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리트(Rene Magritte)-(1898-1967)
전혀 상관없은 사물을 병치시킴으로써 독특한 이미지를 드러내 보였다. 이후 '팝아트'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그리뜨는 1898년 벨기에 레신느 태생인 그는 브뤼셀의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후, 회 화에 대한 여러 실험을 시도했다. 어린 소년시절에 본 무성영화에서 큰 감명을 받아 상상력 을 크게 키우게 되었다는 그는 1927년부터 1930년까지 프랑스에서 브르통과 가까이 지내면 서 초현실주의의 화풍을 성립해냈다. 또한 보들레르, 말라메르와 미국의 괴기소설작가 에드 가 알렌 포의 문학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마그리뜨는 대상을 세밀히 표현하면서 동시에 관례적인 틀로부터 그 대상을 떼어내어 다른 곳으로 공간이동을 시킨다. 그는 대상을 그것의 본질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는 일상적 의미 작용을 대상으로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꿈 속의 환각과 결합하는 통합적인 비젼 속에서 현실을 창조하고자 하였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엄청난 형이상학 덕택에 '신비의 거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그의 최 초 초현실적인 작품은 1925년과 1929년 사이에 시작되는데, 1928년에 그린 [폭풍우의 조짐] 은 그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여인의 석고 토루소, 튜바, 그리고 등의자의 서로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은 세 개의 오브제 가 바다위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있다. 토루소는 화가의 아틀리에에, 튜바는 연주회장에서 그리고 등의자는 평범한 거실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이지만 물결이 이는 바다와 어딘지 짐 작하지 못할 한적한 해변가의 상공이라는 엉뚱한 장소로 옮겨 놓아, 이들 오브제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친밀성을 완전히 배제시켰다.그대신 우리는 세가지 물건과 바닷가, 그리고 푸른 하늘 모두에 낯설고도 엉뚱한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그리뜨의 괴이함은 1934년에 그린 [붉은 모델]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마그리뜨의 콤바인 오브제(Combines Objects)즉 '혼합된 물체'라는 형식의 그림 이다. 이 콤바인 오브제는 실제 현실에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새로운 형체지만, 그의 꼼꼼한 사실주의적 화법에 의해 그림안에서 그럴싸하게 존재함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당혹감과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구두와 발이 서로 다른 물체지만 우리는 습관적으로 사람의 발과 거기에 신겨지는 신발에 대해 친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 마그리뜨의 그림에서와 같이 신발의 앞부 분이 다섯 발가락을 가진 사람의 발로, 발의 뒷굼치 부분이 낡은 구두로 연결되어있을 때 비로서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일상의 상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것이다. 그림을 통해 인간이 사고가 벌이는 연극을 표현한다는 개념.즉 외부의 모습이나 가시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기이하면서도 시성이 담긴 사고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회화개념을 마그리트 는 갖고 있었다. 주요 작품 : 의외의 대답, 궤뚫어진 시간, 인간 상태 등
마네 (Edouard Manet,1832~1883)
프랑스의 화가. 파리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전주의 화가인 쿠튀르의 제자로들어가 그림 공부를 하였고, 루브르 박물관등에서 고전 그 림을 모방하였으며, 유럽을여행하면서 에스파냐의 고야·벨라스케스 등의 영향을 받았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담은 그림을 그렸는데,처음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점차 사실 묘사와 빛을 이용한 표현 기법이 인정을받게 되었고, 이는 인상주의 화법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뒷날 그를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인상파와 같은부류로 불리는 것을 꺼렸다. 그는 이전의 화가들이 즐겨 그린 어두운 화면에 밝음을 도입하는 등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 여 후세의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주요 작품으로는 〈피리 부는 소년〉 〈풀밭 위에서의 식사〉 등이 있다.
마르크(Franz Marc)-(1880~1916)
청기사 그룹의 중심 멤버인 마르크는 뮌헨 태생의 도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골의 자연 을 동경한 나머지 삭막한 도시를 멀리하고 동물을 기르는 생활을 즐겼다. 그러면서 그는 동 물들의 모습과 생태를 직접 관찰 꼼꼼하게 그렸다. 그는 동물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그리게 되면서 형태의 단순성을 강조해 나가고, 점차로 색 깔 자체를 하나의 표현 매체로 사용하기 시작하게 된다. 색면을 중시하는 구성을 보이며 점 차 더욱 강력해지는 색상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동물의 목가적인 정경을 통해 동물과 자연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표현하는 작품을 집중 적으로 제작한다. 그가 그리는 동물은 단순한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자연의 한 상징적인 주제였다. 다시 말해 동물은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상실해 가고 있는 순수한 존재의 한 상징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1912년에 그린 [붉은 사슴] 에는 흰 구름이 오가는 푸른 산꼭대기에서 평화롭게 뛰놀고 있 는 두 마리의 붉은 사슴을 그린 것이다. 구름과 산, 사슴과 초목 모두 같은 비중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리듬으로 표현되면서 화면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대자연의 조화라는 관점 에서 구성되었다. 그의 이런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친밀감은 한해 전에 그린[작은푸른 말] 에서도 볼 수 있다. 초록의 들판에서 각자 몸을 다듬고 있는 세 마리의 푸른 말들이 서로 한 덩어리로, 흡사 뭉 게구름같이 엉켜있다. 이 말들이 가지고 있는 푸른색은 붉은 사슴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상징적인 색채이다. 1912년 마르크가 파리방문시 보았던 미래주의 전시회와 들로네를 만남으로써 분석적 입체 주의의 미학을 수용한 새로운 작품관을 갖게 된다. 이후 그는 모난 각이 드러난 역동선을 사용한 구성에 보다 추상적인 방법으로 채색한 작품 을 발표한다. 따라서 그 이후 마르크의 작품에서는 들로네적 요소및 큐비즘, 미래파의 영향 을 엿볼 수 있으며 그것들은 마르크 자신이 이루어낸 완벽하게 통일된 리듬안에서 신비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티롤'은 광대한 스케일의 산이 있는 풍경으로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빛의 투쟁을 묘사한 것 이다. 마르크는 1916넌 베르덩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이 작품이 생애 최후의 이젤화가 된 셈이다.
마르티니 (Simone Martini,1284?~1344)
이탈리아 화가.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시에나파의 대표적인 화가. 당시 이탈리아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비잔틴 미술을 거부하고 프랑스의 고딕 양식을 받아들 여 세밀한 구성과부드러운 색채를 나타내는 독특한 시에나파의 화풍을 세웠다. 1339년 교황의 명령으로프랑스의 아비뇽으로 갔는데, 이 곳에서 그는 고딕 양식의 전통에 시에나파의 감미로운화풍을 어우러지게 하여, 독특한 아비뇽 화파를 이루었다. 14세기 말부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많은 화가들은 이 아비뇽화풍에 따라 그림을 그 렸다. 주요 작품으로는 〈마에스타〉 〈수태고지〉 등이 있다
마원 - 馬遠 (116065?~1225?)
중국 남송 시대의 화가. 호 흠산. 산시 성에서 태어났다. 하규와 함께 남송 후반기의 원체 산수화를 대표한다. 그의 집안은 북송 말기부터 아들 마인에 이르기까지 7인의 계승화가가 나온 것으로 유명하 다. 여백이 많은구도를 좋아하였으며, 독특한 화풍으로 그림을 그린 그는 집안의 화풍을 계승하 는 한편,산수·인물·화조 등 여러 분야에 뛰어났다. 특히, 산수화에 있어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없었고, 광종·영종 시대에 걸쳐 궁중 화가로 활 동하였다. 그의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우중산수도〉는 남송 시대의 최고 산수화로 꼽힌다. 그의 화풍은 원나라의 손군택을비롯하여 원·명 시대에 많은 후계자를 낳았고, 외국에까지 전해졌다.
마투라 미술
인도 북부 웃나르프라디슈 주, 델리에서 동남 쪽으로 약140km 떨어진 자므나 강의 서안에 위치한 옛도시 마투라를 중심으로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7세기까지 융성했던 종교 미술. 특 히 쿠샨 왕조와 굽타 왕조 시대에 번창했는데, 독특한 작풍을 지닌 고대 인도 미술의 전개 에 크게 공헌하였다. 석조에는 시크리에서만 생산되는 누런 반점이 있는 적색 사암을 사용 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특색이며, 유물은 거의 단편적인 것이지만 많이 발견되고 수집되 었다.(주로 마투라, 라크나우, 뉴델리의 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각의 대상은 대체로 불교 및 자이나교에 속하며, 특히 불상이나 야크시 상이 주목된다. 이 도시는 동서 교통의 교차로 위의 요충지로서 옛날부터 상업적으로 번영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여러 종교와 조형활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그 전개는 대개 고대에 한정되며, 중세에는 볼만한 유품이 거의 없다. ① 초기(기원전 5세기 또는 기원전 4∼1세기)는 인도 미 술사의 고대 초기에 해당하며, 약간의 석조 외에 테라코타 상이 많다. 후자는 주로 지모신이 나 부인의 작은 상인데, 극히 소박하고 유치한 작품에서부터 기원 전후 무렵의 꽤 진보된 양식의 것까지 많이 출토되고 있다. 석조도 일찍부터 시작하여 근교인 파르캄에서 출토된 야크샤 신상(기원전 3세기) 등은 자연발생적인 민간 미술의 가장 오래된 예이며, 그 외에 난 순에 새겨진 부조 단편(기원전 2세기∼기원전 1세기) 등이 있다. ② 쿠샨 시대(1세기∼4세기 중기)는 마투라 미술의 진가가 가장 발휘된 시기이다. 그 초기, 즉 크샤트라파 시대라고 일 컬어지는 외족의 지배기에는 현저한 발전이 없었으나, 2세기 초기부터 인도에서 처음으로 부처의 상이 나타났고, 2세기 중기까지에는 얇은 옷을 걸친 마투라 독자적인 불상형식이 성 립되었다. 순 인도풍의 불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음의 제 2쿠샨 왕조 시대(150∼250년 경)는 불상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미술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서 많은 유물(단편이 많음) 외에, 갠지스 강 유역의 불전이나 불사를 위한 조사에도 호응함으로써 이유역의 불상 제작 을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자이나교 미술이 출현하는 것도 이 무렵부터인데, 불교와 같이 스 투파를 제작하고 숭배하였으며, 또한 조사의 상이나 독특한 봉납판 등을 제작하였다. 그외에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들 두 종교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난순 등의 부조에, 술을 마시는 남녀의 군상이나 관능적인 누드의 여인(야크시)상으로서 특히 후자의 요염한 자태의 표현은 종교 미술 중에서도 가장 이채롭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마투라 조각은 세련되지 않고 약 간은 거친 조각 수법으로, 꾸미지 않고 역동감을 강조한 순 인도적인 조형을 특색으로 하며, 당시 인도 쪼각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후기 쿠샨 시대(250∼350 년경)의 작품은 대체 로 유형적이며 생기가 없는 것이 많고, 양식적 쇠퇴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③ 굽타 시대에는 마투라 조각이 활력을 되찾아 인도 고전 문화의 융성기에 걸맞게, 숭고한 이념과 비약적으 로 세련된 조각술을 바탕체으로 신조형규범에 기초한 새로운 모습의 아름다운 불상을 만들 어냈다. 자말푸르에서 출토된 두 개의 불입상(5세기, 마투라 박물관과 뉴델리 대통령 관저 소장)이 대표적이며 사르나트의 불상과 함꼐 굽타불의 양식적 완성을 이룩하였다. 자이나교 의 조상도 함께 만들어져 몇 개의 조사상을 남기고 있으나, 마투라의 조형 활동은 불교·자 이나교와 함께 이 시대에 거의 끝난 것으로 보인다.
마티스 Henri Matisse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한 화가. 프랑스 화가. 1869년 북프랑스의 르 카토에서 출생. 처음에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나 왔으나 갑자기 병으로 입원하게 돠었고 거기서 그는 병실을 같이 쓰고 있는 옆 병상의 남자 가 가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림에 관심을 가져오게 되거 마침내 병상에 미술 교본을 가져오게 하여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였다.이것이 그가 화가로서 출발하게 된 동기이다. 퇴원 후에는 루브르 미술관에 다니면서 많은 작품을 접하였으며 이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 기 위해 1892년에는 아카데미 줄리앙에 입학하여 부게로 및 페리에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 듬해에는 국립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모로에게 사상하였다. 이 모로의 화실에서 그는 마 르케 , 루오, 카므맹, 망갱 등과 알게되었으며, 특히 마르케와는 죽을때까지 우정을 나누었 다. 그리고 이들의 친교는 후에 포비즘 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1896년에는 소시에테 내셔널 전에 첫 출품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아직도 화면의 색조가 어둡게 나타나 있다. 1988년 모로 가 사망하자 모로의 뒤를 이은 카므맹 밑에서 배웠으나 곧 그곳을 떠나 카리에르의 화실로 옮겨 인물화를 연구하였다. 이 무렵부터는 작품의 구매자도 거의 없어서 재정적인 궁핍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마르케와 함께 [1900년 세계 박람회]를 위한 장식의 책임을 맡았었다. 1900년대 초에는 시냑의 인상파에 관심을 보여 주다가 점차 형체의 단순한 파악과 원색을 대비시킨 평면적인 색면에 의한 선명하고도 대담 솔직한 표현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으 며, 1905년경부터는 팝 스타일의 화풍을 확립하면서 드랭이나 블라맹크등과 함께 포비즘 운 동에 나서서 원색의 대담한 병열을 강조하여 격렬한 개성적인 표현을 시도하였다. 1908년경 부터는 강도의 색체 효과를 억제하여 다소 암색을 포함하는 색조의 조화를 겨냥하는 등 피 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퀴비즘과는 대조적인 색체를 통한 '감서의 해방'이란 현대 회화의 길 을 제시하였다. 1911년부터 1913년 사이에는 두번에 걸쳐 아프리카의 모로코로 여행하어 열 대의 색체와 풍토 및 풍경을 체험함으로써 보다 강렬한 원색 상용을 보여 주었다. 1918년경 에는 종래의 도식적인 화풍을 완화시킨 자연을 바탕으로 하는 수법에 의한 활달한 잘풍을 시도하여 일련의 '오달리스크'를 그렸다. 그리하여 포비즘 및 퀴비즘에서 벗어나서 일시 들 라크르와의 작풍 경향을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1923년경부터는 재차 강도의 색체 효과를 추 구해갔다. 1931년부터는 한동안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영국, 러시아로 여행하였고 이어서 남양으로 출발하여 타히티섬에서 약 3개월간 체재한 뒤 돌아오는 길에 미국을 거쳐 귀국하 였다. 마티스의 예술은 이 무렵부터 최고의 단계로 접어 들어갔다. 즉 1936년 이후부터 축적 된 여러 해 동안의 제작 지식에 따라 [팝 시대]의 어떤 종류 - 형식듸 단순화를 지향해 오 던 가운데 얻어진 그의 독특한 장식적 효과 - 의 경향을 부활시켰었다. 1949년부터는 방스 에서 그의 최대 작업이었던 도미니코파 수도원에 속하는 예배당의 건축 설계 및 장식 작업 을 맡았다. 5년에 걸쳐 완성시킨 이 작업에서는 평생을 통해서 몰두해 오던 예술상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여 표현해 놓음으로써 명쾌함과 단순함에 넘치는 조형을 실현하여 그의 집 약된 예술을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다. 주요작은 파리 근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붉은 바지의 오달리스크', '장식 무늬소의 인물', '큰 실내'를 비롯하여 소련의 에르타미즈 미술관 에 있는 '마티스 부인상', 붉은 색의 조화' 및 푸시킨 미술관에 있는 '금붕어' , '댄스' 등이 다. 1954년 사망.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아프리카와 아랍쪽의 전통미술을 화면에 도입하여 대범한 변형과 강한 원색, 이국적 배경등 이 주류를 이룬다. 생의 즐거움이 나타나 있으며, 만년에는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독특한 조 형작업을 하였다. 마티스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야수주의 작가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존재이며 역사적으로 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조형표현상의 대담한 시도에 의해서 다른 야수주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신인상주의 기법을 받아들여 점묘파 풍의 그림을 그린다. 마티스는 프랑스 회화의 전 통속에서 새로움을 찾는 화가였다. 색채가 공간감과 양감을 창조해 내고 색조에 따라 화면 안에서 올바른 균형이 잡혀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티스는 짧고 불규칙한 터치와 함께 밝은 원색을 사용함으로서 색채 의 효과를 두드러지게 하였다. 그의 작품은 가능한 한 가장 솔직한 방법으로 그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는 것으로 파, 노, 빨등 인간감각의 저변을 뒤흔들수 있는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야수주의가 쇠퇴한 1908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야수파의 화법을 유지 발전 시키면서 그의 예술세계를 완성해 나간 유일한 화가이다. 그는 풍경이나 인물과 같은 전통적인 소재에서 출발하면서 보이는 외부 세계를 그대로 재현 하지 않고,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의 반응을 충실히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주 관적인 색채, 붓터치, 자유로운 선으로 나타냈다. 이러한 시도는 고호와 고갱의 선례에 영향 받은 것이지만, 마티스는 색채의 평면적 배열을 강조하면서 화면을 추상화시키는 본격적인 모더니즘 미술에 진입했다. 1900년대 초에는 시냑의 인상파에 관심을 보여 주다가 점차 형체의 단순한 파악과 원색을 대비시킨 평면적인 색면에 의한 선명하고도 대담 솔직한 표현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1905년경부터는 팝 스타일의 화풍을 확립하면서 드랭이나 블라맹크 등과 함께 포비즘 운동 에 나서서 원색의 대담한 병열을 강조하여 격렬한 개성적인 표현을 시도하였다. 1906년 삶의 환희는 단순화된 형태, 대담한 색의 사용, 종교성을 배제한 신화의 원용등의 성 격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1907년에 제작된 [호사-고요와 열락]은 야수주의 전성기 때의 마티스의 예술세계를 잘 드러 내는 작품이다. 마티스가 그리고자 한 호사란 세련과 단순화로 제어된 삶의 풍요로움, 다시 말해서 고요와 열락, 질서와 아름다움을 노래한 보들레르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마 티스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통하여 고전적인 누드화의 절대적 미를 추구하기보다 는 형상의 율동감 있는 리듬과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평면적인 색조를 통해 화면의 명쾌한 단순화와 장식적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다. 그에게 있어 표현과 장식적 구성은 별개 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 회화의 전통적인 정신인 명석함과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현대적인 형태와 색의 미를 창출하고자 한 것이었다. 1908년부터 1917년까지 더욱 리듬감 있고 유연한 선의 형태와 더욱 강력한 색채의 장식예 술(세라믹, 성화, 옷감) 을 발견해 그의 그림에 이를 도입한다. 1919년 이후 십년간 색채의 효과, 장식요소의 극대화, 복잡한 공간구성연구 등을 하였다. 1918년경에는 종래의 도식적인 화풍을 완화시킨 자연을 바탕으로 하는 수법에 의한 활달한 작품을 시도하여 일련의 '오달리스크' 를 그렸다. 그리하여 포비즘 및 큐비즘에서 벗어나서 일시 들라크르와의 작품경향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1923년경부터는 재차 강도의 색채 효 과를 추구해갔다. 1931년부터는 한동안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영국, 러시아로 여행하였고 이어서 남양으로 출발하여 타히티섬에서 약 3개월간 체류한 뒤 돌아오는 길에 미국을 거쳐 귀국하였다. 마티 스의 예술은 이 무렵부터 최고의 단계로 접어 들어갔다. 1930년대에 이미 거장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던 마티스는 2차대전 후의 화업으로서 새로운 세계에 몰두하게 된다. 오로지 삶을 찬미하고,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이 가져다 준 하나 의 장식적 아름다움의 세계이다. 야수주의적 분방함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게 된다. 야수주의의 본질을 끝까지 고수한 마티스의 1948년 작인 [빨간 실내]에는 그의 만년의 화 풍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빨간색이 화면에 강한 힘을 부여하면서 삶의 환희를 상징하고 있다. 말 기 그의 예술적 목적은 '하루의 힘든 일을 마치고 돌아와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는 듯한 화 음과 평온히 깃든 작품' 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1949년부터는 방스에서 그의 최대 작업이었던 도미니코파 수도원에 속하는 예배당의 건축 설계 및 장식 작업을 맡았다. 5년에 걸쳐 완성시킨 이 작업에서는 평생을 통해서 몰두해 오 던 예술상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여 표현해 놓음으로써 명쾌함과 단순함에 넘치는 조형을 실현하여 그의 집약된 예술을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다. 마티스는 색채의 자율성을 회복시킨 최초의 작가였으며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제작한 작가 로 유화에서부터 벽화, 삽화, 발레를 위한 무대장치와 의상디자인, 타피스트리, 스테인드 글 래스, 조각 등 광범위한 제작활동을 하였다. 주요 작품 : 춤, 붉은 실내, 음악, 오달리스크 등
만다라
만타라라고도 함. 여러 존상의 깨달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불상, 보살, 명 왕, 신 등의 일정한 체계와 조직을 바탕체으로하여 그린 그림이다. 관상, 예배의 대상이기도 하다. 인도에서는 의식수법을 할 때마다 토단을 쌓아 그 위에 색분을 가지고 그렸는데, 티베 트나 네팔에서는 사원의 벽이나 화포에 물감을 가지고 그린다. 라마교의 만다라는 인도의 탄드라 불교와 마찬가지로 금강계 만다라의 계통을 이어 받는데, 일본에 전래된 금강계와 태장 양부의 만다라는 형식이나 내용이 다르다. 힌두교의 얀트라와 유사한 기하학적인 선 속에 여러 존상을 작게 배치한 것, 특정한 존상을 중앙에 크게 그리고, 그 전후 좌우에 금강 계 오불이나 그와 관련된 여러 존상을 배치한 것, 천상의 제천의 궁전 가운데에 여러 존상 혹은 라마교 각 파의 조사를 병렬한 것 등, 그 형식은 여러 가지이다. 주변의 신들 가운데는 티베트, 네팔 등의 토속신을 받아들인 만다라도 있다.
만화(comicstrip, cartoon)
대상의 성격을 과장하거나 변형하여 우스꽝스럽고 명료하게 인생이나 사회를 풍자·비판하 는 회화의 한 형식. 일찍이 서양의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의 벽화에서 동물을 의인화했는데, 그 풍자는 의미는 전하지 않지만, 만화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또 그리스, 로마에서도 그려 졌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있고, 폼페이의 벽화 중 어떤 것은 외설적이지만 만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형태의 만화는 19세기 말에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특히 1회분씩 또는 컷으로 한 사건을 이야기한 만화를 코믹 스트립(comic strip)이라고 부르 는데, 이 만화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95년 미국에서였다. 이 만화는 연속된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 연속성을 위해 스토리가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형체에 의존했다. 이 연속 만화는 순전히 오락적 기능을 위해 발행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시각 매체중 가장 대중적인 것의 하나 가 되었다. R. 하이프는 만화의 대중성과 광범위한 유포는 그 상투적인 단순성에 있다고 지 적했다. 만화가들은 동물 이야기에서 우주 여행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최근에는 정치적 테마 에 점점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모티브를 활용하고 있다. 한샔 이 만화 는 윌리엄 호가드, 오노레 도미에와 같은 화가의 영향을 받았지만 최근에는 반대로 화가들 이 만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 20세기의 몇몇 미술가들은 상업 디자이너로서 출발하기도 했 는데 이들 중 어떤 작가(리오넬 파이닝거)는 1906년에 두 가지의 만화 시리즈를 제작한 바 있다. 그러나 만화가 진정한 자기영역을 차지한 것은, 미술가들이 기능이 다양해진 만화에 능동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부터였다. 광고나 포스터처럼 만화는 많은 현 대 화가의 작품속에 도입되었다. 이들 현대 화가 중 어떤 작가는 만화를 단순히 일시적인 모티브로 사용했지만, 어떤 작가들은 그 형식과 테마까지 도입했다.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콜라주를 만들었던 제스 콜린스는 전자를 대표하는 미술가였다. 반면에 1958년 이래 전 작 품의 기초를 만화에 두었던 오이빈트 팔스트룀은 후자의 전형적인 대표자이다. 만화의 도입 은 현대 화가들이 작품을 정서적 내용을 공식화하고 감소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로이 리히텐스타인과 발레레오 아다미), 그림의 표면을 연속된 구성에 찌그려 넣었고(에르베 텔레 마크와 베르나르 랑시야크), 구별이 없는 단순한 색깔을 사용(앨린 다칸젤로와 오트만 알트) 하게 했다. 만화의 발전은 팝 아트와 SF 소설의 발전과도 연결되어 있다.
말레비치 (Kazimir Severinovich Malevich,1878~1935)
소련의 화가.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몬드리안·칸딘스키와 함께 추상주의 예술의 개척자로 손꼽힌다. 1912년 파리를 여행한 뒤 기하학적 추상화를 발표하였으며, 〈흰 바탕에검은 네모꼴〉로 파 문을 일으켰다. 초기에는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 추상예술을 이론화하여 쉬프레마티슴(절대 주의)을 주장하였다. 소련 정부가 들어선 뒤 모스크바의 국립 응용 미술 학교 교수로 지냈으나, 1921∼1922년 정 부의 미술 정책이 바뀜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졌으며, 자유를 잃은 채 지냈다. 1926년에는 독일에 가서 쉬프레마티슴 선언을 자세히 설명한 《비구상의 세계》를 출판하였 으며, 그 후 다시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사망하였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흰색 위의 흰색〉 등이있다.
매너리즘(Mannerism)
17세기 이후부터 미술에 관한 문헌에 쓰이다가 역사적 비평적 의미가 함축된 복합적인 의미 로 문학 비평 및 신학에도 통용된 용어. 보통 미술사의 시대 구분에서는 르네상스에서 바로 크로 이행하는 사이(약1530∼1600년)에 이탈리아에서 나타났던 과도기적인 미술 양식을 말 한다. 매너리즘이란 종종 성숙기의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쇠퇴를 뜻하거나,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을 일컫는다. 또 성숙기의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또 그 자체로 완결된, 유럽에서 성했던 실재하는 양식이라는 상반된 주장 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퇴보에 도달한 전통주의', 또는'정신적인 위기의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죽어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등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그러 나 20세기 초 매너리즘 시대의 예술가들에 대한 관심이 부활되면서 드볼작의 선도 아래 독 일 비평가들과 역사가들은 매너리즘을 엘그레코에서 정점에 이른 유럽의 예술 운동으로 소 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매너리즘이 독일 표현주의의 미학적 왜곡 및 정신적 격렬함 등이 무분별하고 기묘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는 매너리즘을 '독특 한 방식에의 과도한 또는 부자연스러운 탐닉' 이라고 정의한다.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영국의 역사가들은 매너리즘이라는 말보다 '후기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한편 영어 의 '틀에 박힌(mannered)' 이라는 비전문적인 비평 용어는 19세기의 편견을 내포하고 있는 말로 특정한 양식이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35년 무렵부터 영국의 미술사가들은 'mannered'라는 단어와 'Mannerism'을 구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매너리즘이 보여주는 긴장과 과장을 이 시대가 르네상스 시대와 같이 하나의 이상에 의해 지배되던 시대가 아니라 여러 경향들이 교차하여 갈등을 일으키던 위기의 시대 였던 데서 오는 일반적인 불안의 반영으로 해석했다.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프랑스 궁정 문학이나 이탈리아에서의 '매너' 라는 말은 보편적 인간 행동과 예술 양식에 사용되는 말로 영어의 '스타일(style)'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뜻을 갖고 있었다. 바자리에 의하면 '매너'는 유사한 예술 작품의 바람직한 성격을 뜻하는 '우아함'이라는 말과 사실적이라기 보다는 이 상화된 아름다움, 기품, 세련, 능숙함에 버금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이 고전적 아름다움과 조화를 추구하는 르네상스의 이상에 의식 적으로 반기를 들거나, 전통과의 단절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나 이유는 없다. 그들은 오히려 좀더 미묘하고 세련된 우아함을 추구하려고 했으며, 코렛지오와 라파엘로, 미켈란젤 로가 이룩했던 최상의 완벽을 계속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의 교리와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예술가들의 독창성과 상상력이 장려되었다. 그리하여 과장되고 병적인, 때로는 괴기하기까지한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또 전문가와 소수의 지적인 엘리트에게 부응하기 위해서는 심원한 암시, 놀라움, 새로움을 추구해야 했다. 마침내 16세 기 말에 와서 고전적 균형, 이성적인 자세, 불안정한 구도, 자의식이 강한 기교, 모호함의 강 조로 변형되어 오늘날의 초현실주의의 한 특성을 예고했다. 이탈리아의 매너리즘의 장식적 우아함, 지적 애로티시즘의 장식적 우아함, 지적 애로티시즘 등은 프랑스의 퐁텐블로 화파 속에서 프랑스적 취향으로 변모했다. 영국에서의 매너리즘의 영향은 미약하나마 엘리자베스 시대의 미니아튀르 예술에서 엿보인다. 1590년대에 매너리즘 은 카라밧지오의 사실주의와 카라치의 신고전주의에 밀려나게 된다. 그 후 18세기 말, 몇몇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관심이 일시 부활되었을 뿐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초현실주의자들은 자신들과 매너리즘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매너리즘에 대한 20세기의 관심을 일 반적으로 그 동기가 모호하고 해석상의 의견도 엇갈리고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매너리즘은 기교주의, 형식주의, 현상유지를 고수하는 경향이나 자세를 비난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멀티플 프로젝션(multiple projection)
2대 이상의 영사기를 사용하여 복수의 영상, 일찍이 없었던 마술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방법. 영상 표현의 틀을 확대한 점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1967년의 몬트리올 만국박 람회에서 일약 화제를 모았는데, 그 역사는 의외로 길다. 제1호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서 상영된 그리므앵 상송의 <시크로마>이다. 이것은 10대의 영사기로 360도의 화면을 구성 했는데 영화는 단 한 번의 상영만으로 중지되고 말았다. 전전의 것으로 유명한 것은 아벨 강스의 3면 스크린인<나폴레옹>(1925)이고, 전후는 찰스 임즈의 <샘플 레슨>(1951)이 최초 의 것이다. 그 후 브뤼셀 만국박람회(1958)이래 각 만국박람회를 비롯하여 미국, 캐나다, 체 코슬로바키아 등에서 착실한 실험이 거듭되어 왔다. 멀티플 프로젝션이 1960년대 후반에 비 약적으로 발전을 보인 것은 그 나름대로의 시대적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현대에 는 격심하게 변화하는 다원적 현상이 맥락을 결여한 채 유동상의 모자이크를 이루고 하나의 혼돈된 전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또한 감도가 빠른 무수한 정보가 그 폭주한 체험을 더욱 다 층화하고 있기 샔문이다
메일 아트(mail art)
'우송 미술' 또는 '우편 미술'이라고 번역된다. 말뜻 그대로 우편을 통해 미술작품을 교류하 고 정보를 교환한다는 즉 우편통신 제도를 예술창조의 한 방법으로 이용하는 미술이다. 이 러한 통신 예술의 창시자는 미국의 화가인 레이 존슨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에, 그는 주 위의 친구들이나 낯선 사람들에게 편지를 하고, 또 그들 서로서로가 편지하게 함으로써 내 용이 변화되고 추가되는 콜라주 연작을 제작하였다. 토머스 알브라이트는 이를 '우편에 의 한 영속적인 해프닝' 이라고 표현했다. 메일 아트가 출연하게 된 것은 옵셋 인쇄기계와 복사기계의 이용으로 제작비용이 저렴해지 고 또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작가들이 예술작품을 공동으로 만들어 보고자 한 욕망 때문 이다. 메일 아트는 또 예술제도나 다른 사회 조직을 공격하고 싶어하는 미술가들의 배출구 가 됐다. 특히 그 개방성 샔문에 많은 국제 교류전이 행해지고 있다.
명암법
프랑스 어의 'clair-obscur'와 같다. 회화나 소묘에서 화면이나 묘사된 물체에 입체감과 거 리감을 표현하기 위해 한 가지 색상만을 가지고 명암을 단계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원하는 효과를 얻는 기법. 발디누치(baldinucci)가 처음 사용(1681년)한 말랬. 드 필르(De Piles)는 명암이란 "전체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눈에 휴식과 만족을 주도록 그림 속에 광선과 음영을 적절히 분배하는 미술"이라고 정의한다. <그림 강좌(Cours de peinture>(1708) 그가 말하는 밝은 부분에는 직사광선에 노출된 물건뿐만 아니라 빛을 발하는 성질을 갖는 색깔까지 포함되며, 또 어두은 부분에는 갈색우단, 검은 말, 광나게 닦은 갑옷 등 불빛 아래 에서도 그 불투명성을 보전하고 있는 색깔들 모두가 포함된다. 명암법은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의해 완성되고, 바로크 시대에 크게 활용되었다. 유명한 명 암법의 대가로는 렘브란트를 들 수 있으며, 그 외에도 배리(James Barry), 오피(John Opie), 푸셀리(Henry Fuseli) 등이 있다.
모네 Claude Monet (1840-1926/프랑스)
프랑스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 냈다. 1865년 이후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 그뢰르 아틀리에에서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마네 등의 인상파 화가들과 친교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1874년 최초로 인상파 화가전을 가졌는데 여기에 출품된 '해돋이 인상'의 작품에 의해 이 그룹의 명칭이 생겨났다. 1891년 지베르니에 있는 농가를 사서 연못을 만들고 27년간 '수련'의 연작을 그렸다. 대표작 으로는 '강', '생라자르역' 등이 있다.
모네 (Claude Monet,1840~1926)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으며, 18세때 그 곳에서 화가 부댕을 만나 그림 공부를시작 해서 바다 풍경을 비롯하여 주로 자연을즐겨 그렸다. 1862년 파리로 나가 피사로·르누아르 등과 사귀며 그림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살면서 센강변의 밝은 풍경을 그려 인상파 양식을 개척하였다. 인상파라는 이름은, 1874년 파리에서 ‘화가·조각가·판화가·무명 예술가 협회전’에 모 네가 〈인상·일출〉이란 제목으로 출품한 작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때부터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 집단을 인상파라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모네는 인상파 의대표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주로인물화를 그렸으나, 나중에는 주로 빛에 의한 변화를 그리는 데 몰두하였고, 색채 분할방법으로 풍경화를 그렸는데, 색채는 빛의변화와 함께 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밖의작품으로는 〈루앙 대성당〉 〈수련〉 〈소풍〉 등이 있다.
모노그램(monogram)
성명의 머리글자 따위를 짜맞추어 도안화 한것으로서, 작품의 서명으로 쓰이기도 하고, 기호 나 인감으로 쓰이기도 한다. 문자 이외의 형태를 빌린 것, 문자와 다른 도안을 결합한 것도 있다. 모노그램이 보편화된 것은 기독교가 공인되고 난 다음의 일로서, 그 도안은 십자가 부 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초기에는 그리스 문자와 결합해서 제작되기도 하였다. 핵심 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서, 원, 화관속에 그려지기도 하였고, 제단·문장·동 전·무덤·방패·천정 따위에 새겨져 그리스도의 지고한 승리를 찬미하는 상징으로 쓰여졌 다.
모노크롬(monochrome)
다색화에 대비하여 단일한 색조를 명도와 채도를 바꾸어서 그린 단색화. 대부분의 회화가 폴리크롬(polychrome)인데 모노크롬이라는 개념이 현대에 들어 강조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예컨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말하는 근대 회화의 매체 순수주의 운동 및 환원 주의적 미학, 그리고 이거소가 역시 밀접하게 관련된 타블로사의 종말 및 평면의 대두도 중 대한 원인으로 볼 수 있으며 미니멀 아트와도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색면 회화에 있어서 색에 대한 사고의 판단정지를 추구했던 비색주의 경향들은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1945년 이래 피에르 만조니, 루치오 폰타나와 이브 클랭, 애드 라인하트, 프랭크 스텔라, 로 버트 라우센버그, 로버트 맨골드, 필립 거스튼, 로버트 라이만 등이 전형적인 단색회화의 작 가들로 유명하다. 특히 이브 클랭은 1946년에 최초의 단색실험을 했으며 1950년대 에 그 결 정적 전개를 보였었다. 그 결과 그는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K.N. ; International Klein's Blue) 및 인터내셔널 클라인 골드, 인터내셔널 클라인 로즈 등의 특수색을 창조했고 특허까 지 얻는등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모노크롬
다색화에 대비하여 단일한 색조를 명도와 채도를 바꾸어서 그린 단색화(單色畵). 대부분의 화가가 폴리크롬 polychrome(多色花)인데 모노크롬이라는 개념이 현대에 들어 강 조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예컨데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말하는근대회화의 매체순수주의 운동 및 환원주의적 미학 그리 고 이것과 역시 밀접하게 관련된타블로*사(史)의 종말 및 평면의 대두도 중대한 원인으로 볼수 있으며 미니멀아트와도 관계를맺고 있다. 특히 색면회화에 있어서 색에 대한 사고의 판단정지를 추구했던 비색주의 경향들은 그전 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1945년 이래 피에르 만조니, 루치오 폰다나와 이브클랭,애드 라인하트, 프랭크 스텔라,로버 트 라우센버그,로버트 라이만,로버트 맨골드 등이 전형적인 단색회화의 작가들로 유명하다
모노파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에 걸쳐 일본에 나타난 하나의 미술 경향. 모노란 물, 물건이란 뜻의 일본어. 나무, 돌, 점토, 철판 등의 소재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직접 제시하여 모노와 모노, 모노와 인간과의 관꼐에 주안점을 둔 작품으로, '물질, 물체 = 물건'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내려 하였다. 1968년의 세끼네 노부오의 <위상·대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이우환은 모노파에 최초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작가였다.
모뉴먼트(monument)
기념비, 기념상, 기념건축, 기념적 조형물 일반을 지칭하는 말. 개인의 업적, 역사, 사회적 사 건 혹은 어떤 이념을 길이 기념할 목적으로 만든 것. 좀더 넓은 의미에서 살아있는 자들이 과거의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유적을 말한다. 예술작품과 관련된 모뉴먼트 에 대한 개념은 위엄, 고귀함, 영속성 등을 떠올리 만한 특징을 가리킨다.(때로는 규모와 크 기에 대한 특징으로도 쓰이지만, 본질적인 의미는 아니다.) '모뉴멘탈'은 기념물로서 예술작품의양식을 지닌 것이라는 비평적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 다. 기념비적 목적을 지닌 건축물로는 판테온, 개선문, 오벨리스크, 전쟁 추모물, 무덤 등이 있다. 과거의 많은 기념 조각들은 종교적이고 제례적인 모티브와 기억을 영속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접합시켰다. 그리스 시대에는 체육인, 기마장군, 창에 기대고 있는 통치자, 앉아있는 철학자 등 많은 기념비적인 유형이 형성되어 로마 제국을 비롯하여 서양의 기념조각에 오랫 동안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공공 기념물이 많이 세워졌다. 그러나 창조적 인 예술과 관주도 예술이 점차로 분리됨에 따라 관의 후원으로 세워진 많은 기념물들은 예 술 작품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전형적인 관주도 기념물로는 전쟁 추모물 과 기마상이 있다.
모더니스트 회화( Modernist Painting)
형식주의 미술비평가로서 미국 화단에서 영향력이 컸던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의 이 론적 개념에 바탕체을 둔 회화의 미학을 발전시킨 바 있다. 회화에서의 모더니즘을 그린버 그는 "강령 자체를 비판하는 … 강령을 강령 자체의 영역 내에서 더욱 견고하게 설정시키는 특징적인 방법을 구사하는 조류"로 정의하였다. 그는 모더니스트 회화를 마네 이후 회화의 주류를 이룬 조류로서 그 물리적인 제약을 오히려 강점으로 간주하는 회화로 본다. 여기서 모더니즘 회화의 물리적인 제약 또는 한계라는 것은 평면적인 표현, 안료의 사용 그리고 화 포나 목판에 따른 형체를 말한다. 이런 좁은 범주 이외의 회화 운동을 그린버그는 신종 미 술이라하여 제외하기도 한다.
모더니즘 Modernism (영)
예술사조의 하나.근대주의 또는 현대주의라 번역되며, 내용상으로는 일반적으로 제 1차 세 계대전 후의 시대적 특색을 막연하게나마 표현하고 있다.이시기에는 이미 표현양식이 상당 히 다양해져 사실주의, 낭만주의, 상징주의 등 온갖 경향의 작품이 만들어졌으며,예전처럼 시대의 양식을 명확하게 규정하기가 힘들어졌다. 1-핫산은 모더니즘을 도시주의,기술주의,소외, 원초주의, 에로티시즘,실험주의, 등과 동일시했 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을 포괄성,개방성, 불확정성 등을 통해 그자신을 여타의 것과 구별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모더니즘이란 결국 무슨 운동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어떤 궁 극적인 미학적 가치를 향한 일종의 지향성"이라고 정의하기도한다. 이런 점에서 모더니즘은 대중 문화라든지 대중매체 등과 엄연히 구별된다. 요컨대 모더니즘 은 이 시대의 작가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현대'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현대'를 표현하기 위해 온갖 새로운 형식이나 이론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모던 아트(Modern Art)
최근의 모든 회화와 조각을 지칭하는 일종의 연대기적인 개념어이다. 보다 좁은 의미의 그 것은 지난 시대의 양식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우리 시대를 진실되게 반영하는 예술을 적 극적으로 주장하는, 우리 시대의 특정 예술들을 가리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다. 근대 미술의 기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미술 비평이나 미술사가들 사이에서 견해가 분분 한 형편이지만, 일반적으로 19세기 중반부터라고 인식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과학, 산업, 사회등 각 분야에서의 혁명적인 변화가 미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로 써 새로은 미학이론과, 기법 및 재료의 발달, 그리고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의 변동 등이 한 꺼번에 일어났기 샔문이다. 근대 건축과 근대 디자인도 19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인식되고 있지만, 20세기로 접어들기 전에는 성숙한 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했다. '근대'라는 형용사는 1910년에서 1938년 사이에 나타나는 유럽의 미술 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근대'라는 용어를 대체할 만한 용어 를 찾기 위한 탐색도 꾸준히 있어왔다. 이와 관련하여 '컨템포러리(contemporary)' 라는 용 어가 한때 사용되었으나, 이 용어는 오직 한 세대의 예술가들만을 암시하는 듯한 인상을 강 하게 풍기기 때문에 비평가들로부터 너무 국소적이라는 비판을 바았다. 특히 영국에서는 이 용어가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지나치게 자주 사용되었기 샔문에 이 시기의 예술 및 디자인과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고 말았다. '신예술(new art)' 이라는 표현도 비평가 들이나 전람회 주최자들이 마땅한 대용어를 찾지 못했을 때 흔히 사용한 용어이다. 그것은 '신예술(Art Nouveau)’이라고 불리던 예술운동이 한창이던 1890년대에는 팝 아트가 도래 했을 때 이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1972년 런던의 헤이야드 화랑에서 개최된, 당시 영국 미술의 최신 조류를 보여주는 전람회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모델링(modeling)(영)
회화에서는 이차원적인 평면에 삼차원적 포름의 재현을 지칭하는 용어. 특히 조각에서 대강의 구성이끝난 다음의 성형, 또는 성형법을 가리킨다. 모델링의 재료는 오랫동안 유연한 상태를 지속할 수 있어야 하며, 자유롭고 섬세한 표현에 적합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작품의 을 위해 부드러운 상태로 장시간 작업할 수 있는 것이어 야 한다. 따라서 주재료로 점토와 왁스를 들 수 있다. 점토는 한 모형을 어떤 다른 재료로 바꿀 수 있는 일시적인 모델링 매체로 사용되거나 완성 된 작품의 마지막 매체로서 사용된다. 조각가의 작업실에서 흔히 사용되는 왁스는 밀랍이나 석랍paraffin wax의 대용물인데 정확하고 민감한 부분까지 표현할 수 있어 특히 초상화,데 드 마스크, 실물의 모습을 그대로 본뜨기 위한 재료로 사용된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 - 1920 / 이탈리아)
1884년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출생한 화가. 베네치아 및 피렌체의 아카데미에서 배웠고 또 이탈리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로마와 르 네상스의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어서 1906년 파리로 나와 몽마르트르에서 살았다. 1908년 처음으로 앵데팡당전에서 회화 6점을 출품하였다. 몹시 가난한 생활 속에서 술과 마 취약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1909년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격려를 받고 한 동안 조각을 시도하였다. 베르네임 준 화랑에 서 개최된 세잔의 대전람회를 보고 깊이 감명하여 '거지', '첼로 연주'를 그려 이것을 다른 5점과 함께 앵데팡당전에 출품하였다. 1913년부터는 몽파르나스에 거처를 정하고 키슬링, 수틴, 피카소 등과 친교를 맺었다. 이 무 렵부터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내어 이색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 1918년에는 라피트가의 베르트 베이유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한 뒤 방종한 생활 과 음주, 아편으로 악화된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그 해 겨울에는 니스 및 칸느에서 보냈다. 1919년 파리로 돌아 왔으나 중태여서 병원으로 운반되어 치료받던 중 이듬해 1920년 1월 25 알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즐겨 관능적인 누드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1916년부터 1918년에 걸쳐 제작된 작업 에 수작이 가장 많다. 간결하고 특이한 데포르마시용이 특히 인상적이다. 예리한 관찰력, 뛰 어난 조형적 재능, 다감한 시인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여 독창적인 포름과 미묘한 색조 및 마티에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생전에는 즈보로프스키와 같은 화상이 그에게 관심을 갖고 생활을 돌봐준 것 이외에는 전혀 불우하게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짧은 생애 중에 그의 독 자적인 작풍을 수립한 것이다. 주요작은 '꽃파는 여인', '나부', '테디의 초상', '식모 아이' 등이며 조각 작품으로 '여인의 두상'도 매우 유명하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
브랑쿠시의 권유로 조각을 하다가, 가난과 건강때문에 회화로 바꾸었다. 초상화와 누드화가 주종을 이루며, 길게 변형된 독특한 형태로 에로틱하고 애조띤 정서를 그려냈다. 1884년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출생한 화가이다. 베네치아 및 피렌체의 아카데미에서 배웠 고 또 이탈리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로마와 르네상스의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06년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살았다. 1908년 처음으로 앵데팡당전에서 회화 6점을 출품하 였다. 몹시 가난한 생활 속에서 술과 마취약으로 마음을 달랬다. 1909년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격려를 받고 한동안 조각을 시도하였다. 베르네임 준 화랑에서 개최된 세잔의 대전람회를 보고 깊이 감명하여 '거지', '첼로 연주' 를 그려 이것을 다른 5점과 함께 앵데팡당전에 출품하였다. 1913년부터는 몽파르나스에 거처를 정하고 키슬링, 수틴, 피카소 등과 친교를 맺었다. 이 무렵부터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내어 이색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1914년이후 정면에서 본 모습을 몇가지 안되는 색으로 칠하며 원근이 거의 배제된 배경위 에 큰 면으로 구성된 그의 인물화는 얼굴을 가장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관능적인 누드와 초상화를 주로그렸다. 1916년부터 1918년에 걸쳐 제작된 작업에 수작 이 가장 많다. 간결하고 특이한 데포르마시용이 특히 인상적이다. 예리한 관찰력, 뛰어난 조형적 재능, 다 감한 시인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여 독창적인 포름과 미묘한 색조 및 마티에르를 만들어 내 고 있다. 1918년에는 라피트가의 베르트 베이유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한 뒤 방종한 생활과 음주, 아편으로 악화된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그 해 겨울에는 니스 및칸느에서 보냈다. 1919년 파리로 돌아 왔으나 중태여서 병원으로 운반되어 치료받던 중 이듬해 1920년 1월 25 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초기에는 세잔느와 툴루즈-로트렉의 영향을 받아 화면 구성은 더욱 강렬해졌고 선을 통한 표현이 분명해지며 볼륨을 기하학적으로 단순화시키게 된다. 초기부터 인체만을 작품의 소재로 다루기 시작한다. 생전에는 즈보로프스키와 같은 화상이 그에게 관심을 갖고 생활을 돌봐준 것 이외에는 전혀 불우하게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짧은 생애 중에 그의 독자적인 작풍을 수립한 것이다. 주요 작품 : 쿠션의 나부, 키슬링의 초상, 검은 넥타이를 맨 여자, 꽃파는 여인, 나부, 테디 의 초상, 식모 아이 등이며 조각작품으로 여인의 두상 등
모사(copy)
원화, 원도, 원형을 모방하여 그것을 재현하는 것. '베끼는 것'을 말한다. 모사를 위해서는 우선 본이 되는 원작자의 기법이나 의도를 따라감으로써 원작을 이해하고 그 방법을 배우는 데 예부터 미술학습을 위해 널리 행해졌다. 한 작가가 같은 작품을 둘 또는 그 이상 만드는 경우도 있으며 이때 기준이 되는 하나에 대하여 다른 것을 리플리카(replica)라고 하는데, 이 는 베낀 것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부본으로서, 원본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제한된 의미 에서의 '모사'는 모사하는 이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각색 (version)이나 리플리카와는 구별되나, 원작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자유롭게 변경하는 경우도 있어, 반드시 베낀 것이라고만 할 수 없는, 그 나름의 뜻있는 작업도 있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예술가 중에서 수련기에 모사에 열중하지 않은 사람은 찾기 힘들 정도이 다. 예컨대 루벤스는 프라도 미술관에사 티치아노를 모사했고, 푸생은 지오반니 벨리니를 모 사했으며, 렘브란트는 경매정에서 라파엘로의 <카스티글리오네>를 스케체 했고, 와토는 베 네치아 화가들의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심지어 낭만주의자들도, 모사에 대한 일반적인 혐오 감에도 불구하고 모사에 열중했으며, 세잔느는 루브르 박물관을 자주 찾아다녔다. 미술 교육에서의모사의 가치는 계속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이지만, 수많은 화가 지망생 들이 모사에 열중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모스 (Samuel Finley Breese Morse,1791~1872)
미국의 화가. 전신 발명가. 매사추세츠 주에서태어났다.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초상화가가되었으며, 뉴욕 대학의 미술 교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1832년 이탈리아에서 배를 타고귀국하던 중 최신 전자기학에 관한 내용을알게 되어, 전신기 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한뒤, 독자적인 알파벳 기호와 자기 장치를1837년 완성하였다. 그 기호가 개량된 것이점과 선으로 나타내는 모스 부호다. 1844년에는 의회의 도움으로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의 통신에 성공하였으며, 이로써 실용 화된전신기가 처음으로 통신에 사용되었다.
목판화(woodcut)
판화의 일종. 목판화는 가장 오래된 인쇄 기법의 하나로 그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판목의 편평한 표면에 밑그림을 그려서 조각칼과 끌을 사용해 도안은 그대로 남겨두고 공백 부분만 새긴다. 판목의 표면에 잉크를 칠한 후 그 위에 종이를 놓고 종이의 뒤쪽에서 손이나 프레 스로 눌러서 원래의 밑그림과 반대의 이미지를 본뜬다. 그러므로 목판화는 철판 인쇄의 범 주에 든다. 목판화의 특징은 대담성, 단순성, 투박성으로 이것은 나무 자체의 성질과 조각 도구의 성질에서 기인한 것이다. 어느 정도 부드러운 나무는 어떤 것이든 목판용 판재로 사 용될 수 있으며 특히 배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등이 많이 사용된다. 목판화의 선은 나뭇결 을 따라 날카로운 칼로 파내야 하므로 곧고 굵은 직선인 경우가 많으나 정교한 표현도 충분 히 가능하다. 초기 목판화의 장점들은 주로 대담한 밑그림과 힘있는 판각에 있었다. 이에 비 해 현대의 판화는 나무 표면의 특징을 살리는 정교한 표현에 그 특징이 있다. 목판화의 역사와 목판 작업은 제책기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다. 판각 작업이 된 판목들 은 본문과 삽화가 동시에 인쇄되도록 같은 두께의 활자와 프레스에 맞물리게 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은 다른 인쇄기에 별도의 종이로 인쇄하고 난 후 제본을 해야하는 동판 인홰보다 훨 씬 간편하고 저렴하다. 채색 판화는 대개 각 색깔마다 다른 판을 새기고 그 판목을 같은 종 이 위에 계속 찍어서 만드는 판화이다. 목판화의 기원은 모호한데, 이것은 매체 자체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샔문이다. 5세기 이후로직물인쇄를 위해 나무에 새긴 도안이 중동 지역에서 발견되었고 훨씬 옛날부터 그것 들을 사용해왔다는 증거도 있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화 는 돈황에서 발견된 868년 중국에서 인쇄된 금강경의 책머리에 새겨진 판화이다. 서구에서 목판화 기술은 대략 15세기 초엽 이후에 발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100년 동안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중요한 세 가지 형태, 즉 종교화, 트럼프, 책의 삽화 등의 형태로 꾸준 히 발달하였다. 현존하는 최초의 유럽 판화는 15세기 초엽의 것으로 순례지에 분포되었던 것인데 성모와 성자들을 단순한 선으로 도안하여 손으로 직접 찍은 종교화들이다. 그 당시 의 많은 종교적 내용을 담은 목판화의 명각 기법은 예술에서 매우 특징적인, 말과 영상 사 이의 책의 각면은 본문과 삽화가 한 판 위에 새겨진 것이었는데, 인쇄된 책의 삽화는 구텐 베르크가 1440년과 1460년 사이에 고정된 활자로 인쇄하는 기술을 발명했을 때에야 가능해 졌다. 1470년경, 이미 독일에서 일반화된 목판화 삽화가 이탈리아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히프네로토마치아 폴리필리(Hypnerotomachia Poliphili)>(1499년 베네치아)의 삽화는 소묘 와 도안의 순수성, 장식적인 테두리와 완전히 검은 부분의 사용, 그리고 활자와의 완전한 결 합을 보여주고 있다. 16세기에는 목판을 새기는 장인의 기술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고 근본적인 목표와 의도에서 도 변화를 보였다. 오랫동안 내려온 곧은 선은 뒤러, 홀바인, 크라나흐같은 유명한 화가에 의해 아카데막한 도안의 복제를 위해 점차적으로 복잡해졌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복잡한 삼 차원적 제도 기술은 목판화의 특징인 날카로운 표현과 그래픽적 효과를 잃어버리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세련된 도안들이 16세기에 새겨졌다. 뒤러의 목판화는 르네상 스 양식에 정교한 삼차원적 구성을 함으로써 회화적 특성을 획득하였다. 이 시기의 괄목할 만한 업적으로는 한스 발둥크의 그로테스크한 작품과 여전히 고딕 양식을 보이고 있는 그라 프의 풍경화, 그리고 티치아노의 작품에 대한 볼드리니의 해석 등이다. 17∼18세기 동안 목 판화는 대중적인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19세기 중엽에 목판 제판법(wood engraving)이 발달 하였으나 판목의결을 따라 새기는 기법은 점차 사라져 갔다. 19세기 사진의 발명은 판화가 담당했던 복제 작업을 대체하였기 때문에 판화는 창조적인 표현수단으로서의 가능성을 다시 획득할 수 있었다. 15세기적인 단순성과 솔직한 표현이 재등장했고, 풍부하며 힘에 넘치는 삽화가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뒤피에 의해 새겨졌다. 미이욜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책 에서 모범을 찾아 다시 활자와 삽화 사이의 조화를 이룩하였고 나아가 진정한 고전 정신의 재생에 성공했다.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은 목판화가 그들에게 부족한 것을 보완해준다는 것 을 알았고 키르히너, 마르크와 같은 화가들은 효과와 독창성이 반감된 많은 판화를 찍어내 기도 했다. 이 매체는 추상표현주의 양식, 특히 색채로 작품을 제작하는 유럽과 미국의 미술 가들에 의해 폭넓게 사용되었다.
몬드리안 Piet Mondrian (1872-1944/네덜란드)
몬드리안은 네덜란드의 아메르스포트의 캘빈과 가정에서 태어났다. 암스테르담에서 교육을 받고 자연주의 수법으로 풍경화를 그리다가 1910년 파리로 나가 추상적 경향으로 그림을 그 리기 시작했으며 독일과 런던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미국으로 이주하 였다. 몬드리안의 작품 세계는 일체의 대상성과 구상성을 버리고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화면을 나 누어 나타냈는데 그의 표현을 빌면 '순수한 생명력을 표현한다'라는 의미로 기하학(차가운) 추상의 선구자로 20세기 조형 이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 몬드리안의 작품 세계는 일체의 대상성과 구상성을 버리고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화면을 나 누어 나타냈는데 그의 표현을 빌면 '순수한 생명력을 표현한다'라는 의미로 기하학(차가운) 추상의 선구자로 20세기 조형 이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몬드리안은 네덜란드의 아메르스포트의 캘빈과가정에서 태어났다. 암스테르담에서 교육을 받고 자연주의 수법으로 풍경화를 그리다가 1910년 파리로 나가 추상적 경향으로 그림을 그 리기 시작했으며 독일과 런던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미국으로 이주하 였다. 1907년 경까지 그는 여러경향의 화풍을 시도하며 자신의 길을 모색한다. 1908년 경부터 나 무를 주제로 하여 단순화된 색채의 효과를 살리는 변형된 작품을 시작한다. 1916년경까지 접신론적 신학이 그의 사고를 지배하게 된다. 1911년 그의 미술세계는 입체주의의 영향하에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급전환을 보이게 된다. 자연에서 따온 소재에서 출발하여 이 소재를 점차로 비물질화 시켜 결국에는 수평선과 수직 선만이 지배하는 구성에 도달한다. 1913년 그의 작품은 완전히 추상화로 변모한다. 1917년 그는 단색 바탕위에 원색으로 채색된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을 배치하여 입체감과 원 근감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이 신조형주의 이론에 입각한 회화이다. 1924년 이후 그는 검은 색 수평선 하나와 수직선 하나로 불균등하게 화면을 사등분하고 그 중 하나를 다시 작은 면으로 나눔으로써 분할된 면을 삼원색으로 칠하는 신조형주의 의 원 형적인 작품을 발표한다.
몬드리안 (Piet Mondrian,1872~1944)
네덜란드의 화가. 1894년 암스테르담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자연주의자였던 그는 뭉크의 영향을 받아 섬세하면서도 어딘지 병적이었다. 처음에는 자연주의적 기법으로 풍경을 묘사하였으나, 신비주의 화가 얀 투로프를 알게 되어 〈나무〉를 연달아 내놓으면서차차 추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는 대상의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찾아 이를 가장 아름다운 비율로 묘사하였다. 1938년 런던을 거쳐, 1940년 뉴욕으로 망명하였다. 칸딘스키와더불어 기하학적 추상화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햇빛 속의 풍차〉〈빨간 나무〉 〈브로드웨이의 부기우기〉등이 있 다.
몽마르트르
파리 북부에 위치한 제18행정구의 지역. 근대 미술의 발달에 공헌했던 예술가들이 모여산 것으로 유명하다. 19세기 후반 고호, 로트렉, 위트릴로 등의 근거지였으며 현재에도 많은 예 술가들이 살고 있어 새로운 에술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이곳에는 유서 깊은 옛집이나 물랭 루즈, 물랭 드 라 카레트 등이 있다. 몽타주 보통 사진을 몇장 짜맞추어 만드는 포토 몽타주를 말한다. 원뜻은 조립하는 것. 처음의 시도 는, 1915년 독일의 다다이스트 그로츠와 하트필드가 공동으로 행하였다. 그들은 콜라주에 자 극되어, 본래는 관계없는 몇 장의 사진을 동일 화면 상에 짜맞추어, 비현실적인 광경을 표현 하였다. 그들의 경우는 히틀러 정권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으며, 아지테이션이 목적이 었다. 그후 에른스트나 모홀리 나기도 시도했는데, 그것은 더욱더 환상적인 것이었다. 촬영 이나 현상의 단계에서 조작을 가하여, 온갖 영상을 한 장으로 합성하는 방법도 있다. 또 몇 장의 사진을 따로따로 짜맞추어, 잔상 효과나 환기력에 의해 통일된 인상을 주는 방법도 있 다. 영화에 있어서의 몽타주는 후자에서 발전한 것이다. 최근에는 합성 사진이나 짜맞추기 사진을 뜻하는 것으로서 널리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무어 Henry Moore (1898 - 1986/영국)
영국의 조각가, 1898년 요크셔 지방의 캐슬포드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런던 왕립 미술학교에서 조각을 가르쳤다. 무어의 작품의 경향은 조소 작품으로서의 양적인 형태와 구조, 비례, 균형 등의 조형 원리를 살려서 인체를 단순화하고 변형시켜서 풍부한 양감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자연 대상을 철저한 분석과 연구를 통해서 작품의 구조와 형태를 표현하기 때문에 사실적인 기법은 아니지만 실제의 형상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생생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문학수 (?~?) 월북한 작가여서 기록과 작품이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자유미술가 협회' 1회부터 계속 작품을 출품했고, 6회전 직후에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우리나라의 소재를 가지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표현해 내었다. 비행기가 있는 풍경 1939 춘향단죄지도 1940
뭉크 Edvard Munch (1863-1944/노르웨이)
1863년에 출생한 노르웨이의 화가. 표현파의 선구자들 중의 한사람이며 레이텐 출신. 부친은 빈민가의 의사였다. 어릴 때 어머 니와 누이 동생이 결핵으로 일찍 죽자 병약하고 어린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1881년부 터 1884년까지 오슬로의 미술 공예학교에서 배운 뒤 이어서 1885년 초에 파리로 나와서 3주 간 체재하였다. 이때 그는 파리의 퐁타방의 인상파 화가들 즉 고갱, 고호 등과 사귀면서 그 들의 영향을 받았다. 1889년에는 여름을 바닷가에서 보내면서 '별의 밤', '백야' 등 신비한 밤의 모티브를 포착하여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리고 오슬로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했으 며 그해 겨울에는 장학생으로서 파리로 재차 나갔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90년에는 레온보 나의 화실에 4개월간 다녔다. 동양의 목판화를 비롯하여 피사로, 쇠라, 툴루즈 - 로트렉의 그림에도 관심을 가졌었다. 1891년 프랑스 국내 및 이탈리아 여행 후에는 신인상주의의 영 향을 받아 점묘파 스타일의 그림을 그렸다. 1892년 가을에는 베를린 미술가 협회전의 초청 을 받고 대량의 작품을 출품하였으나 그의 이질적인 작풍으로 말미암아 물의를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1893년부터는 카페 [돌고래]를 중심으로 하는 베를린 생 활이 1908년까지 계속되었다. 뭉크의 이질적인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로서 그리는 것이 아닌, 그의 병약 체험에서 오는 인간의 심리나 성의 불안, 죽음을 처음으로 화면에 정착시켜 표현한 것을 말하는데 특히 이러한 것을 주제로 하여 제작된 작품에 나타나 있는 유동적인 선묘, 극도로 양식화된 암시적인 색체, 극히 단순하면서도 강한 구도를 특색으로 하는 그의 화풍은 세기말 예술의 한 정점인 동시에 독일 표현주의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1902 년에는 베를린 [분리파]전에 28점을 출품하였다. 1908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서는 정신병으로 인하여 코펜하겐에서 요양소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동물의 스케치나 석판화, 시와 판 화에 관한 책 [알파와 오메가] 등을 남겼다. 요양소 생활 후 노르웨이로 돌아와 오슬로 대학 의 벽화 제작에 착수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풍에는 변화가 생겼다. 즉 색체는 종래보 다 밝아졌고 문학적 및 실리학적인 문제, 인간적인 정감과 관심이 한층 더 뚜렷하게 표현되 었다. 1937년 나치스는 독일 국내에 있던 뭉크의 작품 90여점을 이른바 퇴폐 예술로 간주하 여 몰수해 버렸다. 주요 작품으로는 상기한 오슬로 대학의 벽화 외에 연작 '생명의 프리즈', '앓고 있는 소녀', '봄', '질투', '죽음의 방', '외침', '마돈나', '사춘기' 등인데 이를 포함한 대부분의 작품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 및 오슬로 시립 미술관 소속의 뭉크 미술관에 소장 전 시되어 있다. 에칭, 석판, 목판화에서도 특이한 재능을 보여 주었다. 1944년 사망.
미국 풍경화파(American Scene Painting)
제1차 세계대전에 뒤따른 미국의 고립주의적, 국가주의적 경향을 배경으로 해서 192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1930년대에 절정에 달한 강력한 미술 운동. 이러한 경향은 그 당시 10년동 안 미국 미술계를 지배해왔던 모더니즘의 물결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들의 목 표는 사회적 내용이 담긴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미국 풍경화파는 20세기 초 에이트나 기타 작가들에 의해 시도되었던 현대 미국 생활에 대한 사실적 묘사를 부활하 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있었다. 따라서 보다 국수주의적인 미술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도시보다는 시골이나 조그만 읍을 주제로 택한 점에서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러한 주제는 셔우드 앤더슨과 싱클레어 루이스의 문학 작품의 내용과 상통하는 면을 지니고 있다. 이 파의 대표적인 화가로서는 찰즈 버치필드와 에드워드 호퍼를 들 수 있다. 이 두사 람은 미국 생활의 황량함과 고독감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사실주의적 스타일을 택했다(버치 필드의 경우는 환상적인 것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미국 풍경화파에 있어서 훨씬 극단적인 경향으로 흘렀던 작가들로는 중서부 촌락에 중심을 두고, 보다 강렬한 지방주의적 색채를 띠었던 토머스 벤튼, 존 스튜어트 커리, 그랜트 우드 등이 있다.
미니멀 아트 Gallery
사진형상에 기반한 극사실주의적 조각은 마술적 효과에서는 아니더라도 사실주의라는 측면 에서는 포토 리얼리즘 그림을 능가한다. 이들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극단에는 미니멀 아트(Minimal Art)라고 일컬어지는 조각의 형 태가 있는데 여기서도 광고기법의 영향이 발견된다. 이들 작품은 지극히 단순하고 간결한 형태들을 하나만 또는 반복적으로 배열한 것인데.놀라 울 정도의 착시효과나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시각적 현상을 연출한다. 여기서도 몇몇 개인 미술가들이 선호하였던 방법이 주로 1966년의 전시회들을 통하여 특정 한 명칭을 가진 미술운동으로 집결되었다 미니멀 아트는 거대한 실내 또는 길외 조각에서부터 .분리된 형태요소들을 배열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형태와 허공과의 관계.또는 단순한 형태들의 미리 고안된 법칙이나 체제에 따른 전개나 변화가 작품의 본질이 된다. 기본 입체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은 수많은 현대 작품들과 신고전주의 시기의 기념조각들을 거쳐 피라미드에까지 그 근원을 거술러 올라갈 수 있다. 미니멀리즘 작품 중 절제된 형태의 예들은 명확성과 간결성에 대한 취향을 드러내고 있으 며.보다 과장된 방법을 사용한 예들은 기법적인 면에서는 아닐지라도 광고판 같은 느낌을 준다. 이들 모두가 미술 작품을 유동적이고 풍성한 자연에 대비되는 특수한 인공물로서 제시하고 있다. 미국 화가인 애그니스 마틴(Agnes Martin)은 주로 정사각형의 캔버스에 거의 보이지 않는 구칙적인 선을 그려넣음으로써 복제기법을 벗어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매우 부드러운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그림에서 광선이 방사되는 듯한 효과를 연 출한다. 이 광선은 선으로 이루어진 필터에 의해 굴절되어 나오고 있다. 그가 자신의 그림에 대하여 언급할 때는 형태의 기하적 속성이나 단순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즉 '축제와 같은 기분'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스페인 화가 후앙 헤노베스(Juan Genoves)는 [경계를 넘어서}라는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뉴 스나 오락물을 통하여 일상 접하는 폭력적 장면을 찍은 사진을 이용하여 압제의 이미지를 그린다. 그는 원본의 명도 변화나 희미한 부분들은 모방하지만 이에 첨가된 사진 설명은 무시한다. 미국 조각가 댄 플레이빈(Dam Flavin)은 [무제(회전하는 자홍색의 '혁신자'에게)]라는 작품 을 통하여 그가 1963년부터 형광등 튜브들을 특정 공간에 구성하는 방법을 전문적으로 시도 해왔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는 모든 상징적 요소를 제거하는 한편. 다양한 크기의 따라서 다양한 양의 빛의 선과 빛 의 간격. 그리고 리듬을 작품의 본질로 삼는다. 플레이빈은 그 구성을 설계만 하고 전기공이 그것을 제작한다. 여기에서는 통산적인 의미의 내용이라는 것이 전혀 암시되고 있지 않다. 그의 작픔에서는 빛의 선이 그림의 선이나 붓자국을 대신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조정된 광 원이 면이나 입체를 대신하고 있다. 이탈리아 화가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felo Pistoletto)의[수츠카와 함께 있는 자화 상]은 실물 크기의 인물사진을 광택을 낸 커다란 강철판에 붙이는 작업을 한다. 이 강철판에는 관람자뿐 아니라 주변의 사물들과 다른 작품들(그 자신의 것)을 표함한 주위 환경이 반사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현실감을 주는 착시현상이 극단화되고 있는 한편. 단색조의 움직이지 않는 인물들이 가진 비현실성도 또한 극단화되고 있다. 이들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또는 우리의 시점의 이동에 따라 움직이는 반영물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작가인 발레리오 아다미는 만화나 만화영화에서와 같이 쉽게 이해되는 그림을 제 시하는 것처럼 보인다.그의 작품 [침실 정경]이 그것이다. 아다미가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는 요소들은. 그것이 그의 그림 속에서 얼마나 부적합한 위치 와 크기로 되어 있건 간에 우리가 그런 형상들을 익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함을로써 우 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원초적인 당혹감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 화가 존 워커(John Walker)의 [온실]은 윤곽선이 분명한 색면과 불분명한 색면. 안개 와 같은 부분과 질감이 두드러지는 부분. 명확한 물체와 모호한 구조 등을 넣은 평면에 배 치하고 있다. 피스톨레토.헤노베스.아다미 등은 팝 아트 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와 작품이 주는 효과는 팝 아트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워커의 그림은 후기 화화적 추상의 야식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워커의 그림과 후기 회화적 추상의 공통점은 추상표현주의자들의 개성적이고 본능적인 표현 방법을 회피하였다는 점이다.
미니멀 아트(Minimal Art)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예술' 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최소한의 조형수단으로 제작했던 회화나 조각을 가리킨다. 즉, 여기에서 '최 소한'이란 일루전의 극소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회화의 감동성, 마티에르의 풍부함 내지 자기 표현은 곧 예술이라는 신화를 기본으로 하는 종래의 예술 개념을 거부하는 입장 에서 출발하고 있다. 특히 당시 미국 화단의 지배적인 세력이었던 추상표현주의가 초자아를 표현하여 관객에 호소하는 입자을 취했고 팝 아트가 문명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성격을 띠었 던 데 반해, 이들은 엄격하고 비개성적이며 소극적인 화면을 구성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미학의 개념은 본래 카시미르 말레비치와 마르셀 뒤샹에게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말레비치의 작품은 캔버스 위에 그려진 것은 모두 회화가 될 수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뒤샹의 레디 메이드는 어떤 오브제라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 던 것이다. 여기에 또 애드 라인하트와 조셉 앨버스의 독특하고 간결하며 영속적인 화면들 도 미니멀 아트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또 미국 국기 속에 자아를 핍박시킨 재스퍼 존스, 잠든 사나이를 8시간이나 촬영한 앤디 워홀 등에게서 그 정신적인 의미를 재발견하려 는 비평가도 있다. 그러나 미니멀 아트는 그 개성적인 성격, 극단적인 간결성, 기계적인 엄 밀성 등이 장점인 동시에 한계가 되고 있다. 미니멀 아트란 명칭은 영국의 비평가 리처드 볼하임이 1965년 <아트 매거진>지에 발표한 <미니멀 아트>론에서 처음으로 쓰여진 이래 보편화하였다. 또 다른 명칭으로는 'ABC아트', '환원적 예술'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경향의 대표적 작가로는 엘즈워드 켈리, 프랭크 스텔라, 도널드 주드, 케네드 놀런드, 잭 영 거맨, 래리 푼즈, 모리스 루이스 등을 들 수 있다.
미디어 아트(Media Art)
모든 예술작품은 물질적인 매개체(medium)에 의해 구체화된다. 따라서 미디어 아트는 모든 미술작품에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미디어 아트는 예술의 전달적 측면을 강조한 의 미에 국한되고 있으며 그런만큼 오늘날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대표적 수단인 책, 잡지, 신문, 포스터, 사진, 영화, 라디오, 텔리비젼, 달력 및 반도체와 비디오, 컴퓨터 그리고 홀로그래피 와 레이저 등에 관련된다. 실상 현대 사회가 고도로 산업화 될수록 이런 미디어는 일상 생 활 속에서 또 일상공간 속에서 무수히 흘러 넘치고 있다. 마샬 맥루한은 이러한 매스 미디 어를 인간의 감성과 의식의 지구적인 확장이라고했다. 팝 아티스트 들은 매스 미디어의 이 미지와 테크닉을 추구했는가 하면, 매스 미디어를 비판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작가들도 있다. 토머스 알브라이트는 '샘의 카페'라고 불리는 그룹도 미디어 작가로 분류했는데 이들은 거 대하고 비 예술적인 청중들과 만나기 위해 우편제도, 신문, 텔리비전, 라디오, 경찰이 예술작 품으로 말려들게 되었으며 훌륭한 사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미래주의
1909년 시인 마리네티에 의해서 공포된 [미래주의 선언]에 의해 시작된 미래주의는 이탈리 아를 중심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구사회에 확대된 문학, 미술, 연극, 음악의 혁신운동이 다. 이들은 전통적인 미의 형식인 조화, 비례, 통일들을 구 시대의 유물로 간주, 타파하고 20세 기 신세대를 상징한다는 '속력의 미'를 주창하며 기계의 역동과 물결을 찬양하며 열광적인 애국심, 전쟁, 모험들이 현대를 표현한다고 주장하였다. 역사, 전통의 과거를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며 무조건 부인하고, 이에 반하여 미래는 역동적이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찬양하려 했 다. 이들 작품의 소재는 크게 '속력의 미'를 나타낼 수 있는 움직일 수 있는 것들로 전동차, 기관차, 비행기, 달리는 말 등을 선호했으며 연속사진을 이용해 사람의 움직임도 포착하여 이를 화면 위에 재현시키기도 하였다. 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 입체파 기법을 사용해 대상을 해체하였다. 그러나 입체파의 정적인 대상분석이 아니라 대상과 환경의 역동적인 관련성을 중시, 빛과 공간을 일체로 표현하고자 했다. 역동성은 '선의 힘'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선명한 원색, 빠르게 움직이는 사선, 나선형, 예각을을 주로 이용해 그림에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나타내었다. 조각도 마찬가지로 형태의 한계를 구분짓는 것을 부정, 윤곽 선을 파괴하였다. 시간의 흐름 을 주의공간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역동성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과거의 고답적인 형식을 부정하고 기계문명을 예찬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가치추 구와 미래지향적인 도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래주의는 전통과 형식적 틀을 파괴하는 아방가르드이었던 것이지, 허무주의화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과거를 부정하면서 현실을 바탕으로 신세계 건설이나 기계문명 예찬들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 낙천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미래주의의 주역은 시인 마리네티(1976-1944)로서 부유한 이탈리아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외국에 거주하면서 국제적 감각을 키워 나간 부르주아적 예술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파리에서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접 할 수 있었던 새로운 사상이나 예술의 표 현에 영향받아 시인으로서의 진로를 닦아 나아간다. 그는 1909년 2월 20일 파리의 [르 피가로]지 1면에 [미래주의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프랑스 와 이탈리아의 언론, 그리고 지식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 선언문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던 이탈리아 젊은 예술가을 선동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여기서 미래주의의 주요 구성원이 되는 움베르토 보치오니, 카를로 카라, 루이지 루솔로, 지 노 세베리니 등이 모이게 된다. 미래주의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움베르토 보치오니(1882-1916)는 1910년에서 1911년 사이 [일어나는 도시]라는 미래주의 사상과 일치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가로 길 3.1m의 이 대작은 밀라노에서 공사중인 건물을 배경으로 원경에는 전차와 기관차 가 힘차게 김을 내뿜으며 달리고, 공장에서는 기다란 굴뚝에서 연기가 하늘을 채우고 있다. 또한 전경에는 크고 사나운 말이 압도적인 자세로 무거운 침을 이끌고 있다. 그 앞에는 말 을 힘겹게 모는 노동자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그림은 역동적인 행위, 속도, 빛에 의한 물 질의 해체와 바로 그 빛에 의한 회화의 재통합이라는 미래주의 추기의 특징을 표현한 최초 의 중요한 회화이다. 화면을 메우고 있는 일하는 노동자와 말들은 미래주의적인 신념의 한 측면을 나타내고 잇다. 즉 솟아오르며 울부짖는 사나운 말들에 의해 상징되는 강력한 힘을 지닌 현대 산업사회에서 의 노동과 작업의 역동성이 그 것이다. 보치오니는 1912년 이후 조각을 시작한다. 그는 파리에서 브랑쿠지와 뒤샹, 비용 등과 교제하였으며, 미래주의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 는 새로운 장르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해 4월 [미래주의 조각, 기술선언]을 발표하면서, 그는 이 선언문을 통해 미래주의의 선언 을 구체적인 3차원 조형언어로 나타낸 구체적인 작품을 다음해에 발표하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공간 속에서의 연속성의 특이한 형태]이다. 그는 조각에 있어서 영속적인 가치들-'운동양식'과 '환경으로서의 조각', 그리고 '제한된 산 과 닫힌 조각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철폐, 인물을 해체시켜 그것을 환경 속에 가두어 두는 것'등-을 추구했다. 그는 형태모방으로서의 조각가의 의무에서 해방됨을 주장하였고, 모든 종류의 재료들-우리, 나무, 판지, 철, 시멘트, 말총, 가죽, 천, 거울, 정구 등-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조각에 대한 선언문은 이후 구성주의조각,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앗상블라쥬, 실제로 움 직이는 키네틱 조각, 1960년대의 팝 아트와 대지미술에 이르기까지 전개 과정을 예견하고 있다. 그의 [공간 속에서의 연속성의 특이한 형태]는 브론즈로 제작된 것인데, 마치 그의 그림을 입체적인 조각으로 옮겨 놓은 것같은 인상을 준다. 울통불통한 곡면으 로 이루어진 인물은 흡사 길거리를 힘차게 활보하는 인물과 같다. 이 조각은 한 순간의 정지된 형태를 모방해 놓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움직임속에서 활 동이라는 움직임이 자아내는 분열적이나 통일된 순간들의 집합을 나타내고 있다 이 그룹의 구성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자코모 발라(1871-1958)는 로마에서 주로 작업했 다. 그의 1909년 그림인 [거리의 빛]은 순수한 미래주의 초기적인 작품이다. 램프중앙에서 사방으로 분산되는 보색으로 된 V자 모양의 붓자국은 광선에 대한 시각적인 환영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것은 현란한 색채 때문에 그 진동이 발전된 과학의 화려한 예찬 같아 보인다. 또한 그의 1912년 작품 [묶인 개의 움직임]은 개의 네 발과 다리를 중첩 시켜 그린 것으로 미래주의의 동시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치마를 입은 숙녀의 구둣발과 보조를 맞추어 애완용 작은 개가 짧은 다리로 바쁘게 종종걸 음치고 있는 모습은 바쁜 도시생활을 나타내는 듯 하다. 개의 네 발은 돌아가는 바퀴와 유사하게 보일 정도로 가속화되고 중첩되어 있다. 빠른 움직 임과 물리적인 활동을 나타내는 이러한 방법은 후의 만화나 만화영화에서 즐겨 쓰는 표현법 이 되었다. 파리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지노 세베리니(1883-1966)는 다른 미래주의자들보 다 더욱 밀접하게 큐비즘과 연관이 되어 있다. 즐겁고 화려한 파리의 밤 풍경을 다룬 [발 타바린의 동적인 상형 문자]에서 우리는 그의 예술관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의 구성은 크게 회전하고 잇는 곡선 안에 빠른 움직임을 부여하는 큐비즘적 분할에 기초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밝은 색 옷을 입은 합창단원, 신 목소리의 여가수, 높은 모자를 쓰고 외눈 안경을 걸친 신 사, 웨이터, 음식, 포도주, 깃발, 카니발의 분위기 등은 우리에게 당시 화려한 도시의 한 모 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입체파의 격자 형태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색채의 형태뿐만 아니라, 튀어나오는 볼 륨의 효과를 내는 조각적인 살붙임의 효과들, 큐비즘 회화와 콜라주의 모든 수법을 동원한 복잡한 화면을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저기 써넣어진 'Vaise' 'Polka' 'Bowling'등의 글자들과 소녀가 입은 옷에 달 린 장식용 금속조각이 콜라주로 덧붙어져 있다. 색채는 인상주의저인 신선함을 지니고 있는 색을 임의적으로 배분함으로서 야수파적인 대담 함을 보이고 있다. 카를로스 카라(1881-1966의 1914년작인 [애국적 선언]은 큐비즘의 콜라주 가 어떻게 미 래주의 강령에 맞게 상용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글자들은 정 치적인 의미를 확실히 하고 있는데, 마치 소리나 말처럼 당시 고조되고 있던 전시(戰時) 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여기서 왕과 군대를 찬양하였고 사이렌과 군중의 소음을 시각적으로 나타냈다. 이 작 품이 그 해 8월 1일 [라 체르바]지에 실린지 불과 며칠 후 독일은 연합군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미래주의(Futurisme)
현대의 과학 기술로 나타난 속도에 대한 관심과 역동성을 강조하였다. 움직이는 대상의 순 간순간을 한 화면에 겹쳐 그렸으며, 이러한 표현의지는 오르피즘, 보르티시즘 등에 영향을 주었다. 마리네티가 창안한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1909-0914년 사이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였으 나 그 이후 여러나라에서 다른 양상을 띠고 발달해 나갔다. 한 시인에 의해서 세워진 이 운동은 조형미술에 관해서 뿐 아니라 문학,건축,사회, 윤리,정 치등 모든 면에 걸쳐 그 이론을 피고자 했다. 그 최고의 목적을 당시 이태리에 만연하고 있던 아카데미즘과 과거 지향주의에 대항하는 투 쟁을 벌이고자 했던 것이니만큼 이 운동은 인간 활동전반에 걸쳐 확대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미래주의는 전적으로 프로그램에 의해서 세워진 운동으로 이 점에 있어서 야수파나 입체주 의처럼 실제 경험에 의해 결성되어 우연히 이름을 만들게 된 운동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이들은 전통적인 미의 형식인 조화, 비례, 통일들을 구 시대의 유물로 간주, 타파하고 20세 기 신세대를 상징한다는 '속력의 미'를 주창하며 기계의 역동과 물결을 찬양하며 열광적인 애국심, 전쟁, 모험들이 현대를 표현한다고 주장하였다. 역사, 전통의 과거를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며 무조건 부인하고, 이에 반하여 미래는 역동적 이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찬양하려 했다. 이들 작품의 소재는 크게 '속력의 미'를 나타낼 수 있는 움직일 수 있는 것들로 전동차, 기 관차, 비행기, 달리는 말 등을 선호했으며 연속사진을 이용해 사람의 움직임도 포착하여 이 를 화면 위에 재현시키기도 하였다. 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 입체파 기법을 사용해 대상을 해체하였다. 그러나 입체파의 정적인 대상분석이 아니라 대상과 환경의 역동적인 관련성을 중시, 빛과 공간을 일체로 표현하고자 했다. 역동성은 '선의 힘'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선명한 원색, 빠르게 움직이는 사선, 나선형, 예각 을 주로 이용해 그림에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나타내었다. 조각도 마찬가지로 형태의 한계 를 구분짓는 것을 부정, 윤곽선을 파괴하였다. 시간의 흐름을 주위공간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역동성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과거의 고답적인 형식을 부정하고 기계문명을 예찬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가치추 구와 미래지향적인 도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래주의는 전통과 형식적 틀을 파괴 하는 아방가르드이었던 것이지, 허무주의화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과거를 부정하면서 현실을 바탕으로 신세계 건설이나 기계문명 예찬들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 낙천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미래주의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위예술 운동. 이 운동은 시인 필립포 마리네티가 1909년 2월<피가로>지에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한 것이 그 효시가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마리 네티는 기존의 낡은 예술을 모두 부정하고, 기계 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다이내믹한 미를 창 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자극되어 이듬해 2월 카를로 카라, 움베르토 보치오니, 지노 세 베리니, 루이지 루솔로, 재코모 발라의 5인의화가가 연명으로 <코메디아>지에 <미래주의 화가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12년에는 역시 다섯 사람이 서명한 <미래주의 제3선언>, 보치오니의<미래주의 조각 기술선언>이 발표되었고 베르네임 주운 화랑에서 최초의 미래파 전람회가 열렸다. 미래주의의 커다란 공적은, 기계가 지닌 차가운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조형예술의 주제로까지 높었다는 것과, 스피드감이나 운동을 표현하기 위해 회화에 시간의 요소를 도입하려고 시도한데 있다. 이 유파가 뛰어난 조형작품을 낳았 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대에 있어서 예술의 소재에 대해 새로운 문제 제기를 한 의의는 크 다.
미로(Joan Miro)
1893-19830 환각적인 자동기술법 회화를 거쳐, 오브제, 콜라주의 작품을 하였다. 상형 문자 같은 아동화 적 화면을 창출하였다. 미로는 스페인의 화가이다. 1898년 바르셀로나 태생인 호안 미로가 그림을 시작한 것은 1912년경이다. 고전적인 화법을 익히고 있던 중 1919년 파리로 와서 1924년경에 초현실주의 자들과 알게 되면서 그의 그림에는 환상적인 요소가 등장하게 된다. 클레(Klee)와 칸딘스키(Kandinsky)의 영향을 받은 그의 예술은 구상의 수법에서 떨어져 나 와 많은 기호들의 세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러한 기호들에서 선이나 색채는 어린시절의 상징들과 직접적인 서정성을 나타낸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창작의 재료 앞에서 느끼는 감동에서 시작하여 정열 속에서 작업을 이 루어 나아갔다. 그는 단순히 초현실주의자로서만 한정해서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가 초현실회화의 중요한 기법인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의 그림은 무의식이나 꿈의 내용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고전적인 재현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그 는 초실주의가 막을 내린 1940년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기법을 고수해 나가면서 자신만 의 사조를 완성해 나아갔다. 일반 학교교육에 흥미가 없었던 그는 일찌기 열네살때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들어간다. 1915년경 미로의 초기작품들은 입체주의와 야수주의를 혼합한 것이다. 그후 풀잎하나까지 풍경을 세밀히 분석한 세밀화의 시기를 맞는다. 1919년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접하게 된다. 1924년에는 그가 시적 사실주의에서 완전한 몽상의 세계로 이행하고 있다. '베니스의 축제'에서 그의 꿈의 세계는 절정에 달한다. 빛이 만들어내는 비사실적인 공간위에 사실적인 것의 모습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상상의 셰 계로 퍼져나가면서 각각의 모트프는 그자신고유의 독자성을 확보함으로써 하나의 기호로 변 해나가게 된다. 미로는 초현실주의의이론적 토론이나 자동기술법에는 그다지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다. 1920 년대에는 네덜란드의 박물관을 방문하여 과거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고 거기에서부터 모트브 를 빌려 그것을 미로식의 형태와색채로 변형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후 여러 다양한 자료를 모아 콜라쥬와 아상블라쥬를 함으로서 '회화를 말살하는 '유머가 넘치면서도 공경성이 내표된 작품에 임한다. 2차 세계대전이 다가오자 그는 꿈의 세계특히 여성,새,별이 수놓인 밤의 세계로 도피한다. 1942년 다시 새와여자를 작품의 주요주제로 취급한다. 세계적 명성을 얻기 시작한 회화외에도 1944년에도 세라믹에도 착수하였고 페품을 이용한 아상블라쥬도 발표하였으며 오브제를 변형시킨 대형조각도 발표한다. 1928년과 29년사이 미로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실내화에서 영감을 얻어 많은 작품을 제작하 게 된다. 그는 네덜란드 풍경화를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으로 번안해서 그리게 되는데, 환상적 인 인물표현, 몽환적인 대상의 왜곡을 통해 해학적인 형상들을 창조해내고 있다. 사실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키는 기법이 바로 미로의 환상미술의 특징 중 하나이다. 빛이 만들어내는 비사실적인 공간위에 사실적인 것의 모습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상상의 세 계로 퍼져나가면서 각각의 모티브는 그 자신 고유의 독자성을 확보함으로써 하나의 기호로 변해나가게 된다. 사실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키는 기법이 바로 미로 의 환상미술의 특징 중 하나이다. 주요 작품 : 회화, 달을 보고 짖는 개 등 미로 (Joan Miro,1893~1983) 에스파냐의 화가·도예가. 바르셀로나에서태어났다. 갈리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그림을 그렸는데, 처음에는 야수파적인 풍경화와 인물화가 대 부분이었지만 나중에는 입체주의의 영향이 강한 정물화 등을 그렸다. 미국의 전위 운동에 기여한 그는 195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전에서 판화 대상을 받았으 며, 아르티가스와 함께 파리의 유네스코본부에 도판 벽화 〈낮〉 〈밤〉을 완성하였다. 그의 작품에서는 에스파냐 동부의 원시동굴화, 아라비아 문학, 이슬람의 장식, 로코코의 우 아한 단축법 등의 요소가 드러나고,풍부한 공상, 강렬한 형상 등은 친숙한 느낌을 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꿈 그림〉〈상상 속의 풍경〉 〈수확하는 사람〉 등이있다.
미불 - 米불 (1051~1107)
중국 북송 시대의 서예가·화가. 호 남궁. 후베이 성 샹양에서 태어났다. 관직은 예부원외랑에 이르렀고, 궁정의 서화 박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행동이 특이하였다. 왕희지의 서풍을 이어 송의 4대가로 불렸다. 수묵화에서는 독자적인 점묘법을 창시하여 원나라 말 4대가와명나라의 오파에게 그 수법을 전하였다. 독특한 수묵 사용법으로 산수화를 잘 그렸고,뒷날 남화의 대표로 일컬어졌다. 주요 작품으로는 〈초서 9첩〉 등이 있고, 저서로는《화사》 《보장대방록》 《서사》 등이 있다.
미술 비평(art criticism)
미술작품의 가치를 판정하고, 그것에 의해 인간의 창조 활동의 본질을 구명하고자 하는 활 동. 미술 작품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이래 있었던 일이나, 미술 비평이라는 하 나의 장르가 성립된 것은 19세기 후반 이후의 일로, 저널리즘에 의해서이다. 철학자, 미학자 의 저작물에도 미술 작품의 평가에 대한 일반적 문제를 다룬 것이 있었으나, 특히 보들레르 와 같은 문인이 쓴 미술 비평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세기 초 새로운 미술 운동의 대 두와 함꼐 프랑스에서 새로운 미술 비평이 활발하게 행해졌는데, 차츰 여러 나라에서도 그 것이 성행하게 되었다. 비평의 방법이나 태도는 평자의 세계관, 미술관에 따라 각기 달라지 는 것은 당연하지만, 미술 비평이 독자적인 대상과 방법을 가지고 행하는 독특한 평론(에세 이)으로서 인정받게 된 것은 근년의 일에 속한다. 현대의 미술 비평에서는 근대 미술사의 연구가 비평가를 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테면 영국의 허버트 리드, 프랑스의 장 카수, 이탈리아의 리오넬로 벤츄리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미술과 언어(Art and Language)
1966년 영국에서 결성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가들의 그룹. 이들은 공동으로 또는 협 력하여 작품을 만들고, 토론을 하며, 논문도 발표하고, 그룹 전시도 하였다. 이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일차적인 매체로 '언어(language)’를 채택하고 손으로 만든 완성품을 거부한 점이 다. 그 결과 전통적인 표현수단이 확립되었다. 이들은 맨 처음 뒤샹의 사상에 대한 비판과 미니멀 아트 이론을 제기하는 일련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 후 '예술'의 개념에 대해 천착한 후, 과학자들의 논문이 과학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예술가들이 쓴 논문도 예술로 간주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1960년대 말 이 그룹은 영국의 분석철학과 그 방법론에 따른 미학의 전개에 큰 영향을 받고 사회학·논리학·언어학·인류학 등에서 개념과 도움을 얻고자 많은 학문을 섭렵했다. 이들은 발견한 것들을 '오려 붙여' 거의 해독할 수 없는 암호 를 만들어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거나 독자들의 흥미를 잃게 했다. 언어의 한 가지 특징은 그것이 지각 방법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눈(인쇄 물),귀(말), 손(점자책)등 여러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고, 따라서 감각이 아닌 이성에 호소하 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 그룹의 작업은 고도로 이지적이며 발표하는 방법도 인쇄물·녹 음·마이크로 필름·세미나 등 다양하다. 1969년 이들은 <미술과 언어>라는 정기간행물을 창간했는데 그 부제가 '개념예술 잡지'였던 점에서 이들을 '개념예술 운동'과 연결짓는 경 우도 많았지만 정작 이들은 이것을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 이 그룹의 저작물에서는 예술산업에서의 경제적 하부구조, 즉 예술과 이데올 로기·계급투쟁 시의 예술의 역할 등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다. 이런 관점은 특히 미국의 A&L 회원들 중 몇몇은 좀더 급진적인 집단을 창설할 필요를 느끼고 그 후 'PAL(점정적인 미술과 언어)'을 창설하게 된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A&L의 논문이 모호하다는 것을 중점 적으로 비판하며, 경쟁자들과 그룹 밖의 사람들에 대한 허세와 위협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비난하고 있다. 결국 생명력 있는 어떤 예술 형태도 지시하지 못한 마구잡이 식의 연구여서 그 엄청난 지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A&L이 이룩한 것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미술사(history of art)
미술 작품을 조사·연구하고, 그 역사적 발전을 추적하는 학문. 회화·조각·건축·공예 등 의 작품의 역사와 작자의 전기, 기법과 표현 내용의 연구 등도 포함된다. 고대의 유적과 유 품의 조사, 귀속의 결정 등은 일반적으로 고고학의 분야에 속하지만, 고고학과 미술사와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아 미술사에서 다루어지기도 한다(단 그 둘의 구별은 필요하다). 현존하 는 최초의 미술사에 관한 문헌으로 플리니(Pliny)가 쓴 <자연사>(1세기)와 파우사니아스 (Pausanias)의<그리스 주유기>(2세기)가 있다. 전자는 연대기적으로 작품을 해설하는 형식 이고 후자는 지역별로 나눈 것으로 이러한 방식들은 후에 계숭되었다. <자연사>에 들어있 는 회화와 조각에 관한 장 -이 부분은 지금은 분실되고 없는 보다 앞선 시기의 논문들을 기초로하여 쓰여졌다고 한다- 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기의 학자들이 당대의 제반 예술적 업 적들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할 때에 하나의 유용한 모델로서 사용하였다. 기베르티(Lorenzo Ghilberti)의<비평사>가 르네상스기의 이러한 새로운 전통(곧 예술적 업적들에 대한 연대기 적 정리)의 시발점이라면 , 바자리(Giorgio Vasari)의 <위대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생 애>(1550)는 그러한 전통을 완전히 꽃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바자리는 역사가로서의 자신은 '제 양식의 뿌리와 원인을,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 예술이 진보하고 혹은 쇠퇴하는 가를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하였다. 바자리의정신을 이어맏 은 후계자로는 반 맨더 (네덜란드), 리돌피(베네치아), 말바샤(볼로냐), 발리오네와 벨로니(로 마), 잔트라르트(독일), 펠리비앙(프랑스)등이 있다. 한편으로는 아카데미에서는 과거의 위대 한 거장들의 모방을 중시함으로써 역사적인 지식을 중시하였다. 미술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은 빈켈만(J.J. Winckelmann)에 의해 비롯되었는데, 그의 저서 <고대 미술사>(1764)는 조각과 회화를 당대 민족의정신의 가장 고귀한 표상으로서 취 급한다. 독일어권의 여러 나라에서 미술사에 아카데미적인 권위를 부여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견해였으며,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로서의 역사 철학을 얘기한 헤겔은 이러한 견해를 보다 강화시켰다. 미술을 문화적 맥락 속에서 다룬 사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로는 스위 스 태생 브르크하르트를 들 수 있다. 인상주의와 같은 19세기 미술운동의 영향과 '순수 가시성(pure visibility)'의 미학 이론은 미 술사를 순전히 형식에 대한 분석에만 기초지울려고 하는 시도를 낳았다. 이러한 방식의 대 표적 인물로는 부르크하르트의 제자인 하인리히 뵐플린과 비엔나의 알로이스 리글을 들 수 있다. 그들의 저작 속에는, 버나드 베렌슨(Bernard Berenson)의 저작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 게, 양식에 대한 연구가 당대에 통용되던 심리학적 범주들에 기초지워져 있다. 프랑스에서는 포시옹이 예술사의 본질에 대한 생물학적 개념을 통해, 형식주의적 접근방식에로의 새로운 방향 전환을 가져왔다. 자율적 학문으로서의 '예술학'에 대한 요구도 수없이 논의되어 왔다. 바르부르크, 에밀 말레, 율리우스 폰 슐로서, E. 파노프스키와 같은 학자들은 예술작품을 그 것의 사적인 맥락 속에서 살피는 데에 보다 치중하였으며, 동시에 주제에 대한 연구의 중요 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기술적으로 개선된 일러스트레이션의 확대와 함꼐, 서구 이외의 국가 및 원시 미술에 대한 미적 재발견은 전세계 곳곳에 널려있는 무진장한 미술 유산을 일반인이 점점 더 자각할 수 있도록 하였고, 미술에 대한 정보와 주해를 새로이 요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앙드레 말로 의 <침묵의 목소리>(1951)에는 이러한 발전이 가져온 충격이 극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현재 미술사는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동반한 채 많은 나라에서 학교의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대학 교과목으로는 1844년 베를린에서,1932년 런던 코트올드 미 술 연구소에서 (비공식적으로는 1879년 에딘버러에서) 개설되었다. 20세기 초부터 미국에서 는 대학의 교과목으로 주로 고대 고전기 이후의 서구미술의 양식상의 발전 과정에 대한 연 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연구되었다. 그것의 높은 인기는 다음과 같은 경고, 즉 학문적인 엄격 함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순전한 시각적인 접근 방식은, 비전이 결여된 학문이 무미건조해 지기 십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칫하면 역사적으로 그릇되기 쉽다는 말을 주의깊게 되새기 도록 한다.
미의식(aesthetic consciousness)
미학상의 용어. 미적 대상에 반응하는 감각 기관의 기능. 시각, 청각 등 고급 감각이 수위를 차지하나 가끔 미각, 후각, 유기 감각, 운동 감각 드의 하급 감각도 함께 작용한다. 이러한 감각은 감정, 의지 드오가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들 여러 기관의 협동에 의해 대상 을 전체성과 직관성을 가지고 파악하는 것이 미적 감각의 성립 조건이다. 이와 같은 감각만 이 개념에 의거하지 않고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닌 미적 판단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미적 감 각은 미 의식의 수용적 측면, 미적 판단은 능동적 측면인데 실제로 양자는 불가분의 관련을 가지고 나타난다.
미적 감정(aesthetic feeling)
미학상의 용어. 예술 체험에 수바노디는 감정으로, 작품의 내용, 형식 또는 대상, 인격 등을 받아들이는 자의 내부에서 환기되는 갖가지 상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상티망(sentimet)이 라고 하는 것은 이 상태의 감정을 가리킨다.
미적 관조
미학상의 용어. 미의식의 한 측면. 일반적으로 예술 창작이 미의식의 능동적 측면인데 대하 여 미적 관조는 미적 향수와 마찬가지로 미의식의 수동적 측면이다. 미적 관조와 미적 향수 와의 차이는 전자가 대상의 직접적 수용활동인데 대해서 후자는 전자의 작용을 전제로하여 행해지는 간접적 수용이라는 점에 있다. 미적 관조는 자아와 대상과의 사이에 일정한 거리 를 전제로하여 성립되며, 더욱이 그것은 대상에 대한 무관심성을 전제로 하는 점에 있어서 인식론적 활동이나 실천적 활동과 구별된다. 이 무관심성을 강조하는 경우에는 미적 관조를 오히려 미적 정관으로 보는 경우도 많으나, 해석의 능동성을 강조한 사고 방식도 있다.
미적 대상(aesthetic object)
미학상의 용어. 미적 대상은 단지 그 자체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미의식을 상관자로 해서 성립된다. 미적 대상론은 입장에 따라서 설이 나누어지는데, 미학사적으로 보면 근대에는 미 적 대상을 형식의 측면에서 고찰하는 형식 미학과 내용의 측면에서 고찰하는 내용 미학으로 대별된다. 전자는 K.피들러, J.헤르바르트, R.침머만, A.차이징 등올 대표되며, 후자는 헤겔, 셸링, G.짐 멜, T.립스 등으로 대표된다. 현대에는 미적 대상, 특히 예술작품은 존재 양식, 작품 구조의 측면에서 현상학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고찰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N.하르트만은 예술 작품의 구조를 층구조로 파악하여, 예술작품을 그 존재의 양태로 본다면 '실재적인 전경'과 '비 실재적인 후경'의2층으로 형성되고, 또 후경층에 대해서는 다층 구조를 갖고 있다고 했 다. 한편 E. 수리오는 예술작품을 그 존재 양태에서 보면, '물질적', '현상적'. '사물적', '초 월적'의 4가지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각층 간의 상호 조응관계를 고찰했다. 이밖에도 예술작 품 일반의 구조 분석론은 M. 뒤프렌, 하이데거, F.카인츠 등에 의해 시도되고 있으며, 동시 에 각개 예술의 작품의 구조 분석론도, 이를테면 문예 작품에 관해서는 R. 잉가르덴, 미술작 품에 관해서는 E. 파노프스키 등에 의해 시도되었다.
미적 범주
미학상의 용어. 미의 다양한 양태를 일정한 기본적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 가장 기본적인 미 적 범주로서는 우미와 숭고라는 대립되는 개념이 제시될 수 있다. 이른바 '미'와 미적 제 범 주가 범주론으로서 미학적으로 탐구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부터였다. 우선 영국의 버크 (Burke)에 의해 숭고와 미에 대한 고픧이 시도되어 홈(Home)으로 이어지고, 독일에서는 멘 델스존, 칸트, 실러 등에 의해 미와 숭고에 대한 고찰이 시도되었으며, 다시 독일 낭만주의, 독일 관념론의 미학, 심리학적 미학, 감정이입 미학에서는 미, 우미, 숭고, 골개, 유머, 비장, 추 등이 미적 범주의 문제로서 고찰되어 왔다. 각 시대나 민족적 차이에 따라서, 어떤 경우 에는 우미가, 또는 숭고가 각기 이상적인 미로서 대표되는 등, 미의식 내지는 예술의 입장에 서의 역사적인 가치 기준도 차이가 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숭고가 우미에 비해 정신의 높은 단계에서 성립한다고 하는 미학설도 성립할 수 있겠지만, 범주론의 입장에서 마랗면 미적 범주 사이에서 미적 가치의 고저를 생각할 수는 없다. 미적 범주는 또한 미의 양태 (Moodifikationen) 혹은 기본미(Kardinalschonheiten)라고 불리워진다.
미적 정관(aesthetic contemplation)
미학상의 용어. 미의 한 측면으로, 대상에의 무관심성을 근본적 특징으로 하는 수용활동. 근 대에 있어서 미적 정관을 무관심성의 관점에서 고찰한 것은 칸트였다. 그는 취미 판단이 대 상의 실재에 대하여 관심을 결하고 있는 점에서 정관적이라고 하고, 정관성을 미의 자율적 영역을 특징짓는 팛요한 특성의 하나로 보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M. 가이거는 칸트의 무 관심성을 비판, '무관심성'과 '몰관심성(관심조차 둘 필요가 없는 경우)'을 구별하여, 미적 향수가 어떤 종류의 관심을 전제로하여 성립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 T. 립스의 감정이입 미학에서도 정곤성의 적극적인 전개 고정이 인정되고 있고, 현대에소 정관성은 능동적인 방 향에서 고찰되는 경향이 강하다.
미적 직관(aesthetic intuition)
미학상의 용어. 직관의 여러 가지 의미에 따라서 미적 직관의 의미도 다르나 기본적으로는 감각적이든 지적이든 미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작용을 말한다. 그 지적 측면을 강조하여 미적 감정과 대립시키는 학설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본래 직접 체험인 미적 체험의 본질 적 계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예술을 상상에 의한 직관적 인식활동으로 보는 크로체의 미학이나 미적 직관을 의식과 무의식, 주관과 객관과의 통일로서 인식의 최고 형식으로 보 는 셸링(schelling)의 미학 등은 직관주의적 미학으로서도 유명하다.
미적 체험(aestheic experience)
미학상의 용어. 일반적으로 말해서 미의식과 거의 같은 뜻이나, 철학적 미학에서는 미의식이 란 말이 심리학적 미학에서 말하는 미적 태도에 있어서의 의식 과정과 혼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적 체험이란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미적 체험이란 미적 가치 체험이 라는 뜻이다. 미적 체험은 다른 체험과 마찬가지로 객관적 측면과 주관적 측면을 지니며, 본 질적 계기로서는 미적 직관과 미적 감정에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미적 체험의 고찰은 이 두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하지만, 입장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어떤 계기에로의 경사도 인정된다. 헤겔, 셸링, G.짐멜, K. 피들러 등은 객관적·주지주의적 미학의 입장을 취하고, J.B. 뒤보, H. 홈, T. 립스, H. 코헨, R. 오데브레히트 등은 주관적· 주정적 미학의 입장을 취한다. 어느 것에 의하든, 체험에 있어서는 인식적 계기나 실천적 계 기가 배경으로 물러나고, 직감적·정감적 계기가 전면에 나타난다
미적 판단(aesthetic judgement)
미학상의 용어. 미적 판단은 세 가지 용법으로 쓰여진다. ①칸트의 이른바 취미판단, 즉 미 적 대상에 대한 주관적 원리로서의 판단. 칸트에 있어서는 취미 판단과 그 결과인 미적 대 상 및 미의식의 관계는, 선험적으로 말하면 형식과 내용의 관계라고 고찰된다. 따라서 취미 판단은 내용생산의 선험적 형식 원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②대상에 표현된 의미에 관한 미 적 판단. 그로스(K. Gross), 폴켈트(J. Volkelt)가 이해판단(Verstandnisurteil) 이라고 명명한 것으로서, 미적 대상의 내용에 대한 지적 이해 또는 식별을 말한다. 예를 들면 미적 태도의 준비로서 기술적·양식적·예술사적 지식을 가지고 대상의 의미를 이해하고나, 재인식 하는 것은 미적 만족을 깊게 한다. ③미적 인상을 개념화하고자 하는, 그로스나 폴켈트가 가치판 단(Werturteil)이라고 명명한 판단. 즉 직관 이후에, 혹은 미적 태도의 과정 속에 나타난다. 대상 또는 미적 태도 자체의 가치에 관한 판단. 이것은 특히 취미 판단과 혼동하기 쉬운 미 적 판단으로서, 카인츠(F. Kainz)등은 이 판단이 사실상 취미 판단을 전제로 하여 그 미적 감정의 체험을 언어로 보다 명확히 하여 개념화한 일종의 논리적 판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다
미적 향수(aesthetic enjoyment)
미학상의 용어. 예술 창작이 미의식의 능동적 측면인데 대해서 미적 향수는 미의식의 수동 적 측면이다. 이 능동과 수동의 차이는 상대적인 것으로, 이를테면 립스(T.Lipps)의 감정이 입 미학에사는 미적 향수는 주관화의 측면에서만이 아닌, 가치 감정의 객관화의 측면에서도 고찰된다. 가이거(M. Geiger)의현상학적으로 분석, 본래의 미적 향수는 내방집중이 아닌, 외 방집중이어야만 한다고하여 대상의 관조향수를 강조했다. 같은 현상학파의 미학중에도 오데 브레히트(R. Odebrecht)와 같이 미적가치 체험의 창조적 계기를 중요시 하는 입장에서는 수 동적 측면으로서의 미적 향수는 고찰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미적 향수는 대상에서의 무관심성을 특색으로 하고 있는, 가이거는 칸트의 무관심성의 개념을 비판하여, 미적 향수는 어떤 종류의 관심을 전제로하여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미적인 것
미학상의 용어. 이 어원은 그리스 어의(aisthesis)인데, 본래는 직감적이라는 뜻이지만, 미학 적인 개념으로서는 좁은 의미의 '미'를 위시하여, 이것이 갖가지 조건에 의해 변모되는데서 성립되는 숭고(장엄미), 비장(비극미), 해학(희극미) 등의 여러 형태를 총칭한다. 이들의 미 적 기본 형태 또는 미적 범주는 그 다양한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정신적 가치 내용으 로서의 공통적 성격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통일성과 특수화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미학의 과제이다. '미적'과 '에술적'의 차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미적인 것 의 본질이 예술의 영역에서 가장 현저하고 순수하게 나타나고 동시에 예술이 그 본질상 필 연적으로 미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미적형식원리(aesthetic principles of form)
미학상의 용어. 미적 대상을 구성하는 형식적 조건. 예술에 있어서는 작품 전체에 나타나는 구성의 여러 가지 형태. 이것은 작품 속에서 그 원리에 따른 각각의 부분에 작용하면서도 그 개별성을 해소하고 전체를 통일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부분과 전체에 작용하는 원 리가 서로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스 이래 이러한 형식적 조건으로서 여러 가지 원 리가 거론되어 왔는데, 최근에는 실험심리학의 입장에서 이것이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되고 있다. 그것들을 대별하면 ①조화, 비례, 대조, 시메트리, 리듬 등 부분 상호간 관계의 원리 ② 공간적, 시간적인 크기, 강도 등 수량적 관계의 원리 ③ 이들의 최고 통일 원리로서의 ' 다양의 통일'의 원리가 생각된다. 형식 원리와 관련되는 미적 요소라는 말은 흔히 공간 예 술에 쓰이며 건축에서는 벽·문, 회화에서는 색·선 등 명백하게 구분되는 단위 내지 성분 을 가리킨다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 르네상스 시대를대표하는 예술가.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13세 때부터 조각 공부를 하였는데, 로렌초 공작의 집에 머물면서 조각을 위한 인체 해부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1496년 로마로 간 뒤프랑스 추기경의 부탁을 받아 바티칸의 산피에트로 대성당에 있는 〈피 에타〉를 완성하였으며, 피렌체로 돌아와 대리석으로 〈다비드〉를 제작하였는데, 이 석상은 시청 앞에 놓여 피렌체를 지키는 상징이 되었다.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으로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 〈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 이야기〉 등을 그리기 시작해서, 1512년 완성하였다. 피렌체를 방어하기 위하여 성을 쌓기도 하였으며, 1534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성당 안쪽 벽의 벽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1541년에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였다. 그의 예술은 인생의 고뇌, 사회의 부정과 대결하는분노와 우울과 신앙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것이며, 그의 작품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엄청난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미학(aesthetics)
인간이 세계를 미적으로 파악할 샔의 법칙 및 이 특수한 세계 파악의 형태로서의 예술의발 전 및 그 사회적 역할에 대한 본질과 법칙을 명확히 밝히는 과학. 미나 예술에 대한 이론적 반성 그 자체는 일찍이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보통 미학의 시조를 플라톤과 아 리스토텔레스라고 하나, 철학의 한 부분으로서의 미학은 18세기 중반 독일의 바움가르텐이 '감성적 인식의 학(scientia cognitionis sensitivae)’이라는 의미로서 에스테티카(aesthetica) - 그리스 어의‘감성적'이라는 말에서 유래 - 라는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 처음이었다. 칸트 는 이를 비판주의의 입장에서 한층 더 명확하게 기초를 세워 그후 셸링, 헤겔을 거쳐 하르 트만에 이르기까지 소위 독일 관념론을 중심으로 주로 발전했으며, 그 밖에도 헤르바르트 일파의 실존론적 미학, 프랑스의 디드로 일파의 계몽주의적 미학이 각기 그 나름대로 독자 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접어들자 경험 과학 일반의 발달에 밀려 독일의 페 히너 일파는 전통적인 관념론적 미학의 주관적 사고를 배척하고 객관적 기록에 의한 미적 현상의 연구를 주장하여 방법상 종래의 소위 철학적인 '위로부터의 미학'과 새로운 과학적 인 '아래로부터의 미학'과의 대립이 생기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러시아에서는 벨린스키, 헤 르첸, 체르니셰프스키 등이 구체적으로 사회와의 연관성 속에서 새로운 미학적 고찰을 하였 는데 이 속에는 신·구 시대 간의 사고의 투쟁이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곧이어 등장한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예술과 그 역사에 관한 연구에 한정되지 않고, 현실(예술도 포 함하여)에 대한 인간의 미적 태도의 일반적 원리를 연구한다. 즉 그것은 세계의 미적 파악 의 본성을 명확히 밝히고, 이것에 의해 성립하는 예술을 고찰한다. 미학은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로서 성립한 것만을 문제 삼지 않고, 철학적 과학이라고 일컬 어진다. 그리고 철학이 그러하듯이, 미학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성립하는 과학으로, 사회 적 존재, 인간 생활에 대하여 미적 의식 및 예술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삼는 다. 이것에 기초하여 예술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영역 및 예술적 창조의 과정·예 술의 기원 및 그 본질과, 기타 사회적 의식 형태와의 관계 예술이 갖는 당파성·역사적 법 칙·예술적 형태의 특수성·예술적 방법 등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더불어 사회 혁명에 있어서 예술의 역할을 조명한다. 한편으로, 현대 미학의 다방면의 전개 양상을 ① 과학적 미학 ② 철학적 미학 ③ 예술 과학 ④예술 철학으로 개괄하기도 한다. 과학적 미학은 미적 사실을 경험적·귀납적으로 설명하 는 것이 목표인데, 예를 들면 페히너, 립스 드의 심리학적 입장, 스펜서 일파의 생물학적 입 장, 앨렌, 베인, 마샬 등의 생리·심리학적 입장, 텐, 귀요 등의 사회학적 입장 등이 모두 그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과학적 방법은 미적 현상의 각 측면에서 경험적 특수성을 설명할 수가 있지만 그 통일적인 본질성, 법칙성을 갖추지 못했다. 바로 이점에서, 이들 과학적 미학의 성과를 검토 종합하며 넓은 의미의 '미적인 것'의 궁극 원리를 해명하는 철학적 미학이 요 청되기도 한다. 현대의 철학적 미학은 과거의 관념론적 미학과는 달라, 그 방법도 무척 다양 하나 모두 철학과 과학을 조화·종합시키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으며, 미와 예술의본질을 그 직접성, 구상성에서 파악하려는 특성을 갖는다.
미화(beautisication)
미학상의 용어. 미의식에 포함되는 관념화, 이상화의 작용. 예술의여러 양식에서 갖가지 형 태로 나타난다. ① 미적 대상의 개별적, 우연적 요소를 제외하고 본질을 표현하는 방법(고전 주의). ② 대상의 본질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확대하여 초현실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원시 상징주의). ③ 대상의 가치적 통일에 모순되는 내용을 제외하고 소극적으로 미화하는 방법, 예컨데 현실의 인간 속에서 선인은 선한 일면, 미인은 미의 일면만을 표현한다(이상주의). ④ 주관적 견지에서 본 대상의 가치를 확대 과장하여 초현실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낭만주 의). 또는 형식상으로 말하면 미화 작용은 현실의 대상을 가상화하고 자아의 체험 내용을 관념화하는 작용을 한다. 위와같은 의미의 미화는 사실주의예술에도 포함된다. 다만 일반적 으로는 ②, ④의 경우와 같은 대상의 주관적, 초현실적 과장이나 형식상의 조화를 구하여 대 상을 왜곡시키는 표현(양식화)이 주로 미화라고 불린다.
민화 民畵
조선시대의 민예적(民藝的)인 그림.조선후기에 특히 일반민중의 그림으로 유행하였으며,이 규경(李圭景,1788~1865)의<오주연 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에는 이를 속화(俗畵)라 하 고 여염집의 병풍, 족자 또는 벽에 붙여진다고 하였다. 대부분 무명화가나 떠돌이 화가들에 의해서 그려졌으며,서민들의 일상 생활 양식이라든지 관습 등의 항상성(恒常性)에 바탕을 두고 발전하였기 때문에, 창의성보다는 형식화된 유형에 따라 인습적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민화는 생활양식의 오랜역사와 밀착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내용이나 발상 등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보다 짙게 깔려있다. 한편 민화라는 말은 일본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 요시(柳宗稅,1889~1961)가 오오스에(大 津繪)라는 일본의 민속적 회화에 붙였던 명칭에서 비롯됐다하여,민화를 '겨레그림' 또는 '생 활화'로 바꿔 부르자는 의견도 있다. 민화는 장식장소와 용도에 따라 종류를 달리하고 있는 데, 대표적인 화목(畵目)으로 화조도. 십장생도.*산수도. 문자도 .책가도 .풍속도. 고사도. 작 호도(鵲虎圖).어해도(魚蟹圖).무속도 등이 있다.
밀레 (Jean Fran is Millet,1814~1875)
프랑스의 화가. 노르망디 지방에서 태어났다. 셰르부르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1837년파리로 진출하여 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푸생·르냉·샤르댕 등의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848년 살롱에 제출한〈곡식을 키질하는 사람〉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이것은 그가 뒤에 농 민 생활을 그리는계기가 되었다. 1849년 파리에 콜레라가 발생하자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 풍경을 그렸다. 이 시절에 루소 등과 사귀었고,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 생활을 많이 그렸다. 농민의모습을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은은하고 아름답게 표현하여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 상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868년 프랑스의 최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씨뿌리는 사람〉 〈이삭 줍기〉 〈만종〉 〈저녁 기도〉 등이 있다.
문화나눔/지식과상식
미술용어[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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