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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시/미술전시회

[미술전시]한전플라자 초대 안준희展

한전플라자 초대 안준희展

'빈 하늘에 던지는 사유'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작가상세정보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08년 5월 7일 ~ 5월 16일

한전플라자갤러리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1355번지  한전아트센타 전력홍보관 1층 T.02-2105-8190

www.kepco.co.kr/plaza/




안준희 작품전에 부쳐

1983년 첫 작품전 이후 부단한 발표회를 가졌으니 안준희의 작가로서의 삶도 어언  4반세기가 되었다. 적지 않은 세월이다. 그간 필자는 안준희의 오래된 관객으로 지내오다 이번 작품전엔 감히 소감을 쓰게 되었다.

안준희의 작품을 대하면 지워지지 않고 맴도는 느낌이 있다. 창작의 길에 동행이 없는 고독이다. 안준희는 많은 사람들의 행렬에 섞이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기를 고집한다.  이 집요한 미련 때문에 동행이 없고 고독하다. 그러나 이 고독엔 궁상이 없어 보인다. 직관으로 승부를 겨루는 긴장을 감내하기 때문이다. 단칼에 진리의 묘처에 당도하려는 직관을 구사하는 배포가 있다. 직관의 길은 군더더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안준희의 작품은 조작을 허락하지 않는다. 직관이 관통한 주위엔 고요한 여백이 마련된다. 이 여백의 자리에 명상의 틈을 열어둔다.  애써 호흡을 조절해 유연한 응시를 시도하나  내면에는 숨 막히는 전율이 흐른다. 하지만  황토와 석분이 상호 삼투해 빚어낸 자연의 빛을 끌어들여 화면의 긴장을 달래고 있다. 안준희의 작품은 여기서  미학적 평정을 달성한다.



붓을 든 초창기부터 안준희는 <획>에 천착하는 걸 알 수 있다. 회화 작업이 의지하는 색과 선의 구성을 짐짓 모른체하고, 절대 절명으로 생동하는 획에 집념한다. 그런데 이 획은 우주를 읽어내는 특정한 문자의 암호로 이해된다. 획의 밝음과 어둠, 또 날카로움과 둔탁함, 장, 단에 따라 문자는 다양한 암호를 지시한다. 작가는 마술사처럼 획을 조율하며 우주를 해독한다. 획은 물론 자아의 음성과 심상의 궤적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와 마음의 형국을 드러내는데 미진하다지만  안준희는 획을 통로로 투명하게 자아를 분출한다. 안준희에게는 이런 내적 성찰의 운필이 성공하고 있어 부러운 일이다.



언제 들어도 정겨운 동요,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기에 해마다 봄바람은 불어오나”가 있다.  봄이면 으레 무상으로 불어오는 봄바람을 즐기면 되지, 누가 봄바람을 보내주는지 궁금해 할 필요가 없는 일인데 사람들은 잠자코 있지 않는다. 사물의 근원과 이유를 향한 형이상학적 동경에 몸살을 한다.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은 인간과 자연 아니 세계의 온통을  자신의 언어로 독해하려는 욕구에 매달려 왔다. 안준희도 이 범주에 든다. 몇 가닥의 획으로 우주를 소화하려는 열망을 간직한 화가다. 그러나 세계나 우주는 간단한 어휘나 단순한 개념으로 서술이 가능한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안준희는 다윗처럼 승률 낮은 승부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안준희의 이런 가상스런 용기가 싫지 않다.



근자에 안준희는  실존의 세계로 눈을 돌린 인상이 든다. 실존은 현재와 대지를 토대로 하는 존재 양상이다. 실존은 항상 특정한 ‘지금’을 살며,  ‘여기’를 이탈해서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조건을 갖는다. 안준희가 선택한 실존에의 시각은 자신의 작품 속에 구현코자 하는 미적 이데아를 추적하는 작업의 올바른 절차로 생각한다. 작가의 고향 보성강 강변의 작은 갈대의 흔들림을 통해 우주의 바람소리를 명증하게 감지하는 그런 절차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초월적 세계는 우리 주변의 사소한 것들과 무관하게 있을 수 없다. 결국 실존은 위대한 존재의 비밀이 은닉된 매개체로 군림하는 것이다. 연륜 탓일까. 이제 흐드러지게 무성한 삶의 편린들을 향해 애정의 눈길을 보내는 작가의 여유가 든든해 보인다.



어쩌다 안준희와 마주 앉으면 고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고민을 읽게 된다. 나름대로의 세월 덕에 면역이 생겼을 법한데도, 그림을 제대로 못 해 쌓인 한을 실토하곤 한다. 그러나 작가로서 작업과 관련한 고뇌와 고통은 왜 그런지 당연해 보인다. 인간으로, 그리고 하나의 생활인으로서도 완벽하려는 염원이란 대개는 이상에 속한다. 더욱 예술에서 완벽한 창조적 성취란 백일몽에 가까울 것이다. 젊은 날을 잠식한 고뇌들이  농익은 먹빛으로 돌아와 캔버스를 수놓으니, 이제 안준희는 행복해도 되겠다. 언제 봐도 생활인으로도, 작가로서도 자기 정체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안준희의 삶의 저력이 대견할 뿐이다. 아니,.............................. 멋지다.*

(성진기,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