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관展 '연기(緣起)'
2008년 8월 20일(수) ~ 8월 30일(일)
갤러리 담
110-2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7-1 Tel.Fax. 02)738-2745
http://cafe.daum.net/gallerydam
Gallery hours: 월~토 11:00am~06:30pm 일12am~05pm
Opening 2008/8/20 6:00 P.M
"연기"(緣起)/ratīya-samutpāa
"연기"(緣起)-현상적 사물 즉 유위(有爲)는 모두 인(因;직접원인)과 연(緣;간접원인)에 따라 생긴다고 보는 이론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며 산스크리트의 프라티티 아 사무트파다(pratīya-samutpāa)의 번역어로,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사상.
노사(老死)는 태어나는 것에 의해 일어나며, 또한 괴로움은 사랑의 번뇌에 의해 생기거나 인간의 근원적인 무지(無知;無明)에 의해 생기며, 반대로 번뇌가 없어지면 고통도 없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계열화하여 무명에서부터 노사에 이르는 합계 12항(項)을 세는 연기설(緣起說)이 확립되었다(十二緣起·十二支 또는 十二因緣). 그것이 각 항[支]을 생략해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라고도 한다.
-자료출처: http://www.reportnet.co.kr/detail/2055/2054298.html
예술이 물질 그 자체가 목적으로 다루는 행위를 지양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 자체를 언급 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매체확장을 꾀하면서 다른 맥락의 재료들을 공존시키는 것은 무기체와 유기체의 역설적 결합을시도 복제와 반복 미케니컬 (기계적인,무의식의,자동적인) 한 프로세스 등이 주는 물질로서의 매체를 극복하며 무상한 상호작용(Interacition) 의 "생멸"(生滅)을 저 나름의 언어로 표출하는 작업들이다.
두개의 공존 / Two coexistences
현대인의 다양한 지각변화는 사진과 같은 복제 이미지 속에서 아우라의 붕괴로 나타나게 되고 이는 다시 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많은 사람이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는 대량생산된 이미지의 필요성은 있지만 그것의 범람은 다시 절제를 요구하는 현대인의 이율배반적 이중성으로 나타난다.
예술 작품에서 아우라가 상실됨으로써 예술작품 앞에서 항상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고 느꼈던 괴리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의 붕괴를 통해 사물이나 형태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변형하려고 한다.
언어만을 통해서 생각하고, 표현하며, 소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우리는 삶의 생생함을 그대로 그려내고, 보전하는 방법들을 회화와 사진을 통해서 유지, 발전해왔다. 객관적인 현실뿐 아니라, 우리의 심리적인 풍경들 역시 이러한 방법으로 담아냈다. 칸딘스키는 이같은 주관과 객관적 현실의 관계에 대해 종교, 과학, 도덕과 같은 외적인 지주가 흔들릴 때, 문학, 음악, 미술과 같은 감각적인 것들이 가장 먼저 그러한 소외를 감지한다고 했다. 이점에서 본다면 예술은 외적인 현실과 개인의 주관을 잇는 연결이며 상호작용이고 공존의 사유이기도 하다.
System의 미학
자연계의 실제 대상은 시간의 작용 속에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는 역동적 실체로서 고착화될 수 없는 그 무엇이지만 우리는 그 작용과정을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최소한의 소통을 위해 도상(icon)이나 상징(symbol), 혹은 어떤 지표(index)를 만들고 그것에 의존해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 커뮤니케이션 역시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한 것이며 어느 특성의 공유정도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도상이나 상징, 그리고 지표에 의해 교육받고 형성된 우리의 사유는 실제 사물 그 자체와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자연적이기 보다는 인위적이고 언어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현상학은 인위적이고 언어적인 우리의 사유를 반성하고 자연대상과 직접적으로 만남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사유와 인식은 특수하게 주어진 환경과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텍스트들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차용과 이미지 문화가 확산되는 배경이다.
아직까지 그러한 실제와 가상 천연과 가공을 구분하고 있지만 이런 구분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제 기술과 그 개념 안에서 자연을 이해하고, 인공적인 것을 마치 자연물인 것처럼 대하고 있으며 인간이 정신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듯이 자연과 인공도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 두 현실의 네트워트 안에서 서로 맞물리는 인터페이스를 의식하며 소멸의 의미를 제시해주어야 한다.
이제 예술행위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맹목적이며, 즉흥적인 감각의 상태가 그 우세를 정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진보의 의미는 진부하다고 생각하며, 형이상학의 철학이 사라지고 교육과 종교의 부재, 도덕과 가치관의 부재만이 시스템의 미학에 합당한 이론을 구축하려 한다.
존재들은 세계에 속하지만 세계는 존재들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우리에게 외부로 존재하며 이 세계와 삶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 우리 삶이 왜 개인적인 주관을 넘어서 외부와 이어져 있는지는 우리 몸이 유한하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숨 쉴 공기가 없으면 목숨이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삶이 이루어지려면 수많은 사물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하나의 삶을 위해 사물들을 불러 모으는 결합력이 곧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를 깨닫는 감성은 삶을 헤아리는 마음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삶을 헤아리는 마음은 예술과 연결되어야 한다. '생의 기록으로서의 예술', 이것이 진정한 창조인 것이다.- 미셸 푸코-
이 지점에 나는 '존재의 미학'을 끌어들인다.
대중의 의미는 조작되고, 실체가 없는 허구 속에 존재할 뿐이며 의사는 진단하고, 당사자는 죽을 뿐, 사라져 버린 철학, 혼돈의 예술에 무관심과 무감동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젠 그 어떤 장르나 이즘 보다는 좀 더 진솔한 내면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반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