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술전시/국내작가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오치균]

오치균이 갤러리현대에서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이라는 주제로 대규모 개인전 (9. 6∼26)을 연다. 사북과 진달래 시리즈는 물론 뉴욕 풍경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예정이다. 그의 작품은 매번 경매에서 예상치 못한 파격적 낙찰가를 기록하며 세간의 화제를 낳고 있다. 미술계 최고의 블루칩 작가로 급성장한 작가 오치균을 만났다. 행복의 절정에 서 있는 그가 속시원히 털어놓는다. 왜 우리는 오치균을 주목해야 하는가. 엄숙하고 지루한 작품 이야기는 생략하고 그의 솔직한 일상을 여과 없이 공개한다.

서늘함이 감도는 작업실, 지저분한 행색에 괴팍한 성격, 그리고 말수조차 적다. 어둡고 음침한 색감에 붓도 아닌 손으로 작업하는 작가를 상상하니 이러하다. 때문에 요즘 미술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술시장에서 눈에 불을 켜고 주시하는 오치균을 인터뷰한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설레면서도 적지 않게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수화기 상에서 들려 온 작가의 음성. 내 추측이 완전히 빗나갔다. 컬러링부터 심상치 않았고 그의 목소리 톤은 활기가 묻어났다. 세간의 이목을 받는 작가의 현실상을 반영하는 듯 목소리 자체에서 행복하다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중후하다 못해 다소 어두울 것이라는 오치균이라는 작가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어둡고 침울한 화면을 뒤로 하고 물성 가득한 캔버스에서 요동치는 생명력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이내 가공의 인물이 아닌 현실 속 오치균의 실제 모습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스스로를 자유롭게 부리는 작가
오치균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경쾌한 음악 소리가 귀를 찔렀다. 작업실은 어느 작가의 것보다 깨끗하고 아담했다. 설마 이렇게 단정한 곳에서 손으로 덕지덕지 물감을 발라낼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현?옥션에서 그의 작품은 몇 억원을 호가하며 거래 중이다. 그럼에도 작가의 비약적인 인기 상승에 비해 작품을 실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현저히 낮은 오치균 작품의 공급량을 상기하며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사북의 겨울과 진달래 그림 몇 점, 한창 진행 중인 파스텔 작품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작은 물론 이전 작품까지 통틀어 감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무너져 내렸던 것은 당연했다. 인터뷰는 9월 예정인 전시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전시 제목이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입니다. 2층이 사북풍경이고, 1층이 진달래죠. 1,2층에는 신작이 들어가는데, 사북 그림이 30여 점, 진달래가 10점 정도 되요. 그리고 지하 1층에는 뉴욕시대 그림이 걸립니다. 사실 이번 전시가 회고전도 아니고 구작 중 어떤 것을 보여주면 좋을지 고심하다가, 일종의 팬 서비스 차원으로 뉴욕 시대 작품을 선택한 거예요. 그 당시가 대작들도 많고, 언뜻 보니 사람들이 뉴욕 그림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해서요. 두가헌에서는 이전 사북 작품과 꽃 그림 등을 전시합니다. 아직 전시장 인테리어가 완성이 되지 않았는데, 여하튼 이번 전시가 굉장히 기대되요.”
시사회를 앞둔 영화감독은 날카로운 평가의 휘둘림을 예상하며 초긴장 상태로 여러 날을 보낸다고 한다. 그러나 전시를 2주 정도 앞둔 오치균에게선 어떠한 두려운 기미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갤러리현대가 자신의 전시에 맞추어 집을 새로 짓고 있고, 작가는 작품을 한껏 뽐낼 전시 공간이 기대된다고 할 뿐이었다.
“이전에는 불만도 많았고 화랑과도 트러블도 있었고, 박차고 나오기도 하고 그랬죠. 그런?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내가 원하던 화상과 일하고 내가 원하던 환경이 이렇게 올지 몰랐거든요. 내 생전에 말입니다. 이전에는 못마땅한 부분이 많았었는데. 그림만 꾸준히 그리고 내 나름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니 결국 내가 소망했던 것들이 컴 트루(Come True)됐어요.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초인종 벨이 울렸다. 이번 전시에 맞추어 제작한 화집이 도착한 모양이다. 사북, 뉴욕과 서울 그리고 산타페를 각각 묶은 3권의 도록은 작가의 전 작품을 포함하지 않았음에도 묵직한 중량감을 자랑했다. “이렇게 보니 내가 작품을 많이 하긴 했나 봐요”라는 그의 말에서 작가가 현재 느끼는 감회가 어떠할지 대충이나마 짐작이 갔다. 오치균은 분명 지난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본인이 자비를 들여 도록을 만들었던 기억이 어찌 생각나지 않을까. 현재 그를 둘러싼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도 놀랐겠지만 지켜보는 이들 역시 그러하기는 마찬가지다. 화집 속에는 뜻밖에 소설가 김훈의 텍스트가 담겨 있었다. 작가들의 작품 이미지가 소설가의 책 표지에 등장하는 경우는 여럿 있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흔치 않은 사례다. 오치균이 갖는 지금의 영향력이 더욱 가중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훈 선생이 작업실에 왔었죠. 손철주 씨랑 내가 인터뷰하는 것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갑자기 원고지에 부지런히 적는 거예요. 작품이 너무 좋고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예술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굳이 설명을 하거나 스토리텔링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보다 그냥 감동으로 다가와야 한다고 믿죠. 그 분이 그런 점에서 나와 매우 비슷해요. 둘 다 지컥?껍데기가 없어요. 내가 굉장히 무식해요. 그래서 김훈 선생이 내 도록에 적은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감동을 받았죠.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느껴지는 거 있잖아요. 무식하지 않으면 감동이 줄어들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요.”
스스로가 더욱 무식해지려고 노력한다는 오치균의 말이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흩어졌다. 작가는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뉴욕 브루클린 대학에서 유학했다. 그의 이력을 알지 못했다면 아마도 분명히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일회적으로 스치는 관계였다면 그를 ‘용감한 무식쟁이’ 정도로 생각했을 여지도 크다. 그러나 5시간에 이르는 인터뷰와 2차례의 미팅을 가진 짧다면 짧은 시간은 오치균이 얼마나 스마트하고 날카로운 시각을 가졌는지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다.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작가들은 지적인 면을 강조하잖아요. 이건 너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작업 방식이 뭐 뻔한 거고. 이런 이야기는 지겹게 나온 거잖아요”라며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치균은 정형적인 제도의 틀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부리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담배를 끊고 불어난 몸을 만들어 가는 7년차 헬스 라이프는 물론 그 근육질 몸매를 돋보이고자 구입하는 옷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쏟아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의미심장한 말 역시 잊지 않고 덧붙였다.

“작가를 보호해 줘야 합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작가가 준비한 의상은 한결같이 타이트하고 화려했다. 근육에 착착 감기?옷가지들은 오치균의 기쁨조에 다름 아니었다. 2번의 사진 촬영에서 작가는 4벌의 의상을 갈아입었다. 주객을 잠시 혼동할 정도로 적극적이던 인터뷰는 물론 의상에 대한 협조까지 그는 확실히 남다르다. 화두는 자연스레 그의 단단한 상체를 장식하고 있는 나비 문신으로 흘러갔다.
“그냥 했어요. 즉흥적이었던 거 같아요. 우선은 내가 몸이 좋아지니까 문신 생각을 하긴 했죠. 영화 <빠삐용>을 봤는데, 나비의 의미가 굉장히 좋더라고요. 자유에 대한 갈망이나 변태(變態) 등을 상징하는 거잖아요. 예술가로서 작품 활동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문신을 여러 개 하고 싶었고, 결국 나비로 통일해 버렸어요. 주위에서 나랑 나비 문신이랑 의미가 잘 들어맞는다고 하던 걸요.”
오치균은 대다수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문신을 마치 훈장인 양 자랑한다. “어디에 새겨져 있는데요”라는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훌훌 웃옷을 벗어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면서까지. 이처럼 여러 질문을 받아치는 작가의 대답은 거침이 없고 가끔 위험 수위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사진 촬영 내내 자신이 정한 룰만큼은 철저히 고수했다. 선글라스 착용은 스스로가 정한 최소한의 보호 정책인 모양이다. 너무 많이 노출되는 것이 싫다며 그는 인터뷰 중간 중간마다 “작가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연거푸 말했다. 
“가격도 너무 올라가고, 괴담도 너무 많죠. 호당 얼마가 될 거라는 등. 사람들은 작품을 내놓지도 않고, 그야말로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이런 상황에서 자리를 못 잡고 흔들리는 단계는 이미 지났어요. 어지러울 정도로 점프가 됐지만, 나름대로 적응하고 있습니다. 갤러리현대니까 잘 컨트롤하고 있죠. 그리고 내가 마치 돈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말도 안됩니다. 그걸 생각했다면 어떻게 이렇게 어두침침한 그림을 그렸겠어요. 잘 팔릴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지. 그리고 내가 몇 억원에 팔라고 한 것도 아니고, 또한 투기 목적으로 내 작품을 산다고 할지라도 막을 수도 없는 문제잖아요. 옥션가 역시 내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심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관심이 너무 집중되고 억측들이 많은데 끈기를 가지고 1,2년 정도는 지켜봐 줬으면 좋겠어요. 이게 나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이번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전을 앞두고 많은 이들이 오치균의 작품 가격에 주목하고 있다. 경매가가 버젓이 억대를 돌파하고 있으니, 화랑의 판매 가격이 최대의 이슈가 아닐 수 없다. “돈 문제에서 많이 벗어났어요. 그것만 생각하면 손 떨려서 작업 못하죠. 내가 작품을 직접 팔면 돈 왕창 벌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러면 안되죠. 이제는 내가 공인이 됐고 결국 거기에 맞는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격문제를 둘러싼 분분한 견해에 그는 거리를 두었다. (개인전 작품은 결국 비매로 확정됐다.)

일관된 작업 태도와 열정적 제스춰
여기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오치균의 작품에 열광하는 이유 말이다. 작가는 “글쎄,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반문하더니, 이내 젊은 작가들의 작업 방식과 비교해 그의 생각을 정리했다. 젊은 작가들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즉각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그것의 지속쩔〈?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무식하게, 지독하게, 꾸준하게”를 부르짖는 오치균식 작업 논리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작가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때문에 작품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특별날 것 없는 비슷비슷한 소재의 한계를 뛰어 넘어 그를 워너비 작가로 자리매김시킨 것은 작업 태도의 일관성과 손의 열정적 제스춰가 빚은 하모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장에 가면 내 스스로가 감동을 받아요. 작품이 너무 좋은 거야. 내가 이걸 그린 건가 하고요. 캔버스에 양념처럼 살짝 올라간 빨갛고 파란 색감 등이 기가 막힌 거죠. 내가 한 것 같지가 않아. 마치 누구의 힘에 이끌려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물감이 서로 엉켜 만들어 낸 색은 미리 계산할 수 없는 부분이죠. 그래서 하늘에서 시켰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웃음).”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 우리에게 작가의 솔직함이 익숙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예상 밖의 답변은 질문자를 가슴 뛰게 한다. 곧이어 자기 표현에 적극적인 그에게 혹 퍼포먼스 같은 이벤트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냐는 질문을 던졌다. 감정기복 심하고 그림으로 먹고 사는 게 녹록치 않았던 때, 자신의 넘치는 에너지 때문에 무용가라는 직업을 그려본 적이 있었다고 했다. 춤추는 오치균. 온 몸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무용가라는 대답에 갑자기 웃음이 났다. 작가의 현재 상태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손으로 춤을 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다. 빠른 비트의 음악을 선곡해 역동적인 춤사위를 벌이는 것처럼 작가는 그의 특별 공연 무대인 캔버스에서 그가 최고로 잘 부릴 줄 아는 손으로 작품이라는 공연물을 완성 짓는다는 상상을 했다. 격렬한 ┰봤玲?함께 물감은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히고 섞임으로써 역동적인 기교의 잔재를 남기고, 그 반향은 공연 후에도 캔버스 위를 맴돌고 있지 않을까라는 공상에 잠시나마 취해 보았다.
그리곤 “내가 굉장히 이기적이야”라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오치균은 작업을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 몸만 가꿨지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요”라는 말이 쉬이 믿겨지지 않았다. 작업실에서 본 앙증맞은 크기의 가족사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작가는 매번 화집에 딸 진이의 얼굴 초상을 실었던 거 같다. 거칠 것 없이 시원시원하게 안료를 올리는 제작 기법, 특히 뉴욕 시기에 등장하는 거리의 인물군에서 나타나는 뭉그러진 얼굴 형상에 비하건대 진이의 것은 확실히 다르다. 넘치는 에너지와 신이 강림해 내려 주신 기운(?)과는 달리 “손톱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고생 좀 했지”라고 말하던 작가의 표정은 영락없는 아버지 모습 그 자체였다. 갤러리현대 전시장에서도 1호 크기의 진이 얼굴이 전시장 한 벽면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었으니.
부자가 되고 싶고 거지처럼 살고 싶다
디스플레이가 완성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직후 갤러리에서 오치균을 만났다. 공간 연출에 대한 흡족함으로 그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그 흥에 맞추어 사북 풍경이 걸린 2층의 그레이 톤 전시 공간에서 그레이 톤의 의상을 꺼내 입은 오치균이 춤을 추었다. 나는 박수를 치며 흥을 돋우고 사진 기자는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살아 숨쉬는 역동적인 마티에르를 상징하는 것이자 형식적인 격식을 파괴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청바지에 운동화, 짧은 헤어스타일의 작가는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이 춤을 추었고, 그에게 오십이라는 나이는 허울뿐이라 생각했다.
“대학생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그림 그리는 게 잘 되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죠. 화가들이 다 그렇잖아요. 한 발짝 물러나면 그게 그렇게 목숨 걸 일도 아닌데. 그림이 잘 된다 싶으면 두려울 게 없죠. 그러다 잘 안 되면 하늘이 무너지고 앞날이 컴컴한 그런 기분 말입니다. 서울대 시절에는 환영 받지 못했어요. 시골 출신인 것도 있었고. 뻣뻣하고 불량기까지 있었으니. 칭찬도 받고 싶었는데 먹히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유학을 가자마자 날개를 달았죠. 장학금도 받고 그림을 너무 칭찬받았으니깐. 그 당시에 느꼈던 작업에 대한 깨달음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옵니다. 유학을 안 갔다면 그림을 안 그렸을 것 같아요.”
인생이라는 사이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힘든 일이 있으면 곧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믿으면 그만이다. 꿈에 대한 확고한 의지만은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아 두는 것이 난제일 뿐. 전시회를 부지런히 다니고 부풀어 오른 뒷담화를 전해 들으며 작가들은 다른 이를 흠모하고 시기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스스로에게 다짐할 것이다. 본인 이름을 내 건 미술관을 꿈꾸기도 하고 해외 유수의 비엔날레에 참여하겠다는 나름의 위시리스트를 작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치균은 생각이 다르다.
“나는 관심 없어요. 죽으면 끝이라고 봐요. 내가 현실적이예요. 내 이름을 후대에 남기는 거 역시 마찬가집니다. 국공립미술관에 내 작품이 들어가는 것도 중요치 않아요. 시립미술관 등에 내 그림 없잖아요. 그림 사겠다고 여러 번 왔었죠. 그런데 가격 문제 때문에 그만뒀어요. 내가 그런 부분에 욕심 있었다면 그냥 줬겠지 않습니까. 좋은 작품 남겨야지, 미술관에 걸리게 해야지 등등 신경 쓸 게 많으면 작업 못하죠. 마음을 비우고 자유롭게 작업해야지 결과가 좋은 거예요.”
똑같은 소재를 지독하리만치 그려도 작가의 흥은 사그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기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의 소재도 재료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박수를 치며 자신이 생산한 작품을 칭찬해 주는 이들이 많으니 그 흥이 사라지기는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피카소의 말처럼 부자가 되고 싶지만 거지처럼 살고 싶다는 오치균. 돈은 벌고 싶지만 지나친 주목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개인전은 그를 향한 열기를 더욱 증폭시킬 것이고 작가의 바람은 그저 바람으로만 머무를 것 같다. “지금 너무 행복해요. 이것을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니, 즐거움을 줄이고 작업하는 것 밖에 없던 걸요.”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에만 열중하겠다는 오치균의 말이 연신 스스로에게 당부하듯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