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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시/국내작가

생성의 풍경[문경원]

생성의 풍경
글|강태희·한예종 미술이론과 교수

문경원은 ‘미디어도 할 수 있는 작가’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지난 개인전은 (성곡미술관 3. 30~4. 29) 드로잉과 회화 작업이 주축이 된 ‘풍경’ 전시로 미디어 아트 전시라면 단골로 등장하는 인터랙티브 작업도, 테크놀로지의 신기하고 현란한 볼거리도 없었다. 당대의 미디어 환경이 고도의 하이테크를 수반한 이미지와 텍스트의 정보 공간이라면 문경원은 이를 살짝 빗겨 선다. 전통적인 미술과 새로운 미디어 아트 사이에서 일찌감치 ‘디지털 유물론’의 폐해나 기술 위주 작업의 형식적 공허함을 고민해 온 그는 미디어를 다루더라도 그것의 안팎을 뒤집거나 뒤틀어 보기에 주력한다. <사물화된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세계를 풍경으로 접근해 본 이번 전시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이 전시에서 ‘사물화’한 미디어 아트의 풍경까지도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

미디어, 풍경, 사물화
풍경은 우리 시각장의 가장 일차적인 대상이지만 우리 역시 타인의 풍경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사물과 풍경에게도 시시각각 변하는 나름대로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을 사고와 관념으로 대상화시키고 ‘사물화’한다. ‘사물화’는 원래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을 기초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황을 진단한 루카치의 용어로, 간단하게는 사회적 관계가 사물의 관계로 현상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과학기술의 발달로 사물들이 수식(數式)으로 환 원되고 있는 데 대한 위기감에서 현상학이 탄생했다고 전해지거니와 현상적 신체와 세계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강조한 것은 메를로-퐁티였다. 그는 풍경의 인식은 공간에 대한 체험적 인식을 전제하고 이런 ‘공간의 향유’는 몸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우리의 육화(肉化)된 시선이 주체와 대상의 이원적 대립구도에 근본적인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보았다.
문경원이 풍경의 대표로 선발한 도시와 나무와 사람들은 메를로-퐁티가 존재 일반을 물리적 차원, 생명적 차원, 그리고 인간적 차원 세 가지로 구분한 것과 상응한다. 후자가 이들을 각기 다른 내재적 질서를 지니지만 서로 미끄러지며 세계에 내속하는 존재로 규명했듯이 문경원 역시 이들을 한 공간에 풀어놓고 미디어의 경로를 거치면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변모하면서 우리의 일상적인 풍경과 세계의 의미를 교란하고 또 재구성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런 문맥에서 그가 키워드로 택한 사물화는 풍경에 덧씌워진 주지주의적, 환원주의적 각질을 벗겨내고 육화된 주체와 상호감각적인 통일체로서 그 대상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일종의 ‘현상학적 물활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자 결과적인 유동성과 개방성의 모호함까지를 포함하는 시선으로 모든 관습적 시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열린 작업관과 잘 맞아떨어진다. 이때 우리의 고착된 시각장을 헤집고 전혀 새로운 시공간의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미디어 아트는 이런 현상학적인 체험에 가장 적합한 분야이기도 하다.

템플 앤드 템포
문경원은 이화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로 미디어 아트에 관심을 가지고 혼자 공부를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부터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칼아츠(Cal Arts)에서 개념적이고 융합적인 학제간 연구와 더불어 영화, 영상, 애니메이션 등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는데 미디어 프로세싱을 하면서도 드로잉과 회화를 멀리하지 않았다. 당초 만들기와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기계적인 꼼꼼한 수공작업이 감성에 맞아서 엄청난 시간과 끈기가 소요되는 미디어 프로세싱의 실험과 실천 과정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귀국 후에는 <젊은 모색> <아트 스펙트럼>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 <후쿠오카미술관 레지던스> <부산비엔날레> 등 국내외 주요 전시에 참여하고 개인전을 갖는 한편 다양한 인문학과의 연계를 고찰하며 미디어 이론 공부를 병행해 왔다.
이렇듯 문경원의 관심사는 광범위한 인문학의 이슈들이지만 그 주된 주제는 늘 인간과 그들이 구성하는 시공의 모습 즉 풍경으로 모아졌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한 인물 드로잉과 그것을 기본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나 미디어 설치작업들은 대부분 추상적인 익명의 공간에서 걷고 놀이하고 움직이는 군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작가는 드로잉과 애니메이션 혹은 미디어 설치작업 사이의 경계를 부인하고 또 그 해체를 의도하는 의미에서 드로잉과 미디어 작업을 병행했다. 2001년부터 시작된 군상은 처음에는 다소 복잡하게 연결되고 중첩되었다가 점차 개별 단위로 분화하고 급기야는 규칙적인 그리드의 요소로까지 변모했다. 인물들은 개성과 정서의 주체이기보다는 인물 풍경의 구성요소 또는 단위로 작동하며 그 개별화한 제스처들은 우리가 얼마나 다양한 동작과 움직임으로 시공에 소속되고 또 구성하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당초 인물들과 함께 등장했던 미니어처 건물이나 사물들은 도시풍경으로 발전하여 군상을 보다 구체적인 공간 속에 설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칼아츠 졸업전 <템플 앤드 템포(Temple and Tempo)>에서 문경원은 정지와 운동의 시공간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전시의 제목을 빌려온 종교현상학자 엘리아데는 시공상의 지평운동의 공간적인 면은 템플(templus, temple), 시간적인 면은 템포(tempus, tempo)로 표시되지만 둘은 서로 교차되는 개념임을 설명한 바 있는데 이 공간과 시간의 문제는 최근의 전시를 포함, 문경원의 작업 전반을 포괄하는 메인 테마라 해도 과함이 없다. 이 전시에는 격자무늬로 나비를 촘촘히 그려 넣은 빛바랜 기념사진들, 연속적인 날갯짓을 하는 박제된 나비, 회전축을 중심으로 교차, 순환하는 아버지와 어린 딸의 영상, 그리고 시간과 기억이 축적된 손때 묻은 중고 인형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모두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시공의 좌표나 그 생멸의 반복적 주기들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특히 정적이면서 동시에 동적인 모니터 상의 완벽한 좌우대칭의 나비 이미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재현되고 코드화된 시공에 대한 완벽한 메타포이다. 지면관계상 상술할 수 없지만 이 전시 이후 등장한 인물 군상들은 그 자신이 시공의 축을 형성하고 또 그 안에서의 자발적 움직임으로 개인과 사회 또는 우주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무수한 점이자 픽셀들이 되었다. <Follow me>(2002), <Look at me>(2004), <Stop it>(2004) 등의 후속 작업에서의 군상의 움직임은 때로는 빠르고 재미있게, 또 때로는 규칙적이고 일사불란하게 설정에 따라 움직이고 또 랜덤한 이합집산을 일삼으며 개인과 집단의 시공을 규명해 준다. 이때 문경원의 궁극적인 관심은 개개인의 삶의 모습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시공의 풍경과 그 의미에 대한 통찰이 된다.

우주의 축인 ‘나무’와 역사적 시간의 상징 ‘도시’
나무는 생명의 기념비이자 그 주기적 갱신의 능력으로 우주의 축으로 불린다. 그것은 자연풍경 가운데 인간과 가장 가까운 교감의 파트너이자 재현의 대상이기도 하다. 문경원은 수적이고 선적인 작업을 하다 그 대척점에 있는 자연으로서의 나무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전시에 등장한 나무들은 연작 회화 <나무>들로부터 나뭇가지들의 다양한 삶의 순간들을 기록한 <계보학적 나무>, 생장과 소멸의 순환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일기>, 그리고 생중계된 전시장 앞뜰의 살아 있는 나무까지 다양하다. 나무 연작의 모태인 <나무 1>은 모노톤 배경에 뿌리 부분이 생략된 채 화면을 좌우대칭으로 배분하고 있어서 전작인 나비처럼 모니터에 떠 있는 느낌을 주며 밑동이 사람의 몸과 합쳐진 다른 나무들 역시 구체적인 배경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들의 공간은 단일시점의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는 동양화나 산수화의 그것에 더 가까우며 결과적으로 나무의 리얼리티와 관념화된 나무 사이에서 떠있는 모호한 존재가 된다.
작가는 <계보학적 나무>의 구부러진 나뭇가지들의 모습을 컴퓨터에 실행시키기 위해 그 선들의 경로를 x, y의 좌표 값으로 환원시키는 과정이 몬드리안의 나무 변환의 과정처럼 진행되는 것을 경험한 바 있다. 이들은 좌표상의 나무로서 자연이자 미디어이며 생명이자 비생명, 이미지이자 기호로 양자 사이를 넘나들며 자연과 인간, 구상과 추상, 캔버스와 모니터의 대비를 보여주며, 변모하는 애니메이션과 부동의 실제의 나무 이미지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적 시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나무는 이런 모든 변수를 포괄하는 근원적인 시공의 교차로이자 축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도심에 있는 인공적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숭례문을 주제로 도시와 사물을 다룬 작업이 <경로: 도시풍경-숭례문>이다. 숭례문은 서울에 있는 유일하게 사방이 트인 유적으로 우리는 매번 다른 각도에서 이를 바라보지만 결코 그 ‘완전한’ 모습을 보지 못한다. 작가는 숭례문이 개방된 계기를 모티프로 삼아 그 사물화된 풍경을 그린다. 사방에서 바라본 숭례문의 드로잉이 순차적으로 보이는 스크린에는 문이 주체가 되어 바라본 주변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들은 스틸 컷들로 이어지는 배경 이미지들과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있다. 그런데 문과 풍경 간의 이런 시각적 상호작용의 핵심은 배경 이미지와 싱크를 맞춘 열린 문을 통해 드러나는 풍경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닫힌 채 고정되었던 시공간을 진행형과 경로의 그것으로 바꿔 놓아 숭례문의 ‘진정한’ 모습을 시간적 지속과 변화의 대상으로 재정립한다.
또 하나의 도시 풍경인 <경로: 서울과 평양>은 남북한 두 도시 이야기로 이들은 서울과 평양의 광장을 찍은 사진을 모태로 그 색값을 디지털 색으로 변환하여 랜덤한 그리드를 그리도록 만든 작업이다. 이 작품은 속도감 있는 변화와 지속적인 모노톤의 기계음 때문에 가장 통상적인 ‘미디어 아트’에 근접했는데, 다양한 너비와 색채 그리드로 가려진 두 도시를 쏜살같이 가로지르는 자동차들의 움직임과 일정한 시간의 경과 뒤에 도시의 이미지가 서로 뒤바뀌는 것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남북 간의 대화에 대한 반어적인 은유이기도 하다. 그리드들이 스크린을 가릴 때는 두 도시는 동질적인 흐름으로 추상되지만 그 바탕에는 견고한 이질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둘 사이의 교류는 아직은 가상현실에 속할 뿐이다. 드로잉, 사진, 구상, 추상, 시간, 사운드 등의 요소가 버무려진 이 작업은 간결하고 선명한 내용과 형식의 일체감을 보여준다. 문경원의 도시는 전통과 현대를 가로지르는 시사적인 이슈들이 아날로그와 디지털 풍경으로 변화하고 또 교차하는 공간이 되며 그것은 역사적인 시간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다시 인물로-수행적인 시공의 단편들
나무가 그 뿌리에서 사람과 결합했듯이 사람들은 도시 풍경의 일부이며 당연히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풍경이 된다. 이미 말했듯이 인물은 주체이자 대상이며 타자의 풍경이다. 그런데 드로잉 <사람풍경(Peoplescape)>의 인물과 공간의 관계는 과거에 비해 훨씬 느슨하고 자유롭게 설정되었고 무리들은 서로의 배경으로 존재할 뿐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들은 개인으로 또는 개개 그룹의 중심 또는 주변이 되어 전체 풍경을 구성하면서 순간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내지만 그 총화가 스토리로 결집되거나 문맥화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매순간 저절로 만들어지고 변해가는 이를테면 수행적인 시공의 단편들로 고정된 실체도, 불변의 지평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하다.
같은 제목의 미디어 설치작업은 군상의 움직임들로 드로잉의 단편적인 풍경을 시간 속에 풀어놓은 작업이다. 대략 6분 정도 진행되는 과정은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한 인물군의 변신을 다루는데 커졌다 작아지고 모였다 흩어지고 또 그림자에서 선묘로 회귀하는 인물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개인이나 무리 또는 군중으로 풍경을 만든다. 이때 그림자의 색과 사진풍경의 선택, 그리고 중간 중간의 정지 광경은 랜덤으로 진행되어 일관된 내러티브의 성립을 방해한다.
샤르트르는 타자의 존재와 그 시선을 지옥이나 위협으로 규정했지만 메를로-퐁티는 세계 내 존재의 이런 복수적 양식이 상호배타적이기 보다는 연관이며 내가 사회로부터 등을 돌릴 수는 있어도 상대적으로 위치됨을 그만 둘 수는 없다고 관찰했다. 문경원이 의도하는 것은 물론 이런 관계의 양자택일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시간 속에 규명되는 이들의 ‘상대적 위치됨’이자 주체와 타자 또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교차의 텍스트의 풍경 자체를 펼쳐 보이는 것일 터이다. 이 작업의 기초가 되는 <라이프 피싱(Life Fishing)>의 개체들은 복잡한 기하학적인 선으로 연결되어 마치 그물 속에 포획된 듯한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실뜨기 같은 움직임의 경로를 시간적인 경과 속에 재현하는 이 작업은 인물들의 상호관계를 연결과 꼬임으로, 더 나아가서는 사냥과 포획으로 파악하고 있어서 인간관계의 양면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메를로-퐁티가 지적한대로 ‘사물화’를 해소하는 방안은 객체의 참된 잠재성과 대상성을 드러내는 실천으로 현실을 존재 아닌 생성으로, 사물 아닌 과정으로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그는 세계는 공간에 대한 사물의 총체가 아니며 이런 전통적인 대상성의 개념 거부는 그것이 왜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의문을 가지는 일이라고 했다. 이런 언급들은 문경원의 전반적인 작업관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 오래 전에 자신은 작품의 내용을 미리 설정하지 않은 채 모든 이미지를 한 영역 안에 쓸어 넣고 그들이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자발적인 속도로 지속하기를 바랄뿐이라고 말한바 있는데 이 방식은 현해 작업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인간의 제스처나 프레임 안에서의 동적 움직임의 경로를 거미줄처럼 계속 시각화하니 그 선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의 경로가 결국은 인간의 역사나 주변의 풍경을 구축하는 과정을 은유하는 듯 보였다”는 작가의 말이 이를 입증한다.
그의 인물들은, 또 나무와 도시까지도 존재이기보다는 생성이며 무언가로 되어가는 중에 있는 가변적인 대상들이다. 또한 이들이 처한 공간은 말랑말랑한 유동적인 것이며 시간, 특히 디지털적 시간은 전통적인 시간-거리의 관계가 소거된 예측불허의 경로로 존재한다. 이런 열려있고 예측불가한 시공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의 풍경의 참모습이며 그 단편을 제시하는 것이 미디어를 다루는 작가의 문화적 중재의 포인트가 될 것이다.

전통적 미술의 연장으로서의 미디어 아트
이번 전시는 <템플 앤드 템포>부터 시작된 인간과 시공간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인 상황으로 펼쳐 보인 것으로 군더더기 없고 정갈한 디스플레이와 프레젠테이션 과정의 기술적 세련미는 그가 축적해 온 미디어 언어의 수준이 녹녹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현상학의 이론을 참조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업을 이해시키는 보조수단이지 작품을 진행시키는 원리 같은 것은 아니었으며 인문학에 대한 관심 역시 작품의 재미를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그의 작업에서 테크놀로지의 모습이 후방에 머무는 점은 중요한 사실로 그는 결코 기술의 과시를 하지 않으며 물성을 잃은 코드의 세계에 살을 입히고 인간과 기계의 유기적인 ‘인터페이스’적 상황을 실현하고자 한다. 인터페이스는 미디어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말로 그 사이와 경계에서 운동하며 인간과 기계 사이의 정신적 개념적 통로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미디어 아트를 하는 작가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이 가운데 문경원이 점하고 있는 위치는 독특해 보인다. 이미 살펴본 대로 그는 미디어 아트를 전통적인 미술로부터 분리된 특별한 분야로 생각하지 않으며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다루면서도 개개인의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다. 따라서 개인 간의 소통을 다루는 웹이나 넷 아트와도 일정한 선을 그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문제의식은 보다 근원적이고 ‘거시적’이라 판단되지만 이에 이르는 방식은 철저히 ‘미시적인’ 관찰과 분석에 바탕하고, 그를 작업에서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일체의 양보나 타협을 사양한다. 이런 선명한 작업관은 아직 젊은 그에게 커다란 자산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