그러나 과도한 취재 분위기는 모두에게 눈물 훔치는 슬픔을 강요하는 것이다.

여전히 의문을 남긴 채 종결된 수사는 거의 매일 뉴스를 차지했다. 어른이 보기에도 부담스런 시신 유기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지만, 세세한 설명과 함께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초등학생들의 시청 통제가 가능한 심야라면 모를까, 모 프로그램은 훼손된 시신을 찾는 내용으로 초저녁에 방송되기도 하였다.

어린아이들이 ‘친구가 죽었다’를 듣는 것과 ‘친구가 어떻게 죽었다’를 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리고 취재진이 빈번히 학교를 찾아오기에, 아이들의 슬픈 기억은 끊임없이 상기될 수밖에 없다.

심리치료를 하는 그 날도 취재진은 예외 없이 교실 안까지 들어왔다. 어떤 간섭도 없이 솔직한 내면을 그림에 담아야 할 때, 카메라가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는 아이를 좋아하는’ 취재기자 때문에, 아이들이 우는 모습을 그려야 한다고 고민이라도 했을까 봐 염려된다. 모든 치료가 끝난 후 그림을 조용히 촬영해 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이들의 그림 중에는 뭉크의 <절규>가 연상되는 그림이 있다. 두려움에 찬 아이의 모습은 제압 당한 듯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는 구도이다. 태양빛 아래 검은 그림자는 공포감을 배가한다. 또 다른 그림은 눈물을 흘리는 아이의 모습이다. 말풍선을 그려 놓고 시커멓게 검은색으로 마구 칠한 그림도 보인다.

미술은 특별히 위기, 상실로 인한 감정을 논리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때, 언어로 감정 표현이 불가능할 때,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면을 보여준다. 언어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숨기고 회피할 수 있는 데 반해, 미술은 무의식, 표출되지 않은 사고와 감정을 드러낸다.

‘속병’을 앓다 보면 우울함이나 혼란, 불안, 좌절 등을 초래한다. 미술은 이런 감정을 경감하고 해소할 수 있다. 실제로 창조적인 활동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호르몬’, 즉 뇌의 세로토닌의 양을 증가시켜 우울증의 발병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

심리치료에 있어 미술의 기능적인 면은 처방뿐 아니라 진단에 강점이 있다. 문제를 발견하는 데 단연 우세한 것이다. 범죄행위 자체를 즐기는 사이코패스(반사회성 성격장애)가 늘어가는 상황에, 미술은 사전에 범죄성향을 찾아내고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예술의 구원>에서 ‘미술은 어려운 시기에 조력자가 된다’고 한 루돌프 아른하임의 말처럼, 이번 사건으로 상처 입은 아이들이 미술치료를 통해 감정을 분출하고 때론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길 바란다. 더불어 두려움과 감정적 스트레스로 힘든 모든 사람들이 미술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치유하고, 기쁨과 평안을 느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