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ft:작가 정서영 right:<1년에 한 번은 치워야 할 것> 시멘트 모조 화초 2007
스스로 빛나고 진동하는 사물과 언어
글│김현진
“풍부하다는 것은 수여하는 데 있어서, 이를 수 있는 데 있어서, 얻을 수 있는 데 있어서, 도달할 수 있는 데 있어서,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언어의 본질적인 풍부함이며 언어는 말함 가운데, 즉 보여줌 가운데 빛나는 사물로서의 사물을 가리킨다.” - M, Heidegger, Unterwegs zur Sprache 중에서1)
“책상 윗면에는 머리가 작은 일반 못을 사용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나사못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이 길고 의아한 문장은 바로 2007년 봄에 열렸던 작가 정서영의 개인전 제목이다. 이 제목은 작가가 2005년 독일 포르티쿠스의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또 다른 문장형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누워 있을 때 창가에 5마리의 비둘기가 있었으면 했다. 사실 그는 새를 싫어하는데 이왕지사 있어야 할 새라면 5마리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어와 독일어 버전으로 만들어진 이 작업은 벽에 커다란 손 글씨로 쓰여지면서 전시 내부에서는 하나의 커다란 월드로잉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두 문장들은 어떤 유사점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를 해야 한다면 무엇이어야 한다거나, -이면 좋겠다’는 식으로 수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문장이 어쩔 수 없다면 이 정도까지는 수용 혹은 이 정도를 거부하겠다는 의사 표시인 반면에, 첫 번째 문장은 보다 강력하게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구체화한다. 즉, 작가 혹은 그 누군가가 지니는 타협점 혹은 비타협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하는 이 문장들은 특히나 ‘-하도록 주의 하십시오’, ‘이왕지사 있어야 할 새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견 사소하게 치부될 법한 ‘이것과 저것 사이’에 대해 보다 섬세한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언어와 표상의 문제를 조각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어떤 정황이나 맥락, 그 설명은 없다. 이 문장의 의미는 정황이나 구체적 맥락에서 떠오르기보다는 독립된 문장의 형식이나 양상 속에서 확인되는 여러 가지 요소나 요건을 통해서 등장한다. 이들 모두 몸체가 두 문장으로 구성이 되고 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즉 문장이 ‘책상 윗면에 나사못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혹은, ‘책상 윗면에는 반드시 머리가 작은 일반 못을 사용하십시오’라고 쓰이지 않고 바로 ‘책상 윗면에는 머리가 작은 일반 못을 사용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나사못을 사용하지 마십시오’라는 중복 부연 설명을 통해 묘한 두 문장 간의 긴장 관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 두 문장 내에서 사실 ‘머리가 작은 일반 못’이라는 애매한 표현이 다시 ‘나사못’이라는 것에 의해서 한 단계 구체화되기는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계적인 수치 등이 없이 애매하게 등장하는 ‘머리가 작다’는 표현을 통해 우리의 인식은 다시금 어디쯤의 언저리를 맴돌거나 미끄러지게 된다. 즉, 그것의 진리나 진실은 부재하는 듯 그곳에 있고, 늘 그곳에 있는 듯 동시에 부재하여 왠지 참으로 부조리한 듯 느껴지는데, 그와 동시에 사실 우리는 강렬한 근본적 물음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을 조감도처럼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설정된 관계, 유형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그것이 복잡해 보이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지 쳐지고 덧붙여진 의미들이 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작용들의 연결고리를 흐트러뜨리면 간단한 단위들이 나타나고, 그 단위들 중 일상적인 복합성을 포함하는 것들을 골라 또 다른 경험의 조건을 만들어 가는 것이 나의 조각이다.” - 정서영
정서영의 작업들은 대체로 세계와 인식 체계 내에서 형성되는 언어와 표상의 문제를 조각적 형식이나 양상, 그리고 그 조각이 존립하는 공간의 긴장 관계 속에서 다루거나 압축하고 있는 듯하다. 필자에게 2001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던 정서영의 개인전은 작가의 첨예하고도 예리한 인식 체계를 통해서 펼쳐진 주옥 같은 하나의 잊지 못할 전시로 기억된다. 당시 주로 비닐장판, 스펀지, 나무, 점토, 유리, 꽃꽂이용 오아시스 등의 공업 혹은 산업적 재료들을 사용하여 만들어졌던 그의 조각적 오브제들은 작가의 말처럼 사물에 대한 다른-혹은 비일반적 경험의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전시에 등장했던 <꽃> <전망대> <수위실> 등의 작품들은 단어의 이미지를 모방하는-그러나 동시에 모방하지 않는- 애매한 크기의 미니어처들이었으며, <조각적 신부> <스포츠식 꽃꽂이> 등은 스스로의 이상한 제목을 표상하는 조각 설치 작업들로 완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작업적 특성은 이후 베니스 한국관에서의 작업이나 <모닥불> <구르고나면> <담배 피우거나 노래하거나> <Zizizi> 등 포르티쿠스에서의 개인전에 등장한 작업들 및 최근의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의 개인전에까지 지속되고 있다. 최근 작가는 에르메스 개인전을 통해 <거위> <아이스크림 냉장고, 케이크 냉장고> <얼룩> <식탁> <동서남북> <자전거의 빛> <1년에 한 번은 치워야 할 것> 등의 제목을 가진 새로운 작품들을 보여주었는데, 이들 역시 마치 동어반복처럼 그 스스로를 모방한 오브제들로서 등장하고 있다.
모방된 오브제들의 생경함
조명이나 바닥 재질 등 전시 공간의 기존 조건의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인지, 혹은 세월과 함께 부드러워진 작가적 변화 때문인지 예전 작업이 지니는 날카로움이나 차가운 이성으로서의 긴장감은 다소 누그러진 듯하나, 한편 한층 더 흔들림이 없는 작가의 자기 중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작가는 단어와 사물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사고한다. 이 사물과 단어들을 살펴보면 이들이 근 몇 년 사이에 한 아이의 엄마이자 주부로 살고 있는 작가의 생활의 언저리에서 포획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면 방이 하나 나오고 그 안에서 시멘트로 만들어진 거위(필자를 비롯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오리라고 불렀던) 한 마리와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분명 거위이지만 낮은 듯 어정쩡하게 나지막하고 다소 답답하게 내려앉은 천장 높이의 방안에서 독대하게 되는 그것은 또한 거위 밖의 ‘무엇’으로 다가온다. 거위를 지나쳐 방을 나오면 필자가 왠지 포석정 같다고 생각했던, 혹은 달리 부를 명칭을 찾기 힘든 길고 구불구불한 노란색 판에 모래가 담겨져 있는 <정오에서 자정까지>가 놓여 있고, 그 뒤로 ‘멀멀한’ 형광등 빛을 내는 아이스크림 냉장고와 케이크 냉장고가 놓여 있다. 그들은 다만, 익숙한 외관과 아이스크림으로부터 떠오르는 차가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유년과 서민의 여름날을 연상시키면서 등장하는 그러한 지극히 일반적인 추억이나 기억의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떠나 있다.
<1년에 한 번은 치워야 할 것>이라는 제목을 통해 동시에 무한히 많은 것들을 상상하게 될 관객들 앞에는, 시멘트 밑둥을 달고 누운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풀과 나무의 어디쯤에 있을 정체불명의 가짜 식물이 잎인지 줄기인지를 서너 개 달고 놓여 있다. 자전거의 빛은 벽을 뚫고 그 다음 막다른 벽의 어둠 속에서 빛나고, 건넌방의 <식탁>은 일견 책상처럼 보이지만, 또한 턱이 네모로 잘려 결국 일반적 테이블의 상식을 벗어난다. <얼룩>은 얼룩이기에는 너무 큰 커피 자국으로 만들어진 섬세하고 수려한 바닥 드로잉인데, 그러면서도 결국은 고급 인테리어 마감재로 완성된 전시 공간 내에서 다시금 완벽한 얼룩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렇듯 사물과 단어들을 집어 들고 그것들을 모방한 오브제들을 등장시키지만, 그들의 존재는 여전히 생경한 무엇으로 사물의 밖을 향한다.
“(말라르메에게 있어) ‘꽃’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관념을, 꽃의 관념을 불러 세운다. 그러나 여기서 꽃의 관념은 의식에 다시 나타난 꽃의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보이는 꽃들을 환기시키지 않으며, 꽃 일반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이해할 수 있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요구되는 의식의 일반적 표상이 아니다. 꽃의 관념은 꽃 일반을 대신하지 않으며, 오히려 ‘알려진 모든 꽃과는 다른 것’이고, 모든 꽃의 ‘부재’로서의 꽃의 주어짐(존재) 자체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꽃들을 지칭하고 그에 따라 꽃들을 유사하게 재현(모방)하는 표상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꽃들을 “떨림 속에서 거의 사라지게”하는 꽃 자체의 역동적, 동사적 현시이다.”2)
정서영의 사물들은 인간과 사물들을 매개하는 구성적인 언어적 방식을 벗어난다. 언어의 구성적 작용이란 ‘실제 사물이 하나의 표상 아래 일반화 단일화된 방식-예를 들어 서로 다른 ‘개들’이 ‘개’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묶이는 것처럼, 그 일반적 속성을 규정해 동일화(의미 부여에 따른 동일화)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이는 주체(인간), 대상(사물)이라는 일방적인 관계만을 가정한 상태에서 그렇게 형성되는 것이다. 정서영의 사물들은 역으로 인간 주체가 대상화한 사물들의 일반적 표상을 방해하고 흐트러뜨린다. 즉, 그의 ‘거위’는 거위가 아니고 ‘전망대’도 전망대가 아니며, ‘모닥불’은 우리가 아는 붉은 화염을 내는 일반적으로 낭만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벗어나 퍼런색의 상식 밖의 모닥불로 등장해 있다.
기표들 중의 기표
새로운 매체나 형식을 사용하기보다는 좀 더 전통적인 조각의 연장선에 있음에도 정서영의 작업이 보통의 전통 조각이나 오브제들보다 어렵고 다소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정서영의 작업이 이렇듯 구성적 작용에 익숙한 인간들의 일반적 사고 체계를 만족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오히려 극단적으로 그것을 흐트러뜨리고, 그들에게 익숙한 단어와 사물을 통해서 그들을 무한한 바깥3)의 세계로 내몬다.
정서영 작업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관객은 또한 사물과 다른 사물, 사물과 인간 간의 보이지 않는(표상되기 어려운) 어떤 관계성이나 접촉, 그 긴장성 등을 감지해야 하고, 그들을 통해서 언어적 추상성을 더듬어야 한다. 작가는 작품이 놓이는 공간 내에서 1~2cm단위로 작품을 움직이면서 세밀하게 공간과 공간 내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를 인지하면서 치밀한 설치 과정을 거치는데, 이는 아마도 사물 자체의 양상에는 사물이 놓인 정황과 비가시적인 상관성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 말라르메는 ‘사물과 인간의 보이지 않고 표상될 수 없는 접촉점을 지시하는 언어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이 바로 ‘관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사물을 그리지 말고 사물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그려야” 하며, “시는 단어들로 구성되어서는 안 되고 지향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모든 말들은 감각 앞에서 지워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프랑스 철학자인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이라는 저서에서 문학의 언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일반적 언어와의 대비 하에 언급하는 ‘본질적 언어’의 개념을 등장시키는데 ‘사물이 아니라 사물이 나타나 주어지고 있는 사건의 시간(순간)’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일반적 언어와 다른 ‘본질적 언어(그리고 이것이 바로 문학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우리에게 친숙한 것, 이해 가능한 것으로 전환시키는 의미부여 작용에 머무르지 않는 것, 즉 표상에 고정될 수 있는 사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불안정’을, 부재로 즉시 전화되는 존재의 현전을-현전으로 즉시 전화되는 존재의 부재를, 즉 바깥(Dehors)을-, 달리 말해 극적인 유한성의 시간을, 불규칙적이고 단속적인 시간성 내에서 생성하고 회귀하는 시간을 모방”4)하는 것이 문학의 언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사물과 맺는 순수한 관계 자체를, 보이지 않는 존재를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기표들 중의 기표’의 출몰에 문학의 과제가 있다고 언급한다.
정서영의 작업은 단어나 사물을 의미 해석적 코드로 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의 탁월함은 일반적 표상을 방해하는 순간과 사건을 마련하는 ‘기표들 중의 기표’를 출몰시키는 데 있으며, 이러한 미술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서 바로 정서영 작업의 의미와 진정성이 확보된다. 이들은 사물이면서 동시에 사물을 뛰어 넘는 것들로, 스스로 “새로운 사건의 시간을 제공하는 것들”인데, 정서영의 사물, 오브제 조각들이야말로 블랑쇼가 말하는 문학의 과제-다시 우리에게는 미술의 과제를 수행하는 바로 그 현장 속에 살아 있는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적 관점에서 문학(미술) 언어의 과제는 결코 어떤 보이는 ‘무엇’에 대한 요구를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기준(이념)들을 정립하는 데 있지 않고, 반대로 모든 보이는 ‘무엇’에 대한 요구의 전제이자 귀결점인 보이지 않는 함께-있음을 작품을 통해 제시하는 데, 나아가 실현시키는 데 있다.
또한 문학의 언어는 보이는 ‘무엇’이 현실에서 절대화될 때, 현실 배후에 놓여 있는 너무나 명백하고 까발려진 언어인 이념을 검증하고 감시하는 침묵의 언어 또는 음악의 언어가 되어야 한며, 정치의 언어가 문학의 언어를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언어가 정치의 언어를 감시해야 한다. 문학의 언어는 다만 ‘무엇’에 대한 소통 또는 ‘무엇’을 위한 소통에 봉사해서는 안 되고, 그러한 소통의 전제 조건이자 귀결점으로서의 ‘소통’을 열어야 한다.”5)
미술 언어의 본질을 탐구한다
무엇이 정작 미술의 언어인가를 논하는 것은 이제 논외가 되어버린 듯하다. 혹은 그저 고루하거나 보수적인 입장으로 치부되거나 위험한 모더니즘적 사고관의 소유자로 분류되곤 하기 때문이라도 이러한 화두는 별달리 거론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 듯하지만, 늘 가장 전위적이고 정치적인 언어와 사고의 날은 바로 본질을 고민하는 데서 발의된다는 것을 새삼 상기해 본다. 정서영은 바로 우리에게 그러한 미술의 언어를 본 모습을 상기시키는 작가로, 그의 작업에 있어서의 꼿꼿함과 지금까지 지켜온 미술 언어에 대한 책임감은 작금의 요란하지만 예술적 성취는 미온적인 미술 현장 속에서 주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정서영의 작업들은 계급, 정체성(젠더 폴리틱 혹은 여성주의) 등을 통한 타자성이나 후기 식민주의, 글로벌 자본주의 등을 이용한 정치 사회적 담론 등의 그물로 바로 그 자리에서 당장 쉽사리 건져 올릴 만한 그 어떤 실마리도 주지 않기 때문인지 그 평가가 작업적 성취에 비해 상당 부분 정체되어 있고 그로 인해 작가 역시 불필요한 표류 속에 방치되어 있는 듯하다. 정서영은 한때 《포럼A》 활동을 통해 현실 참여적 면모를 보여 왔으나 그러한 현실 정치적 관점을 소재화하지 않았다. 즉, 정서영에게서 미술적 언어는 그러한 현실 정치적 언어들과 접합점은 있으되 같은 언어는 아니다.
작가 정서영의 오브제들은 주변에 산재한 이념이나 현실 속에 절대화된 것들을 검증하는 알레고리로서, 결국 그 언어와 사물들은 침묵 속에서도 ‘정치의 언어를 감시할 수 있는 진정한 미술의 언어’로서 하나의 자기 정치를 지니고 있다. 현실 정치가 보다 전-근원적 소통, 나눔에 대한 요구를 망각하고 다만 나누어야 할 ‘무엇’을 절대화하면서 파탄에 이르는 반면, 온당한 미술의 언어는 전-근원적인 수준에서 스스로 정치를 완성한다. 정서영의 작업적 태도는 바로 이러한 자기 충족적인 미술 언어에 대한 믿음 위에 존재한다. 그리고 작가의 사물과 언어들은 바로 본질적인 무엇 위에서 스스로 빛나며 끊임없이 진동한다.
left:<담배를 피우거나, 노래하거나> 합판, 카펫, 철 2005 right:<꽃> 스티로폼, 나무, 페인트 1999