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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및교육/세계속 명화이야기

[이주은의 마음의 감기를 치유하는 명화]프리드리히 ‘북극해’

[이주은의 마음의 감기를 치유하는 명화]프리드리히 ‘북극해’


■삶에 지친 그대..“춤 한번 추실래요?”

인사동 찻집에서 모과차 한 잔을 마시면서 쉬고 있는데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어설픈 역술가가 무료로 사주팔자를 봐준다고 했다. 됐다고 했지만 벌써 앞자리에 앉아서 생년월일을 받아 적고 있었다. 필자에겐 물이 부족하니, 물가에 살거나 아니면 집에 수족관이라도 두라고 권했다. 그래야 건강하고 성공한단다. 역에서 말하는 ‘물’의 의미와는 별개지만, 실제로 요즘 들어 물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었다.

필자가 말하는 물기란 유머를 의미한다. ‘Humor’는 라틴어로 액체와 즙을 뜻하며, 재치라기보다는 기분과 관련된 단어였다. 서양에서는 체질에 물기가 적절해야 자신도 재미나게 살고 다른 사람도 웃게 해 준다고 믿었나 보다. 물기가 적절하다는 것은 물의 양이 많고 적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물의 속성이 리듬 있게 흐르는가, 또는 정체되어 있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몸과 마음에 리듬을 만들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춤이라고 생각한다. 마침 오늘 라디오 아침 방송에서 기분을 촉촉하고 싱싱하게 해준다며, 댄스곡을 연속으로 틀어주었다. 왈츠곡과 디스코곡도 좋았지만, 특히 피아졸라의 탱고 곡은 듣고 있노라니 마치 건조한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기분이 흠씬 젖어드는 듯했다.

경제가 어려운 때일수록 오히려 댄스는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댄스는 음악을 포함해서 동작 자체에도 확실히 기분을 상승시켜주는 요소가 있는 것 같다. 댄스 열풍이 미국 대륙을 거세게 휩쓸고 지나간 때는 1930년대였는데, 이 시기 미국은 경제대공황으로 가장 어려운 때였다. 당시 린디 홉(Lindy Hop)이라는 격렬한 동작의 사교댄스가 개발되어 도시마다 릴레이로 댄스 경연대회가 열렸다. 이 춤의 하이라이트는 남자가 파트너를 공중으로 띄워 빙그르르 한참을 돌리다가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오게 하는 숨이 멎도록 멋진 피날레 장면에 있었다. 폭발과 해소를 동시에 맛보게 했던 춤이었다.

“나 춤 배워볼까?” 리듬을 타면 생활이 경쾌해질 것 같아서 한 번 진지하게 꺼내본 말이었다. 늘 얼굴을 보고 사는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반응들이 비슷하다. “요즘 사는 게 따분하니?” “본격적으로 중년에 접어드신 게로군요. 축하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춤이라는 단어는 선뜻 일탈이라는 의미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의 국민배우 야쿠쇼 고지가 출연했던 영화 ‘셸 위 댄스’(1996)가 생각난다. 이 영화 속에서도 린디 홉과 비슷한 사교댄스 경연대회 장면이 나온다.

통근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십대 초반의 남자는 우연히 차창을 통해 댄스교습소 창가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된다. 호기심에 그 곳을 찾아가본 그는 얼떨결에 사교댄스를 배우기 시작한다. 주인공 남자도 삶의 리듬을 잃어가는 단계에 있었다. 마음속 물기가 운동을 멈추고 서서히 결집·응고되는 때가 바로 그 나이대인 것이다.

독일의 프리드리히가 그린 ‘북극해’를 보라. 이것은 빙하를 그린 것으로 시원한 단색조에 날카로운 형상이 매우 산뜻하다. 낭만주의자인 화가는 자연이 지닌 극단적 차가움에서 경외감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일정한 형태를 가지지 않은 물이 이렇듯 각이 진 모습으로 서 있다는 것도 한없이 경이롭게만 보인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 그림은 물이 흐르지 않고 덩어리 상태로 경직되어 있는 모습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의 마음속일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감정의 물결도 일렁이지 않고, 생각의 순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외부의 충격도 탄력 있게 흡수해내지 못하고, 새로운 것도 포용할 수 없을 정도다.

물이 통 흐르지 않던 주인공 남자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는 어느새 춤에 푹 빠져 머릿속이 온통 춤 생각뿐이다. 지하철에 서 있을 때도,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도, 심지어는 화장실에서도 스텝을 연습하고 있다. 그의 마음속에 리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자는 내면에 잠자고 있던 리듬 하나를 일깨워낸 것이다. 길을 갈 때에도 그 리듬이 그를 저절로 걷게 해주었다. 그것은 분명 망치로 두드리는 것 같은 반복적이고 둔탁한 소리는 아니다. 결코 지치게 하거나 지루하지 않은, 타면 탈수록 흥이 나는 그런 리듬이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중년의 남자가 마치 바람이 난 듯 일탈로 내용을 몰고 가지만, 후반부에서는 초점이 다른 것으로 옮겨진다. 남자가 찾은 것은 일탈에서 오는 자극이 아니라, 몰입을 통한 기쁨이었다. 메마른 잎사귀에 방울방울 촉촉한 이슬방울들이 맺힌 것이다. 영국의 상상화가 도일이 그린 ‘선창 아래 나뭇잎들-가을 저녁의 꿈’의 장면처럼, 남자의 마음속에서도 수많은 이슬 요정들이 나타나 초록빛 햇살 아래 흥겨운 춤을 춘다. 이것은 분명 정체된 물이 아니라, 울렁울렁 춤추는 생기가 넘치는 물이다.

도일은 어린이 동화책 속에 나오는 상상의 세계를 주로 그렸던 화가이다. 그의 그림은 보는 이를 어린 시절로 초대한다. 재미난 일에 몰입하다보면, 해가 저물어 주위가 어둑어둑해져 있는 줄도 몰랐던 그 때가 언제였던가. 어느 날 손에 쥐고 있던 풍선을 하늘로 놓쳐버린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날이 유년기의 마지막이었나 보다. 함께 노닐던 요정들은 작별인사도 없이 모두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중년이 되어버린 이제는 사는데 득이 되는 일만 중요해졌다. 주변은 새로운 모험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라, 이미 다 알고 있는 일들을 습관처럼 처리해야 하는 시시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물기가 부족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사람들에겐 자기에게만 들리는 리듬이 있다. 내면의 리듬이 울릴 때에는 그것에 가만히 몸과 마음을 맡겨봐야 한다. 그 리듬에 몰두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날아가 버린 풍선이 다시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래전 떠났던 요정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어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우리 춤 출까요?”

/myjoolee@yahoo.co.kr

■사진설명=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북극해', 1824, 캔버스에 유채, 97.7x128.2㎝, 함부르크 미술관(위쪽작품). 리처드 도일, '선창 아래 나뭇잎들:가을 저녁의 꿈', 1878, 종이에 수채, 50x77.5㎝, 대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