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 누보
'신미술'이라는 뜻의 미술사 및 미술 비평용어로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유럽 전역에 넓게 퍼졌던 장식적 양식을 일컫는다. 아르 누보에 대한 관심은 1930년대에 살바도 르 달리를 중심으로 하는 파리의 초현실주의 그룹과 1937년에 발간된 니콜라우스 페브스너 의 <위리암 모리스로부터 발터 그로피우스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운동의 선구자들>에 의해 다시 환기되기도 하였다. 1950년대 이후에도, 취리히에서 열린 '아르누보 전람회'(1952), 빅 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열린 '빅토리아 시대 및 에드워드 시대의 장식 미술 전람회 '(1952∼53),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아르 누보 전람회'(1960) 등의 여러 전람회를 통해 관심이 지속되었다. 이 양식의 특징과 역사 등에 대한 연구는 로버트 슈무츨러에 의해 집중 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는 이 양식의 주된 테마를 '해초나 식물의 넝쿨 따위를 연상시키는 길고 감각적이며 유연한 선'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19세기 후반에 유행처럼 번졌던 아카데미적인 '역사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난 아르 누 보 운동은 과거의 전통 양식들으 모방 혹은 변형하는 차원을 탈피하여 하나의 새로운 양식 을 창출해 내고자 했다. 장식미술적인 성격이 강한 그것은 그래픽이나 일러스트레이션 등을 포함하는 실제적인 응용미술 분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이젤화나 조각에서의 대부분의 새로운 미학이 파리에서 시작된 것과는 달리, 이 운동은 런던에서 대두되어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독일에서는 이 양식을 유겐트슈틸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경우, 아르 누보 양식의 기원은 윌리엄 모리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그리고 라파 엘 전파 호가들과 윌리엄 블레이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표적 인물로는 A. H. 맥머도, A. 비어즐리, C. 리케트, W. 크레인, C. R. 맥킨토시, 맥도날드 자매 등이 있다. 대륙의 경 우, 아르 누보가 새로운 형식으로 각광받은 곳은 브뤼셀인데, 대표적 인물로는 '벨기에의 선 '으로 유명한 빅토르 오르타, 반 데 벨데 등이 있다. 앙소르 같은 유명한 화가도 표현주의적 인 개인적 작품 성향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프랑스의 경우, 1890년대에 유행했던 영국에서의 동경심에도 불구하고, 사치품이나 실내가구 방죘을 제외하고는 이 운동이 그렇게 대단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건축에서는 엑토르 그리마르 가 파리의 지하철을 설계하면서 이 양식을 특징적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독일의 경우, 대표 적 인물로서 오토 에크만을 들 수가 있는데,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잡지<팬(Pan)>에 실 린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남아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벨기에의 건축가 반 데 벨데 의 영향을 입은 추상 형식이 등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건축가 피터 페렌스가 이 양식에 입 각하여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다. 훗날 장식 과잉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서 세기말적 악취미라고 비난을 받기도 한 아르 누보 운동은 근년에 이르러 활발하게 재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것은 장식적, 상징적 표현을 고취함으로써 반인상주의적인 현대에 이르는 디딤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아르 누보의 세례를 받았던 고갱과 그 주변의 화가들이 추구했던 환상성은 현대 미술의 전개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르 데코 Art Deco(불)
장식 미술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1925년 파리의 현대 장식. 산업미술 국제 박람회의 약칭에 서 유래되었다. 그 때문에 '1925년 양식'이라고도 불린다.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구 여러 나라에서 발달했던 후기 아르 누보에서 바우하우스적 디자인이 확립되기까지의 중간적인 장식 양식. 주로 비엔나 공방, 입 체파, 러시아 발레단 , 미국 인디언 미술 등에서 착상을 얻었으며 직선, 입체, 기하학적 문양 을 즐겨 사용하였다. 호화로운 일품 제작의 전통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의 규격 대량 생산의 길도 터놓았다.
아르 브뤼 Art brut(불)
세련되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형태를 지닌 미술로 '원생 미술(原生美術)'이라고도 번역된다. 프랑스의 화가 장 뒤뷔페가 아마추어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일종의 순수한 미술 형태를 지 칭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으로 처음에는 반교양주의적, 반사회적 입장을 가리켰지만 후에는 종말에 달한 서구의 지적 풍토를 재생시키기 위한 기폭제로 인정되었다. 뒤뷔페는 무의식적인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그려진 정신병자나 어린이의 작품은, 고도의 의 식적이고 의도적인 직업 화가의 작품보다 훨씬 적나라하고 창조적인 구성 요소를 지니고 있 다고 주장했고 자신의 작품에 이런 기법을 의식적으로 도입했다. 그 후 많은 화가들이 이런 기법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뒤뷔페는 정신병자, 어린이, 그리고 아마추어 화가 들의 작품을 계통적으로 수집하여 1947년에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아르 브뤼의 진흥을 위해 앙드레 브르통, 장 포랭, 미셸 타피에 등과 협회 까지 설립했다. 그는 일찍이 이런 글을 쓴 일이 있다. "나의 화면에는 색채나 명도 그리고 광채, 질감의 변화도 없이, 단지 모든 종류의 표지(標識), 마티에르를 겁내는 손의 생생한 궤 적이나 자국만이 나타나 있다. 나는 구석구석까지 모노크롬의 진흙만으로 만들어져 있는 듯한 그림을 꿈꾼다." 뒤뷔페의 이러한 반사회적인 개념의 지향은 미셀 타피에의 앵포르멜의 이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르테 포베라 Arte povera(이)
현대 미술의 한 경향. '가난한' '빈약한' 미술이란 의미로, 이탈리아의 비평가 제르마노 체 란트가 1966년에 만들어 낸 용어. 흙, 나무 조각, 철 조각 등의 소재를 사용한 입체적 작품 을가리킨다. 즉 의미 주어진 외계의 소재를 사용하여 현상을 의식화함으로써 연상(連想)의 새로운 가능 성을 실현하는 데 그 의도가 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요셉 보이스, 라이너 루텐베크, 울리 히 뤼크림 등을 들 수 있다.
아모리 쇼 Armory Show(영)
1913년 뉴욕에서 개최된 미국 최초의 국제 현대 미술전. 서유럽에서 일어난 새로운 예술 운동을 신대륙에 보급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전시된 작품의 작가는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레제, 드랭, 블라맹크, 칸딘스키, 뒤샹, 브랑쿠 시 등 19~20세기의 파리 화단을 중심으로 한 전위 예술가들인데, 미국의 존 슬로언, 윌리엄 글랙큰스를 위시하여 몇사람의 대가와 신예 작가들도 참가하였다. 출품된 작품의 총수는 1600점에 이르렀으며 전시회의 전위적인 성격 때문에 일반 대중 사이 에 커다란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다. '아모리 쇼(兵舍展)'라는 명칭은 이 전람회가 뉴욕의 제 67기병대 무기고를 전시회장으로 삼은데서 나온 것으로, 그 후 시카고의 미술 연구소나 보 스톤에서 개최되었을 때도 이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이 전시회가 비록 대중의 매도와 조소를 받았지만, 미국의 젊은 세대 화가들에게는 커다란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특히 스튜어트 데이비스, 토머스 벤튼, 막스 웨버 등 유럽 미술의 영 향을 받은 작가들의 활약은 미국 현대 미술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씨·에이(I. C. A. : Institute of the Contemporary Arts)
I. C. A.는 예술의 새로운 발전을 고무시키기 위해 허버트 리드와 롤랜드 펜로즈에 의해 1947년에 창립되었다. 이 연구소의 프로그램에는 미술 전람회, 영화, 연극 공연, 음악회, 시 낭송회, 강연 및 토론회 등이 포함되었다. 영구의 지도급 예술가들이 이곳의 회원이었고 이 연구소의 후원아래 다양한 협회가 결성되었다.
아이디얼리즘(idealism)
일반적으로 창작의 규범을 자연의 개별성, 우연성을 초월한 이상미에 놓는 입장. 자연주의 또는 사실주의에 대립되는 태도를 말한다. 그리스 미술, 르네상스 미술과 마찬가지로 사실성 에 입각해서 이상미를 추구한 양식을 이상주의의 전형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 적으로는 특정의 운동, 일정한 양식이 아닌, 제작자의 심적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각종 종교 미술, 고전주의, 낭만주의, 상징주의 등 그 각각에도 이상주의적 태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 각할 수 있다. 철학적으로는 관념론을, 윤리학에서는 이상주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이소타입 방식 Isotype method(영)
등형법(等形法). 아이소타입이란 International System of Typographic Picture Education 의 약칭이다. 1920년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박물관장이던 노이라트 박사의 창안에 의한 것으로, 어린이 의 시각 교육을 목적으로 하며 국제적으로 통용할 수 있는 간략화된 그림 언어를 말한다. 노아라트 부인이 런던에 아이소타입 연구소를 세워 세계적인 보급을 꾀했고 통계 도표나 교 과서 등에 사용되었다. 통계 도표의 아이소타입 방식은 아이소타입 식 형상도를 단위로 하 여 늘어 놓고, 수치를 비교하는 데 쓴다. 회화적 통계 도표에서는 사실적인 그림보다 간결한 아이소타입 식 형상 쪽이 명쾌하고 효과 적이다.
아좌 태자
阿佐太子 (?~?) 백제 위덕왕의 아들. 그림을 잘 그려 화가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597년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그린태자의 초상화가 나라 현의 호류 사에 남아국보로 전하였는데, 1949년 불에 타 없 어졌다. 일본에 건너간 이듬해 위덕왕이 죽자 숙부가 왕위를 이었다. 그의 그림은 일본 회화의 기초가 되었다.
아치 arch(영)
벽이나 수직의 석조 건물의 개구부(開口部)에 상부의 하중을 지지하기위하여 까은 돌이나, 쐐기형의 돌, 입방형의 돌, 또는 벽돌 여러 개를 맞대어 곡선형으로 쌓아올릴는 건축 구조. 두 개의 큰 돌을 비스듬히 기대어 놓아 만든 초기의 아치에서 여러 시대를 거치는 동안 변 형 발전되었다. 아치는 기하학적 디자인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반원 아치는 가장 단순한 형태로 미학적으로는 아름다우나 구조적으로 볼 때는 정상 부분이 약해 건물 상체의 하중을 지탱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로마와 중세 건축가들이 널리 이용한 아치 형태이며,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에서 다시 유행한 양식이다. 사슬형 아치(catenary arch)는 역학적으로 볼 때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의 아치가 이 아치의 형태의 모범을 잘 보여준다. 첨두 아치(pointed arch)는 사 슬형 아치와 비슷한 것으로 아랍권에서 주로 사용했으며 11세기 서유럽 건축에서도 많이 보 인다. 중심이 둘 이상인 호(弧)가 아치를 만든다. 세그멘탈 아치(segmental arch)는 고딕 양식의 완숙기인 13세기 프랑스 북부 지방의 성당 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둥그런 모양의 선분이 서로 받쳐주는 모양이다. 후기 고딕과 이슬람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오지 아치(ogee arch)는 원의 중심이 둘로서 S자 형으로 만들어진다. 직립 아치(perpendicular arch)는 중심은 같고 반지름의 길이가 서로 다 른 여러 원들로 되어 있는 아치이다. 프랑스에서는 특정한 형의 아치를 편애한 반면 영국에 서는 다양한 형태의 아치가 발달했다. 중세 이후 건축에서 아치의 역할은 크게 줄어든다. 새 로 운 건축 자재가 발달됨으로써 아치형을 사용하지도 않고도 구조적으로 하중을 잘 견디는 튼 튼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카데미즘(academism)
아카데미즘이란 본래 아카데미에서 나온 말로 일반적으로 학문이나 예술의 관학, 관전계의 작풍, 양식, 수법을 가리킨다. 따라서 미술사적으로는 고전적 규범에 충실한 고전주의적 경 향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술사적으로는 고전적 규범에 충실한 고전주의적 경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 미술사에서는 반드시 고전주의적 경향에만 한정시키지 않았다. 19세기 이래의 역사는 새로운 유파·양식과 아카데미즘의 교체의 역사로 관찰될 수 있다. 이를테면 낭만주 의, 사실주의, 인상주의등은 어느 것이나 그 탄생의 시기에는 동시대의 아카데미즘과 가장 격렬하게 대립한 것이었으나 다음의 유파나 양식이 탄생하면 종종 아카데미즘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나의 새로운 양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그 추종자들에게 단순한 형식 적 전통이 되어버릴 때 그것을 비판적인 의미로 이미 아카데미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트 디렉터(art director)
디자이너, 화가, 사진사, 레이아웃 맨, 카피라이터 등을 종합한, 목적에 가장 알맞는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을 말한다. 때로 영화나 연극의 미술 감독을 가리키는 수도 있으나, 주로 선전 광고에 종사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소규모적인 광고의 경우는 디자이너 한 사람이 일체를 겸하는 수도 있지만 대기업에서는 광고가 조직적이고 과학적으로 제작되므로 표현 기술상에 서도 복수의 재능이 요구된다. 그 결과 경영 기획의 입장을 충분이 반영시키면서 아티스트 개개인의 재능을 조정, 방향을 설정하는 능력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따라서 아트 디렉터에 게는 단순한 프러듀서에 그치지 않는, 광고나 디자인에 대한 넓은 시야와 경영 기술 전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직종의 중요도는 근년에 이르러 급속도로 높아져 가고 있다.
아틀리에
영국의 화가 스탤리 윌리엄 헤이터가 1927년 파리에서 설립한 판화 공방으로 1940년에 뉴욕 으로 옮겼다. 헤이터는 동판화의 독특한 기법을 개발하여 당시 이 공방에 드나들던 초현실 주의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40년대 후반에는 유럽에서 도미한 마르크 샤 갈, 막스 에른스트, 앙드레 마송, 로베르토 마타, 호안 미로, 이브 탕기 등이 이 공방에서 판 화를 제작했다. 이들의 출현은 잭슨 폴록, 로버트 머더웰, 루이스 네벨슨, 모리시오 라산스 키, 게이버 피터디 등의 미국 작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어 미국 현대 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공방은 헤이터가 파리로 떠나자 1950년대 말에 폐쇄되었다.
아틀리에
공방, 화실, 작업장 등의 뜻. 일반적으로 화가, 조각가, 공예가, 건축가, 사진가 등의 작업장 의 총칭이다. 한편 대가를 중심으로 많은 제자들이 모인, 그 집단의 자업장을 지칭할 때도 있다. 개인명으로 전해지는 르네상스나 바로크의 거대한 회화의 대부분은 이들 공방의 제자 들에 의해 협동 제작된 것이 많다. 그밖에 마티스나 드랭이 모였던 '아틀리에 쥘리앙'과 같 이 작가나 예술가가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방 따위를 말한다
아티스츠 스페이스(Artist's Space)
뉴욕 우스터(Wooster)가 155번지에 있는 비영리적 화랑 겸 집회 장소. 지명도가 낮은 미술 가와상업 화랑에 가입해 있지 않은 미술가의 작품을 전시할 목적으로, 1973년 뉴욕 주 의회 의 보조금과 국가의 미술 기부금으로 설리ⅷ었다. 미술가들의 작품, 슬라이드, 문서함이 보 존되어있으며, 수시로 바뀌는 미술가 위원들에 의해 전시회의 선별이 이루어지고 있다.
안견 - 安堅 (?~?)
조선의 화가. 호는 현동자(玄洞子)·주경(朱耕). 화원 출신으로 도화원 정4품 벼슬을 지냈다. 안평 대군의 사랑을 받았으며, 1447년에는 안평 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세종 대왕의 들놀 이 모습을 담은 〈몽유도원도〉를그렸다. 그는 북송 때의 화가 곽희의 화풍을바탕으로 여러 화가의 장점을 잘 살려 많은명작을 남겼 는데,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초상화·사군자·의장도 등도잘 그렸으며, 그의 화풍은 일본의 수묵 산수화 발 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밖의작품으로는 〈사시팔경도〉 〈소상팔경도〉〈적벽도〉 등이 있다.
안중식 - 安中植 (1861~1919)
조선의 화가. 호 심전. 도화서 화원을 거쳐양천·통진 군수를 지냈다. 1880년 조석진과함께 관비생(나라에서 대 주는 돈으로 공부하는 학생)으로 중국에 유학하여 글씨와 그림을 공부하였으며, 1918년 서화 협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 다. 산수·인물·꽃·새를 잘 그렸고, 글씨에도뛰어났으며, 시에도 재주가 있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천보구여도〉 〈산수도〉 〈성재임간도〉 등이 있다.
암벽화(岩壁畵)
동굴, 절벽 등의 돌에 그린 그림. 세계 각지에서 보이는데, 구석기시대부터 중세까지 각 시 대의 것이 있다. 그 양식과 기법은 실루에트를 새기거나 윤곽선을 한 가지 색깔의 안료로 그린 것에서부터, 부조나 여러 색채를 사용한 그림까지 다양하다. 소재는 구석기 시대에는 주로 수렵의 대상인 들소, 말, 맘모스, 코뿔소 드이었고, 신석기시대 이후로는 집단적인 수렵, 어로, 경작, 제의 장면이 표현되었다. 이것들은 대개 주술적인 목적 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소련에는 구석기 암벽화로 카포바야 동굴과 쉬슈키노 등이 있고, 신석기시대의 것은 쟈라보 르가 등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특히 유럽, 러시아 동북부와 동 시베리아에 많다. 우리나라의 암벽화로는 울산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와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의 것 등이 있 다.
앗상블라주 assemblage(불)
'집합', '조립' 등의 뜻. 평면적인 타블로 회화에 삼차원성을 부여하는 기법으로, 우리 주변 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이나 폐품 따우를 조립해서 작품을 만드는 일 이나, 또는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종이 대신 오브제를 써서 만 든 삼차원의 콜라주나 콜라주 조각을 말한다. 앗상블라주란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뒤뷔페 이지만, 이러한 시도는 이미 브라크, 피카소, 피카비아. 뒤샹 등에 의해 20세기 초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미국의 평론가 윌리엄 사이츠가 196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을 모아 '앗상블라주 미술전'을 기획하고 나서부 터이다. 사이츠는 다다, 초현실주의 이래의 오브제의 현대적 호칭으로 이용어를 쓰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앗상블라주는 "그리거나 조각된 것이 아니라 조립에 의한 것으로 전부 또는 일 부가 자연물이거나 공업제품이지만, 전혀 미술을 의도하지 않고 만든 물건에 의한 것" 이다. 문명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앗상블라주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폐품 문화(이를테면 헌 자 동차의 부속품이나 상업 문화의 쓰레기 등에 의한 조립이므로)의 반영으로 보여지기도 한 다. 또 미술사적으로 전 시대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또한 추 상표현주의의 발전이라는 측면도 지니고 있다. 조셉 코널, 리처드 스탠키에비치, 존 체임벌 린, 에드워드 키엔홀츠, 리 본티코 등이 이 경향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앙파트망 empatement(불)
화면에 물감을 칠하는 것. 특히 붓이나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하여 두텁게 칠한 효과를 낼 경우에 쓰인다.임파스토와 거의 동의어이다.근대 회화에서는초기의 세잔느,반 고호이후 화면 효과,표현력 등을 강조하 기 위한 목적으로 앙트리망 이 중시되었다. 현대 작가의 경우에는 포트리에의 작품 등이 좋은 예이다
애니메니션(animation)
디자인 용어. 필름 조작으로 대상이 살아 움직이듯이 보이게 하는 영화 기술 또는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를 말한다. ① 풀 애니메이션 ; 매초 24장면의 필름을, 한 장면마다 찍은 영상 으로 메워,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한다. ② 리드미트 애니메이션 ; ①의 영상 수를 제한하여 움직임을 한정한다. ③ 스틸 애니메이션 ; 스틸 사진의 인화를 사용하여 운동을 주어 애니메이트 한다. 애니메이션에는 그림, 만화, 사진, 인화 드의 평면적인 소재를 움직이 는 경우와 상품이나 인형, 그 밖의 입체적인 물체를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애니메이션의 특 징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비현실적인 재미에 있으며, 만화영화를 비롯하여 방송 광고 등에 이용되고 있다. 또 그 움직임의 비현실성 혹은 넌센스라는 특성을 영상표현 으로서 추구하려는 실험적인 작품이 화가, 만화가,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 등 여러 분야 의 작가들에 의해 제작되고 있다
액션 페인팅 action painting(영)
제2차 세계대전 후, 뉴욕을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 회화라고도 불리며 추상표현주의와도 중 복되는 부분이 많다. 양식상으로는 유럽의 같은 시기의 앵포르멜과 마찬가지로, 전전(戰前)의 기하학적 추상과 대 비를 이루어, 유기적(有機的) 표현주의적인 다이나믹한 추상으로 간주되지만 여기서는 액션 페인팅의 어의(語義)에서도 분명한 것 같이, '행위' 자체가 중요시된다. 이 파를 대표하는 잭슨 폴록은, 스스로 화면 속게 들어가 그림물감을 떨어뜨리는 방법(드립 페인팅)으로 회화를 제작했다. 즉 완성된 작품에서 미적 가치를 구하기보다는 예술가가 현 실의 장(場)에서 표현할 때의 그 절실한 행위에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화면이 거대한 것도 액션 페인팅의 특색인데, 회화가 그린다고 하는 순수한 행위로까지 환 원될 때, 그 행위의 장(場)인 화면은 당연히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폴록 이외에 역시 유 동적인 선이나 포름이 초현실주의에 연결되는 고르키, 평탄한 색면만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로드코 등이 있고 드 쿠닝, 클랭, 프랜시스 등도 포함된다. '액션 페인팅'이란 명칭은 1952년 비평가 로젠버그가 처음으로 사용한 이래 같은 경향의 작 품에 대하여 세계적으로 통칭되기에 이르렀다.
액션(action)
예술적인 이념이나 감각을 구체화시킬 때 활발해지는 행위, 동작, 과정, 수행, 표현력 등 표 현 태도 전체에 대한 총칭. 해프닝과 유사하며, 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미술가에 의해 행해 진 이벤트 형태를 가리킨다. 비엔나 직접미술협회를 구성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많은 미술 가들은 '물리적 행위'의 기본 개념인 '비엔나 행동주의'라 불리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 미술가들은 현실은 재현하기 위해 매체를 사용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것은 현실 그 자체를 형식 창조의 수단으로 직접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행위는 연극적 공연(가장된 현실) 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직접 체험한다는 일종의 '실연'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예술과 삶 간의 이분법을 종결시키려는 단호한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행위는 예술가들 간의 사회 적·정치적 의식을 내표한다. 요셉 보이스는 1972년 테이트 화랑에서의 행위 속에서 정치, 예술, 교육을 분필로 칠판에 써서 논의했다. 또한 영국에서는 '공동체 예술협회'에 의해 '행 위'란 말이 수용되고 (상호행위, 행위공간), 미국에서는 게릴라 아트 액션과 같은 급진적 단 체에 의해 수용되었다.
액추얼리즘(Actualism)
1968년 5월의 프랑스와 같은 혁명적인 상황 아래 예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기술하기 위해 문필가 알랭 쥬프레이(Alain Jouffrey)가 사용한 용어.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회 현실로 부터 유리된 독립적 개체로서의 예술은 폐기된다. 예술작품이 더 이상 예술로서 범주화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 혹은 무의미는 실제의 행동과 의미에 의해 밝혀지게 된다. 주프레이 는 예술은 더 이상 국가의 탁상공론의 기능을 담당헤서는 안되며, 예술가는 사회의 모든 분 야와 직접 소통하기 우해 예술의 '종말'을 추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앵그르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 프랑스)
프랑스 19세기의 대표적 화가 중의 한 사람. 1780년 몽토방에서 출생. 16세때, 파리로 나와서 다비드에게 사사하였다. 1806년부터 1824년까지 18년간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고전 회화를 연구, 특히 라파엘로의 화 풍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라파엘로 찬미를 반영하는 고전적 작품 '루이 13세의 성모 에의 서약' (몽토방 대성당)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것을 기회로 당시 신흥하던 로망주의 운 동에 대항하는 고전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834년에는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의 장으로서 다시 이탈리아로 갔다. 고대 미술의 진수에 접촉한 후부터 그의 이성은 사실 즉 인체의 유기적 생명을 정관적으로 직사하는데 있었다. 앵그르가 고대 미술의 진수에 도달하는데 있었다는 것은 그가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온 '토 르스 메디시스'에 대한 이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이상은 피디아스 라파엘로, 모차르 트였다고 한다. 1841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로부터 그의 명성은 점점 고조되었으며 마침내 아카데미와 미술 학교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구축하게 되었다. 앵그르의 예술은 전아한 고전적 회화의 극치에 달하였다. 고전주의자로서 역사화의 우수작을 많이 남겼는데, 가장 개성적이고 위력이 있는 부문은 초 상화와 부녀의 나체화이다. 주요작은 '그랑 오달리스크'(18414년), '샘'(1856년). '입욕', '터키 탕'(1863 년), '호메르스 예찬'(1827년),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황금 시대', '리비에르 부인'(1805년), '베르당씨의 초상'(1832년) 등이다. 1867년 사망.
앵티미슴
친밀한 감정, 특히 풍경보다도 가정 내의 일상 생활을 잘 묘사하는 경향을 말한다. 불어의 ' 앵팀므'란 서민적인 소박한 생활 감정을 뜻하는 말로 우리 주변에 있는 것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그것을 그릴 때 친밀한 애정을 화면에 나누어 담으려는 경향을 말하는데 뷔야르나 보나르가 이경향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앵포르멜 Informel(불)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서정적 추상 회화의 한 경향. 정형화되고 아카데미즘화된 추상, 특히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것으로, 격정적이며 주관적인 것이 특징이다. 앵포르멜이란 '비정형(非定形)'을 의미하는 말로, 넒은 의미에서 보면 추상표현주의의 범주 에들지만 특히 미국의 액션 페인팅에 대응하는 프랑스의 예술 동향을 가리킨다. 앵포르멜에 는 포트리에, 볼스, 뒤뷔페 등 세 사람의 선구자가 있어, 그 기원은 1945년에 발표된 포트리 에의 '인질(人質)전', 1946년 뒤뷔페의 '오트 파트전', 1947년의 볼스의 전시회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가혹한 전쟁의 피해자들로서, 이 세 전시회의 공통적인 특징은 전쟁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억압된 인간의 극한적인 정신 구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앵포르멜 의 이념이 구체화된 것은 비평가 미셸 타피에에 의해서였다. 그는 '아르 오트르'란 소책자를 내어, 본래 앵포르멜의 근원적인 생명의 징후는 구상. 비구상을 부정하고, '생생한' 포름에 정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입체파와 기하학적 추상은 붕괴된 고전주의의 "마지막 절규'에 지나지 않고 초현실 주의도 낭만주의의 문학적 변종으로 보아 부정한다고 밝히고, 가치 전도를 위해 앤티휴머니 즘의 극한까지 밀고 갔던 니체와 다다이즘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산으로 규정한 뒤, 이 반근대주의 위에 위상기하학, 집합론, 양자역학, 비교적(秘敎的) 기독교, 노장사상(老莊思想) 등을 끌어들여 앵포르멜 미술의 진로를 제시했다. 파티에는 앵포르멜 미술에서는 표현의 제스처보다는 마티에르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 했는데, 이것이 액션 페인팅과 다른 점이다. 그 후 앵포르멜은 국제적인 예술운동으로 전개 되었다. 본래 이즘이나 유파를 목표로 하지 않았던 앵포르멜 운동은 그 구성원도 늘 유동적 이었지만 주로 파리에 살고 있던 젠킨스리 오펠, 아펠 등이 중심이 되었다. 앵포르멜(Informel) 1951-2년 사이 프랑스의 비평가 타피에에 의하여 조직되고 주도된, '비정형' 의 뜻을 가진 화파로 추상표현주의와 동시대의 양식이다. 추상, 구상에 관계없이 정형을 넘어서 생명의 긴 장을 질감과 공간으로 직접 드러내려 하였으며,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실존 주의적 태도를 지녔다. 앵포르멜이라는 단어는 일정한 학파를 지칭하기보다는 쟝 폴랑이 적극 지지하던 포트리에 나 말로가 서양 최초의 서예가라 칭하던 마티유,혹은 어느 곳에도 분류해 넣을 수 없었던 볼스등과 같은 주요한 작가 들과 유사한 풍으로 여겨지던 일군의 작가를 규합하는 미술경향 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당시 추상미술은 한창 전성기에 처해 있었으며 프랑스에서는 서정추상이 지배적인가하면 미국에서는 행동이 표현을 위주로 하는 '액션 페인팅'이 새로 탄생되는 등, 미술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타피에가 주관한 이 6인전은 추상미술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주고자 했으며 '새로운 기호'언 어를 활성시키 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마티유가 지적하듯이 만일 타티에가 포트리에, 뒤뷔페, 미쇼의 구성작가 3명과 비구성작가 3 명을 정략적으로 섞 어 놓지만 않았다면 모든게 아무 문제없이 진행되었을 수 있었을 것이 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비정형이라는 형용사가 갖는 모호한 성격에 관한 대단한 논란을 유 발시켰다. 50년대말까지 앵포르멜 미술은 타시즘이나 순수 추상과는 다는 특수한 성격을 보유하고 있 었다. 다른 새로운 작가들도 이에 가담했으며 그 영향을 대양을 건너 확대되어 멀리 떨어진 일본 에서도 큰 여파를 발휘했다.
야수파
야수파는 20세기를 여는 첫 번째 주요한 미술 운동이다. 1899년 마티스를 중심으로 일기 시 작한 이 운동은 화가의 주관이 강조되며, 색채의 추상성을 향한 본격적인 시도로서 일컬어 지고 있다. 강렬한 원색과 자유분방한 붓터치는 화면을 평면화시키면서 대상 재현의 색채 역할을 거부 한 점이 특이하다. 입체파가 형태의 자율성을 주장하였다면 야수파는 임의의 선택에 의한 색채 선택을 통해 작가의 감정을 표출하면서 화면 전체의 장식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1905년 (살롱 도톤느)의 전시에서 일군의 야수파 화가가 그룹 전을 가지면서 야수파는 절 정기를 맞이한다. 여기에는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 루오, 망갱, 뒤피등의 대표적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들의 자유분방하고 다소 충격적인 그림들은 어느 비평가에 의해 '야수 파'라는 명칭을 얻게 되고, 이 명칭이 이들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야수파가 활동하기 시작했을 무렵 프랑스 화단은 인상주의가 중심 사조로 역할을 하고 있었 다. 야수파 작가들도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인상주의와 후기, 신인상주의의 영향하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소재는 밝은 햇빛 아래의 풍경이었으며, 구성적인 측면에서도 인상주의를 답습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솜씨 좋은 붓터치와 도시 생활의 세련되고 한가로운 여가활동을 그리는 데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화면 그 자체와 색채였으며, 이것은 굵은 붓터치의 독립성과 단순함, 생명력 있는 원색의 가치를 추구했다. 그래서 야수파 화면의 물감은 인상주의의 시각적 혼합 효과 의 매개체라기 보다는 물감이라는 물리적 존재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즉 이들의 기법은 후 기 인상주의의 반 고호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드랭이 블라맹크에게 쓴 편지에서 이러한 이들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회화의 사실주의적 시기는 이미 지나갔고 새로운 시기가 오고 있다. 반 고호의 캔바스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추상적 성격을-그 점에 대해서는 논박할 필요도 없겠지만-예를 들지 않 더라도, 선과 색채는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처음부터 서로 평행적인 존재이며 독 자성을 지닌, 구속받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다.." 요약하자면 야수파는 고갱과 고호, 세잔느의 후기 인상주의에서 많은 가르침과 영향을 받았 으며, 그들은 고호와 고갱에게서 자율적인 색채 사용에 의한 감정 표출과 세잔과 쇠라, 시냑 에게서 형태의 자율성을 배우게 된 것이다. 야수파 화가들은 화실을 공유하면서 같이 작업하고 스케치 여행을 함께 떠나곤 했다. 그리 고 나서 여행에서 얻은 영감과 스케치들을 통해 제작된 그림들을 함께 전시하였다. 이들의 작업은 서로 유사하면서도 각자의 독자성을 지님으로서 개성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한다. 야수주의는 1907에서 1908년 사이에 주요 화가들의 관심이 순수한 색채의 나열에서부터 입 체감, 양감, 볼륨, 선으로 이행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한 예로 야수파에서 시작해 입체파로 전향한 브라크는 당시의 상황을 "항상 흥분 상태에 있 을 수만은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야수파의 열정적인 회화탐구가 절정에 달 한 후 쇠락의 길로 들어 섰음을 알 수 있다. 앙리 마티스(1869-1954)는 야수파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야수주의가 쇠퇴한 1908년 이 후에도 계속해서 야수파의 화법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그의 예술세계를 완성해 나간 유일한 화가이다. 그는 풍경이나 인물과 같은 전통적인 소재에서 출발하면서 보이는 외부 세계를 그대로 재현 하지 않고,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의 반응을 충실히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주 관적인 색채, 붓터치, 자유로운 선으로 나타냈다. 이러한 시도는 고호와 고갱의 선례에 영향받은 것이지만, 마티스는 색채의 평면적 배열을 강조하면서 화면을 추상화시키는 본격적인 모더니즘 미술에 진입했다. 야수파들의 역사적인 출발점인 1905년의 (살롱 도톤느)에 출품한[모자 쓴 여인]을 보자. 이 작품은 전시회에 출품된 야수주의 작품 중 가장 충격적인 그림이었는데, 소재가 된 모델 (마티스의 부인)의 자세는 전통적인 서양 초상화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그 표현 기법에 있어서는 실로 놀라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푸른색, 분홍색, 노란 색 빨강색 등의 화려한 원색의 선으로 가득 채워져 있 으며 뒷배경은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추상화되어 있다. 또한 그녀의 모자와 옷등의 혼잡한 색들은 마치 굵은 색종이 띠로 엉성하게 채운 듯한 느낌 을 준다. 여기서는 어떠한 원근법이나 실제적 공간감도 배제되어 있다. 이 그림은 야수주의의 자유분방한 색채 사용의 전형이 되는 작 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전시회가 끝난 후 같은 해에 제작된 [초록색의 선]에서 마티스는 색채의 병치와 병렬에 의 한 입체감을 확인하고 있다. 오른쪽의 찬 초록색과 왼쪽의 따뜻한 색은 같은 화면 위에서 각기 후퇴와 전진의 효과를 주 어 배경으로서 원근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초록색 선으로 양분된 여인의 얼굴도 왼쪽과 오른쪽 색의 미묘한 차이로 인물의 실제감을 형성하고 있다. 1907년에 제작된 [호사-고요와 열락]은 야수파 전성기 때의 마티스의 예술세계를 잘 드러 내는 작품이다. 마티스가 그리고자 한 호사란 세련과 단순화로 제어된 삶의 풍요로움, 다시 말해서 고요와 열락, 질서와 아름다움을 노래한 보들레르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마티스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통하여 고전적인 누드화의 절대적 미를 추구하기보 다는 형상의 율동감 있는 리듬과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평면적인 색조를 통해 화면의 명쾌한 단순화와 장식적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다. 그에 게 있어 표현과 장식적 구성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 회화의 전통적 정신인 명석함과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현대적인 형태와 색의 美 를 창출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906년에 그린[생의 기쁨]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서 마티스는 고전에서 영감을 찾아 자신의 현대적 기법을 표출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 작품은 또한 그가 점차로 야수주의적 분방함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 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가롭게 누워 있거나, 춤을 추거나, 피리를 불고 사랑하고 있는 인물들에서 풍경과 인물을 자연스럽게 혼합시키고 있으며, 누드화와 풍경화라는 고전적인 도상에 그가 관심을 기울였 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만의 율동적인 인체 묘사의 선과 함께, 세잔의 [수욕도]에서 볼 수 있었던 화면 구성과 고갱의 [설교 후의 환영]에서 볼 수 있었던 색채면에 의한 화면 분 할이 존재 함을 확인할 수있다. 이렇듯 마티스는 프랑스 회화의 전통속에서 새로움을 찾 는 화가였다. 야수파의 본질을 끝까지 고수한 마티스의 1948년 작인 [빨간 실내]는 그의 만년의 화풍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빨간색이 화면에 강한 힘을 부여하면서 삶의 환희를 상징하고 있다. 말기 그의 예술적 목적은 '하루의 힘든 일을 마치고 돌아와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는 듯한 화음과 평온히 깃든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에 이미 거장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던 마티스는 2차대전 후의 화업으로서 새로운 세계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오로지 삶을 찬미하고,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이 가져다 준 하나의 장식적 아름다움의 세계이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1876-1958)는 야수파 그룹 중에서도 가장 야수파 적인 정열을 소유한 화가였다. 그는 한때 음악에 열중하기도 하고, 자전거 경주 또는 프로 레슬러와의 시합등 당당한 체구 와 성격에 어울리는 활동적인 경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순수한 색채를 튜브에서 직접 짜서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 여태까지 나는 나의 파괴 적인 본능을 실감하고, 이를 생생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재창조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야수파 화가들이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에서 공부한데 비해, 모든 전통적인 기법 과 소재를 거부하면서 내적 표현의 매체로 색채의 자율적 가치를 강조한다. 그는 "예술은 본능이다." 라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내적 충동을 과감하게 분출시켰다. 1906년에 그린[빨간 나무가 있는 풍경]과 [서커스]는 이러한 블라맹크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의 직관적인 정열이 낳은 강렬한 원색의 힘찬 선은 진정 야수파다운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앙드레 드랭(1880-1954)은 블라맹크와 각별한 우정 관계를 맺으며 야수파의 진정한 예술을 완성시킨 야수파의 중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블라맹크가 본능적인 직관만을 신봉 한데 비 해, 드랭은 과거의 영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심사숙고하면서 그것에 대해 항상 회의하려 들었던 이지적 화가이다. 그는 야수파에서 세잔느의 세계 및 입체파 수법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방법을 변화시킨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방법을 꾸준히 연마하는 성실한 화가였다. 야수파의 작가들이 그들의 그림이 순간의 정열에 의해 단숨에 완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티스를 위시해 많은 야수주의자들은 그들이 채워 넣어야 할 캔버스의 빈 공간에 알맞은 색과 선을 찾으려 부단히 애썼고,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일견 엉성해 보이면서도 완벽한 짜 임새를 보이는 그들의 그림에서 증명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드랭도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자세로 야수주의적 화면을 완성해 내려고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의 예술은 격정과 지성의 결합으로 형성되고 있다. 1904년에 그린 [르 페크 부근의 세느 강]에서 볼 수 있듯이 소박하면서도 활기에 찬 색의 조화는 그의 예술 세계가 지니고 있는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1905년에 그린 [콜리우르의 풍경]은 마티스와 함께 스케치 여행을 가서 완성한 작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밭을 표현한 화면에 흰 빈틈을 발견할 수 있다. 서양회화의 전통에서 화면 의 부분을 칠하지 않고 희게 방치한다는 것은 용기있는 시도라고 할 수있는데, 드랭은 그의 원색들이 한데 뒤섞여 혼잡한 색면을 만들어 버릴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이러한 틈을 만든 것이다. 그의 야수주의는 격정의 분출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원색 들의 배열이라고 해도 좋을듯하 다. 라울 뒤피(1877-1953)는 비교적 뒤늦게 야수파에 동참한 화가이다. 그러나 그는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의 쇠라 이후에도 야수주의를 고수한 또 한사람의 화가이 다. 그는 또한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완성하는데 이는 1952년에 완성한 [겔마 골목의 아틀리에] 에서 잘 나타나 있다. 뒤피는 1908년 무렵에 와서 야수파의 색채의 향연으로부터 세잔의 견고한 화면 구성으로 관 심을 옮기 시작하면서 대상을 평면화시키는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이것이 뒤피의 후기 작품에 나타나는 선묘적 요소의 근간이 된다. 그는 섬세한 선으로 화면의 윤곽을 형성하고 그 위에 평면적인 색채를 가미함으로서 아름답 고 경쾌한 화면을 구축하게 된다. 또한 미완성으로 마무리한 듯한 기법에서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여백의 효과는 동양화의 기법을 연상하게 하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선의 유희를 자 연스럽게 즐기게 한다. 이러한 기법은 여유롭고 낙천적인 뒤피의 세계관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조르쥬 루오(1871-1958)는 여느 야수파 화가들과는 다른 깊이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를 가리켜 흔히 20세기의 최대의, 혹은 유일한 종교 화가라고 일컫는다. 이는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종교적 모티브와 어둡고도 두터운 표현적 기법에서 연상되 는 진지함 때문이다. 그러나 루오가 그리는 그리스도는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의 인간의 죄와 악을 미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의 충동이다. 루오는 이런 인물들을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관을 표현했다. 1933년에 그린 [성스러운 얼굴]은 이러한 그의 예술관을 드러내고 있다. 루오의 그리스도 초상화에는 진실을 갈구하는 인간의 고뇌가 빚어져 있다. 그것은 분노와 절망을 감춘 고독의 모습이다. 그의 색채는 깊고 탁하며, 힘차고 단순화된 선에 의한 형태가 두터운 색층속에서 부터 배어 져 나온다. 그의 검은 윤곽선에 의한 색면들은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볼 수 있는 구획성을 상기시 키며 그의 그림을 중세의 종교화와 같은 무게감을 갖게 한다. 야수주의 (Fauvisme)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강렬하고 경쾌한 양식이다. 세잔의 단순성과 고갱의 대담하고 화 려한 원색에 영향을 받았으며, 라틴 민족의 낙천성이 표현되었다. 야수주의는 20c초에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색채의 해방' 이라는 명분아래 힘찬 붓터치와 색채의 자율성을 추구하였으며, 과감하게 강 렬한 원색을 사용함으로써 외부 세계에 대한 감성을 표현해내었다. 이러한 노력은 추상으로 나가는 하나의 본격적인 시도로써 색채의 추상성을 선도해 나아간다. 야수주의라는 명칭은 1905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된 마르케의 청동조각을 보고 비평가 루이 보크셀 (Louis Vauxcelles) 이 "야수의 우리속에 갇혀있는 '오나텔로' 같다" 고 평한 데서 유래되었다. 당시 인상주의가 중심사조로 자리잡고 있을 때라 야수주의 역시 인상주의와 후기, 신인상 주의의 영향을 받게 된다. 풍경이 그들의 소재였으며 구성적인 면에서도 인상주의를 답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수주 의자들은 인상주의를 따르는 것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1900년대의 사회적인 동요와 불안의 표출로 야수주의는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08년에 벌써 자취를 감취갈 정도로 잠시밖에는 존재하지 못한다. 야수주의는 선언문이나 프로그램, 이론등을 확실하게 갖춘 학파를 이루지는 못했다. 우연적이며 즉흥적인 양상을 띠면서 나타났고, 화가들의 신조나 입장을 명백히 설명할 만한 선언이나 주장은 없었지만, 전통적인 화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현기법을 시도하려는 공통 의 관심사를 나누던 급진적인 화가들의 모임으로서 의미가 있다. 마티스, 마르케, 블라맹크, 반 동겐, 루오등 젊은 작가들이 있다. 야수주의 작가들의 작품에는 강렬한 순수 색채가 사용되었으며 그 색채는 공간구성을 이루 는 것에도 사용되었으나 그보다도 대부분 감정의 표현과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서 사용되어 진다. 색채사용을 회화의 목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색채자체가 회화의 목적이 된다는 것은 이 미 회화가 단순한 외계표현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를 내포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화면이 이루어내고 있는 그 자체와 색채였으며, 굵은 붓터치의 독립성과 단 순함, 생명력 있는 원색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야수주의가 사용하는 화면 의 물감은 인상주의의 시각적 혼합 효과의 매개체라기보다는 물감이라는 물리적 존재를 더 욱 강조하고 있다. 즉 이들의 기법은 후기인상주의의 반 고호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상주의의 빛에 의한 명암법을 거부하고 적, 청, 녹, 황의 4원색을 강렬한 필치로서 병렬 하는 대담한 수법으로 격렬한 개성적인 표현을 시도하였으며 형태는 극도로 단순화시켰다. 인상주의의 즉물적인 감수성을 배제하고 회화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전통적인 기법을 재현하 여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색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이러한 해석은 구질서로부터 이탈하고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구 축하고자 하는 사고를 강조하고 있다. 이전까지의 전통적인 회화개념을 부정하고 자연주의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색채 그 자체의 표현을 강조하는 근대 미술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야수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원색에 가까운 순색을 사용하여 색채가 눈부시게 표현되고 각 색조간의 직접적인 대비로 화려함을 보여준다. 또한 보색을 사용하여 더욱 강한 이미지가 부각되기도 한다. 대담한 터치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두어서 색채와 표현력이 더욱 생생하게 강조되었으며 회 화적인 감동이나 열정을 보다 단순하고 생략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작품세계에 표출시켰다. 강렬한 원색과 자유분방한 붓터치는 화면을 평면화시키면서 대상재현의 색채역할을 거부한 다. 1908년경부터 이들은 각자의 방향을 독자적으로 전개해나간다.
양식(樣式) style(영) Stil(독)
형(形), 형(型), 풍(風), 식(式), 유파(流波),태도(態度) 따위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예술상 으로는 예술적 표현이나 형성 방식의 유형적 분화에 관한 기술 개념(記述槪念)으로서 사용 되는 경우와 특이한 의미에 있어서의 가치 개념으로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우선 이 개념은 인간의 정신적 창조활동을 감각적 대상의 형태화로 파악하는 데에서 성립한 다. 라틴어 'Stilus'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는 필기용의 철필을 지칭하던 것이 의미가 변하여 먼저 수사학과 문체론에서 문장을 쓰는 방법 혹은 문체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점차 이 용법 이 확대되어 예술적 표현의 방식에도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예술작품에서는 일반적으로 역사적 양식을 말하는데 개인의 연령별 발전 단계에 따라 청년 양식, 장년 양식, 노년 양식과 같이 나누는 방법과, 시대에 따라서 구분하는 고전 양식, 고딕 양식, 바로크 양식 등이 있다. 그밖에 프랑스 양식, 독일 양식 등 민족에 의해 분류하는 경우, 유채화 양식, 목조 양식 등 매재에 의한 분류, 정물화 양식, 풍경화 양식이 있고, 또 소박적(素朴的), 정념적(情念的), 촉 각적, 시각적 등, 보다 본질적인 형성 가능성에 근거해서 분류하기도 한다
양식화(stylization)
참된 예술품은 당연히 그 작가의 민족이나 시대 양식의 특징을 띠고 있기 마련인데, 원리적 으로는 모든 예술적 표현을 양식화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말은 보통 자연 물상의 형태를 재 래의 관용되어 온 형식에 따라서 강력하게 또는 필요 이상으로 바꾸거나, 단순화 하는 조형 예술상의 한 수법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양식화 또는 속화(conventionalization)는 실제 문양화가 되는 일이 많다. 다만 이 상투적 양식화에 대하여 개성적 양식화를 구별하는 사람 도 있는데, 그에 따르면 후자의 경우 단순화는 예술가가 자기 자신의 주관에 따라 대상의 본질적 형상을 요약하여 뽑아내는 것을 뜻한다. 언더 페인팅(underpainting) 유약칠이나 바림, 임파스토를 덧바르기 전에 맨 밑에 칠하는 페인트 층을 일컫는 용어. 'Alla prima painting'이 보편화된 19세기 후반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회화가 여러 층으로 되 어있었다. 템페라 화법에서는 밑 그림을 그린 후 흙빛이 도는 초록색 도료 위에 밝은 색부 터 덧칠해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표현했다. 이 방법은 특히 14세기 회화에서 흔히 나 타난다. 유화에서는 여러 가지 중간색 중 하나를 언더 페인팅에 사용했다. 15세기와 16세기 초 많은 이탈리아 화가들은 플란더스의 영향을 받아 템페라를 언더페인팅으로 사용했다. 18 세기의 거의 모든 화가들은 넬러의 방식대로 중간 색으로 밑바탕을 칠한 후, 그 위에 유약 칠, 바림 또는 진한 색을 칠해 음영과 부분적인 색을 표현하고 가장 밝은 부분은 두꺼운 임 파스토로 맨 나중에 칠했다. 이때 나중에 칠한 색이 언더페인팅과 결합해 짙고 선명한 효과 를 내기도 했다. 19세기 회화에서는 극단적으로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을 피함으로써 각각의 색깔이 더 차분해지고 짙어졌을지는 모르나 완성된 작품의 색깔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다. 이는 한 가지 색 이상의 불투명한 물감을 칠하는 기초를 마련하게 되어, 언더페인팅의 색이 어두워졌다. 18, 19세기 회화에는 광택이 없는 애벌칠 도료로 종종 수성 물감을 여러번 덧칠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보통 단색으로 먼저 칠한 후 덧칠함으로써 밝은 색은 둔 화되고 어두운 색은 보강되었다. 또 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부분적으로 색을 덧칠하기도 했 다.
언더그라운드 영화(Underground Cinema)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영화 운동. 1960년대 미술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종래의 영화가 상업주의의 해독을 입어 도덕성의 퇴폐, 빛바랜 미학, 천박한 테마 의 관용적인 표현에 빠졌다고 보고, 이에 대항하여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새로운 태도에 바탕을 두고 자유로운 영상 표현을 목표로 하는 실험적인 영화작가 및 화가들에 의해 시도 되었다. 미국에서는 그 이전에 뉴 아메리칸 시네마라 불리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1960년 조 나스 메커스의 '언더그라운드 제1전선'은 새로운 영화 작가의 집단적 결속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주장은 삶이나 예술에 대하여 기존의 온갖 원칙을 불신, 영화는 절대로 개인 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하여, 프로듀서나 배급업자, 융자인의 간섭을 거절하고, 일체의 검열 을 거부하는 등 전위적인 입장을 띠고 있다. 작품에는 단편이 많지만 긴 시간의 장편물도 있다. 개인적 주관의 표현이 공통적인 경향인데, 자유로운 주제로 온갖 영화 수법을 동원하 여, 영상 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앤디 워홀, 케네드 앵거, 칼 린더, 로버트 브리 어, 올덴버그, 마코폴로스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언더페인팅 underpainting(영)
유약칠이나 바림, 임파스토를 덧바르기 전에 맨 밑에 칠하는 페인트 층을 일컫는 용어. 'Alla prima painting' 이 보편화된 19세기 후반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회화가 여러층으로 되 어 있었다. 템페라 화법에서는 밑그림을 그린 후 흙빛이 도는 초록색 도료 위에 밝은 부분 과 어두운 부분을 표현했다. 이 방법은 특히 14세기 회화에서 흔히 나타난다. 유화에서는 여러 가지 중간색 중 하나를 언더페인팅에 사용했다. 15세기와 16세기 초 많은 이탈리아 화가들은 플란더스의 영향을 받아 템페라를 언더페인팅으로 사용했다. 18세기의 거의 모든 영국 화가들은 넬러의 방식대로 중간 색으로 밑바탕을 칠한 후, 그 위에 유약칠, 바림 또는 진한 색을 칠해 음영과 부분적인 색을 표현하고 가장 밝은 부분은 두꺼운 임파스 토로 맨 나중에 칠했다. 이때 나중에 칠한 색이 언더페인팅과 결합해 짙고 선명한 효과를 내기도 했다. 19세기 회화 에서는 극단적으로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을 피함으로써 각각의 색깔이 더 차분해지고 짙어졌 을지는 모르나 완성된 작품의 색깔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는 한 가지 색 이상의 불투명한 물감을 칠하는 기초를 마련하게 되어, 언더페인팅의 색이 어두워졌다. 18,19세기에는 광택이 없는 애벌칠 도료로 종종 수성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보통 단색으로 먼저 칠한 후 덧칠함으로써 밝은 색은 둔화되고 어 두운 색은 보강되었다. 또 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부분적으로 색을 덧칠하기도 했다.
에나멜(enamel)
① 색유리의 가루를 금속(금, 은, 동 등)의 표면에 구워 붙이는 장식 기술.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칠보라고 불린다. 서양의 중세에는 특히 종교적 용구가 이 기술로 많이 만들어졌다. 기 법이나 지금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세분되어 분류되고 있다. ② 에나멜 페인트를 지칭 하기도 한다. 오동유, 아마인유에 천연수지, 합성수지를 가열·융합한 유성 바니쉬 혹은 알 키드 수지와 같은 합성수지 도료에 여러 가지 안료를 개어 넣은 것으로 보통 페인트에 비해 칠했을 때의 손자국이 적고, 건조가 빠르며, 광택이 좋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에로틱 아트(erotic art)
성을 주제로 다루거나 관능적으로 표현한 미술. 다신과 풍요를 기원하는 비너스, 지모신, 생 식기 등의 표현과는 의도가 다르며, 성행위의 직접적 표현을 목적으로하는 포르노그라피 (Pornography)와도 구별된다. 1960년대 들어와서 주목할 만한 토픽으로 부각되었으며 (1968 년 미술사가 피터 웹에 의해 영국의 미술 대학에 에로틱 아트에 관한 강좌가 개설), 책과 전시물들을 통해 대중 소비에 적합한 주제가 되었다. 1968∼69년 필리스와 크론하우젠에 의 해 조직되어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열린 대규모의 에로틱 아트 국제 전시회는 25여만 명의 관람객들을 매혹시킨 바 있다. 마리오 아마야(Mario Amaya)는 에로틱 아트를 '육체나 정신 속의 성적 감각을 유발하는 예술'로서 규정짓고 있지만, 어떻게 해서 이러한 감각이 유출되 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에로티시즘은 성(sex)와 동일시되고 있는 데, 이는 성적 행위에 대한 묘사 없이도 예술작품이 에로틱한 감정을 일으킬 수 있으며 반 대로 성교의 이미지라고 할지라도 전혀 에로틱한 반응을 자극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라고 하겠다. 예컨데 렘브란트가 성행위를 묘사한 것은 예술일 수 있지만 서투 른 아마추어에 의한 동일 행위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성적 활동이 인류의 보편적인 속성인 한, 에로틱이란 사회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변하 는 문화적 개념인 것이다. 에로틱 아트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동성에 수성 등 인간의 성행 위의 전역에 걸친 장면들로서, 이는 에로틱 아트와 포르노그라피 간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제기케 한다. 즉 포르노그라피의 이미지는 노골적이며 단지 목적에 대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에로틱 아트에서는 이미지의 관능성이 형식과 매체 사용에 연결됨에 따라, 예술작품 을 관조하는 일 그자체가 하나의 성적 행위,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타인의 정사를 엿보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는 변태성욕자와 유사한 감각이 체험되고 있는 것이다. 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개력론자들은 에로틱 아트의 치료적 가치야말로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요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성적 해방이 경제·사회 및 정치 영역 에 있어서의 해방과 결합되지 않는 한, 성적 자유란 우리를 구속하는 억압의 상황 아래 피 난처를 제공할 따름인 것이다. 현대 예술가 중 성적 주제에 관심을 표방하는 자들로는 비토 아콘치, 발튀스, 한스 벨머, 프란시스 베이컨, 배리 버먼, 로버트 크럼, 알렌 존스, 데이비드 호크니, 리하르트 린트너 그리고 앤디 워홀(영화)등이 있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프로타주 기법을 통한 초현실 세계를 표현하였다. 1891년 독일의 브뤼힐 태생인 에른스트는 본에서 철학 공부를 한 인문학도였다. 1914년 한 스 아르프를 알게 되고, 이즈음 아방가르드의 모더니즘 이념에 전도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독일 표현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한다. 1919년 쾰른의 다다그룹에 참여하였으며 1922년에 파리로 와서는 초현실주의에 참여한다. 1919년 부터 입체파에 의해 이미 사용된 콜라주의 새로운 활용법에 전념,1925년 초칠을 하 는 방법을 발명하였다. 초현실적인 작품이 등장하는 시기에는 데칼코마니도 사용했다.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현 실을 생생하게 관찰하고 그것에다 자신의 환상을 펼쳐나간다. 자신의 환상과 스스로가 유발 시킨 환각을 그리는 일이 그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에른스트가 이야기하는 숲은 매우 빽빽하고 불길한 곳. 태양이 숲위에 비쳐도 빛이 숲속까 지 깃들지는 않는다. 에른스트는 숲이 상상을 위한 완벽한 장소라고 또한 한 사람이 죽음에 처학게 되는 장소. 환상과 공포가 뒤섞이는 곳이다. 1920년에 최초로 콜라쥬기법을 활용한 작품을 발표하고 곧 이 기법은 포토몽타쥬, 유화 위 에 콜라주등으로 확산되며 가시적인 것에 혼란을 야기하는 작품을 제작한다. 1921년에 그린 [셀레브의 코끼리]는 에른스트의 초현실주의 회화작품 중 첫번째작품으로 꼽 히고 있다. 화면 중앙에 반은 코끼리를 닮은 동물의 형태를 하고,반은 기계와 같은 모습을 띄고 있는 몸집이 거대한 괴물이 들어 차 있다. 이것은 한편 난로와 같은 이미지를 띄고 있는데, 중앙으로 늘어뜨린 튜브 끝에는 소머리를 연상시키는 투구를 매달고 있다. 매우 낮게 자리잡은 수평선과 하늘 위로 헤엄쳐 다니는 물 고기를 보면, 이 그림이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회화에서 영향받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편 이 알 수 없는 괴물은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과도 연관이 있다. 즉 꼬마 에른스트 가 친구들과 함께 등하교길에서 점잖은 어른들을 놀리기 위해 불렀던 약간은음탕한 가시의 노래 속에 셀레브섬에 있는 엉덩이 큰 코끼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차가운 기계 이미지 와 화면 오른쪽 아래를 차지하고 있는 목이 없는 여인 누드는 에른스트가 직접 겪었던 1차 대전의 악몽 같은 기억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에른스트가 브르통의 동료이자 시인이었던 폴 권유로 파리에 정착하게 된 다음해인 1923년에 그려진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들 메우는 초생달과 둘로 나뉘어진 해, 그리고 그 바로 아래 남녀의 섹 스가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날카로운 직선과 사선에 의해 분열되어 있는 화면 중앙에 산 인지 굴뚝인지 알 수없는 원통이 땅위로부터 우뚝 솟아있다. 화면 맨 아래에는 인간의 내장 같기도 한유기체가 늘어져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관객은 이 그림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괴기스러운 악몽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구상 과 추상의 요소가 뒤섞여 평범한 감상의 시각에는 난해하기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무의식을 펼쳐 놓은 것만 같은 상상도 가능하게 한다. 1924-38년에는 초현실주의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1925년 프로타쥬K(문지르기)기법을 고안 한다. 이는 평면이 매끄럽지 않은 판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로 그위를 문지름으로써 동물과 같은 형태를 발견해내는 기법으로 '명상적이고 환각적인 능력을 강화시키는 '데생을 만들어 낸다.1926년에 발표한 '박물지'가 이 기법으로 모든 종류의 다른 재료에도 다채롭게 적용하 였다. 나뭇잎, 헝겊조각, 등이 그것으로 이는 초현실주의적 꿈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 시기에 에른스트는 그 특유형태를 소재로 하여 밀도 높은 시성이 가득찬 세계를 보이는 회화를 발표한다. 그는 또한 로망 콜라주의 발명자이기도 하다. 1938년초현실주의와 결별한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국제적명성을 얻게되어 1954년에는 비 엔날레의 대상을 수상하고 마긋 에른스트이 작품은 인간정신의 탐구능력에 관해'회화를 넘 어선 상태'를 밝히고자 하는 욕구를 담고 있다. 주요 작품 : 숲, 도시의 전경, 비온 후의 유럽 등
에보시
밑그림, 대충 그린 그림을 말한다. 조각의 경우, 대출 깎아놓은 상태도 에보시이다. 타블로의 제작에서는, 에스키스의 다음 단계로서 유화물감(예전에는 템페라)으로 대강 그린 것을 말한 다. 작품은, 글라시로 그려지든 파트(물감의 반죽상태)로 그려지든, 밑그림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파랑 바탕위에 칠한 검정은 한층 깊은 맛을 낸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에는 각기 다른 에보시가 쓰이고 있다. 이탈리아 파는 흑색, 스페인 파는 빨강, 네덜란드 파는 회 색 또는 갈색을 썼다. 인상주의 이후에는 에보시르 쓰지 않고 바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에스키스 esquisse(불)
회화에서 시작(試作)을 위한 밑그림의 뜻. 큰 작품을 제작할 때 준비 단계로서 작은 종이나 천에 간단히 구도를 그려보는 것. 때로는 색채나 명암을 그려넣어 그 효과도 가늠해 보는데, 에스키스의 자유로운 이미지나 왕성한 선묘에 작가의 조형사고나 개성이 잘 표출되는 경우도 많다. 오늘날에는 타블로보다는 벽화나 건축 설계 등 보다 계획성 있는 일에 많이 쓰인다
에스프리 누보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예술 혁명 운동의 하나로 문학, 미술, 건축, 음악 등 넓은 범위에 걸쳐 그 표현과 형식을 근대 정신에 합치시키고자 했던 시도. 에스프리 누보란 '새로운 정신'이라는 의미로,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장식 예술 만국 박람회 때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세운 전시관에 붙여진 이름에서 유래된 말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1920년 이후 화가 오장팡과 함꼐 동명의 잡지를 간행하여 이런 혁신적인 예술 운동을 옹호하였다. 르 코 르뷔지에는 에스프리 누보관을 건축할 때 철근 콘크리트라는 새로운 재료를 도입, 장식이 과잉된 이른바 '근대 양식'의 쓸데없는 부분을 일체 배제한 기능주의적 건축물을 설계하여, 건축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것은 20세기 초두의 화려한 양식에 대한 반발로 회화의 순수주 의 운동과도 호응하는 것이었다. 에스프리 누보 운동은 특히 건축과 공예 분야에서 19세기 적인 것을 일체 버리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에칭(etching)
산의 부식작용을 이용하는 판화의 한 방법이다. 잘 닦여진 동판에 산의 화학 작용을 방지하 는 물질을 내산성 방식제 또는 '에칭 그라운드'라고 하는데 보통 밀랍, 역청, 또는 송진을 혼합한 것이다. 이 판에 금속 에칭 바늘로 새겨나간다. 이렇게 검은 피복막을 새기면서 밑의 밝은 금속이 드러나게 한다. 판의 뒷면과 모서리는 일명 '내산성으로 처리된 와니스'로 덮은 후에, 희석된 산이 들어있는 통에 담근다. 이때 일반적으로 질산을 쓴다. 부식액 속에 담겨 진 판은 그라운드가 바늘에 긁혀져 드러난 금속 부분만 부식된다. 에칭의 특징은 펜이나 연필로 종이 위에 직접 그리는 것과 같은 선의 자연스러움이다. 따라 서 신중하고 간접적인 성격의 기법인 라인 인그레이빙의 정확성, 계획성, 형식성과는 다르 다. 뿐만 아니라 에칭은 그라운드를 입힌 에칭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스케치북처럼 필요할 때마다 이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방법은 라인 인그레이빙으로 시도할 수 없다. 뷔랭 으로 작업하는 라인 인그레이빙의 방법은 생활을 직접 대변하면서 작업하는 소묘의 한 방법 과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선 자체를 엄밀하게 조사해 보면 때때로 많은 차이점을 볼 수 있다. 동판에 직접 새긴 선은 손의 압력에 따라서 선의 굵기가 정해지는 반면에, 부식된 선 은 손에 의한 작업이 아니라 산의 화학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일정한 폭을 갖게 된다. 부식된 선, 특히 질산에 부식된 선은 때때로 약간 불규칙하다. 반면에 동판에 뷔랭으 로 새긴 선은 힘들게 긁어낸 흔적이 뚜렷하다. 이러한 차이점을 이해하면 에칭인가 라인 인 그레이빙인가를 판별할 수 있다. 최초의 에칭은 16세기 초에 시도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디자인을 금속판에 부식시키는 그 기 본적인 원리를 갑옷과 투구를 장식하는데 이용했었다. 뒤러는 철판을 이용하여 에칭을 하였 는데 부식상태가 강렬하고 상당히 거칠다. 뒤러 외에도 그 당시 북구에서는 우르스 그라프, 알트도르페, 루카스 반 레이든, 이탈리아에서는 파르미지아노 등이 에칭을 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초에는 자크 랄로와 아브라함 보스가 에칭으로 크게 활약하였는데, 이들은 에칭의 구파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에칭을 라인 인그레이빙의 대체 기법으 로 간주하였다. 최초의 근대적인 에칭 화가는 렘브란트 였는데 그의 판화는 풍부한 감정, 인 간성, 그리고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에칭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18 세기에는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가 환상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작은 크기의 에칭으 로 그의 대형 그림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빛, 대기, 그리고 공간에 대한 환상적인 느낌을 보 여주고 있다. 18세기 말에 수페인에서는 고야가 숨많은 에칭을 제작하였는데 그 중 대부분 이 부식된 선뿐만 아니라 그늘진 작은 부분가지도 나타내는 동판부식법을 이용했다. 19세기 에는 밀레, 코로, 피사로, 드가를 포함하여 프랑스의 뛰어난 화가들 대부분이 에칭을 제작했 다. 20세기에 이르러서도 뛰어난 화가들 대부분이 다른 판화 기법들과 함꼐 에칭을 제작하 였는데, 주로 책의 삽화를 위한 것이거나 감식가를 위해 고안된 소수의 제한된 판을 제작했 다. 피카소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에칭을 하였다. 그는 입체파 운동을 통하여 브라크, 그리 스 등의 화가들과 함꼐 에칭을 입체파 화가들의 자율적인 기법으로 간주하여 제작하였다. 1930년대에 루오는 에칭과 동판 부식법, 그리고 드라이 포인트를 혼합해서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냈다. 마티스도 훌륭한 에칭 작품을 남겼다. 샤갈은 구약성경의 삽화를 위해 에칭을 제작하였는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에코르셰
인체, 동물의 군육의 움직임을 연구하기 위해 피부 밑이나 근육의 노출된 상태를 그린 그림 이나 석고 모형. 인체의 해부학적 탐구가 성행했던 르네상스 시대 이래 많은 화가, 조각가에 의해서 시도되고 있다
에콜 드 보자르
화가, 판화가, 조각가, 건축가를 위한 고등 교육을 목적으로하여 설립된 프랑스의 국립 미술 학교. 파리의 보나파르트 가에 위치해 있으며, 문화성에서 관장한다. 대혁명 전까지의 각종 왕립 아카데미에서 행해진 교육이 콜레지 드 카트르 나숑에 통일된 것이 시초이며, 1820년 에 오늘날의 건물 건축이 드브레에 위촉되었다. 17세에서 30세까지의 지망자가 시험을 쳐서 입학한다. 아틀리에에서의 제작이 교욱의 주체로, 그밖에 일반 교양, 전문강좌가 있다. 아틀 리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장관이 임명한 교수의 아틀리에로 학교 내에 있고, 또 하 나는 학교 외에 설치되어 있는 자유 교실로, 교수는 학생에 의해 선임된다. 매년 각종 콩쿠 르가 행해져 각종 상이 수여된다. 19세기에는 예술가들에게 로마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던 로마 대상으로 특히 유명했다.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1925년 이후 파리에 거주하며 활동한 작가들을 총칭한다. 조국을 잃고 가난했던 이들의 작 품에는 불안과 애수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파리에서 활동하 는 국내,외 작가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특정한 유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에콜 드 파리파는 파리에 모였던 외국인 예술가들의 집단을 말하는데 제 1차 세계대전 후 부터 제 2차 세계대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모였던 외국인 작가들을 가리킨 다. 제1차 대전 전후, 파리에는 많은 외국인 작가들이 모여들었는데,그 중 이탈리아의 모딜리아 니, 러시아의 샤갈, 네덜란드의 반 동겐, 독일의 에른스트, 스페인의 피카소, 미로 등이 대표 적인 작가이다. 그들 대부분은 외국인이고 동시에 유태인이어서 애수적인 면과 표현주의적 인 경향이 있었다. 이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감상적이며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였으며, 이론의 구성면에서는 약했다. 파리파는 공통적인 주의나 양식이 없었기 때문에 각기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하며 활동했 다. 그래서 20세기의 이즘이나 유파와는 성격이 다르다. 모딜리아니, 샤갈, 수틴, 파스킨, 키 슬링, 등이 모두 유태계 화가였기 때문에 애수를 띤 우울한 정서를 보여주었으며, 그 중 샤 갈은 러시아의 민담이라든가, 유태인의 속담과 신비적인 전설 등를 주로 그렸다. 감상적이며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그들의 공통점이다. 이들은 표현주의자들과 같이 그들의 영감을 찾기 위해서 공상과 주관적이 것, 직관을 믿었 다. 작가 각각의 내면성을 구축하여 외계와 다른 독창성을 고수하고 있었다. 에콜 드 파리파 는 개성적인 유파로 프랑스 수도에 정착한 외국인으로서 가지는 동화와 현대의 국제적인 예 술의 근본적인 변화, 그리고 두드러진 독창적인 풍취를 서로 나누고 익히며 프랑스 화법도 외국의 화법도 아닌 개성적인 화법을 창출시켰다. 작가들의 출신 배경이나 민족적 기질이 가미되어 기존 화단에 전통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작품과는 차별화 되었다. 이들의 생활에서 오는 고독과 불안에 존재되어 있는 '개성의 집단' 으로서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에꼴 드 파리파의 작가들은 무국적자로서의 고독감, 고국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 불안의 내면의 표정을 작품전체에 표현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로 파리파는 해체되었다. 에콜 드 파리 파리 파. 파리에 모였던 외국인 예술가의 집단을 말한다. 19세기 말 또는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를 비롯, 여러 지역에서 각 시대마다 이와같은 종류의 집단이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제1 차 세계대전 후부터 제2차세계대전 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모였던 외국인 화 가들을 가리킨다. 피카소나 브라크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 파에 속하나 편의상 다른 유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앵데팡당의 화가들, 특히 서정적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이 시기를 대 표하는 화가들을 가리킨다.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리투아니아의 수틴, 불가리아의 파스킨, 폴란드의 키슬링, 네덜란드의 반 동겐, 일본의 후지타 등이 주요 작가이며, 샤갈을 포함시키 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대부분 외국인이고 동시에 유태인이었는데, 이 파의 근저에 깔려있 는 애수와 표현주의적 경향은 이런 성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미려 하고 감상적이며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며. 이론의 구성에는 약했던 면도 있다.
에콜
학문상의 학파, 예술상의 유파를 가리킨다. 미술사 용어로는 고전파, 사실파, 인상파, 입체파 등과 같은 방식으로 쓰인다. '에콜 드 파리'는 엄밀한 의미로는 유파가 아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에 파리를 무대로 활약한 각국의 화가들을 총칭하여 부르는 용어이다.
에튀드
습작, 연습 따위의 뜻이다. 음악의 연습곡도 에튀드라고 한다. 영어로는 스터디(study)가 이 것의 동의어에 해당된다. 제작의 준비를 위해 그려지는 습작은, 부분적인 습작이든, 전체적 인 습작이든 모두 에튀드라고 한다. 또 묘법의 조밀에 상관없이, 습작으로 그려진 것은 에튀 드이다. 연필로 그리는 경우도 있고, 유화로 그리는 경우도 있다.
에피고넨
후계자, 추종자라는 뜻.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테베 전쟁 때 전사한 7인의 용사의자식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10년 뒤에 테베를 멸망시켜 아버지의 복수를 하였다고 전하는데, 그것이 전용되어 예술상으로는 뛰어난 선구자의 모방을 일삼은 아류의 뜻으로 쓰인다. 완성된 모범 적 작품을 독창적인 창조성 없이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엑조티시즘(exoticism)
보통 이국 정서, 이국 취미라고 번역된다. 그리스 어의 엑소티코스(exotikos)에서 유래된 말 로 예술상으로는 자기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미지의 이국을 취재하여 비통속적인 (작가 자 신의 주변 인물들이 보아)혹은 비현실적인 미 또는 아이디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것. 따 라서 낭만주의와 결부되는 일이 많은데 프랑스 낭만파 회화의 오리엔탈리즘이 그 하나다. 후기 낭만파 문학에서도 엑조티시즘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테오필 고티에가 그 대표자이다. 그에 따르면 엑조티시즘에는 공간상의 것과 시간상의 것, 두 종류가 있는데, 시간적으로 멀 리 떨어진 시대를 취재하는 것도 엑조티시즘으로 보고 있다. 금세기 초의 흑인 조각에 대한 흥미가 그 예이다.
엔소르 (James Sydeny Ensor,1860~1949)
벨기에의 화가. 오스텐드에서 태어났다. 근대회화의 천재로서 표현주의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브뤼셀의 미술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뒤에 아카데미즘을 반대하여 중퇴하였다. 초기에는 드가·고흐 등의 영향을받고 인상주의로부터 출발하였으나, 1883년부터는 독일의 표현파에 가까운 환상·괴기·풍자의 방향으로 바뀌면서 가면·해골·망령 등을 주요 주제 로 삼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성 앙투안의 고난〉 등이 있다.
엔타블러춰(entablature)
기둥 상부에 걸친 수평부. 고대 그리스 로마 계통의 건축물에서 기둥의 윗부분에 수평으로 연결된 지붕을 덮는 장식 부분. 위로부터 코니스, 프리즈, 아키트레이브의 세 부분으로 구성 됨.
여백(餘白)
그림에서 묘사된 대상 이외의 부분. 특히 동양화에는 옛날부터 여백은 편재되 있는 기(氣) 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중국의 초기(10세기) 산수화가들은 '산수(山水)의 기상(氣象)'을 묘사 하고자 여백을 두었다 . 여백은 광(光)과 기(氣)를 의미한다. 북송의 사대부들이 시화일치론(詩畵一致論)을 제창하 였는데 그림 가운데 여백은 시정과 여운을 양성하는 유효한 수단이다. 남송의 마 위앤(馬遠), 시아 꾸에이(夏珪)는 이를 과장하여 '변각경'에 의한 화면의 주요 부 분을 공백으로 처리하여 정형화했다. 여백으로 광대한 공간을 암시하는 수법은 송. 원 시대 의 선종 화가들에게 종교 이념을 표명하는 것으로 구체화됐고 명대의 절파 화풍으로 계승되 었다. 여백은 감필과 병행되어 표현을 억제하는 데 의의를 두며 많은 걸작을 만들어냈다. 또한 묵 죽, 화조화, 인물화에서 여백은 대상의 포치에 대한 구성상의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 여백은 종종 장식적. 조형적 효과를 내기위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연단도(煉丹圖)
중국화의 화제. 연단(煉丹), 또는 연단(鍊丹)은 장생불사의 선약(仙藥)을 만드는 도가(道家) 의 비술을 말한다. 화제로는, 연단의 시조라고 하는 진(東晋)의 갈홍(葛洪)이나 고사(高士)가 산속에서 동자와 선약을 만드는 모습을 그리는 것과 안휘성의 황산 속에 있는 빼어난 경치의 하나로서 태고 에 황제가 금단을 만든 곳이라는 연단대(煉丹臺)를 그리는 두 종류가 있다. 명의 당인(唐寅)의 낙관이 있는 '소악도(燒樂圖)' 가 있으며, 후자의 예로는 청의 매청(梅淸) 이 그린 작품과 석도(石濤)의 '황산팔승도책(黃山八勝圖冊)' 중의 그림 등이 있다예서(隸書) 한자의 서체. 진팔체(秦八體)의 하나. 진대에 소전(小篆)을 간략화하여 만든 서체. 진의 옥리 (獄吏)였던 정묘(程 )가 옥에 종사하는 사무원의 문서의 번잡함을 줄이기 위해 고안하였다 하여 예서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다. 한 대에 이르러 전서를 대신하여 통용되었다. 전한 중기까지는 아직 소박한 서체를 하고 있 어 이것을 고예(古隸)라고 한다. 전한의 말기부터 차츰 파책(波 , 영자필법 가운데 여덟 번 째 책, 즉 파임)을 수반하는 기법이 발달하고 형식이 정비되었으며, 후한에 이르러 완성된 모양을 이루었다. 이것은 팔분(八分)이라고 비각(碑刻)에 많이 사용되었다. 팔분의 서체는 위진(魏晋) 무렵까 지 통용되었는데, 차츰 파책을 잃어 해서로 옮겨 갔다. 이것을 '금예(今隸)' 라고 부른다. 뒷 날 고예, 팔분, 금예를 총칭하여 예서라 부르게 되었다.
영모화(翎毛畵) Ling-mao-hua (중)
중국화의 화제. 영은 새의 날개, 모는 짐승의 털을 뜻한다. 곧 새나 짐승의 깃이나 털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꼼꼼하게 그리는 그림이다. 주로 작은 동물이 중심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새를 소제로 한 것을 영모화라 부르고, 짐승은 축수도(畜獸圖)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북송의 화원들 사이에서 특히 발달하였다
예술 심리학(psychology of art)
예술 작품, 예술 활동, 예술가 등을 포함해서 널리 예술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심리학. 현재 로는 아직 완전한 체계가 수립되었다고 할 수 없으나 역사적으로 보아, 두 갈래의 연구 방 향이있다. 그 하나는, 예술 자체를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 다른 하나는 심리학적 연구의 범위 안에서 예술 연구에 관여하는 것이다. 전자는 미학, 예술학의 흐름에서 파생된 것으로 각 장르마다 연구 대상이 있어, 연구 대상에 따라서 그 연구 방법에 차이가 난다. 후 자는 심리학적인 논리를 원용함으로써 그 분석이 시도된다. 미적 인상을 주는 자극 대상의 특성이나 미적 향수의 문제, 상징이나 양식의 문제 또는 예술가의 내면적인 동기, 개성, 작 품과 그 것을 받아들이는 독자나 감상자의 심리학적 문제 등 여러 방면을 다룬다.
예술 철학(philosophy of art)
예술의 본질 또는 현상에 대해서 그 원리를 고찰하는 철학의 한 부문. 일반적으로는 미학, 예술학과 같은 뜻. 좁은 의미로는 19세기 후반 미 자체만을 고찰 대상으로 하는 전통 미학 에 대해, 그것이 취급하지 않는 에술 분야의 존재를 인정하고 예술 사항 일반을 심리주의적 가치론에 의해 철학적으로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M. 데스와르나 E. 우티츠의 입장 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연에 대치된 인공의 작품은 모두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 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엇이 예술이냐는 정의하기 어렵다. 따라서 예술 철학의 엄밀 한 정의를 내리는 것도 또한 어려운 문제이다. 이는 개개의 작품을 음미하는 예술 비평과는 다르다.
예술사회학(sociology of art)
예술 현상을 사회학적 입장 또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과학의 입장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학 문. 예술 현상, 특히 그 역사를 예술 고유의 내면적 법칙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입장에 대해 서 널리 사회 현상을 고찰, 그 역사성, 계급성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H. 텐, 장 귀 요 등이 예술 사회학적 입장에 속하나 마르크스 주의에 입각한 W. 하우젠스타인에 의하여 비로소 예술 사회학이란 명칭과 그 입장이 명확하게 되었고, 프리체 등이 이 분야에서 활약 하였지만 이들은 도식주의적인 견지를 취했다고 해서 비판 받았다.
예술의욕
독일의 저명한 미술학자 알로이스 리글에 의해 예술학, 미술사에 도입된 개념으로 예술가 혹은 각 시대, 사회, 민족은 어떠한 특정한 예술적인 문제에 대해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와 충동을 지니고 있다고하는 인식에서 생겨난 용어. 리글은 그의 저서<후기 로마의 미 술 공예>(1901)에서 종래 고전 고대의 타락에 일조를 한 것으로 간주되어온 고대 말기의 로 마 예술을 고전 고대와는 다른 이념, 다른 가치 기준에 근거를 둔 예술형성이라는 것을 명 확히하여 로마인만이 아니고 모든 양식이 각각 고유한 예술 의욕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여 미술사의 시대 구분에 대한 개념에 큰 변화를 주었다. 리글의 학문은 W. 보링거를 비롯한 비엔나 학파의 기초 이념이 되었으며, 영국의 T.E. 흄, H. 리드 등에 의해 계숭되었지만 예 술의욕이란 개념은 매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예술지상주의
'예술을 위한 예술'. 19세기 낭만주의의 중심 명제중의 하나. 예술은 사회성, 윤리성 그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그 자신 때문에 존재한다는 사상. 흔히 '인생을 위한 예술'이라는 것 과 대비적으로 쓰인다. 즉 미를 예술 창조및 향수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예술의 자율성을 주장하여, 예술이 다른 어떤 문화 영역에도 종속되거나 관여하는 것을 부정하는 사고 방식 을 말한다. 이런 사고 방식을 의식적으로 체계화한 사상이 유미주의이다. 이것은 19세기 프 랑스의 철학자 쿠쟁이 제창자라고하며 고티에, 플로베르, 메리메, 보들레르, 포, 와일드 등의 낭만주의 문학 속에서 전개되었다. 예를 들면 미와 실용을 엄격하게 나눈 고티에의 '필요는 기피해야 할 것이며, 비천하다. 한 채의 집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 그것은 변소가 아닌가' 와 같은 발언은, 그 입장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19세기 초의 신고전주의 시대에는 대혁명을 주도한 D. 디드로 등과 같이 예술의 사회적 임무를 요청하는 태도가 일 반적이었으나, 1820년대의 낭만파의 대두는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러한 이념이 예술의 근대화의 한 계기로서 주창되었다. 예술지상주의는, 예술의 자율적인 가치를 인식하 고, 미적 형식의 독자성을 발견한 적극적 의의는 있지만, 한편으로 예술이 현실의 문제와 유 리되어 고답적이 되거나, 유희적·퇴폐적이 되는 폐해를 동시에 함유하고 있다. 또한 '무엇 을 만들것인가' 보다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부심하는 미술의 경향이나 미술가의 제작 태도 등을 이 말을 써서 비판적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예술학
넓은 의미로는 '예술에 관한 학문'을 가리키나, 좁은 의미로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독일 에 있어서 미학과 대립 내지 병립적으로 제창된 '예술학', '일반 예술학'을 가리킨다. K. 피 들러는 미와 예술의 문제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논의했으나, 예술학이란 용어는 쓰지 않았는 데, M. 데스와르는 예술만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 즉 예술학을 미학에서 처음으로 독립시켜 거기에 일반 예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미학과 병립시켰다. 그는 1906년에 <미학과 일 반 예술학>을 저술하여 일반 예술학의 본질과 과제를 명확히 했으며 동시에 기관지 <미학 과 일반 예술학 잡지>(1906∼43)를 간행했다. 랑게는 자연미와 예술미의 혼동으로부터 미와 선, 미와 진의 혼동이 생긴다고하여 예술을 분리하여 예술의 미만을 취급하는 예술학을 수 립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일반 예술학을 논리적으로 깊이 있게 발전시킨 것은 E. 우티 츠이다. 그는 <일반 예술학의 기초>에서 예술의 본질 연구를 주제로하여 일반 예술학을 체 계화했다. 미학이 주로 미의 일반 법칙을 철학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라면, 예술학은 예술의 기원, 목적, 성립 조건, 기능, 발전 법칙, 창작, 감상의 법칙 등을 취급한다. 현대에는 일반 예술학의 입장은 후퇴했으나, 각개 예술을 실증적 역사적 또는 실험적으로 연구하는 소위 예술의 과학은 착실한 성과를 얻고 있고, 예술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예술철학도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오달리스크 odalisque(불)
방을 의미하는 터키 어의 오다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는 터키 황제의 신변에서 시중을 들던 여자 노예를 가리켰지만, 차츰 변하여 하렘의 총비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19세기 초 오리엔탈리즘의 주요 테마의 하나로 서양 회화에 등장했고 근대 나체화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이미 카를르 반 로 등의 엑조티시즘적인 회화에 사르타나(술탄의 소실)나 오 달리스크가 그려졌으나 이것을 불후의 테마로 만든 작가는 앵그르다. 그는 1814년과 1819년에 살롱에 출품한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비롯하여 여러 점의 오달리 스크를 제작했다. 또한 들라크루아, 르노아르, 마티스 등이 동일한 주제의 작품을 남겼다. 오달리스크 방을 의미하는 터키 어의 오다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는 터키 황제의 신변에서 시중을 들던 여자 노예를 가리켰지만 차츰 변하여 하렘의 총비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19세기 초 오리엔 탈리즘의 주요 테마의 하나로 서양회화에 등장했고 근대 나체화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이 미 카를르 반 로 등의 엑조티시즘적인 회화에 사르타나(술탄의 소실)나 오달리스크가 그려 졌으나 이것을 불후의 테마로 만든 작가는 앵그르다. 그는 1814년과 19년에 살롱에 출품한 <그랑드 오달리스크>(투르크 미술관)를 비롯하여 여러 점의 오달리스크를 제작했다. 또한 들라크루아, 르노아르, 마티스 등이 동일한 주제의 작품을 남겼다.
오르피슴 Orphisme(불)
오르픽 큐비즘이라고도 한다. 로베르 들로네, 쿠프카 등을 중심으로 하는, 색채성이 풍부한 입체파의 한 분파에 붙여진 명 칭. 명명자는 시인이자, 비평가인 아폴리네르이다. 본래 피카소나 브라크를 중심으로 하는 정통 입체파는 대상의 분석과 화면의 재구성을 중요 한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색채보다는 오히려 형태의 조합에 의한 구성을 중시했지만, 이에 대하여 들로네나 쿠프카는 인상주의의 보색 이론을 발전시켜, 스펙트럼의 모든 색채를 화면 에 끌어들여서, 음악적인 리듬에 바탕을 둔 다채로운 화면 구성을 추구하였다. [오르피즘] 오르피즘은 1911년과 1914년 추에 파리에서 출현한 '추상'혹은 보다 더 정확히 '순수회화' 를 지향하는 사조를 말한다. 비평가이자 시인인 아폴리네르가 기존의 입체파와 비교해 자연적 소재에서 거의 완전히 벗 어난 일련의 '추상'그룹 작가들을 정의하기 위하여 그들을 오르픽 큐비즘(Orphic Cubism)이 라고 구분해 부른데서 출발한다. 이들의 예술은 시각세계의 구현이나 문학적 주제의 표현보다는 음악적 세계, 즉 보는 이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유도하는 그들의 순수한 색채 울림의 추상을 지향하고 있다. 로베르 들로네(1885-1941)는 분석적 입체주의에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여, 종합적 입체주의 로 나아 간 첫 번째 화가였다. 그는 주제에 대하여 모방적 표현을 자제하고 관찰된 자연과는 별 관계가 없는 생생한 색의 원이나 형태의 질서를 통해 순수한 추상을 추구하였다. 그는 초기 시절 야수파 화가들과 같 이 커다란 색점을 이용해 풍경을 제작했지만, 1909년경부터 에펠탑을 소재로 한 연작을 시 작하면서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1912년에 완성한 [붉은 탑]에서 그는 대상을 마치 피카소나 브라크와 같이 해체, 분해하고 다시 임의대로 재조립하고 있다. 또한 재경의 하늘과 구름도 원형과 사각형의 평면적 색면들로 분해하고 있다. 그러나 들로 네가 입체파 창시자들과 다른 점은 바로 색채의 충만함이다. 그는 색채를 희생시키지 않고, 그 원색들로 대상의 입체감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그리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영화 카메라가 움직이듯 화면 속에서 헤엄치게 만든다. 이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개념을 화면 위에 구현시킨 것으로, 동시점과 함께 입체파의 특징 이기도 하다. 1889년에 세워진 에펠 탑은 당시 가장 현대적 기념물이었다. 이 건축물은 돌과 나무가 주재료였던 이전 건축들과는 다르게 철근과 유리로 만들어진 300 미터 높이의 대형 탑이었다. 이러한 기념비적 크기의 건축물을 목격하게 된 당시의 예술가 들이 에펠탑을 현대 과학문명의 상징으로 내세웠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이 탑은 그 기술과 크기에서뿐만 아니라, 라디오 수신탑의 역할을 하는데, 주파를 수용 하는 그 용량에 있어서 유럽 대륙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 만큼의 위력을 발휘해 진보된 과 학기술을 증명하기도 했다. 들로네는 인상파의 광학 이론을 계승하여 [빛의 동시대비]의 법칙을 입체파의 형식 안에서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 법칙을 아폴리네르의 설명을 빌어 보자면 "만일 단순한 색이 그것에 대한 보색을 정했을 경우, 그 색은 대기 속에 퍼지면서 스펙트럼의 온갖 색을 낳는다."는 것이다. 1913년에 완성한 [원형]에서 보듯이 들로네는 색채를 중심으로 한 순수한 조형적 움직임을 화폭에 남겼다. 들로네는 빨강, 노랑, 파랑, 초록의 동심원들을 자주 그렸다.. 조형의 기본적인 형태를 밝은 원색의 번짐으로 처리한 이런 회화는 보는 이에게 마치 음악의 멜로디에서 느껴지는 공명처 럼 울려 퍼지는 듯한 효과를 전달한다. 그의 원형에 대한 관심은 1914년작인 [블레리오에의 경배]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블레리오는 당시 비행기로 37분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를 가르는 도버해협을 횡단한 비행사 였다. 그리고 이 비행기를 날게 한 힘은 나무 목판으로 만들 프로펠러였다. 그 프로펠러의 회전이 현대성의 빛나는 상징으로 표현된 것이다. 들로네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소감 이자, 축하로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들로네에게 동심원은 순수한 회화의 한 요소로, 그리고 현대성의 상징 으로 나타나고 있다. 보기에도 화려하고 경쾌한 원색들의 퍼레이드와 오른쪽 상단에 어김없이 그려진 에펠 탑과 비행기 를 통해서 우리는 들로네가 가지고 있었던 현대문명의 새로움에 대한 동경을 읽을 수 있 는 것이다 프란체스크 쿠프카(1871-1957)는 체코 출신의 화가로 일찍이 구성적 이미지를 전혀 사용하 지 않는 순수한 완전 추상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그는 초기 작업시절인 1904년에서 1910년 사이 수년 간 '거대한 누드'를 주제로 작업하였다. 이 연작들은 초기에는 상당히 아카데믹한 기법으로 시작되다가 나중에 가서는 색면의 형태 배열로 전개되고 있음을 비교해 볼 수 있 다. 그는 이 연작들을 통해서 음영과 원근법을 통해 환각적인 볼륨감을 전달하는전동적인 작업 방식으로 부터 벗어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화면을 2차원적인 평면으로 만들고 대상을 넒은 색면으로 채우기 시작하면서 추상화에 본격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1912년 작인 [뉴욕의 원반]에서 그는 진동하면서 회전하는 색채의 원형들로 이루어진 추상 세계를 추구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삼색의 본질에 대한 추구는 몬드리안을 예견하는 듯이 보이며, 색채 의 음악성에서는 들로네나 칸딘스키에 뒤지지 않는다. 다만 그는 들로네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기 때문에 그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들로네만 못 했던 것이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e)
동방적 취미, 동방적 정서, 동방적 예술의 애호를 말한다. 특히 낭만주의 예술에서는 고딕 취미와 함꼐 오리엔탈리즘이 주제의 선택, 취향의 기초가 되었다.
오벨리스크(obelisk)
이집트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태양신을 상징하는 긴 거석으로 된 석주형의 사면 방첨탑. 피 라밋형의 정상에는 황금관이 씌워져 있고, 본체와 기대의 표면에는 봉헌 명문이 새겨져 있 다. 초기에는 대단히 높았으나, 이집트 제5왕조 시대에는 태양 사원 안에 낮게 세워졌었다. 특히 신왕국 시대에는 흔히 왕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 오벨리스크가 사원의 탑문앞에 한 쌍 씩 세워졌다.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카르낙 신전의 하트셉스트 영왕이 건립한 오벨 리스크가 가장 크고 (높이 2,956 cm),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아스완 지방의 한 오벨리스 크는 높이가 4,175cm나 된다. 로마 제국 시절에는 많은 오벨리스크가 로마로 옮겨졌다. 그 리고 르네상스 기간 동안에는 오벨리스크를 새롭게 조명하여 기념물과 건축 장식에 사용하 기도 했다. 19세기에 와서 이집트에서 반출된 오벨리스크 (소위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말나는 오벨리스크를 포함하여)가 파리, 런던, 뉴욕 등의 광장이나 공원에 세워졌다.
오브제 아트(object art)
'오브제 아트' 또는'오브제 조각' 이라는 용어는 미래파 화가,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자들 이 회화나 구조물을 표현하기 위해 1945년 이전에 사용하였다. 때때로 전후에도 이러한 의 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본질적으로 앗상블라주의 대용물이다. 1965년 프랑스의 비평가 쥬프레이는 작품에 일상적인 물체를 결합하거나, 그런한 물체의 모양을 띠게 만드는 일단의 화가들을 이 용어로 칭하였다. 이러한 작품에 관심을 두었던 화가들로 레칼카티, 레이노드, 쿠도, 파울 반 호이동크 등이 있다. 1970년에는 미국을 순회하던 공예 물체들의 전시회 책자 가 <오브제 유에스 에이>라는 표제로 나왔다. 1960년대 중반에 '오브제 아트'라는 용어는 미니멀 아트의 대용물로 사용되었다. 이론적인 면에서는 미니멀리즘이 예술의 본질은 그것 이 만들어진 재료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형이상학적 범주의 예술을 실제 생활의 상태로 축소 시키고자 하엿다. 이와같은 자포자기의 시도는 '정신적 대상'을 예술로 주장한 개념미술의 출현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포스트 오브제 아트', '반 오브제 아트 ', '오브제 아트의 탈 물질성'에 대한 논의가 일었다. 이와 같은 논쟁은 철학적으로 오래 계 속되어온 주체와 객체, 정신과 욱체, 관념론과 유물론,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것 과 같은 이율배반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수 있다.
오브제
본래 물건, 물체, 객체 등의 의미를 지닌 프랑스 어이나, 초현실주의에서는 이것을 전용, 독 특한 표현 개념을 부여하여 구체적인 예술의 방법으로 삼았다. 즉 예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물건이나 그 하눕분을 본래의 일상적인 용도에서 떼내어 절연함으로써 보는 사람에게 잠재된 욕망이나 환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를 말한다. 이 방법은 바로 언어의 무의식적인 합성에 의해서 새로운 시적 언어가 형성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일상 생 활에 쓰이는 모든 물체는 그 나름의 용도나 기능 또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 다. 그러나 이러한 물체가 일단 오브제로 쓰이면 그 본래의 용도나 기능은 의미를 잃게 되 고 이때까지 우리가 미처 체험하지 못했던 어떤 연상작용이나 기묘한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초현실주의에서 오브제란 사람과 물체가 서로 교통하는 한 방법으로 생각되기 도 했다. 이러한 오브제의 개념은 초현실주의의 조형적 영역은 물론 그 사상에도 중대한 변 화를 일으키게 했다. 즉 오브제는 회화와 조각을 접근시켜 회화도 조각도 아닌 새로운 조형 의 개념을 탄생시켰다. 또 오브제는 예술가의 생활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물건 그 자체로 인 식되어 예술과 생활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드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여러 가지 오브제를 정리하여 12가지로 나눴는데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자연물의 오브제(광물, 식물, 동물 따위) ② 미개인의 도구 나 주술적인 물체 ③ 수학상의 오브제(수학적 원리에 의해서 구성된 입체적 모향 따위) ④ 발견된 오브제(흔히 오브제라면 이것을 가리킬 만큼 일반적인 것으로 표류물, 나무뿌리, 돌 기타 모든 오브제는 발견된 오브제라 할수 있다. ) ⑤ 해석된 오브제(이를테면 발견된 오브 제인 나무 뿌리를 약간 가공해서 거꾸로 놓으면 전혀 다른 물체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 데, 이것이 바로 해석된 오브제이다.) ⑥ 재해의 오브제(화재가 난 뒤 어떤 물건이 불에 타 서 예상할 수 없을 만큼 초조형적으로 변형된 경우) ⑦ 기성품의 오브제(실용을 목적으로 만든 기성 제품에 단순히 서명을 함으로써 예술품으로 전이시킨 것) ⑧ 움직이는 오브제(어 떤 종류의 자동 인형이나 풍차 따위와 같은 것으로 콜더의 모빌이나 팅겔리의 <자멸기계> 등이 여기에 속한다.) ⑨ 상징 기능의 오브제(달리가 발명한 것으로 인간의 잠재 의식에 직 접 호소한 것)
오지호(1905~1982)
동경미술하교 졸업 귀국후 '녹향회' 그룹에 참여 인상주의나 신인상주의적 터치를 사용해 주변에서 본 자연의 눈부시게 반짝이는 풍경을 주로 그렸다. 오지호 - 吳之湖 (1905~1982) 서양화가.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1931년 일본 도쿄 미술 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한 뒤, 사실적 자연주의 수법의 유화를 발표하 였다. 1935년부터 10년간 개성 송도 고보 교사로 있으면서 밝고 투명한 색채와 가득한 햇빛, 경쾌 한 붓놀림의 인상주의 화법으로 한국의 자연미를 표현하였다. 1949년부터는 조선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호남 지역 서양화계 발전에 많은공헌을 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나부〉 〈아내의 상〉 〈사과밭〉 〈선운사 설경〉 등이있으며, 저서로 는 원색판 《오지호 작품집》과 미술 평론집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 미학원론으로 《미와 회화의 과학》 등이 있다.
옵 아트
짧은 기간 동안 유행하였던 '옵 아트(Optical art의 준말)'는 시각현상을 예리하게. 그리고 거의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경향이었다. 옵 아트에 있어서는.망막을 자극이 주된.또는 대부분의 경우 유일한 소통의 수단이여. 그 의 도는 관람자의 생리적인 시각반응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사실이 암시하듯이.옵 아트의 대부분이 2차원이나 3차원작품을 통하여 교묘한 지각 적 효과를 유발하는데 그쳤다. 이들 작품은 움직이기도 하고 정지되어 있기도 하였으며.조명장치가 부착된 것. 또는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와 같은 작품들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단명한 것이었으며.옵 아트는 하나의 미술경향 으로서의 위치를 그리 오래 지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는데.그 주요한 예가 브리지트 라일리(Bridget Riley)의 작품이 다. 브리지트 라일리 는 1960년에.과학자들이 지각작용의 연구를 위해서 사용하였던 도해들을 개작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강렬한 흑백 회화를 만들어 내었다. 그녀는 이같은 회화가 더욱더 미묘한 효괴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회색을 그 리고는 점차 다른 색체를 첨가하게 되었다. 시각적 자극 자체가 그녀의 목표는 아니었다. 라일리는 자신이 그리는 요소들을 자연의 일부로 즉 나무.구름.언덕.강과 같은 풍경의 요소 로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들 요소들을 맞추어서 그것들의 형태와 색체의 총체 이상의 마술적 효과를 이루어내었다. 라일리의 작품들은 분명히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서정적이고 시적인 효과를 산출하고 있다. 포토 리얼리즘은 사진의 형상과 기법에 의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팝 아트와도 관련시킬수 있다. 이 경향에 포함시킬 수 있는 화가들의 범위도 역시 광법위하다. 예를 들어 맬컴 몰리(Malcoim Morley)는 1960년대 중반부터 커다란 캔버스에 잡지 사진을 세밀하게 복사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의 작품은 사진기법으로 전사한 워홀의 사진적 형상들과 비교됨과 동시에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몰리는 그가 선택한 형상들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에 대하여 어떠한 관심도 가지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형상들을 거꾸로 그릴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는데.그 이유는 그가 복사하는 갯상과 명 도 변화가 갖는 의미의 영향력을 피함과 동시에 그 표면의 특성 자체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였다. 그럼에도 [경마 트랙]과 같은 그림에서는 표면보다는 의미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남아프리카에서의 즐거운 여가 장면을 밝은 태양광선에서 찍은 사진을 복사하고. 그 위에 피빛 빨강색으로 협박하듯이 × 표시를 그렸다. 이에 비해서 대부분의 포토 리얼리즘 작가들은 비교적 냉정하고 중립적이었다. 많은 미술가들이 주변세계의 일부를 사진으로 찍어서 이 사진들을 캔버스 위에 투시하여 그 림을 만들어내고.투시된 형상에 준하여 채색을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것들은 가능한 한 가장 순수하게 사물을 묘사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특히 매혹적인 예는 리차드 에스티스(Richard Esles)가 만들어내었다. 이런 종류의 작품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요인 중 하나는.제작과정에서 의식.무의식적으로 내 려지는 예술적 판단의 풍부함이다. 이 예술적 판단은.투사된 형상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 복잡한 세부를 묘사하기가 어려운 시 각적 자료들에 개입되고 있다. 카메라는 오직 기술적인 변수에 의해서만 통제되는 객관성을 가지고 세계를 본다. 가장 객관적인 미술가라 할찌라도 카메라처럼 너그러운 평등주의적 시각으로는 어떤 정경에 도 주목하지 못한다. 또한 미술가가 어느 정도는 사진에 대하여 개인적인 해석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 다. 어쨌든 미술가는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정경을 사진으로 찍어서.같이 찍혀진 슬라이드들 중에서도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슬라이드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을 다른 크기가 아닌 바로 그 크기로 그리겠다고 결정한다. 그러고도 미술가에게는 광건에 의해 포착한 형상을 물감에 의해 고착시켜야 하는 문제가 여 전히 남아 있다. 이런 종류의 그림 중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우리에게 많은 즐거음을 주며.그러한 즐거움과 함께 어떤 사념을 유도하기도 한다. [음식점]을 예로 들면.우리가 식당의 유리창 자체를 보거나 그것을 통해서 보면. 그것이 반 대편 거리의 정경을 반영하는 한편 다양한 표면들과 차원들이 상호 작용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그림에서는 세부가 생략된 넓은 면과 세부가 모여 있는 부류들이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 다. 또한 서로 어울리지 않는 양식들로 이루어진 음식점의 정면과 거의 대부분이 가리워져 있는 엄격한 고전주의적 양식의 건물을 통하여 사회적 의미를 내표한 대비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여러 소재들에서 반사되고 그가 카메라로 포착한 다양한 종류의 광선들이 다양한 강도 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이같은 마술적 효과는 카메라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훌륭한 옵 아트 회화의 효과 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옵 아트(Op Art) 옵티컬 아트(Optical art)즉 '시각적인 미술'의 약칭. 196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추상미술 의 한 동향으로 당시 미국 화단에서 강력한 뿌리를 가지고 인기를 끌던 팝 아트의 상업주의 나 상징성에 대한 반동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옵 아트는 미술품의 관념적인 향수를 거부하고, 순수하게 시각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고자 했으며, 다이나믹한 빛·색·움직임의가 능성을 추구한다. 옵 아트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계열이 있다. 즉 움직이는 빛의 형태 및 빛의 공간을 추구하는 키네틱한 옵 아트와 평면상에서 구성하는 회화적인 옵 아트가 그것이 다. 옵 아트는 팝 아트와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옵아트는 팝 아트와 같은 시사적인 자극이라든가 정서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과도하게 지적이고 조직적이어서 차가운 느낌을 주는 예술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인문 과학적이라기 보다 는 자연과학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옵 아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가능한 방법으로 시 각적 착각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비재현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유사 이래의 모든 재현적 예술이 어떠한 의미에서건 시각적 착시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옵 아트의 선구자는 몬드리안에게까지 거술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 미술의 독창적인 실천자이자 주요 이론가인 비토르 바자렐리의 작품에서 주로 유래하고 있다.옵 아 트가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정착한 것은 196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응답하는 눈전' 을 계기로 해서였다. 윌리엄 사이츠가 주최했던 이 전시회에서는 여러 가지의 표현 방법으 로 제작된 작품들이 출품되었는데 기본적으로는 시각적인 착각에 따라 일어나는 회화작품과 시점의 이동 또는 작품의 변동에 따라 일어나는 조형상의 변화를 추구한 조각적인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와토 (Jean-Antoine Watteau,1684~1721)
프랑스의 화가. 북프랑스 발랑시엔에서 태어났다.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회화의 선구자이며,특히 ‘아연화’의 창시자이다. 발랑시엔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1702년 파리로 나와 루벤스·티치아노 등에게 감화를 받 았다. 그 후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하고, 궁정 풍속을 산뜻한색채와 섬세한 필치로 그린 연작 작품 을 남겼다. 1717년 왕립 아카데미 정회원이 된 기념으로 그린 〈시테 섬으로의 출범〉으로 명성을 떨쳤 는데, 이 그림 속에는 와토 예술의 특색이잘 나타나 있다. 폐결핵으로, 1620년 요양차 런던에 갔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런 와중에서도 친구 제르생의 가게 간판 그림으로 평생의 걸작 〈제르생의 간판〉을 그렸 고, 이 그림을 완성하고 얼마 안 가서 3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 밖의 작품으로〈전원 오락〉 〈파리스의 심판〉 〈제우스와 안티오페〉 등이 있다.
왜곡(歪曲) distortion(영)
예술에서 원형과 그 표상 간의 의도적이거나 무의도적으로 나타나는 차이를 가르키는 용어. 모든 예술 작품은 대상에 대한 정확한 삼차원적 복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변형 혹은 왜곡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각은 모델이 없는 경우일지라도 인체측정학의 법칙에 의거해서 왜곡된 비례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회화는 원근법에 의해 부득이 왜곡된다. 또한 카메라를 향하여 손을 들면 부자 연스럽게 크게 보이는데, 이때 사진도 왜곡되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외관상의 왜곡은 우리 마음이 변화를 극소화시킴으로써 지각체계에 안정성을 보전하 려는 항상성에 의한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을 볼 때, 우리는 망막에 던져진 상의 크 기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다고 알고 있는 크기를 본다. 사진사와 마찬가지로 자연주의 화가 들은 대개 이런 경향으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극단적인 왜곡은 피한다. 반면에 , 바로크시대의 일루저니스트 화가들은 작품을 단지 한 면에 구상하므로, 모든 면에 서 왜곡되어 보인다. 왜곡이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은 특히 20세기에 들어와서다. 왜곡이 감 정이입의 기법에 의해 정당화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개념적 모호성으로부터 왜곡의 근거를 찾을 수도 있다. 예컨대 인간의 형과 산맥의 양상들을 결합한 헨리 무어의 조각 이 바로 그것이다. 왜곡은 때로 보다 특수한 표현적 목적 때문에 사용되는데, 이미 알고 있는 대상에 불쾌하거나 우아 한 형태 및 비례를 부여한다는 , 동시적 인식에 의한 정서 반응을 감상자에 유발시키는데 있기도 하다.
외광파
특정의 유파를 가리키는 경우엔 인상주의가 이에 해당된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실외의 공기와 자연 광선에 의한 회화적 효과를 표현하기 위하여 야외에서 그리는 화가들을 가리킨다. 19세기 중기까지 풍경화는 야외에서 모티브를 취재하여 화실에 서 마지막 손질을 가해 완성하는 것이 통례였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다갈색 을 기초로한 어두운 화면을 지니고 있다. 19세기의 영국 화가 컨스터불과 터너는 아틀레에 에서 야외로 나와 자연 광선에 의한 풍경의 변화하는 양태를 밝은 색깔을 써서 직접 그리기 시작하여 외광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역시 19세기 중기 마키아이오리파의 화가들,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 선행하여 퐁텐블로파의 화가들, 드비니나 네 덜란드의 용킨트가 있다. 드비니는 수면에서 교차하는 빛을 잡기 위해 강에 뛰운 배 위에서 작업했는데, 이러한 제작태도가 후에 마네, 피사로, 시슬리,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 채용되었다. 인상주의와 대립하는 입장에 있었던 관전파의 아카데믹한 화가들 중에서도 인 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야외에서 제작한 화가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인상주의의 아류라는 의 미에서 외광파라고부른 적도 있다.
요철법(凹凸法)
동양 회화의 기법. 남조(南朝), 양대(梁代)에 장승요(張僧繇)가 금릉(金陵, 지금의 南京)에 있 는 일승사에서 '천축법(天竺法)'을 써서 입체감의 효과를 강조한 고대 인도의 화법이라고 전하는데, 작품을 멀리서 보면 요철처럼 빛나지만, 가까이서 보면 실제로는 평탄하다는 것이 다. 또 당(唐) 초에 위지지승(尉遲之僧)이 그린 공덕. 인물. 화조는 모두 외국의 사물들로서 현 란한 염색에, 음영이 있고 입체감이 강하여 '요철화파'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런 종류의 회 화 작품을 '요철화'라고 간략하게 부른다.
우점준(雨點峻)
수묵 산수화에서 사용되는 준법의 하나. 지마준(芝麻峻 ) 혹은 호마준(胡麻 峻)이락도 한다. 세로로 가는 붓자국을 밀집시켜 바위나 산을 묘사한 것이 비오는 모습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준법으로 황토 절벽을 즐겨 그렸던 북송 초기 산수화가 범관(范寬)이 창시하였다. 미후, 미우인(米友仁)의 소위 미점과는 다르다.
위트릴로(Maurice Utrillo)-(1883~1955)
파리 뒷골목의 정경을 투시도법을 이용하여 표현하였다. 프랑스의 작가인 위트릴로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1891년이 되어서야 아버지로부터 친 자인정을 받게 된다. 위트릴로는 어릴 때부터 술을 마시는데 1900년에는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를 술로부터 떼어놓기 위해서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데생과 회화수업을 시키게 되고 이로서 위 트릴로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그린 위트릴로의 그림은 어두운 색조와 두터운 질감을 띠고 있다. 1908년경부터 백색시기가 시작되는데 이 시기의 작품은 석고와 집착제를 혼합하여 사용하 는데 회색과 장미색으로 반사된 설경, 크림빛을 띤 흰색벽 등을 그린다. 그의 백색시기는 1915년경까지 지속되며 그가 늘 헤매고 다니는 몽마르트의 구석구석을 그 렸으며 엘리포르나 옥타브 미로와 같은 미술 평론가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이후 위트릴로는 우편엽서에 담긴 사진을 보면서 같은 모티브를 반복하는 그림을 그린다. 1923년에는 디아길레프의 발레 '바라바오' 의 무대장식을 제작하기도 한다. 주요 작품 : 노틀담 사원, 몽마르트의 뒷골목 등
유기주의
건축이나 조각, 회화, 디자인 등에서 기능적 혹은 기하학적 경향에 대해 유기적 생명감을 중 시하는 경향을 뜻한다. '유기적'이라는 비유적 표현은 이미 바자리가 페루치의 <빌라 피르 네시아>를 '만들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탄생된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평가했듯이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다. 근대에 와서는 미국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ioyd Wright)가 유기 적 건축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20세기 비평 용어로서 '유기적'이란 명백하게 정의된 의 미는 아니지만, 예술 작품은 그 구성 요소들이 생생하고 상호 육기적인 관련을 가진 조화로 운 전체임을 주장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유미주의(Aestheticism)
예술은 오직 자족적이며 자율적이고 자기 목적적으로서, 사회·정치·종교 등 어떤 기준들 에 의해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주의. 그 단적 표현은 '예술 지상주의(art for art's sake)’에 서 볼 수 있다. 예술적 기준의 자율성은 미적 판단 기준을 도덕적 선이나 유용성, 그리고 쾌 로부터 구별한 칸트에 의해 최초로 정식화되었다. 이어 괴테, 실러, 셸링과 영국의 코울리지 와 카알라일, 미국의 에머슨과 포우 등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소개, 강조되었다. 에머슨은 그의 시 <로도라(Rhodora)>에서 "눈이 보기 위해 있는 것이라면, 아름다움이란 있게 위해 있는 것"이라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스탈 부인, 철학자 빅토르 쿠쟁과 그 제자 테오필 쥬프 로아가 있다. 쿠쟁은 소르본느 대학에서 진·선·미에 관한 강의 (1818년, 출판은 1836년)에 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테오필 고티에는 <모펭양>(1835) 서문에서 '예술이란 그 미적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더라도 미적인 것 외에 여하한 가치를 위해 진력해서는 안된다' 고 천명했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이란 단지 무용한 것이다'. 그리고 보들레르로부터 말라르메에 이르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 역시 의도적으 로 미적 가치를 중시했다. 그렇지만 보들레르는 '도덕을 벗어나는데 있는 예술지상주의자들 의 유치한 유토피아적 이상'에 반대했다. 공쿠르 형제는 '회화란 눈과 감관들을 즐겁게 해주 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시신경의 즐거움 그 너머의 것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주 장했다. 1870∼80년대에는 라파엘 전파의 특정 요소들에 의해 고취된 초감수성이 월터 페이 터에 의해 공식적 재가를 얻었다. 그는 <르네상스>(1873)의 결론에서 '시적 열정, 미에의 열망,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사랑' 등 감수성을 고취시켰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초상>(1891)역시 미적 체험의 우위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반동은 윌리엄 모리스와 레다비의 공예운동에서 비롯되었다. 러스킨은 일상 생활과의 관련에서 벗 어난 예술에 반대했으며, 휘슬러와의 예술지상주의에 관한 논쟁은 유명하다. 이어서 톨스토 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도덕 기준과 일상인으로부터 유리된 이른바 순수 미 술을 신랄하게 반박하였다. 예술이 종교나 정치·사회 등 어떠한 다른 동기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극단적인 편향성은 시 각 예술의 가치를 그 형식적 속성에 두는 클라이브 벨이 주장한 '형식주의'의 극단적 변형 에서 그 잔영이 엿보이지만, 세기가 바뀌면서 거의 지지세력을 잃게되었다. 그러나 미적 기 준이 자율적이며 아름다운 예술의 창조 및 감상은 자기 보상적인 행위라는, 보다 완화된 형 태의 유미주의는 20세기 미학적 견해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유약(釉藥) glaze(영)
1. 도자기 표면에 덧씌워 광택과 무늬를 아름답게 하는 유리 같은 분말의 약품. 소지(素地) 의 흡수성을 적게 하고, 그릇의 강도를 높게 하는 효과도 있다. 소성화도(燒成火度)에 의한 고화도유와 저화도유, 외관에 의한 철유(鐵釉), 동유(銅釉), 연유 (練釉), 장석유(長石釉), 회유(灰釉), 소다유 등으로 분류된다. 규산과 산화알루미늄이 주성분 이고 거기에 나트륨, 칼륨, 마그네슘이 첨가되며 종류에 따라 연(鉛), 아연 등이 사용된다. 고대 자기의 유약은 소다유(알카리유), 연유, 회유의 3종으로 대별된다. 소다유는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고, 그후 서아시아와 로마에서 사용된 바 있으며 이슬람 도기에 많다. 연유는 중국 전국시대와 한나라 이후에 성행하였다. 유약의 색조는 함유하고 있는 금속의 종류와 양, 소성할 때 환원염(還元焰), 산화염(酸化焰), 중성염 및 용제(溶劑)의 성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한다. 유약 중 금속으로서 철이 색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여 청 자유, 흑유, 황유 등이 되고, 동(銅)은 녹유(綠釉), 홍유(紅釉) 및 소다유의 청유(靑釉), 망간 은 자유(紫釉), 흑유(黑釉), 코발트는 남유(藍釉)가 된다. 2. 서양 회화에 나타나는 그림의 기법적인 용어. 색채나 바탕 위에 바른 또 다른 그림물감 은 혼색하면 뒤로 후퇴하는 반면에, 유약을 바른 색채는 앞으로 드러나는 듯이 보인다. 많은 화가들이 유약을 여러 번 덧칠하는데, 루벤스가 특히 이 방법을 애호하였다. 티치아노와 엘 그레코가 그린 그림에서 의상의 화려한 실홍색은 불투명한 밑그림의심홍색에 유약을 바른 것이다. 19세기에는 유약을 바르지않은 그림을 선호한 까닭에 유약이 거의 쓰 이지 않았다. 19세기의 와니스 유약은 불완전한 부분을 감추고 이전에는 성취할 수 없었던 색채의 눈속임식 조화를 그림에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터너가 빛과 대기의 효과를 그리고자 했을 때, 그는 유화에 수채화 기법을 원용하였다. 그때 밝은 바탕위에 투명한 유약이나 밝은 그림물감으로 된 얇은 층을 주로 사용하였다.
유영국
1916년 강원 울진에서 출생 일본 동경문화학원 유화과를 나옴. 독립전,자유전 등에 출품했으며 자유전에선 회우가 됨. 48년 김환기,이규상과 더불어 신사실파를 조직했으며, 57년엔 한묵,박고석,이규상 등과 모던 아트 협회를 조직했음. 58년 이후 현대작가초대전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운동에 앞장섬. 신상회를 끝으로 그룹을 떠나 개인 발표만을 지속했다. 기하학적인 추상의 형태를 계속 유지해왔다. 7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으며 96년 호암갤러리에서 다시 회고전이 열렸다. 산 (1957) 캔버스에 유채 73*100cm 숲 (1964) 캔버스에 유채 136*194cm 산 (1968) 캔버스에 유채 129*129cm
유화(oil painting)
안료를 녹이는 매재로서 린시드유를 사용한 그림. '유화'라는 용어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대해서도 쓰여지고, 그러한 방법으로 그려진 그림에 대해서도 쓰여진다. 여러 시대에 걸친 각 유파의 기법이 구조와 외양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에, 그림의 방법과 재료 등 매우 다양 한 범위에 걸쳐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화라고 부를 때 공통적이 특징은 매재에 건성유를 사 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화 물감이 처음에는 패널에 그려졌으나, 후에는 틀에 맨 아마포 (canvas)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건조 후에도 색조의 변화가 거의 없다. 유화가 15세기 초 반 아니크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하는 쨣리의 주장은 잘 알려져 있지마느 유화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반 아이크는 햇빛에 쬐지 않고서도 마를 수 있는 와니스를 탐구하는 동안 린시드유와 호도유에서 이러한 성질을 발견했다. 반 아이크는 이러한 기름을 색소에 대한 매재로 사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기름이 반 아이크보다 훨씬 이전인 중세 시대에 이미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어쨋든 반 아이크가 보다 나은 유여성, 보다 풍 부한 색조, 보다 범위가 확장된 명암을 유럽 뢰롸에 가죠오면서 유화의 기법상 하나의 혁명 을 실현했음은 사실이다. 이와같이 초기 플랑드르 파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 새로운 화법 이 안토넬로 다 메시나에 의해 이탈리아로 전해졌고, 이때부터 새로운 유화 방법의 보다 큰 잠재력이 이용뺹 시작하여 점차로 종래에 성행하던 템페라화와 교체되기 시작했다. 세부적 인 명암의 변화, 색채와 대기의 자연주의적인 재현, 공간에 입체적으로 표현되는 형식, 색조 의 미묘한 변화와 혼합 등 이러한 특징을 템페라로써는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제 물감은 조직적인 특질을 갖고 있는 실체로 인정되고, 그 자체의 표현성을 살리면서 사용되 기에 이르렀는데,유화의 가장 특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방법의 사용이 르네상스 화가들 중에서도 티치아노의 후기 작품에서 그 정점에 달하였다. 티치아노의 그림의 구조와 입체감 표현 작업에 있어서 주로 색채와 안료에 의존하였다. 17세기에는 루벤스, 벨라스케 스, 렘브란트를 통하여 다양한 유화 기법이 완전하게 구사되었다. 이들은 유화만이 가능한 제작의 신속함과 분방함, 미묘한 명암의 변화 등을 능숙하게 처리하여 바로크 회화의 양식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세기 중반에는 두 가지 면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그 하나는 상업적인 채료상이 등장하여 화가가 직접 하던 재료의 제조 과정을 떠맡았다는 것이다. 짤 수 있는 주석 튜브의 발명은 이전에 사용되었던 불편하고 지저분한 주머니를 대신하여 작업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뿐만 아니라 옥외에 나가 자연을 직접 그릴 수 있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매재로서 포피유의 사용은 천천히 마르는 그림을 만들게 되었지만, 동시에 두껍게 버터를 바른 듯한 견고함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견고함은 붓 터치와 같은 거친 흔적을 보존할 수 있게 했는데 이전에는 그러한 흔적들이 곧 평평하게 되어버리거나 말리는 동안 사라져버리 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물감의 성질의 변화는 덧칠해서 원하는 색채를 내는 방법이 아닌, 직접 또는 프리마 묘법으로 그리는 것을 선호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유약칠과 바림 (scumbles)으로써 투명 또는 반투명의 물감을 여러번 덧칠하여 그리는 방식이 아니라, 이제 는 화가가 마치 그림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는 효과를 의도했던 것처럼 색채를 부분적으 로 칠한다. 또한 직접 그리는 방법은 자연스러움과 충동성을 나타낼 수 있게 하였다. 이전에 는 그릴 것을 머리 속에 미리 구상해놓은 체계가 있어야 했다. 이제는 세심한 소묘와 주의 깊은 밑그림 작업에 따라 단계적으로 조심스럽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밑그림이 마르지 않 은 상태에서 단 한 번의 덧칠을 하거나 아니면 거의 덧칠을 하지 않고서도 그림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19세기 화가들에게는 장식적인 붓 터치가 더 이상 그림의 표 현적인 종속물이 아니라, 그림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고, 그들 양식의 뚜렷한 특징을 갖게 하 였다. 두 번째의 변화는 인상주의자들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의 화가들은 몇 개 안되는 비교적 밝은 색채를 사용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짙은 색조의 사용을 선호하였는 데 이러한 색조로서 그들은 미와 강렬함을 최대한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는 보다 많은 계통의 색채, 특히 금속 비슷한 색채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 그들의 팔레트는 연보라색, 보라색, 밝은 녹색, 오렌지색, 다양한 청색, 강렬한 노란색 등으로 더욱 풍부해졌 다. 그러나 인상주의자들에 의한 이러한 새로운 방법은 물감의 보다 밝고 풍부한 효과를 만 들어내기보다는 빛과 대기를 재현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서 유화의 역사는 끊임없이 불안한 실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5세기 초나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새로운 미적 전개가 매재를 다루는 방법에 따른 새로운 기법의 소개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것에 비추어 보면, 20세기의 유화는 이에 비견할 만한 중요한 혁신을 보이지는 못했다. 다만 20세기의 가장 특징적인 혁신은 삼차원적인 구조물에 유화를 결합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육기(六氣)
중국 회화의 용어. 청대의 추일계(鄒一桂)가 '소산화보(小山畵譜)'에서 제기했다. 여기서 그 는 "그림에선 육기를 피해야 한다. 첫째는 속기(俗氣)로, 시골 여자의 화장 같은 것이고 둘째는 장기(匠氣)로, 교묘하긴 하지만 신운(神韻)이 없는 것이고 셋째는 화기(火氣)로, 붓자루가 있긴 하지만 붓끝이 노출된 것이고 넷째는 초기(草氣)로, 너무 조잡하여 문아(文雅)한 기색이 없는 것이고 다섯째는 규각기(閨閣氣)인데, 묘사한 선들이 너무 부드럽고 약해서 골력(骨力)이 전혀 없는 것이고 여섯째는 축흑기(蹴黑氣)로, 멋모르고 함부로 창작하는 것이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 다."고 쓰고 있다.
육원(六遠)
산수화의 이론. 산의 높이를 표현하기 위해 산 아래에서 꼭대기를 쳐다본 고원(高遠), 깊이 를 표현하기 위해 산의 전면에서 후면을 넘겨다본 심원(深遠), 거리를 표현하기 위해 가까운 산으로부터 먼산을 바라본 평원(平遠)의 삼원에 활원(闊遠), 미원(迷遠), 유원(幽遠)을 더한 것. 북송(北宋)의 한추(韓추)가 그의 저서인 '산수순전집(山水純全集)'에서 제창하였다. 한추에 의하면, 활원은 , 가까운 언덕에서부터 넓어진 산수를 바라본 것이고, 미원은 노을이 나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들판이나 강을 사이에 둔 경관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을 말 하며, 유원은 경관 전체가 약간 어렴풋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곽희(郭熙)의 삼원은 산수화의 기본적인 구성 원리를 시점(視點)을 통하여 설명한 것이지만, 한추가 덧붙인 삼원은 산수 경관의 인상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육원은 삼원을 정밀화, 혹은 확장한 것이라고 그 개념을 규정할 수는 없다. 육원(六遠) 산수화의 이론. 산의 높이를 표현하기 위해 산 아래에서 꼭대기를 쳐다본 고원(高遠), 깊이 를 표현하기 위해 산의 전면에서 후면을 넘겨다본 심원(深遠), 거리를 표현하기 위해 가까운 산으로부터 먼산을 바라본 평원(平遠)의 삼원에 활원(闊遠), 미원(迷遠), 유원(幽遠)을 더한 것. 북송(北宋)의 한추(韓추)가 그의 저서인 '산수순전집(山水純全集)'에서 제창하였다. 한추에 의하면, 활원은 , 가까운 언덕에서부터 넓어진 산수를 바라본 것이고, 미원은 노을이 나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들판이나 강을 사이에 둔 경관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을 말 하며, 유원은 경관 전체가 약간 어렴풋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곽희(郭熙)의 삼원은 산수화의 기본적인 구성 원리를 시점(視點)을 통하여 설명한 것이지만, 한추가 덧붙인 삼원은 산수 경관의 인상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육원은 삼원을 정밀화, 혹은 확장한 것이라고 그 개념을 규정할 수는 없다.
윤곽(輪廓) outline(영) contour(불)
외형, 가장자리 따위의 뜻. 물체의 형태는 그 윤곽을 선으로 그리지 않더라도 주위의 것과 색이나 질이 틀리므로, 그 윤곽을 알 수 있다. 윤곽은 그러한 것도 있고, 의식적으로 물체의 윤곽을 선으로 그린 경우도 있다. 구체적인 작 품의 예로서는, 루오와 레제가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어 흥미롭다. 루오의 윤곽은 굵고 억세지만 그 선에는 농담(濃淡)이나 굵고 가는 변화가 있어, 화면에 녹 아들고 있다. 그러나 레제의 윤곽은 무표정하여 무기적(無機的)이라고도 생각되는데, 그 반(半)추상적인 선의 성격이 바로 독자적인 근대성과 매력이 되고 있다
응용미술(applied art)
실제적인 필요에 목적을 둔 공예·장식미에 대한 총첩. 순수 미술과 웅용 미술의 구분은 정 치가들과 경제학자들이 산업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의 일환으로 예술에 대한 국가의 후 원을 주창한 산업 혁명기에 대두되기 시작했다. 영국의 로버트 필(Robert Peel)은 "이 나라 의 순수 예술을 위해 내놓은 모든 지원책은 우리 제조업자들의 이익과도 관련된다. 우리 제 조업자들은 기계에 관한한 외국 경쟁자들보다 우월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산업 생산물이 소비자의 호감을 얻는데 매우 중요한 회화적 디자인에 있어서는 불행히도 그만큼 성공적이 지 않았으며 그래서 우리들은 그들과 경쟁하기가 벅차다는 것을 깨달았볾. 그러므로 의회에 서 순수 예술의 후원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것 이 부분적이나마 순수 예술를 위한 박물관과 화랑, 정부 지원의 다자인 학교, 장식 예술 박 물관 등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게 된 동기였다. 이 움직임의 기저에 놓은 사상은 예술은 기계 공업과는 구분되는 어떤 것이지만, 제조된 물 건에 웅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은 장식과 동일시 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나온 장식에 대한 여러 중요한 이론서에서는 물건의 재료와 기능, 생산 수법에 맞게 장식을 하는, 다양한 양식화 방법 및 정도를 추천하고 있다. 세기가 바뀌어 기능을 중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종 장식에 대한 거부를 포함한 여러 가지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장식적 꾸밈에 대한 거부와 간소한 형태와 장식없는 단순함이 주는 우아함에 대한 고집은 1930년대 를 넘어서까지 지속되진 못했다. 로코코 풍과 빅토리아 풍에 대한 관심이 부활한 것이다. 그 러나 기본적으로 나쁘거나 평범한 디자인에 예술적 장식을 응용하면 마음에 들게 할 수 있 다고 하는 응용 예술의 개념은 조금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유용한 예술이나 산업미술에서 말하는 좋은 디자인이란 세공도 훌륭하고외관도 보기 좋아야하며 재료와 공법도 중시하고 또 기능의 적합성도 겸비되어야한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W. 모리스 등이 주창한 공예 운동은 실생활의 미화야말로 미에 대한 판별 능력을 갖춘 미술가의 역할이어야 한다는 이념에서 출발하였다. 응용미술은 이와 같이 순수 미술에 있어서의 '미의 원리'가 실생활에 응용되는 조형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라 하겠 는데, 그 바닥에는 순수 미술을 상위에 두려는 생각이 깔려있으며 기계 생산을 배제하고 다 분히 수공예적인 제작에 중점을 두려는 경향이 있다. 실용적인 미술이라는 의미에서 이전에 는 건축까지 포함시켜 응용미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주로 손 으로 만드는 장식품에 한정시켜 이 말을 사용한다. 또한, 공업 시대 또는 기술 시대에 부응 하는 디자인 고유의 방법이나 이념이 요구되면서 디자이너라는 직업 분야가 확립되자 응용 미술은 발전적인 의미에서 '디자인'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이 에이 티(E.A.T.)
'예술과 과학 기술에 의한 실험(Experiments in art technology)의 약자. 1966년 1월, 스톡홀 름의 예술과 과학 기술의 제전에 참가한다는 취지로 이 에이 티가 탄생하였다. 그 결과 9월 제저네는 참가하지 못했으나, 10월에 ‘극장 및 엔지니어링의 아홉 밤(9 Evenings : theatre and engineering)’이라는 타이틀로 뉴욕에서 대대적인 발표를 하였다. 장소는 1913년에 미 국에서 처음으로 유럽의 전위예술 전시회가 열렸던 유명한 아모리 쇼의 건물이었다. 이때 기술자의 대표로서 벨 연구소의 과학자 빌리 클뤼버가 중심이 되어, 각 분야에 걸쳐 예술가 들의 상상력을 기술적인 면에서 구체화하도록 노력했다. 이때의 예술가로는 로버트 라우센 버그, 존 케이지를 비롯하여, 해프닝이나 연극 관계의 작가도 있다. 결과는 예술가들이 새로 개발된 제어장치를 무턱대고 사용하여 실패한 프로그램도 없지 않았으나, 아무튼 미국 전후 미술에 새로운 페이지를 남긴 시도였다. 그 후, '이 에이 티'의 활동은 최초의 화려한 쇼에 서 보다 착실하게 과학과 예술 사이의 여러 문제를 결합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68년 의 2월∼5월 초에 걸쳐 컴퓨터, 레이저, 텔리비전 드의 새로운 기술, 그 밖의 새로운 소재 등에 대한 연속 강좌를 열거나, 또 1968년의 가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기계 예술전' 을 기념하여, 과학자와 예술가 사이에서 작품에 대한 세미나가 기획되기도 했다
이마동 (1906~1981)
동경미술하교 졸업 사실주의적으로 그림 친구의 초상 1931 캔버스에 유채 115*87 국립현대미술관 이미지(image) 보통 영상, 심상 등으로 번역된다. 이미지는 외계의 자국에 의해 의식에 나타나는 대상의 직 관적인 표상을 말하는데, 사르트르에 의하면 화상과는 구별된다. 사르트르는 이미지의 존재 자체가 의미 작용이나 대상 지시 작용애 의존하고있는 점을 지적하고, 그 점에서 화상과 유 사함을 인정하나, 이미지에서는 어?건물의 기둥의 수를 헤아릴 수 없듯이, 그것은 물체가 아 닌 의식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화상과 구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물체의 지각상이므로, 이미 지와 물체는 종이의 표리와 같은 관계에 있다. 자연주의 미술에서는 대상을 직접 갖다 놓을 수 없으므로 그 이미지를 그렸던 것인데, 반자연주의적인 현?미술에서는 마음속에 잠재하는 환각이나 형상을 그리게 되고 여러 가지 형태나 사물을 변형시키고 조립함으로써 독특한 이 미지를 표현한다. 현대 미술에서 이미지와 물체 즉 오브제와의 관계가 명확히 된 것은 초현 실주의에 의해서였다. 막스 에른스트가 콜라주의 과정에서 내면에 숨겨진 환상과 깊은 욕망 으로서의 이미지의 형상화를 의식한 것은 그 한 예에 속한다. 프로타주나 데칼코마니 등 초 현실주의의 자동적인 수법도 이미지 형상화의 한 수단이었다. 추상 표현주의는 그린다는 행 위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탐구하였다. 라우센버그는 또 그린다는 행위와 일상 오브제를 등가물로서 화면 속에 그림으로써 사물 자체보다도 이미지로서의 현실을 다루었다. 그는 종 래의 이미지와 오브제의 관계가 복잡하게 교차되면서 변질된 것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미술 의 방법론을 새롭게 전개시켰다.
이미지 image(영)
보통 영상(映像), 심상(心象) 등으로 번역된다. 이미지는 외계의 자극에 의식에 나타나는 대 상의 직관적인 표상을 말하는데, 사르트르에 의하면 화상(畵像)과는 구별된다. 사르트르는 이미지의 존재 자체가 의미 작용이나 대상 지시 작용에 의존하고 있는 점을 지 적하고, 그 점에서 화상과 유사함을 인정하나, 이미지에서는 어떤 건물의 기둥의 수를 헤아 릴 수 없듯이, 그것은 물체가 아닌 의식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화상과 구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물체의 지각상(知覺像)이므로, 이미지와 물체는 종이의 표리와 같은 관계에 있다. 자 연주의 미술에서는 대상을 직접 갖다 놓을 수 없으므로 그 이미지를 그렸던 것인데, 반자연 주의적인 현대 미술에서는 마음속에 잠재하는 환각이나 형상을 그리게 되고 여러 가지 형태 나 사물을 변형시키고 조립함으로써 독특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현대 미술에서 이미지와 물체 즉 오브제와의 관계가 명확히 된 것은 초현실주의에 의해서였 다. 막스 에른스트가 콜라주의 과정에서 내면에 숨겨진 환상과 깊은 욕망으로서의 이미지의 형상화를 의식한 것은 그 한 예에 속한다. 프로타주나 데칼코마니 등 초현실주의의 자동적 인 수법도 이미지 형상화의 한 수단이었다. 추상 표현주의는 그린다는 행위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탐구하였다. 라우센버그는 또 그린 다는 행위와 일상 오브제를 등가물(等價物)로서 화면 속에 끌어들인 컴바인 페인팅을 실천 하였고, 재스퍼 존스 역시 성조기나 숫자 등을 화면에 그림으로써 사물 자체보다도 이미지 로서의 현실을 다루었다. 그는 종래의 이미지와 오브제의 관계가 복잡하게 교차되면서 변질 된 것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미술의 방법론을 새롭게 전개시켰다.
이상범
1897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 서화가 양성소인 서화미술회 화과에 입학하여 화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딤. 해방 후 50년데 홍익대학 전통회화 교수로 임명되어 61년 정년 퇴임시까지 후진을 양성했다. 동연사(이요우,노수현, 변관식가 함께 만든 그룹)를 조직한 것외에는 이후 별다른 그룹 활동없이 국전이나 대한미협전 및 개인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1972년 76세를 일기로 작고. 8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9주기전이 열렸다. 초동 1926년 종이에 수묵담채 153*185cm 가을 1930년 종이에 수묵담채 146*214.5cm 주모 1950년대 중반 종이에 수묵담채 54*101.5cm 금강산 명경대 1967년 종이에 수묵담채 129*67cm 이상범 - 李象範 (1897~1972) 동양화가. 호 청전(靑田).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심전 안중식에게서 그림을 배워1925년부터 계속하여 열 번이나 조선 미술전람회에 특선으로 뽑혔다. 1927년부터 동아일보사의 미술 책임 기자로 근무하다가,1938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 후에는 국전 심사위원과 홍익 대학교 명예 교수를 지냈 다. 초기에는 스승이었던 안중식의 영향을 받아 남북종 중간의 화풍을 보였으나, 점차 독자적세 계를 개척하여 향토색 짙은 작품들을 그려냈다. 주요 작품으로 〈창덕궁 경훈각 벽화〉 〈원각사 벽화〉 〈설로도〉 〈고원귀려도〉 등이 있다.
이용우 - 李用雨 (1904~1952)
화가. 호 춘전(春田). 서울에서 태어났다. 9세의 나이로 서화 미술회에 1기생으로 입학하여 조석진과 안중식으로부터 전통 화법을 배 우고, 1918년 서화 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1920년 서화 미술회 동기인 오일영과 함께창덕궁 대조전의 〈봉황도〉를 그리고, 1921년부 터 열린 서화 협회 전람회 등에 출품하면서 화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930년대부터는 한적한 산의 경치를 환상적인 형태로그렸으나, 1940년대 들어서는 향토적인 정경에 눈을 돌려 경쾌한 그림을 그렸다. 이 밖에 현대적 감각이 풍기는 화조화도 많이 그렸으며, 1949년 제1회 국전에서는 추천 작 가와 심사 위원을 지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시골 풍경〉 〈백두산 천지〉 등이 있다.
이응로 (1914~1989)
1904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의 집에 기숙하면서 화가로서의 훈련을 받음. 38년 동경에 건너가 양화풍의 사실적인 동양화를 시도함. 46년 단구미술원 창립에 가담하는 한편 신설된 홍익대 동양화과 교수로 취임함. 59년 독일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표현주의적 추상을 시도 파리 화게키 화랑 초대를 비롯 콩파레종, 상파울루 비엔날레, 오늘의 대가와 젊은 화가들,레알리테 눌벨 등 수 많은 전시에 초대출품됨 1989년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 기간 중 심장마비로 별세. 94년 호암 갤러리에서 작고 5주기전이 열렸으며, 파리 교외에 고암 이응로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추상 (1961) 캔버스에 종이 콜라주 100*80cm 작품 (1975) 종이에 유채 153*123cm 군상 (1979) 종이에 수묵 담채 23*120cm 구성 (1981) 캔버스에 유채 146*114cm 군무 (1988) 종이에 먹 177*46cm
이인성(1912~1950)
여섯번에 걸쳐 '선전'에 입선과 특선을 해 25세의 나이로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태평양 미술학교를 다녔다.
이중섭
1916년 평남 평원에서 출생 동경문화학원 미술과에서 서양화전공 자유미술가협회의 4회전부터 출품, 주목을 받기 시작하다. 6.25동란과 더불어 월남, 제주도,부산,통영 진주,대구등을 돌아다니면서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로 극도의 정신적 고통에 휩싸였으며 그것이 끝내 정신질환과 죽음으로 이어졌다. 일저한 거처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많은 주옥 같은 작품을 남겼다. 흰소 1950년대 합판에 유채 30*41.7cm 황소 1953~54 종이에 유채 28.8*40.7 투계 1955년 종이에 유채 28.8*41.6cm 소와 새와 게 1950년대 종이에 연필,유채 32.5*49.8 cm 이중섭 - 李仲燮 (1916~1956) 서양화가. 호 대향. 평양에서 태어났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 문화 학원 미술과 재학 중 자유미협전에서 상을 받았다. 1945년 귀국하여 원산에서 일본 여자 이남덕과 결혼하고 원산 사범 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6·25 전쟁 때 월남하였다.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돌아다니며, 그림 그릴 재료가없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 기도 하였다. 1952년 부인이 가난 때문에 두 아들과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자, 정신 분열 증세를나타내기 시작하였고, 1956년 적십자 병원에서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그림은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서 서구 근대화의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하였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선화는 표현의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 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 〈흰 소〉 등이 있다.
인디펜던트 그룹 Independent Group (영)
1950년대에 결성된 영국의 전위적인 미술 단체. 런던의 아이 씨 에이 의 부설단체로 출발 했었다. 따라서 이 그룹의 본래 목적은 대중을 위해 아이 씨 에이가 주최하는 강연회의 주 제와 연사를 결정하는 데 있었다. 단체전을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이 그룹은 비평가 로렌스 알로웨이가 이론가로서 활약했고, 존 맥레일,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프랭크 코델, 앨리슨 스미드슨, 피터 스미드슨, 리처드 해 밀튼 등이 그 주요 멤버였다. 인디펜던트 그룹은 현대 도시 사회의 대중 매체-영화, 광고, 공상과학소설, 팝 음악 등에 데 해 폭넓은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미국에서 일어난 상업주의는 영국 미술가들에게 많은 아 이디어를 주었는데 특히 상품의 포장 디자인, 인간과 상표에 대한 새로운 규범 등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충격은 그 발생지인 미국에서보다 영국에서 적극적으로 검토 되었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결국 영국의 팝 아트의 발단이 되었느데, 브리티시 팝British pop이란 말도 알로웨이에 의해 명명된 것이었다.
인물화(figure painting)
사람을 주제로하여 그림 글미의 총칭. 동서를 막론하고 회화사의 발전, 전개는 인물화를 중 심으로하여 이루어져왔다고 할 수 있으며, 가장 오랜 옛날부터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인정 되어 온 제재이다. 특히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풍경화, 풍속화 등이 독립된 회화의 장르로 발전되기 이전, 그리고 동양에서는 송대의 산수화가 발전하기 이전에는(약간의 예외는 있다 고 해도), 회화는 곧 인물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물론 사람을 주제로 하는 것이 반드시 사람을 그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용, 제재에 따라 초상화, 신화화, 종교화, 역사화, 풍속 화, 나체화, 전쟁화 등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1850년 이후의 시대를 풍미하던 인상주의 계열의 미술 사조는 오늘날 20세기 미술을 생성케 한 밑바탕이 된다. 인상주의와 그 뒤를 잇는 신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등의 유파에서 20세 기 첫 장을 장식하는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미술이 나타나게 된다.
인상주의
인상주의란 19세기 후반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발달한 회화의 한 유파 이다. 인상주의의 기원은 이전 서양 회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자연주의적 경향에서부터 기인한 다. 19세기 영국의 풍경화가인 터너, 콘스터블 등이 그린 그림에서 보이는 빛의 효과나, 프랑스 의 풍경화가 코로와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자연관찰에 의한 그림들이 인 상주의자들의 외광파(실외의 빛에 의한 색채 표현을 충실히 화폭에 담으려고 하는 의도)적 기질에 영향을 주게 된다. 당시 발명된 사진술의 기법과 과학적 색채이론을 접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대상의 실제 모습 을 빛을 통한 삼원색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화가들은 직접 햇빛 아래에서 작업을 진행시킴 으로서, 배워서 알고 있는 대로 그리는 아카데미적 기법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대상의 직접 적 관찰을 통한 모습을 꾸밈없이 표현하는 현대적 기법을 시도한다. 이들은 주로 도시인의 일상생활을 주된 모티브로 삼았다. 사진술의 영향으로 인하여 흡사 스냅사진의 한 장면처럼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동작을 순간 포착해 낸 것 같은 그림을 그렸 다. 대부분의 인상주의자들은 농촌의 고즈넉한 전원풍경을 경건한 마음에서 그리기보다는, 떠들썩하고 활기찬도시민의 표정들을 담아 내길 원하였다. 이같은 주제의 변화와 함께, 색채사용과 구도용의 새로운 기법들이 20세기 현대회화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는 마네를 위시하여, 모네, 르느와르, 컷사트, 모리조, 드가, 피사로 등이 거론된다. 이들은 모두 인상주의라는 하나의 그룹으로 묶였으나, 각자 나름의 예술 세 계를 완성해 나가면서 인상주의라는 화파를 형성하고 있다. 신인상주의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에서 한 단계 더 과학적인 발전을 모색한 경우라고 하겠 다. 쇠라와 시냑이라는 두 화가에 의해서 주도된 이 화파는 색채가 망막에 미치는 작용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화폭 위에 충실히 적용시키려고 했다. 즉 순수한 색채를 규칙적인 작은 점들로 분할하여 찍음으로서 마치 모자이크처럼 화면을 구 성한다. TV화면의 원색점 분포와 비슷한 이치로, 관객들은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떨어져 그림을 보면, 이 순색의 점들이 혼합되어 눈에 비치게 되어, 색채의 순도나 명도를 잃지 않 고서도 색들의 시각적 작용으로 섞여 보임으로서 중간색의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점묘법의 특징은 대상의 윤곽선을 되살리면서 동시에 평면화 시킴으로서 추상적 화 면을 구성하게 된다 후기인상주의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상주의파는 일종의 정체 상태에 머무른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새로운 시도들이 심화될수록 화면은 더욱 피상적이 되고, 뜻하는 내용이 없는 가벼운 그림으로 되어 갔다. 이런 인상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한편 그 의도를 계승한 화가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이 세잔, 고호, 고갱이다. 이들은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와 평면성은 유지하면서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던 내용적 측면 에서의 진지함과, 기법적 측면에서의 견고성을 구축하게 된다. 세잔은 불변하는 자연의 구조를 원, 삼각뿔, 원통으로 단순화시켜 화면 위에 탄탄한 구성을 이루어 냈으며, 고호는 채색에 의한 작가 내면의 감정을 표출해 내면서, 평면회화속에 심리 적 깊이를 더하였다. 고갱은 원시주의와 기독교 문화의 만남을 한 화면 위에 장식적 이고, 색채에 의해서 분할된 구획을 통해 나타내었다. 그는 보편적 의미로서의 인간내면 심리를 표출하면서 19세기말 상 징주의 운동과도 연관을 맻는다. 이들은 20세기 야수파, 표현주의 , 입체파에 직접적 영향을 줌으로서 사실상 19세기 근대회 화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인상주의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회화운동. 인상주의는 단일한 이념이나 명백한 원리를 갖는 유파라기 보다는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었다. 최초의 중심 인물은 모네, 르노아르, 시 슬리, 바질 등으로 이들은 마르크 글레이르의 제자들이었으나, 1863년 마네의 전시회 이후 아카데믹한 교습에 불만을 갖고, 피사로, 세잔느, 모리조, 기요맹과 친교를 맺고 몽마르트의 카페 등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이후 드가와 마네, 비평가 테오도르 뒤레 및 조르주 리비에르도 합세하고, 화상 뒤랑 뤼엘의 후원을 받게 된다. 1873년 살롱이 피사로, 모네, 르 노아르, 세잔느, 그리고 시슬리의 그림을 거부하자, 이것을 계기로 이듬해인 1874년 4월, 사 진 작가 나다르의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앵데팡당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를 자칭 '무명 화가 및 조작가 판화가 예술가 협회전'이러고 불렀다. 그런데 출품작 중 모네의 <인상, 해 돋이>를 인용하여, 신문기자 루이 르로이가 <르 샤리바리>지에서 이들 모두를 '인상주의자 '라고 조소적인 의미로 명명한 것이 후에 그들 자신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져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는 어려우나 대체적으로 아카데미의전통 교육과 낭만주의의 기본 이념에 반대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예술가의 정서상태보다도 오히려 자연 혹은 삶의 편린들을 가능한한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정신에 의해 기록함을 예술 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는 사실주의의 태도에 동조했다. 이 운동은 19세기 후반에 놀리 보급 되었던 과학적 사실주의의 한 일환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들의 예술관은 사회주의 리얼리 즘과는 달리, 사회의 개혁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의 주제는 다양했는데, 마네는 18세기 전통적 주제들을 사실적으로 변형시켰고, 르노아 르는 귀여운 여인이나 아이들 아름다운 풍경들을, 드가는 경마, 무희, 세탁부, 재봉사들을, 시슬리, 피사로, 모네는 주로 풍경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형태 구성을 피하고, 마치 카메 라가 우연히 한 장면을 찍은 것처럼 즉각적인 시각적 인상의 효과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렇 지만 우연성의 인상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으로서 예컨대 드가는 현장에서의 스케치를 자 신의 작업실에 와서야 비로소 그림으로 구성했다. 마네는 1870년 이후에야 외광파로 전환했다. 르노아르의 방향 전환은 검은 음영과 윤곽선을 배제하고 '색채 분할 기법' 혹은 '점모법', '아롱다롱한 색체계(rainbow palette)' 등을 도입 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풍경화는 이제 망막의 실제 이미지를 재생하고 밝은 광선에 비친 생 생한 장면의 등가무을 그림 물감으로 재창조하는 행위가 되었다. 음영은 회색이나 검정색이 아니라 대상의 보색으로 칠해지고, 윤곽선을 배제함에 따라 대상의입체성이 상실되며, 따라 서 인상주의 회화는 빛과 대기의 회화, 지시색과 반사색의 유희로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 법은 바르비종파의 디아스 데 라 페냐의 영향아래 1860년대 말, 르노아르에 의해 도입되어 1870년대 초 피사로, 모네, 시슬리에 의해 채택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의 풍경화에서 빛과 대기를 통해 표현된 기후와 계절 등의 효과에 대한 민감성은 콘스타블과 터너에 의한 풍경 화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그리고 전통적인 다갈색 대신 회색이 초벌칠된 캔버스 위에 혼합되지 않은 그림물감을 사용하는 필법, 검정색의 배제 등은 직접 관찰에 의한 것이 었다. 이것은 쇠라 등 신 인상주의의 화가들이 점묘법에 의해 과학적 기초를 획득하고자 한 기법이었다. 모네는 인상주의 개념에 일관되게 출실했던 거의 유일한 화가인데 점차 빛과 대기에 몰두,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채를 분할하여 공간을 해체하는 등 인산주의 기법의 전형을 개척했다. 한편, 1870년대에 인상주의 그룹과 유대를 맺었던 세잔느는 더 이상 우연적인 장면을 재상 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한 장면의 영속성을 보유케 하는 형태, 연관들에 대한 그 자신의 생각을 전개했다. 르노아르 역시 1880년대에 오면 인상주의의 주돈 특징을 포기하기에 이른 다. 실재의 우연적 현상보다는 그 영속적 구조에 대한 관심은 쇠라와 세잔느로부터 입체파, 그리고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었다. 인상주의 이론에 의해 제기된 과학적 리얼리즘은 그 이후의 미술 운동의 흐름에서 퇴조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는 근대 예술 이론을 전개하는 출발점으로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인상주의는 서양 근대 미술에서 중요한 한 획을 긋는 미술 사조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아방가르드 움직임은 고대 그리스의 고전의 답습의 오랜 전통 에 대한 반발이자 미술의 기법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였다. 인상파를 개괄함에 있어, 우선 주목되어야 할 인물이 에두와르 마네(1832-1883)이다. 마네는 인상주의 운동의 선두 주자로서 그의 그림은 사실주의와 본격적인 인상주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인상파를 엄격하게 규정하는 미술사가들은 마네를 인상파에서 분리하여 설 명하기도 한다. 이유는 모네, 르느와르, 드가 등의 인상주의자들이 추구하였던 빛에 의한 색 채의 변화에 열중하지도 않았고,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화면에서 보이는 평면성과 색면의 분할, 빛에 의한 명암의 대비 등은 분명히 인상주의 미술의 본격적인 태동에 한발 앞선 선구적 작업이었다. 1863년에 그린 [풀밭 위의 점심]은 그의 회화 발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서구 근대 미술사에서도 기억될 만한 작품이다. 1863년 살롱전에서 낙선된 모든 작품을 모아 전시한 (낙선자展)에 전시되어, 당시 비평가와 관람객들의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전 통적 회화 이미지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그림의 당혹스러운 화면 구성에 경악을 금치 못했 다. 평범한 휴일의 피크닉 자리에서 서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세 사람의 남녀를 보자. 두 명의 남자는 브르조아의 신사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무언가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는 듯하다. 그 두사람 사이에서 화면밖에 관객에게 시선과 웃음을 던지고 있는 여인은 놀랍게 도 나체이다. 또한 그들 뒤로 냇가에 두발을 담그고 있는 여인도 속옷 차림이다. 이렇듯 남녀 군상의 대조적인 모습과 전혀 여성 누드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자리, 그리고 도대체 이런 모습으로 대낮의 햇살 아래 뻔뻔히 앉아 있는 이들의 태연자약한 표정 등이 이 그림을 비난하는 관객들의 표적이 되었다. 또한 회화 기법 면에서 그늘에서 빛으로의 이행 부분을 없애고, 밝은 표현(裸婦의 피부 표 현)이나 어두운 표현(신사복 표현)도 그 자체의 순색에 의해 평면적으로 표현, 색채의 대비 를 극심하게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새롭고도 화면을 단순화시킨 기법은 인상파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지만, 같은 해 살롱展에 출품된 아카테미즘의 누드화와 비교해보면 이 그림이 얼마나 상대적으로 조악 해 보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 작품의 구도는 마네의 창조품이 아니다. 나체 여성과 옷을 입은 남성을 배치한 구도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태리 화가인 지오르지오네 의 [전원에서의 연주]에서 연상한 것이며, 인물의 포우즈와 배치는 르네상스 시기의 동판화 [파리스의 심판]에서 모방한 것이다. 그런데 마네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의 설명은 회화 속에 서 제외시킨 채 당시 실존 인물들의 초상으로 대체 시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림의 진위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외설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 것이다. 그러나 관객들의 시각과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미술세계를 꿈꾸던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이 그림은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1882년에 완성한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마네의 만년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떠들썩한 술집의 한 가운데에 주문을 받으려 서 있는 여급이 정면으로 크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여인을 살아 있는 주인공이 아닌, 색채의 아름다움을 전시하기 위한 마네 킹처럼 무표정하게 드러내 놓고 있다. 벽 거울에 비치는 흐릿하지만 화려한 실내의 전경과 불빛, 여급 앞에 잔뜩 늘어놓은 술병과 과일, 그리고 그녀의 장식적인 옷차림에서 우리는 당 시 파리 사교계의 생동감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생명감을 읽을 수가 없다. 그녀를 둘러싼 배경에서 파악할 수 있는 화려함이 정 작 그 그림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공에게서는 느껴지지가 않는 다. 결국 그녀는 이 고급 술집의 이름없는 웨이트레스일 뿐인 것이다. 한껏 치장을 하고 느긋하 게 사교를 벌 이고 있는 귀족과 부르주아적 계급들의 즐거운 한때를 위해 시중드는 노동자 일 뿐이다. 술집 안의 들뜬 분위기는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며, 그 시간을 즐기는 사람도 그녀가 아니 다. 이 여인은 자신이 입은 섬세한 장식의 드레스가 불빛에 의해서 두드러지는 색채들 의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그려진 것처럼, 손님들의 즐거운 저녁 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 다. 그런 그녀의 입장이 바로 무심한 표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끌로드 모네(1840-1926)의 1872년 작품인 [인상-해돋이]는 본격적인 인상파의 시작을 알리 는 회화로 기억할 만 하다.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제 화가들은 주제, 즉 이야기 중심의 그림에서 소재, 즉 보이는 그 자체의 표현에 더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이 작품을 본 한 풍경 화가는 악의에 찬 어조로 이들 그룹을 '대상의 아무런 형체도 주제도 보이지 않는 인상'만을 그렸다고 비난하면서, 이들을 '인상파'로 명명했는데, 이 명칭이 그 후 이들의 공식적인 이름이 된 것이다. 물론 이후의 세대가 '인상파'라는 명칭을 비난의 의 미로 부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의 효과를 포착하려는 기법을 단적으로 나타낸다는 사 실을 고려하여 '인상'이라는 용어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모네는 르 아브르 항구의 아침, 혹은 안개 속의 일출 광경을 표현하려 하면서, 안개 낀 대기가 햇빛을 머금은 풍경을 선험적 지각이 배제된 시각에 의해 포착했다. 빛과 대기가 빚어내는 순간적이고 매혹적인 장면을 섬세한 색면과 즉흥적인 붓터치로 그려 낸 이 그림에서 우리는 이제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 속의 교훈, 이념이 가득한 이야기의 매 개체로서의 회화가 아닌 눈에 보이는 풍경 그대로를 화폭에 옮기는 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1877년작인 [생 나자르 역]은 [인상-해돋이]와 더불어 모네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이 다. 유리 지붕 아래 그늘진 역장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수증기와 연기의 유동적인 색점 들이 화면을 생동감 있게 만들고 있다. 증기 기관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수증기가 주 변 물체들의 분명한 윤곽선을 흐려 놓고 있다. 지붕 유리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이러한 사물의 흐릿한 윤곽선 위로 점점의 색면들을 만든다. 도심을 관통하는 철로와 그 주 의를 서성이는 승객들, 모네가 보았던 파리는 기계와 인간이 어울려 분주히 움직이는 도시 였다. 1891년 지베르니 지방에 있는 농가를 별장으로 개조한 모네는 거기에서 자연을 대상으로 풍 경화에 몰두한다. 그는 또한 넓은 정원 안에 연못을 꾸미고, 거기에서 발견되는 풍부한 빛과 색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1899년부터 27년에 걸쳐 그린 [수련]연작은 바로 자신의 연못 위의 수련들을 소재로 한 것 이다. 모네는 수면에 드리운 빛의 오묘한 조화를 끊임없이 화폭에 옮긴다. 물위의 변화무쌍한 빛의 유희는 인상주의의 정통파인 모네에게는 더없이 적절한 소재가 아 닐 수 없었다. 연작의 초기의 구도에서는 수면 가장자리에 제방을 그려 넣기도 하며, 나뭇가지와 연못을 가로지르는 일본풍의 다리도 나타난다. 그러나 연작이 계속 진행되면서 주제에 대한 일관적인 해석이 가해지고 그러므로서 수면 상 의 빛과 색채의 변화 이외의 대상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 수평선과 원근, 실제적 명암은 없 어지고 대신 연못물만이 평면적이고 추상적으로 펼쳐지게 된다. 물위로 떠 있는 수련 꽃과 잎사귀, 그리고 그 위에 너울너울 비치는 구름의 그림자만이 환영처럼 화면 위를 부유하고 있다. 모네의 <수련>연작은 그의 인상주의 화풍에 있어 기념비적인 작업인데, 빛과 색채의 미묘한 움직임과 그 비현실적인 효과를 포착하고자 한 인상주의자들의 목적을 극대화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에드가 드가(1834-1917)는 인상파 화가들과 교분을 맺고 1874년 1회 인상파 전람회에서 창 립 멤버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인상주의적 기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다. 소묘를 중시한 그는 외광파인 인상파와는 다르게 실내에서 인체의 다양한 움직임을 새로운 각도에서 포착해 내는 개성적인 화풍을 보여준다. 그는 인위적인 모델의 포우즈를 거부하고 움직이는 순간의 율동감을 재현해 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가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보이는 인물의 무중력 상태와 같 이 되지 않고 그 나름의 견고성을 유지한다. 그 까닭은 드가의 화면이 탄탄한 구성력을 가지고 어떠한 복잡한 구도를 형성한다 할지라 도, 그림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화면 내의 질서와 균형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드가는 발레리나를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은 그가 발레 연습소와 극장의 관람 석에서 그들을 지켜보면서 여러 각도에서 갖가지 자세와 표정을 연출해 내는 인체 를 관찰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냉정한 객관성을 가지고 의외의 시각에서 본 공간과 입체감 있는 형태의 인상을 전달 하려고 했다. 연작인[무대위의 발레 연습]은 1874년 제 1회 인상파展에 출품되었는데, 모네, 르느와르, 세 잔, 피사로, 시슬레 등의 작품과 함께 나란히 걸린 작품이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드가의 이 작품도 비평가들의 혹독한 평을 받는데, 무 희들의 흰 옷과 조명의 어울림에서 흡사 유령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화 면안에서 둥근 무리의 무희들의 움직임과 조명이 조화롭게 어울려, 전체의 구도속에서 하나 의 선율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대 안쪽의 어두운 부분과 무대 난간의 밝은 면 을 양쪽 극으로하여 무희들의 치마위로 반사되는 빛의 효과는 이들의 다양한 율동과 함께 화면을 조화롭게 꾸며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드가의 작품들은 일견 스냅사진처럼 꾸밈새가 없어 보인다. 그것은 당시 대중적으로 유포되 기 시작한 사진술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 대상의 일상적이고 우연적인 포우즈의 순간 포 착이라는 기법은 드가 회화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그러나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 속에서 정확히 표현되고 있다. 드가는 그가 존경하 던 앵그르의 선의 전통속에서 수업하면서 소묘의 숙달된 표현법과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성격 에 대한 통찰을 습득하게 된다. 이러한 특성은 1876연작인 [백부와 조카딸]이란 작품에 잘 드러나고 있다. 작가의 친 백부와 조카의 자연스러운 자세와 표정은 따스한 인간미가 느껴질 정도이다. 인 물들의 자율적인 동선이 배경의 정확한 구획속에서 그 효과를 증대시키고 있는데, 벽난로와 창문의 수직선이 보이는 질서정연한 배열이 화면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또한 앉아 있는 노 인과 소녀의 손과 얼굴, 어깨의 위치가 일치된 방향성을 보이는데, 이는 두 사람 사이의 통 일성을 획득하는 역할을 한다. 까미유 피사로(1830-1903)는 인상주의 그룹展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유일한 인물 이다. 초기 그의 풍경화는 사실주의파인 쿠르베와 코로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보여준다. 그 러나 그는 곧 인상주의자로서의 독자적인 예술관을 확립하는데, 자신의 근원을 대지라고 생 각하고 그 위에 펼쳐진 자연 풍경을 주시하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변화, 즉 계절 의 변화는 그에게 있어 대지를 풍요롭게 만드는 신의 섭리로 인식된다. 그는 대지의 생명력과 대지에 의존하는 자연의 생성과의 긴밀한 연관성을 평화롭고 순수한 시골 풍경에서 찾으려 했다. 따라서 피사로에게 태양은 자연에 생기와 온기를 주는 것이어 야 했고, 대지의 결실을 풍요롭게 하는 역할로서 이해되었다. 그가 그리는 언덕이며 들판은 밀도 있는 질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흙의 무한한 생명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 이러한 피사로의 시각은 대상의 고유한 형태를 존중하고, 거기에 다시 견고한 건축적 구성 을 부여함으로서 후기 인상주의의 세잔의 예술과 연결되기도 한다. [빨간 지붕]은 1877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피사로의 초기 인상파 시대의 걸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피사로의 겸손한 마음가짐이 엿보이는 듯 하다. 붉은 지붕의 가지런한 나열 과 형태와 색채들 사이에서 오는 대조를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빛에 의한 색채 효과라는 새로운 회화 실험으로, 복잡한 소재를 향해 빛을 풍부하게 처리하여 인상파의 가장 연장자다운 숙련미와 소박한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따스한 봄볕 을 받은 농가가 옹기종기 언덕을 등지고 모여 있다. 바르비종파를 연상케 하는 이 풍경화는 인상파다운 순색의 조화로 회화 독자의 생명감을 부여하고 있다. 알프레드 시슬레(1839-1899)는 시종일관 풍경화로서 생애를 영위했으며 자연에 대한 정감에 있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파리에 머물러 있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프랑스 태생이지만 영국의 혈통을 이어받아 감정 표현에 있어 영국인다운 절제성이 보인다. 즉 대담하다기 보다는 균 형을 존중하는 감각을 기조로 하여 온건하고 섬세한 색의 뉘앙스를 통해 대상을 부드럽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 젖게 한다. 시슬레는 인상파 풍경을 완성한 작가로서 피사로와 함께 현 실감을 잃지 않은 작풍에 충실하면서도 인상파적인 밝은 색채와 빛을 창조한 인물로 일컬어 지고 있다. 1873년 연작인 [세브르로 가는 길]이란 작품은 원근법의 강조로 흡사 사실주의 화풍을 견지 한 풍경화처럼 보이지만 인상파의 밝고도 투명한 원색의 조화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메리 커사트(1845-1925)는 일생 동안 독신으로 지낸 여성 인상파 화가이다. 피츠버그 출신 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소녀 시절을 거의 파리에서 보냈으며, 성장한 후 미국 으로 돌아갔다가 화가 공부를 하러 다시 파리로 오게 된다. 1886년 연작인 [아침화장]은 드가가 구입해 그가 죽을 때까지 소장하고 있던 커사트의 걸작 중 하나이다. 그림공부를 위해 파리로 돌아간 그녀는 화랑의 진열대속에 걸려 있는 드가의 파스텔 작품을 보고 첫눈에 매혹되어 그후 인상파의 일원으로서 화업을 쌓아 나간다. 그녀는 뎃상에 전력하면서 드가와 친분을 맻게 되는데, 그녀의 소묘 솜씨를 본 드가는 "여 자가 그처럼 데생을 잘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또한 이 그림의 명확한 데생을 본 후 그녀에게 정말 굉장한 데생이여, 멋진 구도라고 감탄 했다고 한다. 잠옷차림의 소녀가 막 깨어난 눈매로 긴 머리를 가다듬고 있다. 흰 잠옷과 대조되는 붉은 무늬의 벽지와 황토빛의 등나무 화장대가 소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소녀의 균형있는 자세와 화사한 피부의 조화는 커사트로 하여금 다른 인상주의 화가 들과 같은 위치에 서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인상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 중 베르뜨 모리조(1841-95)를 꼽을 수 있다. 그녀 의 완숙한 붓터치와 색채의 활용은 17세기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화풍을 연상시킬 정도이 다. 세부의 묘사의 정확함과 함께 다루기 어려운 포우즈를 빈틈없이 잡아내는 모리조의 솜 씨는 인상파 그림이 보여 주려 하는 모든 것을 화면위에 펼쳐 놓고 있다. 모리조의 양식은 그녀의 증조부에 해당하는 로코코의 대가 프라고나르에서 출발하여 코로를 거쳐 마네로 이른다. 그녀는 인상파전에 꾸준히 출품함으로서 인상주의자들과의 활발한 교 류활동을 보였으며, 화법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인상주의를 고수하였다. 1875년경에 완성된 [화장하는 여인]은 특이한 구도와 함께 정확하고도 섬세한 붓터치의 숙 련미를 보여주고 있다. 한 여인이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관람자인 우리는 그녀 의 뒷 모습, 즉 드레스 위로 드러난 등과 목덜미만을 볼 수 있는데, 화면 전체를 뒤덮고 있 는 황금색의 자유분방한 터치가 주인공의 화려함을 대신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모네의 영향을 받은 오귀스트 르느와르(1841-1919)는 풍경화나 실외의 인물화, 누드화를 통 해서 화려한 인상주의의 색채를 완성했다. 그는 색채의 마술사라고도 불리는데, 풍부하고 화 려한 색의 조화가 인상주의의 빛의 탐구를 이용해 십분 발휘되고 있다. 1874년 연작인 [특별관람석]은 제 1회 인상파展에 출품되었던 르느와르의 초기 대표작이다. 화려한 옷차림을 한 한쌍의 남녀가 화면을 꽉채우며 공연이 시작되기를기다리고 있다. 르느와르는 '팔레트에서 검정색을 추방했다'는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유독 검정색의 매력 을 응용한 화가이다. 이 작품에서 여성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굵은 줄무니를 비롯하여 그녀 가 가지고 있는 부채, 남성의 상의, 그가 들고 있는 오페라 망원경등 검은 물체를 등장시킴 으로서 검은색의 화려함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검은 색은 여성의 흰 피부와 드레스의 레이스 장식, 머리에 꽂은 꽃, 남성의 셔츠 등을 구성하는 흰빛과 대조를 이루어 화면을 더 욱 생동감있게 한다. 이렇듯 르느와르는 흰색과 검은색의 보색대비를 이용해 화면의 통일성과 화려함을 동시에 주면서, 색채화가로서의 진가를 뚜렷히 발휘하고 있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여성 모델은 그 당시 직업모델로 일하던 '니니'라는 여자이며, 뒷쪽의 남 성은 르느와르의 친 동생인 에드몽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제 3공화국 시대의 파리에서 볼 수있었던 부유한 사교계 인물들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르느와르는 인상파 화가들 중에서 주로 그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여성들을 주제로 하여 따스하고도 정감 어린 도시민의 표정을 그리고 있다. 모네나 피사로 등이 외광을 바탕으로 풍경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인물의 등장이 희박해지는 반면, 르느와르는 드가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을 주제로 다루었다. 인상파가 만들어 낸 새로운 화풍 가운데 당시 도시발전에 걸맞는 주제로서 즐겁게 살아가는 건전한 시민의 모습을 그린 것을 꼽을 수 있는데, 바로 여기에 대표적인 화가로 르느와르를 들 수 있다. 1876년에 그려진 [물뿌리개를 든 소녀]는 양식이나 기교면에서 르느와르 화업의 완숙미를 느끼게 해준다. 귀여운 소녀가 작은 물뿌리개와 꽃을 들고 뜰안에 서 있다. 흡사 사진을 위해 잠시 포우즈를 잡은 듯한 그녀의 약간 경직된 자세가 더욱 그녀를 사랑스 럽게 한다. 머리위의 빨강 리본은 소녀의 조그만 입술과 함께 생명감을 상징하는 듯 하다. 화면은 거의 평면화되어 인물과 배경이 나란히 놓여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린아이를 표 현하는 그림답게 붓터치 또한 작고 섬세하다. 이러한 작은 평화로움속에 동심의 세계가 펼 쳐지고 있는 것이다
인터미디어(intermedia)
1960년대에 들어와서,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전위 예술가들 사이에서 쓰이기 시작한 말로서, 종래부터 쓰여왔던 해프닝, 이벤트, 믹스트 미디어 따위를 종합한 명칭이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시각 예술에 있어서 여러 '미디어(매채)'간의 중간 영역이다. 회화·조각·영화 등 지금까지의 장르들은 이러한 미디어를 포함하고 있는데, 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어느 장르에 넣기가 곤란한 새로운 예술상의 동향을 가리키는 데 이런 말이 쓰인다. 약간의 뉘앙 스의 차이는 있지만, 믹스트 미디어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수가 많다. 몇 개의 미디어를 병 용하는 측면을 강조한 경우는 믹스트 미디어, 전체적인 작품이 여태까지의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은 점을 강조한 경우는 인터미디어가 되어, 표리의 관게에 있다 할 것이다. '화가 들에 의한 연극'이라 불린 해프닝을 비롯하여 뉴욕 파의 작가들에 의해 행해져 온 빛이나 음향, 오브제, 텔리비전이나 우화의 영상, 등장 인물의 액션 등을 종합한 공연을 가리키는데 쓰이고 있다. 1968년 봄에 뉴욕을 중심으로 한 시인, 호가, 조각가, 음악가, 영화 작가들이 참가하여 조직된 '인터미디어 68전' 이 있었다
일러스트레이션 illustration(영)
삽화, 도해. 신문이나 잡지, 광고의 문장. 내용을 보충하거나 강조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첨 가되는 그림. 그러므로 일러스트레이션은 광고 기획의 아이디어를 완전히 소화하고, 작품에 강한 개성을 주며, 아이디어와 표현 기술이 일치하여 소구효과(訴求效果)를 발휘해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은 디자인이나 사진에 의해 사실적. 상징적. 민화적. 도표적 등 각종의 표현 형식을 취하며, 또 아이 캐처의 연속 사용에 의한 효과, 색채에 의한 강조 등 광범한 기술을 이용한다. 일러스트레이션의 작가를 일러스트레이터라 한다
일루저니즘(illusionism)
자연주의 예술의 '환영성'을 뜻한다. 원근법 처럼, 그려진 것을 실재라고 생각하도록 눈을 속이는 회화 기법 혹은 건축이나 무대 장치에서 구조물을 실제보다 더 확대되어 보이도록 하는 수법 이런 의미에서 트롱프레이유는 일루저니즘의 논리적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및 르네상스 시대의 일루저니즘은 타일 마루의 형태나 모자이크, 그리고 벽화의 가상 프레임 같은 디자인 인테리어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쉽게 눈속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회 화에서 일루저니즘의가장 뛰어난 사례는 로마 치기 성의 발다사레 페루치의 벽화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벽 너머를 마치 개방된 주랑 현관을 통해 보는 듯한 전망을 전개하였다. 그림 속의 대리석은 실제 대리석과 조화를 이루고, 가상 기둥 위의 빛은 실제 창문을 통해 비치 는 듯하여 하이라이트를 교묘하게 만들고 있다. 만테냐에 의한 만투아의 천장화(1474년 완 성)는 15세기의 원근법의 산물로서 바로크 장식의 놀라운 일루저니즘의 전조라고 할 수 있 다. 바로크의 일루저니즘의 사례로는 1690년 로마의 성 이그나티우스 교회의 안드레아 포초 가 그린 천장화가 있다. 르네상스 건축 역시 건물의 외관상의크기를 확대하기 위해 일루저 니즘의 방법으로 원근법적 기법을 사용한 바있다. 또한 일루저니즘은 17세기 내덜란드의 요 지경 상자들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는 기법에 적용되기도 했는데, 이는 과학적 원근법 원 리의 엄격한 적용에 의한 눈속임을 통해 오락을 제공했다.
일루전 illusion(영)
환상, 착각, 망상 등의 의미이다. 예술 작품을 볼 때 일어나는 심적(心的) 과정(過程)의 하나 로 의식적인 자기 착각. 회화는 평면 위에 그린 것이지만 마치 실제의 사물에 있는 입체감, 원근감, 공간감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일루전이 있기 때문이다. 원근법에서는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그만큼 작게 나타낸다. 이런 방법으로 화면에서 거 리감을 만들어 마치 멀리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착각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 일루전이다. 이러한 원근은 색채에도 있다. 이를테면 노랑이나 주황이나 빨강은 가깝게 보이고 푸른색, 녹색, 보라색 등은 멀게 보인다. 이와 같이 색 자체에도 그 성질에 따라서 멀고 가까운 일루전이 있다. 또 명암에도 원근이 있어서 밝은 색조는 가깝고 어두운 색조는 멀게 느껴진다. 이와같이 회화나 부조에 있어서 여러 가지 표현상의 조작에 의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속여 마치 자연에 있는 입체감, 원근 감, 실체감을 나타내는 것이 일루전이다
임파토스
'반죽된'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 어에서 나온 말. 그 어원이 암시하듯 유화 물감을 두거벡 칠하는 기법을 일컫는다. 붓이나 팔레트 나이프, 또는 손가락을 사용해 색을 칠하거나, 직접 튜브에서 물감을 짜바르는 방식으로, 붓자국 등을 그대로 남겨 표면과 질감에 다양한 변화 를 주려할 때 이 기법을 사용한다. 루벤스, 넬러, 렘브란트의 그리믈 보면 보통 중요한 부분 이나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에 임파스토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임파스토 기법 을 애용한 유명한 화가로 할스, 벨라스케스,마네, 사전트, 반 고호 등이 있다. 안료가 갖는 성질상 수성 물감이나 템페라 화법으로는 불가능한 기법이며, 유약칠이나 바람칠과는 대조 되는 효과를 낸다
입체파
입체주의는 시각적 사실로부터가 아니라, 개념적 사실로부터 차용해 낸 요소들을 가지고 새로운 전체상을 그리는 것이다." - 비평가 아폴리네르의 정의- 입체주의는 일반적으로 1907년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시작되어 1920년대 말까지 유행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피카소와 브라크, 후안 그리 등의 대표적인 화가들과 함께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광선주 의, 오르피즘, 미래주의, 순수주의 등의 화파들이 생성하게 된다. 입체주의는 그 지대한 영향력만큼 20세기 미술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 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1점 원근시점에서 벗어난 동시점 즉 다시점의 작풍 태도였다. 이런 시도는 많은 비평가들에게서 인정을 받았는데, 화면의 평면화, 빛의 평등한 분산, 주제의 일 관성 등으로 그 실천적 성과가 더욱 견고해지는 것을 보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예술론을 성 공적인 시도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비평가 알프레드 바는 크게 입체주의를 분석적 입체주의(1906-1912)와 종합적 입체주의 (1910-1928)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초기 입체주의까지 3단계로 구분하는 것이 통 상적인 연구이다. 초기 큐비즘(Cubism)은 1907에서 1909년 사이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여기서 피카소와 브라 크는 사물의 본질적인 모습을 "원, 원통, 원추"라고 정의하였던 세잔의 이론을 심화하는 작 업을 하게 된다. 대상의 자연적 형태를 요약, 단순화시켰으며, 1점 원근시점이 아닌 복수시 점을 이용해 사물의 본질적인 형태를 화면에 구축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회화에서는 고전적 사실주의에서의 광선, 명암, 원근, 질감, 채색법을 무시하 고 3차원의 깊이, 공간, 입체감들의 전통적인 표현법이 소멸하게 된다. 이는 화면이 평면으로 환원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아폴리네르는 입체주의를 해석하 는 글에서 피카소와 브라크 야수파 시기에서 입체주의의 태동의 시기로 넘어가는 과정을 자 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두 사람 모두 야수파의 회원으로서 활동할 시기에 아프리카의 가면 조각 과 세잔의 화풍을 접하게 된다. 이들은 아프리카 조각에서는 미술의 개념적 의미를 새롭게 하는 것을 배웠으며, 세잔의 정물화에서는 조형상의 혁신을 본받았다. 이 두 가지의 영향하에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들의 큐비즘 시대를 열어 가는데, 이들이 같 이 작업하는 동안의 그림은 서로의 것이 구분되지 못할 정도로 비슷한 양상을 띈다 1907년에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은 입체파 회화의 대표적인 작품이자 입체파를 시작하는 최초의 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대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본 것을 한 화면에 종합하여 배열, 앞뒤의 공간적 배경이 없어지고, 푸른색 배경에 흰색으로 윤곽을 표현하여 입체적으로 돌출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대상 을 크게 왜곡, 과장되게 표현합으로서 얻어지는 결과이다. 또한 여인들의 얼굴이 각가 이집트인, 초기 이베리아인, 아프리마 가면등을 연상케 하여 원 시미술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1909년에서 1912년 사이의 분석적 큐비즘 시기에는 초기 큐비즘의 조형 논리가 극대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대상이 완전히 기하학적 단위로 해체되어 다시 화면 위에서 재구성 되고 있다. 이러한 분석, 해체, 재구성의 과정에서 색채는 녹새, 황색, 검은 색, 회색 등의 명 도 낮은 것으로 요약되어 나타난다. 이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구현하고자 한 것이 형태의 분석적인 묘사라는 의도를 나타내기 위 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912년에서 14년까지의 작업을 종합적 큐비즘이라고 분류하고 있다. 이는 분해되었던 각 요소가 종합되어 형체를 되찾기 때문인데, 피카소와 브라크는 자신들의 대상해체 작업이 극에 달하여 대상의 윤곽이 완전히 분해되어 버리자 빠삐에 꼴레와 콜라주 를 통해 형태를 재현시킨다. 차가웠던 색채가 다시 밝아지고, 기법이 확대되어 어느 정도 대 상이 회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파피에 콜레(종이를 풀로 붙인다는 뜻)과 꼴라쥬 마티에르(실제물을 한데 모은다는 뜻)를 통해 문자, 단어, 숫자, 실물들이 화면위에 회화와 함께 등장하게 된다. 입체주의는 많은 비평가와 미술사가, 문학가들이 연구한 사조였는데, 그 이유는 이 운동이 미술의 지적인 사유의 개념을 그림을 그리는 작풍에 성공적으로 실행시킨 사실 때문이었다. 입체주의를 논하는 대부분의 저자들은 큐비즘의 새로운 대상 재현의 시도에 의미를 부여하 고, 이들의 참신한 사실주의에 20세기 미술의 모더니즘 정신을 부합시켰다. 비평가 로저 프라이는 큐비즘의 의도가 근본적으로 사실주의적이라고 말하며, 결국 입체주 의는 대상 재현이라는 서양 미술의 오랜 전통의 또 다른 방식으로서 새로운 사실주의적 기 법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입체파가 세잔을 그들의 선구자로 보고 있지만, 둘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 즉 세잔의 작업이 축적된 시각의 부산물인 반면, 입체주의 작업은 직관적 발명의 결과라고 한다. 후안 그리와 브라크는 피카소와는 달리 일생을 통해 입체주의를 추구했는데, 그들의 작업과 논리 정연한 글에서 우리는 입체주의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브라크는 그의 글에서 모방과 창조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그의 목적은 일화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 사실을 구성하는 것이며, 그는 창조하고자 하는 것을 모방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큐비즘을 추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닌가?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작업과 말로서 입체주의가 순수 추상을 목적으로 한 움직임이 아니라 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은 일반적으로 추상의 시초 내지는 중대한 업 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에게는 흔히 말하는 추상의 의지보다는 대상 재현의 새 로운 방식의 의지가 있었다. 몰론 그 결과가 추상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1910년에 그린 [칸바일러 초상]은 분석적 입체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걸작 초상화의 모델은 당시 피카소와 가까웠던 화상(畵商)이다. 그는 일찌감치 입체파의 예술성을 간파하고 피카소와 브라크를 위시하는 많은 입체파 화가 들을 후원하고 그들의 작품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수집한 그림들을 일반에게 공 개 전시함으로서 입체파가 당시를 대표하는 하나의 전위적 예술로서 자리매김 하는데 일조 를 하게 된다. 1910년 여름 한때를 피카소는 스페인의 작은 도시인 카케스에서 보내면서 정물 또는 나부를 소재로 하되, 극도로 복잡한 구성을 시도한다. 그 당시 그의 입체주의는 화면 내용을 거의 해독 불가능한 추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포즈를 취한 반신상의 칸바일러의 얼굴 오른쪽에는 아프리카의 가면이, 그리고 왼편 뒤로는 건반과 그 위에 놓인 물체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인물 앞의 한쪽에도 정물 소 재가 올려진 테이블이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전통적인 명암법을 무시하고, 빛의 방향을 어느 한쪽에 고정시키지 않은 평면적 변용의 구성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서양화에서처럼 선명하게 판별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또한 각 면에는 미묘한 명암이 섬세하게 부여되어 그의 얼굴 윤곽과 몸체가 조심스 럽게 나타나고 있다. 죠르쥬 브라크(1882-1963)의 [포르투갈 사람]을 보자. 분석적 입체주의 시대의 브라크의 작품은 피카소의 당시 그림과 거의 구별이 안되는 유사함 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이 브라크의 예술적 독자성을 흐리게 하지는 않는다. 왜 냐하면 이들 둘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당시 같은 아틀리에를 쓰며 공동작업에 몰두하고 있 었고, 서로가 서로의 그림에서 영향받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브라크는 피카소가 다른 화풍으로 전향한 후에도 진정한 입체주의자로 남아 입체파를 완성시키는 업적을 이루게 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브라크를 피카소가 주도하는 입체파를 형성하는 무리 중 한 화가 로 평가절하 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1911년에 이르면, 피카소와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브라크의 요소가 차차 엿보이기 시 작한다. 이 그림에서도 보게 되는 숫자나 문자의 도입이 그것이다. 브라크의 집안은 조부 때부터 간판을 그리는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브라크도 어릴 때부터 페인트를 칠하고 간판을 그리는 기법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 었다. 1900년에 파리로 간것도 실은 그러한 간판 그림의 기법을 더 닦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화가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그전의 그의 간판 기법이 입체주의 작품에 반 영된다. 이 작품의 문자와 숫자 도입은 앞서와 같은 배경과 관련을 갖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 그림은 브라크가 마르세유의 어느 술집에서 만났던 포르투갈 출신 기타리스트를 그린 것 으로 알려져 있는데, 입체주의 이후에 기타를 비롯하여 만도린, 바일얼린 같은 악가를 많은 화가가 모티브로 즐기게 된 것은 브라크의 영향이 깊다고 하겠다. 피카소가 1915년에 그린 [파이프를 든 사나이]는 분석적 입체주의를 넘어서 종합적 입체주 의로 정착한 이후의 그림이다. 입체주의 화가들에게 있어서 콜라주의 커다란 매력은 여러 색면을 결합시키는 과정에서 밑 과 위로 겹치는 효과의 묘미가 자연스럽게 얻어지고, 현재의 상호 거리감이 스스로 명확해 진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피카소는 이 작품에서 유화의 표현으로 역이용하고 있다. 벽지, 목재, 의자 등의 물질적 요소의 부분들을 단편화시켜 자유롭게 재구성하는 화면을 만 들어 내어, 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순수한 공간적 존재의 형태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브라크의 1938년작인 [과일과 기타]는 브라크의 예술이 가장 다채롭게 무르익던 시기인 1930년대 사이에 그려진 장식성 짙은 일련의 작품의 하나이다. 독특한 구성의 짜임새는 양 쪽 주황색 벽면 사이에 가져온 테이블에 비쳐 든 빛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그리고 정물들 은 캔버스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따스한 광선을 받으며 놓여 있다. 이 화 면에서도 입체주의의 전형적인 수법이 반영되고 있으나, 과거의 엄격한 입체주의의 논리에 서 벗어난 그만의 독자적인 화풍이 완성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제의 대상들은 마치 불 속에라도 빨려 들어간 듯 부풀어 있고, 윤곽선은 유동적이다. 가령 자주 등장했던 기타의 곡 선은 불에 녹아 버린 듯 호리병 같은 단순한 유기적 형태로 변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기묘 한 된 기타는 그 왼쪽의 과일, 꽃병 등의 정물체들과의 조형적 균형에 의해 미묘한 생명을 부여받고 있다. 후안 그리(1887-1927)는 스페인의 마드리드 태생인 화가 호세 곤잘레스의 널리 알려진 예명 이다. 그가 스페인 출신의 선배 피카소를 흠모하여 파리로 간 것은 1906년의 일이었다. 그는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를 진지하게 연구하였고, 1912년과 14년 무렵 이후의 종합 적 입체주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 인물이다. 그리는 본래가 지극히 이지적인 정신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화면을 엄격하게 구성하는 입체 주의의 미학은 그의 본성에 잘 부합하게 된다. "세잔은 병을 원통으로 환원시켰다. 나는 원 통에서 병을 만든다."라고 한 그의 말은 그의 작품의 기하학적 성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방의 벽면이나 천장도, 의자나 테이블도, 그리고 그 밖의 어떠한 대상도 인간의 생활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 실용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순수한 조형적 형태로서만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였다. 제목이 [의자 위의 정물](1917)로 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도 우리는 직선과 곡선과 색면에 의 한 순수한 조형적 구성만을 보게 된다. 피카소가 1937년에 그린 [게르니카]는 그의 무수한 작품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걸작이 다. 이는 1930년대에 그려진 피카소의 통렬한 파시스트 압제에 대한 고발이며 反戰을 상징 하는 작품이다. 1936년 피카소의 조국 스페인에서는 총통 프랑코가 중심이 되어 공화국 체제를 전복하려는 쿠데타가 일어난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가 프랑코를 지지하는 가운데 1937년에 는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여 민주운동을 벌이던 피레네 산맥 근처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나치의 폭격기가 초토화시켜 버린다. 그 엄청난 학살의 소식을 전해들은 피카소는 당장 일련의 데생을 시작한다. 죽음과 공포 속 에서 울부짖는 인간과 쓰려진 말과 소들이 상징적으로 강조된 형태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것들이 대작 [게르니카]를 구성하는 부분들이 된다. 그전에 피카소는 마침 파리에서 개회될 예정이던 만국박람회의 스페인館을 위한 벽화를 스페인 정부로부터 위임받았었다. 파카소는 이를 위해 이 작품을 한 달만에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것은 독재 세력과 잔인한 살육에 대한 정치적 저항과 분노를 표명한 피카소의 최초의 대 작이면서 동시에 입체주의 평면화라는 그의 또 다른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1969년에 피카소는, "스페인에 국민의 자유와 민주 체제가 회복되면 이 작품을 스페인으로 보내라'라고 유언함으로서, 1981년 무렵, 1939년 이후 보관해 온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스페 인의 마드리트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지게 된다. 큐비즘의 충격은 대단했다. 즉 기존 양식의 변화와 새로운 양식의 창출을 동시에 불러 일으 켰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표현주의적 접근 방식에 대한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네덜란드와 러 시아에서는 절대적 추상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했고, 미국에서는 사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유도하였다. 그 여파는 첫 결과는 1910년을 기점으로 다양한 후기 입체파적 양상들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다. 입체주의의 확장에서 맨 처음 논할 수 있는 화가로 페르낭 레제(1881-1955)를 꼽을 수 있 다. 그는 입체주의에서 시각 세계를 조형적으로 단순화시키는 방법을 습득하여 자신이 추구하고 자 한 현대성과 기계문명, 그리고 그 안의 인간을 표현하고자 하는데 적용시켰 다. 그의 초기 작품으로 1910년에 완성한 [숲속의 누드들]을 보자. 이 작품에서 그는 세잔느의 형태의 본질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숲속에서 나무를 베고 있는 세명의 벌거벗은 나무꾼이 거의 배경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원통의 튜브로 환원되고 있다. 레제는 여기서 피카소와 브라크와는 다른 입체주 의를 구사하고 있는데, 즉 동시적 다시점 을 사용하거나 대상을 파편으로 해체시키지 않은 채, 대상 형태의 본질적인 요소를 기하학 적 구조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체를 기계나 로봇과 같이 단순화하고 견고화하는 단계를 거처, 레제는 강렬한 원색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기계적 형상을 실험하는 쪽으로 발전한다. 1913년의 [형태의 대비]는 추상적 의도가 명확히 나타나면서, 입체주의적 분해의 기법이 색 채의 대비라는 효과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레제는 색채, 특히 밝은 원색에 대한 의지를 전 시기의 작품을 통해 강력히 드러내는데, 이 는 1918년에 완성한 [난로]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작품은 그가 1차대전에 참전하고 난 후에 그린 것으로 전쟁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제 작한 것이다. 그는 전쟁을 통해 기계문명에 대한 긍정적인 발견과 일반 민중에 대한 애정을 재확인하는 계기를 맞는다. 그는 유럽의 다른 화가들과는 다르게 전쟁을 겪고 난 후에도 기계문명에 대한 변함없는 찬동의 입장을 고수하였는데, 이는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 더욱 강조된다. 레제의 1912년 작품인 [세여인]에서 볼 수 있듯이 사각형과 대각선, 원통과 평면들을 통해 2 차원적 화면을 빽빽하게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화면은 흡사 완전 추상에 가깝게 보이기도 하지만, 레제의 예술관이었던 인간과 현 대문명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으로 인하여 후기에 들어가면서, 재현적 구상의 요소가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입체파 (Cubisme) 세잔의 이론이 심화, 전개되어 나타났다. 추상화를 시도, 많은 유파가 생겨나는 동기가 되었 다. 오브제 미술이 시작되어 현대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20c최초의 새로운 미술운동이며 미술사의 전환점이다. "큐브"란 정6면체란 뜻으로, 큐비즘 은 1907년부터 1914년 사이에 걸쳐 파리에서 일어나 유럽 전역에 파급된 미술 혁신 운동이 다. 큐비즘이라는 명칭은 1908년 마티스가, 브라크가 그린 <에스타크 풍경> 이란 연작을 평하 면서 '조그만 입체(퀴브)의 덩어리'라고 말한데서 유래되었다. 세잔느의 "자연의 형태는 원추, 원통, 구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주장을 이론적인 근거로 한, 큐비즘은 피카소가 1907년,대담한 색채와 면의 구성을 보여주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큐비즘은 대상을 해체하여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을 동시에 표현하려 했는데.처음에는 색채를 부정하고 흑색, 녹색, 갈색 등으로 제한된 색채를 사용했으며,눈에 비친 형상의 우연적인 속성을 일체 생략하려 했다. 큐비즘의 중심 사상은 르네상스 이래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 운 색채를 이용한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양하고 시점을 다수로 하고, 색채도 녹색과 향토 색으로만 한정시키며 그 위에 자연의 여러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시켜 사물 의 존재성을 2차원의 "타블로" 로 구축하여 재구성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큐비즘은 1911년이라고 하는 지그히 짧은 단 한순간동안 서 있었던 실험예술이었다. 그것 은 새로운 종류의 현실에 두려움없이 직면했고 또 그것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완전히 독창 적인, 반자연주의적인 유형의 형상화를 진전시켰는데 이것은 동시에 화화적 창조의 메카니 즘을 홀딱 발가벗겼으며, 그 과정에서 추상과 재현의 인위적인 경계를 부숴 버리는 쪽으로 멀찍이 나아갔던 것이다. 요컨대 큐비즘은 금세기 전반의 예술에서 회전축과 같은 운동이었 다. 20세기초 큐비즘은 르네상스 이후 오랫동안 확고하게 자리잡은 단일 시점의 원근법에 의해 부여된 대상의 가짜 입체감을 해체시키고 그것을 이차원적 캔버스평면에 재구성함으로써 예 컨대 19세기 리얼리즘작품에서 보이는 문학적 암시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말하자면 순수 한 시각성에 의한 회화의 자율성을 획득하려 했다. 큐비즘은 근본적으로는 정적이며 반성적인 예술 양식이었다. 그러한 특성은 피카소의 예술 적 성공이 곧 부르즈와적 순응주의에로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큐비스트들 이 혐오해 마지 않았던 부르즈와적 현실을 변혁 가능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역겹지만 어떻게 잘만 하면 편하고 자기만족을 주는 그 현실 속으로 큐비즘을 쉽게 빨려 들어가게 했다. 큐비즘은 물체를 입방체처럼 분석, 분해해서 그 각 단면을 재구성하는 작업. 큐비즘 작가들 은 르네상스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한 순 간적인 현실묘사를 지향하였다. 야수파의 주정적인 표현을 폐기하는 대신 시점을 복수화하여 색채도 녹색과 황토색만으로 한정시켰으며, 자연의 여러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타블로로 구축적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이 시도는 중기에 이르러 대상이 극도로 분할되어 나타났으며, 후기에는 풍부한 색채가 부 활되어 기하학적인 색면과 대상의 환기력있는 요소와 결합하여 융합되었다. 피카소, 브라크, 그리 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었으며, 화면에 밝은 색채와 다이나믹한 율동 을 도입했던 레제와 들로네가 있다. 입체파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 축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큐비즘의 충격은 대단했다. 즉 기존 양식의 변화와 새로운 양식의 창출을 동시에 불러 일 으켰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표현주의적 접근 방식에 대한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네덜란 드와 러시아에서는 절대적 추상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했고, 미국에서는 사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유도하였다. 그 여파는 첫 결과는 1910년을 기점으로 다양한 후기 입체 파적 양상들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다. 피카소와 브라크, 후안 그리 등의 대표적인 화가들과 함께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광선주 의,오르피즘, 미래주의, 순수주의 등의 화파들이 생성하게 된다. 입체주의는 그 지대한 영향 력만큼 20세기 미술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1 점 원근시점에서 벗어난 동시점 즉 다시점의 작풍 태도였다. 이런 시도는 많은 비평가들에 게서 인정을 받았는데, 화면의 평면화, 빛의 평등한 분산, 주제의 일관성 등으로 그 실천적 성과가 더욱 견고해지는 것을 보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예술론을 성공적인 시도로 받아들였 던 것이다 초기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로까지 3단계로 구분한다. 초기 큐비즘(1907-1909)- 1907에서 1909년사이를 초기 큐비즘이라고 한다. 여기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사물의 본질적 인 모습을 "원, 원통, 원추"라고 정의하였던 세잔의 이론을 심화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대상의 자연적 형태를 요약, 단순화시켰으며, 1점 원근시점이 아닌 복수시점을 이용해 사물 의 본질적인 형태를 화면에 구축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회화에서는 고전적 사실주의 에서의 광선, 명암, 원근, 질감, 채색법을 무시하고 3차원의 깊이, 공간, 입체감들의 전통적인 표현법이 소멸하게 된다. 이는 화면이 평면으로 환원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분석적 큐비즘(1909-1911)- 주제보다는 주제를 다루는 방법이 중요해졌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정물처럼 환경의 간섭을 받지 않고 폐쇄된 공간속의 주제를 택하는 것이 자신들의 방법론을 더욱 분명하게 할 수있 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결정했던 것 같다. 색채의 산만함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엄격한 색채들만을 그림에 사용한다. 주제를 택한 다 음 그것을 모든 측면에서 본다는 착상을 했으며 그런 다음에는 그 모든 단면을 동시에 한 시점으로 보는 방법이었다. 분석적 단계에는 색채가 거의 브라운과 회색 계통, 검정색, 황토색 계통만을 사용하였다. 이 러한 색채 제한은 화면안에서의 평면들 사이의 관계 및 구성,구조의 문체에 강조점을 두기 위한 의도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큐비즘은 두개의 전제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첫번 째 자연적 형태는 기하학적인 동일체의 방향으로 단순화시키거나 세련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미술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며 이것을 큐비스트들은 극단적인 결론으 로까지 파고 들어갔다. 두번째 전제는 4차원의 공간과 시간이 어떤 형태로든지 회화에서 인 정되어야 하며 대상의 모든 면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분석적 큐비즘 시기 에는 초기 큐비즘의 조형 논리가 극대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대상이 완전히 기하학 적 단위로 해체되어 다시 화면 위에서 재구성되고 있다. 이러한 분석, 해체, 재구성의 과정 에서 색채는 녹새, 황색, 검은 색, 회색 등의 명도 낮은 것으로 요약되어 나타난다. 이는 피 카소와 브라크가 구현하고자 한 것이 형태의 분석적인 묘사라는 의도를 나타내기 위한 의지 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종합적 큐비즘(1911-1916)- 다방면에 걸친 회화적 수단을 가지고 자유롭게 작업하면 형태를 파괴하기보다는 상징에 가 까운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주관적이고도 임의적인 방식으로 형태들을 구성하였다. 따라 서 분석적이기 보다는 더욱 심화된 평면성, 단순성 , 풍부해진 색채와 질감, 느슨해진 분위 기의 개성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추상적 하부구조와 중첩된 소재는 함께 유합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동시에 각 요소 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종합적큐비즘은 추상적 요소들을 함께 융합하여 하나의 재현적인 전체를 형성하는데 역점을 둔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자신들의 대상해체 작업이 극에 달하여 대상의 윤곽이 완전히 분해되어 버리자 빠삐에 꼴레와 콜라주를 통해 형태를 재현시킨다. 차가웠던 색채가 다시 밝아지고,기법이 확대되어 어느 정도 대상이 회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파피에 콜레 (종이를 풀로 붙인다는 뜻) 과 꼴라쥬 마티에르 (실제물을 한데 모은다는 뜻) 를 통해 문자, 단어, 숫자, 실물들이 화면위에 회화와 함께 등장하게 된다. 실제나무의 모조를 그려 나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대신에 진짜로 나무를 그림에 도입시킨 것이다. 단순히 사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을 그리려 한다는 것이다. 입체파 1900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 운동. 1908년 마티스가, 브라크가 그린 <에스타크 풍경>이란 연작을 평하면서 '조그만 입체(퀴브)의 덩어리'라고 말한데서 유래되 었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급격하게 발젼된 이 운동은 일반적으 로 세잔느 풍의 입체주의(1907∼9), 분석적 입체주의(1910∼12), 종합적 입체주의(1913∼14) 등 3단계로 나누어 고찰될 수 있다. '자연을 원추, 원통, 구에 따라 취급한다'는 세잔느의 말 은 입체파의 계시가 되었고, 그의 예술과 흑인 조각은 이 운동의 초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입체파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를 쓴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양하고, 야수파의 주정적인 표현을 폐기한 대신 시점을 복수화하여 색채도 녹색과 황토색만으로 한정시켰으머, 자연의 여러 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 상으로 환원,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타블로로 구축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 시도는 중기에 이르러 대상이 극도로 분할되어 나타난다. 그 후 트롱프뢰이유나 파피에 콜레의 수 법을 채용하게 되고, 이것을 과도기로, 입체파 운동은 후기에 들어간다. 여기에서는 풍부한 색채가 부활되어 기하학적인 색면과 대상의 환기력있는 요소와 결합·융합된다. 몽마르트르 의 세탁선에 거주했던 피카소, 브라크, J.그리스 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었고 그밖에 몽파르 나스에서 화면에 밝은 색채와 다이나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F. 레제와 R. 들로네가 있고, 또 퓌트에 그룹으로 화면의 구성 원리를 추구하여 추상 예술에의 길을 열었던 F. 쿠프카와 J. 비용, M. 뒤샹, R. 뒤샹-비용 의 삼형제 등이 있다. 1911년 그들은 앵데팡당전에 작품을 출 품하였고, 이듬해 섹숑도르 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아폴리네르, 앙드레 살몽, 모리스 레 이날 등이 비평가로서 이 운동을 지원했다. 입체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 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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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용어[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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